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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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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종합db (db.it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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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범진. (2020). 병자호란 전야 외교 접촉의 실상과 청의 기만 작전, 그리고 『청태종실록』의 기록 조작. 동양사학연구, 150(), 253-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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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 『조선왕조 스캔들』, 생각정거장, 2016
-고대원, 김동율 외 7명 저, 『조선왕조 건강실록』, 트로이목마, 2017
-신명호(Shin Myung-Ho). "『승정원일기』를 통해본 昭顯世子의 病症과 死因." 史學硏究 -.100 (2010): 109-137.
-윤석희. "학질의 개념과 말라리아의 관계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경희대학교 대학원, 2012. 서울
-나종면 ( Jong Myeon Na ). "사학 : 소현세자의 죽음과 장례절차." 東方學 14.- (2008): 187-208.
-김종덕. "소현세자 병증과 치료에 대한 연구." 규장각 31.- (2007): 29-80.
-김남윤. "『昭顯乙酉東宮日記』로 본 昭顯世子의 죽음." 규장각 32.- (2008): 1-16.
안녕하세요 역사랑 놀자입니다 오늘날
조선의 15대 임금인 광해군과 16대
임금인 인조는 매우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광해군은 당시 급변하던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여 쇠퇴하던
명나라와 신흥 강국으로 급부상한 후금
사이에서 이른바 중립 외교를 펼치며
전쟁의 위협을 막은 매우 뛰어난
군주로 반면에 인조는 국제정세에
어두웠으면 오로지 명나라에 대한 의만
강조하고 후을 캐라 무시하며 배척하는
친명배금 정책을 펼치다가 정묘 병자
호란을 초래하였으며 그 결과
삼전도에서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당한 무능한 군주로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의 이러한 평가처럼 당시
인조는 정말 국제정세를 제대로 잃지
못한 채 오직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멍청한 사대주의자
불과했을까 인조는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반정의 여러 명분 중 하나로
내세웠을만큼 그의 외교에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하더라도 명나라를 도와
후금을 토벌하 있다고 말할만큼 후금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성향을 내비쳤던
인물임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알려져
있던 사실과는 달리 인조가 실제로
취한 대회 정책은 후금을 배척하기
커녕 후금을 자극하는 행위를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고 또한 정묘호란 때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은 이후
후에는 후금 측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거의 다 들어주며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광해군
식기의 외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죠 왜냐하면 집권 이후 당시
쇠퇴하고 있던 명나라의 내부 사정을
그가 자세히 파악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조실록 편찬 과정에서
일부 빠진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인조는 집권 3년 차인
1625년 3월 22일에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나라에서 환관들이
권세를 부리고 있으며 후금의 기세는
조금도 세한 적이 없고 그들이 항상
중국을 넘보고 있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러자
이정이라고 말할 것도 없지만
명나라에서 반드시 반란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으며 최네 길이라는
인물은 심지어 천하는 한 번
다스려졌다 한번 어지러워졌다 하는
것이니 명 나라도 반드시 쇠할
것이라고 말했죠 또한 그해 4월
26일에는 신세라는 인물이 명나라
일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며 환관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온전한 곳이 없다고
아뢰었습니다 게다가 3일 뒤인 4월
29일에는 반정 공신인 이귀가
위충현이 국정을 전하고 남아의
관료들이 그의 지시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 천하의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위충현 24가지 죄가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이정기 역시 인조에게 명나라에서 환관
