(제 20강) 이승만 대통령, 자유를 위해 싸우다 4 - 임시정부의 의회쿠테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소비에트체제의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다' #이승만과자유민주주의의시작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
161 팔로워
2023. 10. 31.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최수용,#글로벌디펜스뉴스,#성상훈의국내외정세분석,
1)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월정기 후원 바로가기 (https://me2.kr/exHVc)
2)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역사전쟁' 후원계좌 (우리은행 : 1005 -204-476779 : 예금주 :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본 채널에 영상이 한 동안 올라오지 않으면 구글코리아에 의해서 방송이 차단된 것으로 생각하시고 아래의 채널로 오세요.
1. http://www.k-cia.kr/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홈페이지 개설)
2. https://url.kr/of12r8 (글로벌디펜스뉴스)
3. https://url.kr/4ib1wo (성상훈의 국내외정세분석)
구글코리아가 본 채널의 영상에 대해서 '광고 적합' 메일을 보낸 뒤, 하루 뒤 '증오심 표현'으로 경고를 하고 임의로 영상을 삭제한 사례가 실제로 발생하였습니다. 언제든지 본 채널이 차단될 수 있으나,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홈페이지( http://www.k-cia.kr/ )로 오시면 중단없이 방송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 구글코리아가 광고적합 메일을 보낸 뒤, 임의로 삭제한 영상 바로가기 (https://url.kr/qklhnr )
(2편)북한, 보수유투버 파괴 지령 종북주사파에게 하달, 한국인터넷진흥원편
2. 구글코리아의 블랙리스트 언론탄압 '광고 붙여 놓고 임의 삭제' (https://vo.la/j1fsE)
- 최수용 올림 -
대한민국 현대를 성경적 세관으로
알리고 전하는 대한역사 문헌을 황곡
환사 바로 하기의 특강입니다
[음악]
자유를 위해 싸우다네 번째 이야기
대한민국 국민이 꼭 알아야 할
독립운동의 역사 이승만 박사와
임시정부 이야기입니다 3일 운동 이후
독립의 열망은 더
이에 따라 국내외에서 속속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영향력이 큰
조직은 연애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정부 서울의 한성
정부였다 처음 수립된 대한 국민
의에는 노령 임시 정부라 불렸는데
1919년 3월 17일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희 효 그리고 국무 총리에
이승만 박사를 내정하여 임시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자신이
노령 임시 정부의 국무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는 교민 신문 신한 민보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4월 11일 중국 상해에
신한 청년당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에의 의 상해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는
대통령이 없이 국무총리가 지휘하는
정부였던 사람이 바로 이승만
박사였다 필라델피아 대한인 총
대표회의 중인 4월 15일 전보를
통해 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월 23일 서울에서 이승만
박사를 집정관 총재로 임명하고
민주공화국의 형태를 갖혀 출발한
최초의 임시정부 한성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한성 임시정부는 국내
13도 대표가 모여 국민대회 취지서
발표하고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점에서 절차상 가장 정당성이 있는
임시 정부로 평가됩니다 이승만 박사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된 것은 이승만
박사의 요구나 하이 동포들의 추천이
아닌 국내와 중국 시베리아 등지에
있던 동포들 모두의 바람 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
동포들이 이승만 박사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증거겠죠 한성 정부의 집정관
총재가 된 이승만 박사는 워싱턴의
대한공화국 본부를 설치하고 외교
활동을 펼치며 각국 정상에게 한국이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음 공식 서안을
통해 선포하면서 자신을 프레지던트
of 리블 오브 코리아라고
소개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임시정부
대통령 자격으로 윌슨 대통령을 비롯해
대한제국과 국교를 맺었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열강의 정부
수반들길 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미국에
보낸 서한에는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
대표로 보낼 것이니 발언권을 달라
요구하며 요구에 근거로
1882년 조미수호 통상 조약을
운운하기도 했습니다
와뿐만 아니라 일본에게 한국이 정부를
모든 일본인을 한반도에서 즉각
철수하라고 통보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여러 곳에서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이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한인이 많이 모여 사는 간도 연애주
지역으로 거점을 옮기자는 주장 국제
도시인 상하이가 적합하다는 주장 등이
분분했고 여러 차례에 걸쳐 논의한
결과 통합된 임시 정부는 상 의
거점을 두고 명칭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하며 한성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기 결정하고
1919년 9월 11일 모든 임시
