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방송) 제9강, 조선에 온 선교사(4) - 객과 고아와 과부를 섬기라 (알기쉬운 한국근현대사 #9)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
161 팔로워
2023. 12. 16.
우리은행 1005 204 476779 (예금주 :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의 시작'(역사전쟁)에 후원하실 분은 후원해 주세요. 다음 프로그램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기원" 입니다. 많은 후원 부탁드립니다.
https://www.ihappynanum.com/Nanum/B/3QPKX090HC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월정기 CMS 후원 바로가기)
다음 편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기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후원 부탁드립니다.
여러분께서 내어주신 후원금으로 제작한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의 시작'은 7월 3일(월)부터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 저녁 8시에 방송 합니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제작을 하다보니 제작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1주일에 한 편씩만 내보내고 있습니다.
대한역사문화원,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글로벌디펜스뉴스 홈페이지에서 지난 방송을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hiskeepers.or.kr/news/section.html?sec_no=100 [대한역사문화원]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시작 과거영상 보러가기
http://www.k-cia.kr/news/section_list_all.html?sec_no=109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시작 과거영상 보러가기
대한민국 근연 대사를 성경적
세계관으로 알리고 전하는 대한역사
문화원의 한국 고대사 바로기
특강입니다
[음악]
조선에 온
선교사네 번째
이야기 질병의 멍에를 끊어준 의료
선교사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소주제를 이렇게 정해
봤습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를
섬기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객과 고아 과부를 돌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객과
고아 그리고 가부는 소외되고 스스로
설 수 없어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객과 고와
과부는
누구였을까요 여인들 천한 신분에 속한
이들 병든 자 그리고 장애인들
이들이었습니다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조선에 와서 핍밥 갖는 자
소외된 자 병든 자들을 섬기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조선은 가정을 보호하고
여성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래 여성들을
남의 눈에 뜨지 않게 격리해야 한다는
괴상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여인들은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하고 부모의
보호를 받고 살다가 결혼하면 다시
남편 집에 갇혀 지내는
신세였던 선교사가 제중원의 원장이
되면서 여성들의 진료를 위해 여의사를
초빙하여 부인과를 개설했지만
중원 의사의 대부분이 남성이다 보니
조선 여성들이 제중원에서 치료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자 의사가
많은 제중원에서 진료를 받는다면
내외도 모르는 짐승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죠 이런 조선 여성들의 고충을
지켜보던 리 스크랜튼 선교사는 자신을
송한
미교
선교회에 조선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전문 병원을 세워 달라 청원했고
선교부는 메타 하워즈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하여 1887년 10월 정동의
조선 여성을 위한 전문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1888년 고종은이 병원의 보구
여관이라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이름의 뜻처럼 보구
여관은 선대 받던 조선 여성들을
구하고 보호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잠깐 보구 여관의 성장
역사를
살펴볼까요 1887년 10월 31일
매타 하워즈 정동에서 처음 여성 환자
진료를 시작한 일에 로제타 셔우드홀
메리 커틀러 릴리안 해리스 엠마 언스
bco 바게스 아만다 힐만 등 많은
여성 의사들이 조선 여성과 어린이
진료에 힘쓰며 조선의 객과 고와
과부된 이들에게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선물했습니다 보구 여관은 환자 진료
외에 의료 선교와 의학 교육 간호
교육에도 매진하여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사 바게스 최초의 간호사
이그레이스 김 마르다를 배출하기도
했죠 정동에서 시작된 보구 여관은
1913년까지 진료실 수술실 약재실
입원실을 갖추고 어엿한 병원의 기능을
수행하였습니다 1892년 동대문의
보구 여관의 분원인 볼드윈 진료소가
설립되었고
1912년이 자리에 동대문 부인
병원이라고 불리던 릴리안 해리스 기념
병원을 신축하여 1913년에 보구
여왕과 완전히
통합하였습니다 동대문 부인 병원은
해방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병원이 되었고 2008년 이대