위충현 권세가 황제를 압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인조
정권이 국제정세에 어두웠다 오늘날의
통념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후금의
강성함을 알고 있었고 더불어 명나라의
내부 사정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수집하며 명나라가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현실을게 된 인조는라
황제가 금을 라는 조칙을 보내도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그해 9월
25일에는 대사간 이구라 자가 후금을
배척한다고 해놓고 그동안 후금을 단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으니 수천이
수백명의 군사를 보내 정이라도
시키자고 건의하자 이렇게 말하며
후금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을 매우
꺼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군사를 보내어 탐지를
시도하는 것은 말이 정당하고 의리가
긴 하나 이와 같은 일들은 해만
있을뿐 은 없는 것이다 명나라가 비실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굳이
명나라의 편에 서서 후금과 전쟁을
벌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인조가 신하들 앞에서
명나라를 조롱하는 발언까지 했다는
것인데요 정묘호란이 끝난 직후인
1927년 5월 명나라의 사신으로
다녀온 김상헌에게 명나라가 후금을
토벌할 뜻이 있냐고 묻자 김상원은
토벌할 기세가 없는 듯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명나라에서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큰 문제가 되고 있으며
환관의 권세가 대단히 높아 백성들이
크게 분노하고 있고 현재 명나라에
조공하는 나라가 없다며 당시 명나라의
현실을 정확히
보고했기 김상원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하며 주화론자 최명길과
치열한 대립각을 세웠던 바로 그
김상원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때
지수라는 인물도 명나라 사람들
스스로가 명 곧 다할 것이라
말하기까지 했다고 했는데요 그러자
인조는 놀랍게도 전조의 일은 역시
한심스럽다라며 명나라를
디스했다 가도의 모문룡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중원에서
하는 일은 역시
한심스럽다라고 또다시 명나라를
디스했다 명나라 환관들의 부정부패에
대해 논하다가
어찌하여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
말인가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병자 호란이 일어나게 직전인
1636년 4월에는 신하들과 명나라
내부의 폐단을 논하며 탐욕스러운
풍조가 매우 놀랍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죠 이러한 발언들이 기존의 명나라
빠돌이 알려져 있던 인조의 입에서
나왔다는게 정말 놀랍지 않으신가요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이 생기실
수도 있습니다
라가 태하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잘
파악하고 있었으면서 그럼 라를 버리고
후편에 빨리 붙어야지 왜 끝까지
명나라를 버리지 못했느냐는 것이죠
어피 명나라는 결국 멸망하게 되는데
차라리 빠르게 손절하고 진작의 후편에
붙었으면 두차례의 호란을 겪 일도
없었을테니 말입니다 그런데이는
어디까지나 훗날 라가 중국대륙을
지하게 되는
과를는 가능한 지적이지 그러한 결과를
미리 알 수도 없었을 뿐더러 쉽게
예측하기도 힘들었던 당시 조선의
입장에선 과연 누구의 편에 붙어야
할지 선뜻 결정을 내리긴 상당히
어려웠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시 후금이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항상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데
실제론 딱히 그렇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명나라가 비록 군사적
금보다 열쇠를 보이고 있었고 또한
내부적으로도 환관의 득세와 부정부패
반란 등으로 쇠퇴하고 있었다고 한들
그 당시 명나라는 여전히 엄청난
인구와 물자 그리고 영토를 자랑하는
강대국이 반면에 후금은 군사적으로는
나라보다 우세했지만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그때 입은
부상으로 얼마안가 사망하고 말았죠
또한 누르하치 뒤를 이은 홍타이지
역시 병자호란 전까진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지을 만한 뚜렷한
승리를 거둔 적도
없었습니다 중국 대륙으로 진입하는
관문인 산해관을 돌파하려고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명나라
군에게 번번히 격 당하기 일수였죠
심지어 홍타이지는
1633년 조선측에 명나라와 화해하고
싶으니 조선이 중간다리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하는데요
이처럼 병자 호란 이전까지는 명나라와
후금 중에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지를 예측하기가 몹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이를 지켜보던 인조 정권의
입장에선 명나라가 비록 비실 되고
있다곤 하더라도 그렇다고 후금이
우세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굳이 명나라를 버리고 후금의 편에