정부를 하나로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탄생한 것입니다 대통령의
이승만 박사 국무총리의 이동이 노동국
총판의 안창호 경무 국장에 김구 등이
지명되어 임정 활동을 시작
했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
박사는 곧바로 상해에 간 것은
아닙니다 필라델피아 대한인 총 대표
회의 이후 워싱턴에 임시정부 대통령
사무실을 마련한 이박사는 1919년
8월 25일 구미 위원부 설치하고
임시정부의 외교 본부로서 역할을 하며
세계를 상대로 임시정부 홍보와
외교활동에 전념 하며 1년을 동분서주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는 동안 통합 임시
정부에는 개파 간의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뿐만 아니라 1919년
5월 상해에 도착한 안창호와 11월에
도착한
하겠다며 협박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더는 임시
정부의 문제를 좌시할 수 없어 상해로
가기 위해 6월 말 워싱턴에서
하와이로 돌아와 상해로 갈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 미국 국적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이 박사는 해방되는 때까지
무국적자로 어려움을 감 하며
독립운동을 해 나갔죠 무국적자
이박사가 미국 여행증을 받는다면이
박사의 상해 행이 노출될 것이
뻔했기에 미랑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이 박사에게는
여전히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기
[음악]
때문이죠이 박사는 호놀룰루에서 장의사
사업을 하던 보수 의 도움으로 일본을
경유하지 않은 배를 타고 상해로
가기로 했습니다 보스 이은 이승만
박사보다 나이가 위였지만 하와이에
와서 인연을 맺은 평생의 친구로
이승만 박사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이
박사를 도왔던 사람입니다 보수 이은
이승만 박사를 자신의 별장에 숨겨두고
배편을 알아보는 한편 이승만 박사가
이미 상해로 떠났다는 가짜 소문을
내서 이박 가 무사히 상해로 갈 수
있도록 힘을 썼죠 마침내 11월
16일 새벽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승만
박사는 아들과도 같은 평생 동지
임병직 상해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사실 이승만 박사가 상해로
가겠다고 의사를 전하자이 박사를
지지하던 임정의 인사들은이 박사의
상해 행을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안창호와 이동이
이가이 박사를 상해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이승만 박사를 임시 정부에서
찍어내려는 음모였다 있니다 이승만
박사 측근이었던 안현경 장봉의 편지가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 줍니다
1920년 4월 23일 안현경
편지입니다
결단코 이곳으로 오지 마시옵소서
샌프란시스코와 상화의 몇몇 야심가
그이 내응이 되어 세분 이승만 김규식
여운을 상하이에 끌어들여야 미주
하와이 일이 해결된다 하였고
대통령께서 이곳에 오시면 안창호는
미국으로 간다 합니다 이박사를 상해로
불러놓고 이박사와 하와이 교민들을
갈라놓으려 했던 것이죠 7월 16일
장봉의 편지는 더 구체적입니다
각하를 이곳으로 오시라는 운동은 모두
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여러 가지 작은 허물을 찾아내어 공박
하자는 의도에 불가하며 또 각하를
위하는 사람들은 모두 오시는 것을
원치 아니하나이다 연일 국무 회의도
하고 차장들이 비밀이 단결되어 각하를
공격할 하자도 찾고 방책도 연구하는
듯 하외다 이박사를 상해로 부르는
것은 사심이 가득한 제안이었습니다
이박사의 허물을 찾아내서 이박사를
몰아내고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끼리끼리
모여이 박사를 공격할 방법만 연구한
것이죠 때문에이 박사를 아끼는
사람이라면이 박사가 상해에 오지
않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추신 만일
오시려거든 돈기만 원을 가지고 오셔야
하며 또 사용할 기밀비기만 원 있어야
하겠소이다
이박사 반대파가 이승만 박사를 상해로
부른 이유 중 또 하나는 하와이
교민들로부터 돈을 마련해 오기를
은근히 요구했기 때문에 돈이라도
가져오지 않으면 정말 곤란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인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를 반대하던 세력의
문서에도이를 뒷받침해 주는 자료들이
남아 있습니다 한인 사회당 김립이
이동희에게 사흘 다 보낸 편지들의 한
대목입니다 한인 사회당은 볼쉐비키
혁명 이후
1918년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아
이동이가능합니다
승만 몰아내고 다시 국을 정리하려
힘쓸 마음이 많았 소이다 설사 승만이
상해에 오지 않을지라도 상해 국 중에
안창호가 공심이 있는 자이면 동심
협력하여 이국을 일신할 수 있사오나
이것은 1919년 7월의 편지로
임시정부가 통합되기 전 이미 공산주의
세력이었던 이동이 일판은 이승만
박사를 임정에서 축출하고 통합
임시정부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이미 세워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는 자유 공화정 지지파
이이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세력
그리고 안창호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존재했습니다이 박사가 상해에 오기 전
신니 키로부터 받은 편지만 봐도 임정
내 개파 싸움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임시정부는 한마디로 당동
벌이라는 평을
들어왔으며이를 혁파할 묘책은 안
보입니다 당동 벌이란 뜻이 맞는
사람끼리 한패가 되어 다른 사람을
물리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독립을 위
에 통합된 임시정부의
현실이었습니다 김구는 이승만 박사
부임을 전후한 당시 임시정부 상황을
백범일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김인현
대한민국 임시정부 원년에는 국내외가