목동 병원과
통합되었습니다 다시 보구 여관의
시작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메타 하워즈 선교사는 보구 여관에서
수많은 조선 여성과 어린이를
치료했습니다 그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보던 메타 하워즈
선교사는
1889년 건강이 악화되어 조선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은 보구
여관의 여의사가 로제타 샤우드 홀
선교사입니다
1890년 10월 13일 제물포에
로제타 샤우드 선교사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직 홀이라는 성을 쓰지 않을
때였습니다 홀은 결혼 후 가지게 된
성이요 그녀는 미국 감리교 해외 여성
선교회에 파송을 받은 의료
선교사였습니다 로제타 서우두 선교사는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인 10월
14일 바로 첫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로제타 샤우드 선교사는
진료를 시작하고 3년 동안 1400
가지나 되는 질병을 치료했다고 합니다
와 그녀에게 치료받으러 오는 환자의
대부분은 신분이 낮은 여인과
아이들이었습니다 신분이 높은 여인들은
대낮의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로제타 선교사는 직접 왕진을
다니며 그녀들을 치료했고 밤에도
병원을 열어 모든 신분의 여성들이
치료받으러 올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로제타 선교사의 사역
초반에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화상으로 손가락 세 개가
손바닥에 붙은 16살 소녀가
찾아왔습니다 로제타 쇼우드 선교사는
손가락을 분리하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 소녀의 보기 싫은 흉터을
가리기 위해 피부 이식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환자의 몸에서 피부를
떼어내야 하지만 소녀는 이해하지
못했고 로제타 셔우드 선교사는 자신의
피부를 떼어 소녀의 피부에 이식해
주었습니다 선교사의 그 놀라운 행동을
본 주변 사람들까지 기꺼이 자신의
피부를 내주어이 소년은 무사히 치료를
받았고 태어나게
되었지요 그리고 얼마 후 비가 몹시
많이 내리던 밤 한 남성이 보구
여관에 찾아와 부인을 위해 약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알고 보니 부인은 아주
위독한 상태였던
것이죠 로제타 선교사는 즉시 그의
집으로 가려고
일어섰습니다 남자는 놀랐습니다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 밤에 로제타
선교사가 자기 집으로 함께 가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죠 그 병원를 봐주던 남자직원
귀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선 여인에게 자신의
피부까지 떼어준 의사인데이 정도 빛
때문에 왕진을 안 가겠는가라고
말입니다 로제타 우드 선교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의를 통해
조선 여성을 구하고 보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친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그는 이화학당의 학생 중
명을 진료를 돕도록
시켰습니다 한 아이는 일본 소녀 오
아과 한 아이는 조선 아이
점동이었습니다 로제타 선교사는이 두
소녀를 자기 일만 돕게 하려고 훈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이 두 소녀를 훈련시키는
것은 나를 돕는데만 쓰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시야를 넓혀 장래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말 로제타 선교사의 바람대로
조선 아이 전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 에스터가 되었습니다 전동은
세례를 받고 에스더라는 이름을 받게
됩니다 엘더는 조선의 풍습에 따라
일찍 결혼하고도 로제타 홀 선교사와
함께하며 사역을
도왔습니다 1891년 12월 15일
로제타 쇼우드 선교사의 약혼자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가 조선에
왔습니다 그 역시 조선을 위한 의료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온
것입니다이 드메인 1892년 6월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1893년 11월 홀
부부의 아들 쇼우드 홀이 서울에서
태어났죠이 아이는 장차 자라서 조선의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홀 부부는 함께 사역하지
못하고 제임스 홀 선교사는 평양으로
그리고 로제타 홀 선교사는 는
서울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게 됩니다 1894년
5월 8일 로제타 서우두 선교사는
남편이 있는 평양으로 그의 사역지를
옮겼고 그 길은 에스토 부부도 함께
했습니다 사실 당시의 평양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곳이었지만 홀 부부와 에스터 부부는
담대하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평양으로 갔습니다 이때부터 로제타 홀
선교사는 조선의 또 다른 객과 고아
과부였다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장애인은 쓸모
없는 물건 취급을 당했습니다 로제타
쇼우드 홀의 환자 중에도 특별히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그리고 말을
못하는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시각 장애인의 경우 부모가
돈이 있다면 훈련을 시켜 무당이
되거나 점을 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쓸모없는 물건 취급을 당하며 소해