붙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았을까요
병자 호라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론에 사로잡혀 대세인
청나라를 척하다가 조선이 자초한
전쟁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인조 정권은
국제정세에 어둡지도 않았고 순전히
병자호란 이전까지의 상황만 보자면
성이 나라보다 우세하다고 보기도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인조 정권이
무작정 라를 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오려 광군 시기와 마찬가지 대한 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죠 다만 청나라 측이
홍타이지의 선언에 조선이 동참할 것을
요구한 시점을기로 론이 대세가 되게
되는데 인조 역시 처음엔 여기에
동조했지만 얼마 안가 현실을 깨닫게
된 그는 결국 주자인 최명길의 편을
들어주며 병자호란 발발 직전까지
청나라와 타협을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병자 호라는 처음부터 홍타이지의
제 선언에 순순히 동만 해주었다면
피할 수 있 것은 실입니다 하지만
조선이 홍해를 황제로 추대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의
편에 붙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간에 벌어지고 있던
전쟁의 승패를 예측하기 쉽지 않던
상황에서 조선이 굳이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의 편에 붙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장 직면한
청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겠다고 를
배신한다면 혹시라도 명나라가 예전의
힘을 회복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배신자 조선을 응징하기
위해 무자비한 보복을 가열 가능성
역시 전혀 배제할 순 없었을 겁니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당시 조선의 입장에선 충분히 걱정할
수 있는 문제였죠 또한 명나라의
멸망이 거의 확실시 되어가는
상황이었다면 또 모를까 명나라가 아직
건제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집 명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명나라로부터 입은
은혜를 저버린 배신자라는 오명까지
들어가며 자발적으로 홍타이지 황제로
추대한다는 것은 당시 인조 정권의
입장에선 거의 모험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애초의 병자호란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정묘호란 때
양국이 맺은 조약을 청나라가 먼저
어겼다는 점입니다 청나라는 정묘호란
당시 조선과 형제의 관계가 되어 서로
사이게 지내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홍타이지가 자신의 황제로
대하라고 조선측에 요구한 행위는
형제로서 사게 지내자는 것이 아닌
명나라를 버리고 자신에게 복속하는
의미로 명백한 조약 위반이고 조선의
입장에선 이러한 청나라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일 이유는 전혀 없었기에
강하게 반발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인조가 잘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전쟁에 대한
대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례
란과 에서 인조 정권이 보여준 군사적
무능은 참담한 수준이었죠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두 차례의 호란이
일어난 원인을 어디까지나 침략을 받은
피해자인 인조와 당시의 조선 측에게
전가 하기에는 여러 가지 복잡했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너무 과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병자 호란이 발발하기
3년 전인
1633년 홍타이지는 군사 전략
회의에서 장차 정복해야 할 나라로
명나라 조선 몽골의 차하르 새 나라를
꼽았다고 합니다 그리고이 세 나라 중
첫 번째로 하르가 1635년 후금에
의해 멸망했고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병자 호라는 혹시 그 시기가 앞당겨진
것이었을뿐 어차피 청나라의 침략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이
아니었을까요 오늘의 영상은
여기까지입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
1636년 12월 8일 갑자기 청나라
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면서 병자 호란이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군 기습과 빠른 진격
속도에 크게 당황한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으며 청나라 군의
침략 소식을들은 인조는 강화도로
피하려고 하였으나 빠른 속도로 남아
청나라 군의 선봉대가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자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전할
수밖 없 이후의 결과는 이미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듯 전쟁이