일치하여 민족 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세계 사조가 점차 본건이이
사회 주인이
복잡해지면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에도
사상이 갈
음양으로 투쟁이
전개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서도
산주인 민족 주인이 하는 분파적
충돌이 격렬해졌다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서도
대통령과 각부 총장들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로 갖기 옳다는 주장에 따라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주의를 주장하였다 맞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시작부터 민주주의
그리고 공산주의로 나뉘어 있었고 또
하나의 세력 안창호가
존재했습니다 장봉이이 박사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을 보면 안창호가
임정의 3분의 이상을 독점하고 있으니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안창호가 상하이에 와서 황제 노릇
한다는 반발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당시 안창호는 미국에
이어 상해에도 흥사단을 비밀리에
조직하는 일에
전념했는데
1920년 9월 20일 흥사단 원동
위원부 결성하여 해방 때까지 영향력
있는 유력자 190 여명으로 중국
지역 독립운동가의 규모를 뛰어넘는
사조직을 만든 것이죠 그야말로 사심이
가득한 행보였습니다
안창호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그의
실제 모습과는 달리 너무 과장된
것입니다
1920년 12월 5일 이박사는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12월 13일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드디어 임시정부 청사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임시정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었죠 그리고 12월 28일
저녁 사무소에서 임정 강들 의정원
국회의원들 현지 동포사회 인사들
300여명이 모여 임정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위한 환영식을
가졌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감사와 감의
말을 전하고 난 후 많은 금전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여
임정 인사들의 기대감에 파문을 일으켜
놓고는 독립 전쟁론
터트렸습니다 미구의가 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거 같이 하고 각각
사업하면 비밀이 예비하여 단도와 소총
한 개씩이나 사서 적어도 두 놈은
죽이고야 죽겠다는 결심을 가집시다
평소 이박사의 외교 독립 농가는 결이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시간과 상황을 고려하여
무장 투쟁도 필요하다는 것이 이박사의
생각이었습니다 더구나 무장 투쟁을
내세우는 많은 임정 인사들의 입을
잠시나마 틀어막는 효과도
있었겠지요 독립전쟁의 이야기를 마친이
박사는 임정의 개파 싸움을 정조준하여
단합을
부르짖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단합하는
민족이라 하니 기쁘다 단합의 경고를
더하여 넘어져도 한결같이 일어나도
한결같이
향진시다 왜 탐정과 이한을 제하고는
다 한 지체인 한 사람이라 불이라
하면 우리 사업에 그만치 해가 되리다
어느 곳에서 작정하고 동원령을 내릴
날이
있으리이다 독립신문은 이날 장시간의
연설이 청중들에게 심각한 감동을
일으켰다고
썼습니다 국민아 통곡을 말고
희망으로이 결심을 하자 우리의 원수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대통령을 따라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기에 일하자 합
하자 우리 생명이 가진 존경과 지식과
기능과 심성을 다 그에게 드리고
마침내 그가 나오너라 전장으로 부르실
때에 일제 예하고 나서자 마치 이승만
박사를 찬양하는듯한 독립신문 기사는
이동이 안창호 등 사심을 가진 세력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셈이 되었고
그들의 암투와 전혀 다른 동포들의
독립에 대한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이
1923년 1월 1일 임시정부
인사들은 신년 축하식을 거행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임정
강요 및 의정원 등을 다 합쳐 겨우
59명이 출신 지역과 이념과 사심
가득한 이해 관계로 찢어지고 갈라져
날마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드디어 이동은 붉은 속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9월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약 1년 가까이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사이 국무총리 이동이
김님의 의해 장악된
상태였습니다 임정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상해에 오기 전 임정을 손해진
두 사람은 이동이 또 다른 신복
한영권 임시정부 러시아 주제 정권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했습니다 이동이
가 임정 몰래 임정 대표 문서를
만들어 한권을 밀사로 레닌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동이이 행동은 임시정부를
속이고 모든 절차를 무시한 독단적
처사였습니다 한권은 레닌에게 상하이
임시정부는 한인 사회당의 정부이 빨리
인정해 주고 대폭 지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레니는 200만 브를
내어주었습니다 만 블은 현재 가치로
2천억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이 아니었고 오로지 공산당
조직을 위한
자금이었다 레닌이 준 돈이
독립자금으로 쓰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영건의 말해서
이동이 비롯한 공산세력이 임시정부를