당하다가 잘 먹지도 못하고 결국 걷는
곳조차 어려울 지경까지 이르게 되어
죽어갔습니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시각
장애인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다가 자신이 어린 시절
점자를 배운 기억을 되살려 한글
점자를 개발하여 그들을 돕기
원했습니다 홀 선교사를 돕던 오석
형의 딸 봉래 시각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로제타 홀 선교사는
기름종이에 바늘로 점자를 만들어
동래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저 사진에 나오는
집에서 그 교육이
시작되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청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한 달여 안에 홀
가족과 그리고 에스터 부부는 서울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1894년 10월
1일 윌리엄 홀 선교사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청의 전쟁 중 평양에서
큰 전투가 있었고 그 후 평양의
전염병이 돌고 부상자들이 넘쳐 났기
때문에 홀 선교사는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던
것입니다 불행이도 평양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던 중 윌리엄 홀 선교사는 발진
티포스에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
4시였다 홀 선교사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돌이 같이 난 아들 셔우드
데리고 그녀의 몸속에 자라고 있는
둘째를 출산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의 귀향길에 에스터
부부가
동행했습니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1895년 1월 14일 고향집에
도착했고 후 딸 이디스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로제타 홀 선교사는
두 아이를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올
준비를
했습니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평양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면서 두 가지를
마음에
품었습니다 평양의 남편을 기념하는
기호 병원을 짓는 것과 한글 점자를
개발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녀는 한글 점자
개발을 위해 체계적인 공부를 했고
2년뒤 인 1897년 11월 두
아이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무렵 바게트는 미국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 지금의 존스
홉킨스 의과 대학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바위산은
그녀의 뒷바라지를 했죠 1898년
5월 1일 로제타 선교사는 다시
평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질로 딸
이디스를 잃게 되었습니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아픔을 잊기 위해 곧바로
진료소를
열었습니다 개원 직전 평양 감사
부인을 치료해 준 덕에 평양 감사는
그 병원에 광해 여원이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후에 기 병원과 광해
여원이 통합돼 평양 연합 기독 병원이
되었습니다 로제타는이 병원에 이디스를
기념하는 어린이 병동을 추가로
건립했고 이곳에서 시각 장애인을 위한
교육도 시작
했 겨울 동안 서울에 머물며 초급
한글 교리서 등을 점자 교재로 만들어
평양에 다시 돌아왔고 오지를 돌며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례를 다시
만나 그녀가 만든 교재로 점자 교육을
시작했고 점자로 성경을 읽게 된 봉은
성경에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이 고침을
받는 이야기를 읽으며 감동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특수 교육 교사가
되었습니다 와 로제타 선교사의이 특수
교육은 곧 평양의 소문이 파다해서
맹인 소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이디스
마가렛 병동의 특별 교시를 열어
이들을 가르쳤고 1903년 평양 여행
학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로제타 선교사는
시각 장애인뿐만 아니라 말 못하는
이들과 청각 장애인까지 받아들여 농화
교육을 시작하고 학교 이름을 평양
여맹 학교에서 평양 맹아 학교로
바꾸고 장애인을 위한 교육을 발전시켜
조선의 객과 고와 과부인 이들을 섬긴
특수 교육의
어머니였습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여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1912년 광해 여원 안에 실습을
병행하며 의학 강습 반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의전에
입학시키려고 의전에서 여학생 입학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여자 의학
전문학교를 만들기로 하고 한국인
의사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리하여
1928년 조선 여자 의학 전문학교
창립을 발기한 것입니다이 학교가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죠 잠시 로제타 선교사의 제자이자
자매로서 함께 사역한 에스터 이야기를
해볼까요 박에스더는 의학 공부가
끝나갈 무렵인 1900년 폐결핵으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의과대학을 졸업해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죠 엄밀히 말해 남녀를