발발한지 약 두 달만인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의 황제인 홍타
이지에게 머리를 숙이고 항복하면서
병자 호라는 결국 조선의 패배로 끝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에
대해
1627년에 이미 한차례의 호란을
겪은 경험도 있고 이후 병자 호란이
발발할 때까지 약 9년의 시간
있었음에도 그동안 조선은 전쟁 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도대체 뭘 했느냐며
오늘날까지 큰 비판을 받고 있죠
그런데 사실 조선이 전쟁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전쟁 대비의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왜냐하면 침략을 앞두고 먼저 조선이
방심하게 만들려고 했던 청나라의기만
작전에 당시 인조와 조선 조정에 홀딱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조선과 후금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 호란을 계기로 형제의 관계를
맺은 이후 중간에 여러 가지 문제로
마차를 믿긴 했지만 그래도 몇 년간
큰 문제 없이 사이좋게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1936년 2월
갑자기 후금 측에서 조선의 사신의
보해와 기존에 맺었던 형제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뒤 새롭게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조선측이 크게 반발하자 생명의 위험을
느낀 의들이 본으로 돌 아가면서
양국간에는 서서히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1636년
4월 홍제 황제 식에 참석한 조선의
사신들이 그에게 배례를 행하는 것을
거부하자 이에 개망신을 당한
홍타이지는 결국 조선을 침략할 것을
결심하게 되고 이후 조선 역시 준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전히 파탄나게 됩니다 그런 이처럼
거실 가던 상황에서 그의 6월말
갑자기 청나라 측에서 마데라는 인물이
상단을 이끌고 와 앞서 조선의
사신들이 청나라에 가져갔던 물건들의
대금을 치르겠다며 의주부윤 임경업
만남을 요구했는데요 여기서 마부는
이전에도 조선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왔던 인물로 병자호란 때는 선봉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인조의 강화 도을
가로막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부는
이때 임경업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자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말한 뒤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조정에서는 이미 양국의 관계가
파탄이 난 상황에서 마부대가 갑자기
이러한 행동을 보이자 상당히 의아했죠
이후 9월 초에 마부대가 정말로 다시
왔고 임경업의 만남이 성사되면서
오랜만에 양국간의 외교 접촉이 되게
되는데요 이때 임경업은 마대를 접대한
뒤이어서 양국관계의 파탄에 대한
책임은 청라
라을 수기를 촉구한다는 용이 긴
조선조의을 마에게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마부는 자신은
오직 물건값을 치르기 위해 왔을뿐
홍타이 명령이 없었으니 격을 가지고
갈 수 없다며 굳이 꼭 격을 보내고자
한다면 사람을 따로 보내라고 말하고는
돌아갔죠 그자 마 주자들이 서서
목소리를 기 시작하던 조선에서는
마을 관계 회복의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그의 10월
청나라의 입장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들의 내부 사정도 정탐할 겸 통역관
박인범 등에게 격서 더불어 주활
혼자인 최명길이 작성한 서신을 갖고
청나라로 갈 것을 명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의 황제 홍타이지는 박인범
일행을 만나 주지 않았고 박인범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그가 막 귀국하려던
찰라에 갑자기 청나라 측이 12월
25일까지 왕의 아들과 대신을 인질로
데려오는 사신을 보내지 않으면 조선을
침략하다 통보해 왔는데요 여기서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 보이지 않으신가요
이때 청나라가 박인범게 통보한 날짜는
12월 25일인데 정작 병자 호란이
발발한 날짜는 12월 8일입니다
즉 청나라는 이때 박인범 화친을 위해
12월 25일까지 조선을 침략하지
않고 기다려 주겠 짓말을 전하여
조선을 속인 뒤이 말을 믿은 조선이
방심한 틈을 노려 12월 8일에
갑자기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겁니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의 속임수는
한가지가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데요 인범은 청나라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정묘호란 때 포로로 잡혀
끌려갔던 조선인인 남이라는 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인범은 그에게
몇 달전 청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라로
들어간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는데 이때 남은 천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심지어이 과정에서