자신들의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 임정을
공산주의 정부로 이끌어가려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공산주의자들과 치열한 싸움을 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이승만 대통령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동이 김립이 제입으로 임정이
절대 모르게 우리만 써야 할 공산혁명
자금이라고 말했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요이는 돈을 가지고 한인
공산당 즉 고려 공산당 설립에
매진했습니다 새로운 공산당 조직에
착수한 이동이 김립은 임정 내외의
주요 인사들은 물론 상하이에 몰려든
청년 남녀를 비밀리에 포섭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운영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고려공산당에 입당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상황을 김구는 백범일지 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공원에 산보 가자는
이동이 따라가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를 좀 도와주시오 얼핏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무슨 유감이
있나 이동이 아니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대저 혁명이란 유열 사업으로
어느 민족에게나 대사인데 현재 우리의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오
따라서 이대로 독립을 하고 나면
또다시 공 을하 될 것이니 두번
유열은 우리 민족에게 큰 불행이
그러니 아우님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하오 우리가 제 3
국제당 명령을 받지 않고 공산혁명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하
이이의 대답을 듣자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일이라 거절하고 자중을
고했다 이이가 새로운 공산당 조직을
만드는 동안에 받은 비밀 작은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대통령이 참석한
국무회의에서이 문제를 둘러싼 설전이
폭발하고 말았죠 임정 측은 국무총리가
레닌이 임시 정부에게 보낸 거액을
혼자
착복하다 범죄라고 들고 일어났고
이동이 임정이 아니라 한인 사회당에
제공한 자금이라면
반격했습니다 맞는 말이죠 이제야
이동의 본 드러난 것입니다 레닌에게
받은 자금은 독립운동이 아닌 공산주의
혁명 자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인식 속에 잘못
자리잡은 소련의 독립운동 지원설
그야말로 가짜 뉴스일 뿐이고 팩트는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주고받은 정치
자금이었다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이동이
1921년 1월 더 이상 이승만
밑에서는 일을 못 하겠다며 사표를
던지고
사라졌습니다 학무 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노백린 노동국 총판 안창호
등도 연달아
사퇴했습니다 잠깐 짓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자유시
변에 대해 들었습니다 소련의 붉은
군대와 한인 공산당이 연류되어
대한독립 군단을 학살한 끔찍한 학살
사건
이동이가능한 거래를 했습니다 그
거래는 자유시 변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소련의 사주를 받고 독립
군단을 자유시로 유인한 장본인이 바로
이동이었다 와해의 혁혁한 공을 세운
이동이 독립운동가라고 추하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를 죽인 가해자가 어떻게
독립운동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이
두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
느니라 다시 정으로 넘어가 볼까요
임정을 떠나기 전 안창호는 끝까지
이승만 박사 흠집내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창호 여은 중대를 열고
미국에 의존하려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노선이 독립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이박사를
공격했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외교독립
노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정작 독립정신을 위배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분야를
조장하는 그들
자신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
박사는 임시정부를 하나로 만들어보려고
새해 연두교서를 하고 현실에 맞는
임정의 활동 목표와 방법론까지
제시하며 설득해 봤지만 소형 없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실용주의적 교육을 받고
기독교 세계관을 추구하는 이승만
박사가 임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임정은 점점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와
같았습니다이 박사는 더 이상 상 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때마침 미국무장관 찰스
에반스 휴즈가 태평양 지역 아홉
개국의 해군 군비 축소 회담을
제의하자 이승만 박사는 9개국 군축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한다는 명분으로 미국행을
결정하고 상해 부임 5개월 여만인
1921년 5월 중순 상해를
떠났습니다 후일 하와이에 돌아온
이승만 박사는 지지자들을 모아 대한인
동지애를 조직했는데 그것은 상해에서
조직이 없어서 늘 발목을 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고통스러운
경험의
산물이었습니다 동지에는 이박사의