통틀어 우리나라의 최초 의사가 된
것입니다 바게 스턴은 그의 5월 미
감리교 해외 여성 선교회에 의료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고국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보구 여관에서
평양에서 자 누린 자유를 조선
여인들에게 헌신적으로 나누며
봉사하다가 1910년 4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이 일은 홀 선교사의
가족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슬픔이었습니다 구한말 조선의 또한
부류의 객과 고아 가부는 바로 결핵
환자였습니다 구한말 당시 다섯 명 중
한 명이 결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걸리는 병이지만 약도
없고 고칠 방법이 없는 불치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결에 걸리면 내가
벌을 받아 이병에 걸렸구나 두려워하며
무속의 힘을 빌려 결핵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체념하고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핵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이모 에스터를 잃게 된 로제타의 아들
윌리엄 셔우드홀 자신의 이모를
빼앗아간 결을 조선에서 퇴치하는 일에
앞장서기로
결심했습니다 반드시 폐결핵 전문의가
되어 조선에 돌아올 것과 결핵
요양원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이 모든 일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있었습니다 윌리엄 쇼우드 홀은 서울에
태어나 평양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가 대학 과정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캐나다로 가서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미국으로 가서 뉴욕롱 아일랜드의
홀트빌 서포크 결핵 요양소에서 결핵을
전공한 후 1925년 8월 미국
감리회 의료 선교사로 임용되어
1926년 4월 19일 아내 메리언
홀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셔우드 홀과 메리언 홀
부부은 셔우드 홀의 오랜 소망대로
조선의 결핵 퇴치를 위해 1928년
황해도
해주에만을 필요하기 위한 해주 구세
요양병원을 세우고 조선 결핵 퇴치를
위해 그들의 젊음을 다
바쳤습니다이 결핵 요양원을 통해
절망에 빠져살던 조선의 객과 고아
과부였다 결핵 환자들에게 희망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죠 셔우드 홀 부부은
조선에서 폐결핵 퇴치를 위해 조선
사람들이 결에지지 않고 변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계몽 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들의 그 노력이 얼마나
놀라운 열매를 맺어 가는지는 해주
9세 요양병원에 10주년을 맞이하여
홀 선교사에게 보내온 축하 편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친해하는 닥터 셔우드홀
선생님은 성스럽고 훌륭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은 해주 결핵
요양원의 설립 10주년 기념일입니다
요양원의 눈부심 발전은 선생님의 피와
땀의 결정입니다 오느 날 결핵은
인류의 적이
그러나 10년 전만해도 우리 조선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요양원을
설립하신 후로 환자들이나 일반 대중이
결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 병마와
싸우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 선생님은 결에 걸려 깊은
절망에 빠졌던 많은 사람을
치료하 선생님은 병을 고쳐 주셨을뿐만
아니라 결 예방운동을 시작하셨고 퇴
협회의 지도자로 훌륭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생애의
황금기를이 사업을 위해 바치셨다 많은
사람이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사랑은 태산보다
높고 황해 다
깊습니다 영광스러운 1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선생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저희들은 감사한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이제 저희의 마음을
표시하고자 작은 선물을 올립니다
저희의 성의를 기억하는 뜻으로이
선물을 받아 주시면 저희들은 최고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샤우드 홀 부부가 얼마나
많은 헌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감동의
편지입니다뿐만 아니라 샤우드 홀
선교사는 조선의 결핵 환자 치료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932년 크리스마스 씨를 발행하여
결핵 환자를
도왔습니다 1940년 일제는 제임스
우드홀 선교사에게 간첩 죄를 씌워
추방했고 통해 조선을
떠났습니다 그날 홀 선교사 가족은
부산항에서 조선의 자유로운 그날을
기대하며 태극기를 펼쳐 나뭇가지에
걸고 조선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홀
선교사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 제임스
샤우드 홀과 메리언 홀 부부까지
2대에 걸쳐 한 가족이 74년의
조선의 객과 고아와 과부된 조선의
여인과 아이들 장애로 고통 당하던
이들 결핵으로 죽어가던 이들에게
자유의 빛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시작에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음악]
좋겠습니다
[음악]
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