홍타이지의 동생인 아바이가 전하기까지
했다고 답했죠 그리고 인범은이어서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고 이에 남은 잘은
모르지만 조선의 대신이 청나라에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더라고 답했습니다
다시 말해 청나라가 파탄난 조선과의
관계를 전쟁이 아닌 외교를 해해 다는
겁니다 그러자 인범은 남에게 얻은이
정보들을 조정해 보고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의주 부 임경 역시 청나라
군이 명나라를 공격했다가 패배했고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여섯 왕자 중 한
명이 전사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조정에
보고했는데 그러나 이들이 입수한
정보들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당시 청나라 군은
명나라 군에게 패배하기는 커녕 오히려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며 대대적인
약 린 귀했고 이때 청나라 측
전사자는 고작 79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즉 인범과 임경업이 입수한
정보는 현재 조선을 칠 여력이 없는
상태인 것처럼 속여서 조선이 더욱
방심하게 만들려고 청나라 측이 일부러
흘린 거짓 정부였던 겁니다 하지만이
모든 것이 청나라의 속임수임을 알
방법이 없었던 인주와 조선 조정은 그
정보들을 그대로 믿고 말았고 그 결과
외교적인 방안에만지 초점을 맞춘
나머지 전쟁 대비에는 비교적 소홀할
수밖에 없었죠 이에 대한 예로
1636년 11월 13일 비변사가
이전에 미리 뽑아 두었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그리고 강원도의 정군
1,300명을 전쟁 발발 시에 곧바로
동원할 수 있도록 12월 10일까지
각도의 경계에 미리 대기시켜 놓자고
인조에게
했는데요 하지만 인조는 군대를
이동시키는 일을 너무 서두르지 말
했 사실 병자호란이 12월 8일에
발발했던 것을 고려하면 12월
10일까지 지방의 군사들을 미리
대기시켜 놓자는 비변사의 건는 상당히
늦은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조는
청나라가 통보한 기한이 아직 많이
남았기에 좀 더 상황을 지켜본 이후
대비해도 시간이 충분할 것이라
여겼는지 이마저도 더 늦추게 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던 겁니다 이후 인조는
11월 16일 대신과 비변사 관료들을
불러모아 청나라와 화친을 것을
결정하였고 12월 4일에는 척화파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의
화친 교섭을 위해 드디어 주화론자
박로 정식 사신으로
파견하였고 침략을 위한 준비를 모두
끝낸 홍타이지가 11월 25일 조선이
전쟁 준비를 마치기 전에 먼저 기습
공격하겠다고 하늘에 고하는 등 이미
병까지 다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2월 8일이
되자 청나라 군은 로의 사신단이
청나라로 오고 있던 말던 예정대로
얼어붙은 암록 강을 건너 조선에 대한
대대적인 기습 공격을 개시하면서
마침내 병자 후안이 발발하게 되죠
그리고 청나라에게 속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인조는 12월
18일 남한산성에서 이렇게 말하며
크게
탄식했습니다 이제 보니 전날에 호여
한말에 저들이 명나라에 패배를
당했다고 하였는데 역시 청이 우리를
속여서 우리가 준비가 안 되었을 때
침입하려는
것이었다 병자 호란이 끝이 난 직후
청나라의 인질로 끌려갔던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는 1645년 2월 약
8년간의 인재의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조선으로 연구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약 두 달
뒤 4월 23일에 갑자기 병이 났다고
합니다 이에 어인 박군이 아는 자가
세자의 진맥을 보았는데 이때 그는
세자의 병을 학질이라 진단했고
그리고이를 토대로 다음날 새벽 왕실
병원인 내 의원에서 인조에게이 형이
기라는 어이 이게 명하여 침술로
세자를 치료하게 할 것을 청하니
인조는이를
허락했습니다 이후 소현세자는 24일과
25일 총 이틀 동안 이형 이에게
침을 맞았는데 다음날인 4월 26일에
결국 사망하고
말았죠 그런데 실록의 다른 기록을
보면 이와 관련하여 심상치 않은
내용이 하나 나와 있습니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염습 참여했던 종친
이세이 소현세자의 시신을 보니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눈코 입 귀에서
모두 서열이 흘러나왔는데 이에 검은
천으로 얼굴의 반쪽을 덮어 놓았으나
시신의 색깔과 천의 색깔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고 합니다 당시 34살에
한창 젊은 나이였던 소현세자가 병인
난지 고장 며칠도 안 돼서 죽은 것도
의외인데 이처럼 시신의 상태가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는
기록까지 있으니 여기까지만 보면
소현세자가 정말 병으로 사망한 것이
만나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데요
게다가 소현세자의 사망 이후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둘째
봉림대군을 다음 후계자로 삼는 가면
며느리에게 영모 혐의를 씌워 죽인
인조의 행동들은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죠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인조가 어인