지지자가 되어 함께 대한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후일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도 이박사를 물심 양면으로 도은
진정한 동지가 되어주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미국으로 돌아가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이 박사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습니다 의정은 1921년 6월
17일 임정에 존재하지도 않는 불신임
제도를 들고 나와 이승만 박사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하고 박은 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절차에 어긋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1925년 3월 18일 이승만
박사는 안창호 세력의 주도하에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이 일방적인 탄핵으로
5년 6개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측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이 박사가 외교 독립을 위해
공들인 워싱턴의 구미 위원부
폐지되었습니다 이승만 박사 탄핵 후
임시 정부는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2대 대통령 박은식이
67세로 숨을 거두고 난 뒤 김구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추에 맞이 않는 김구 선생은
주도적으로 임정을 이끈 지도자가
아니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1927년 1월 19일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식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김구가
임정의 사령탑이 되었습니다 이제
정부는 본격적으로 공산 체제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날의 충격적 개헌을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상해
임시 의정원 그래는 지난 19일 임시
헌법을 개정하여 전부 소비에트 식으로
하고 대통령 국무총리 이하 제례의
직제를 패하고 노농 러시아식으로
위원제 채용하였으며 동시에
집행위원장이야 집행위원을 선거하는 그
치명은 아래와 같다더라 집행위원장
김구 위원 이동영 이시영 윤기섭
조항구
이규홍 1919년 3일 운동을
기획했던 이승만 박사는 3일 운동이
탄생시킨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5년 6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의 열망을 품고 자유 공화정의
정성 을가지고 태어난 임시정부는 탄생
7년 만에 삼일운동의 독립 정신은
지워지고 자유 공화정이 아는 정체성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공산 체제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지난 2019년 문재인
정부 당시 보훈처는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하며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활동에 공로가 큰
임무를 선정하여 대적인 홍보에
나섰습니다 유관순 김마리아 손병희
안창호 김규식 김순혜 한용훈 이동희
김구 지정 안중군 박은식 윤봉길 등
총
1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윤성열 정부가
출범하고 첫 3일절 기념식이 있었던
2023년 3월 1일 행안부가가 한
3일절 기념식에도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한나라의 건국 과정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고
더구나 거짓 역사에 매도되어
삼일운동과 임시정부에서 가장 핵심
인물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을 지워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 당시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주년을 강조하며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가 1919년
임시 정부라고
떠들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임시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이 첫 대통령이 된
그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산
체제로 변질된 그때를 말하는 것이죠
만약 문재인 정부의 주장대로라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공산주의로
바꾸어야 합니다 임시정부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승 박사 탄핵
이후 공산주의 체제로 변질된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건국의 뿔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공산 세력과 결탁하여
대통령제를 없앤 안창우 자유민주
공화제 대신 소비에트식 독재 헌법을
받아들인 김구 그들은
[음악]
공산주의자였으며 활동을 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식이었습니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진정한 독립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사욕을 채우거나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놀아 나다가
그지경이 된 것이죠 우리는 임시정부의
혼란과 격동의 독립운동 역사를 통해
지식의 중요성을 깨게 됩니다 이승만
박사가 그토록
주장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나야
독립이 가능하다는 그 말을 기억하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 바른 역사를
[음악]
공부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