이익을 이용해서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이름바 소현세자
독입니다 그런 현자는 귀국후에 갑자기
병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귀국하기
전부터 이미 병을 앓기 시작했고 귀국
후에도 거의 매일 병에 시달렸다는
사실 혹시 알고 계셨나요 북경을
점령한 청나라는 1644년 11월
11일 소현세자에게 조선으로 영구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소현세자는
본국에 귀국하기 위해 11월 20일에
청나라 사와 함께 북경을 떠나 먼저
심양으로 향했죠 이때까지만 해도 소현
세자의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드메인 1645년 1월
10일 갑자기 세자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보고가 들어왔다고 하는데요
소현세자는 1월 9일에 심양에
도착하게 되는데 1월 10일에 보고가
들어왔다는 것은 보고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했을 때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심양으로 향하던 중간에 건강 상태가
갑자기 빠졌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에 인조는 내의원의 요청에 따라
소현세자의 치료를 위해 어이 1명을
급하게
파견했지만 소현세자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고 심양을 떠나 조선으로 향하는
과정에서도 병환 때문에 중간에
수차례나 이동을 멈춰야만 했습니다
이후 소현세자는 2월 18일이 되자
오랜 고생 끝에 간신이 한
도착했는데요 한양에 도착한 소현세자는
건강을 많이 회복했지만 아직 완치되지
못했습니다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한양에 도착한지 이틀 뒤인
2월 20일에 의들이 세자를 진했는데
아직 기침 천식 가래 고열 입만 없음
등의 증세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어들이 이모 수을 처방하여
복용토록 하였지만 세자의 병세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오 기침과 숨이 차고
어지러운 증세가 더 심해졌으며 속이
매스껍고 신물이 올라오는 증세가
더해졌죠 그러자 최득용 유우성 박군
등의 어들은 이모 영수에 넣었던
약재들을 일부 덜어낸 뒤에 다시 약을
지에 올렸고 상태를 좀 더 지켜본
후에 다른 약처방을 고려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후 2월 26일이 되자
어이 이형이 추가로 투입되어 소현
세자를 진했는데 이때 감기까지
겹치면서 세자의 열이 더욱 심해졌다고
합니다 이에이 형에게 합류한 의료진은
소시 호을 처방하여 세자에게
복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3일인
2월 29일에 어이 체용 이형익 박군
등이 다시 세자를 진했는데 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열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하지만 감기 증상이 아직
남아 있어서 기침 오심 신물이
올라오는 증세가 아직 없
시호에를 추가하여 복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2월 30일
소현세자는 몸이 조금은 괜찮아졌는지
자신과 함께 조선에 온 청나라 사를
만나러 갔는데요 이때 그는 사에게
자신의 병 때문에 대접이 소홀했다고
미안함을
했습니다 그자 사는 자께서 치
않으시기 때문에 늘 걱정하고
있었습니다을 욱
미안합니다라며 세자의 병을 크게
걱정했죠 이후 3월 1일 어이 소연
세자를 무난했는데 이때 세자는 소시
호이 효과가 있는 듯하다고 말하며
다만 감기증세가 아직 남아 있으니
소시 호을 더 복용하다 말했습니다
이에 어들은 소시호탕 첩을 더 지어
올렸죠 3월 4일 자는 아직 병이지
않음도 자신과 같이 온 청나라 사의
전에
참석했습니다 그러자 세자를 본 청나라
사는 이렇게 말했죠 세자의 얼굴을
베니 아직도 미령 아신 기세에 있어
걱정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3월 5일 어이 최용
이형익 박군이 소현세자를 진했는데
이날 세자의 요청에 따라 어이
박태원이 추가로
투입되었습니다 이후 진 끝 어들은
효과가 있었는지 세자의 병이 3는
나았다고
진단했습니다 다만 아직 완치된 것은
아니었기에 시후 연교 복용과 침을
병행하여 치료받아야 한다고 보고했고
이후 소연 세자는 3월 6일부터 탕약
복용과 더불어 여러 차례 침을
맞았는데요 그 결과 3월 14일에
소현세자를 진찰한 어들은 이제 침과
탕약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세자의 병이
거의 다 나았다고 진단했습니다
비록 열이나는 증세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심하진 않기에 열흘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약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했나 얼마 뒤 세자의 병은 또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는데요 4일 뒤 3월
18일 소현세자는 심한 천식과 가슴이
답답한 증세 그리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피곤함 등의를
호소했습니다 이에 어
유성군은 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는 청폐탕 첩을 지어 세자에
복용토록 했죠 하지만 3월 23일
숨찬 증상과 천식 증상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더욱 심해졌고 두통과 더불어
옆구리가 당기는 증세까지 더해지는 등
세자의 병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게다가 4월 1일에는
오른쪽 다리에 두드러기가 일어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4월 11일이
되자 성탕이 효과가 있었는지 세자의
증세가 많이
호전되었는데 하지만 기침과 식사 후에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는 증상 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어이들 중력 지출 환을 처방하여
세자에게 복용토록 했습니다 이후 4월
16일 소현 세자가 어이 박군을
호출하여 이전에 알턴 평은 거의
회복되었지만 두통으로 인한 현기증과
더불어 식사한 뒤에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피곤하며 뱃속이 불편하고 양
옆구리가 당기며 온몸이 무겁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바꾼 유성 등의
어들은 세자의 비위가 허약해
때문이라며 자음 건비탕 첩을 처방하여
복용토록 하였죠 그러나 이틀 뒤 4월
18일 세자의 증세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현기증이 더욱
심해져서 몹이 괴롭다고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4월 21일
밤에는 추워서 몸을 떠는 오환 증세도
나타났는데
하지만 다음날인 4월 22일에는 오한
증세가 전혀 없자 어들은 단순한
감기로 판단하여 소시호탕 첩을 처방
내렸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인 4월
23일 새벽부터 세자가 다시 오한으로
심하게 떠는 증상을 보였는데 이러한
증세가 저녁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한 증세가
멈추자이어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밤새도록 열이
내리지 않아 잠을 한 숨도 못 잤으며
숨도 거칠어서 편안히 눕지도 못했다고
하는데요 이에 박군 이형익 등의
어들이 세자를 다시
진찰했다 증세를 학질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내 의원에서는
어이들 진찰 내용을 토대로 먼저 침을
놓아 세자의 열을 내린 뒤 다시
증세를 살펴서 약을 의논하는 것이
합당하다면 이형 익게 침을 놓게
하겠다고 보고했고
그고 다음날인 4월 24일 새벽 박군
이익 이섬 명의 어가 자궁에 들어가
치료를 시작했는데 이때은 이형이
았습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어 유성과
박군이 시지 삼을 처방하여 복록 했죠
그리고 다음날인 4월 25일 다시
박군이 이길의 어가 소를 치료했을
그러나 세자의 병가 나아질 미를
보이지 않자 어이 룡이 세자의 치료를
위해 추가로
투입되었습니다 이후 다음날인 4월
26일 새벽 소현세자의 병이 여전히
나아지지 않자 룡이 소시호탕 첩을
처방하여 복용토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갑자기
소현세자가 숨이 막히는를
보였는데요이 소식을들은 인조는 자신을
치료할 매을 을제외한 모든 관들을
세자에 보냈고 이후 어들은 소조중탕
첩을 급하게 처방하여 세자에게
복용토록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소현세자는 다행히도 숨이 막히는
증세는 나아졌지만 식은 땀을 너무
많이 흘려 옷이 흥건히 젖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에 내 의원에서는
인조에게 세자의 증세가 가볍지 않아서
응급조치를 미리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며 세자의 병이 조금이라도
어 유 이익 박태을 내에 입게 하도록
청했고 인는이를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안타깝게도 그날 낮에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소현세자의
치료과정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는데요 이처럼 소현세자는
귀국후 약 달 4월 23일에 갑자기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병에 시달렸고 거의 매일
치료를 받으며 증세의 호전과 제발을
반복했습니다 또한 소현세자의 병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치료 기록들에 나와 있는 소현세자의
증상들을 고려했을 때 간단히 치료가
가능한 병은 아니었음이 분명해
보이는데요 그리고 당시의 소현세자의
치료를 이형이 혼자 담당한 것으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
세자의 치료는 이형이 단독으로 한 것
아닌 항상 여러명의 어들이
함께했습니다 즉 소현세자 독살설의
주장처럼 이형이 정말 세자를
독살했다이는 다른 어이들 모두
인조에게 매수당한 상태가 아닌 이상
이형이 몰래 저지르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겁니다 또한 이익이 투입된
이후 세자의 병세는 오히려 몇 차례
호전되지
했었습니다 인조가 정말 이익을 지켜
세자를 독살하려 했다면 이익이 투입된
이후 기회가 얼마든지 많았는데 굳이
세자의 증세를 몇 차례 호전시켰다
뒤늦게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소현 세자의 죽음은 독살이
아닌 세자의 병을 치료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던 17세기 조선시대 한의학이
한계 때문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 영상은 여기까지입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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