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내 강사의 독립운동 강좌 석주 이상룡 2부 | 서간도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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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리고 1909년에 대한 협회가
어 서울에서 만들어졌는데요 그 대한
협회가 전국의 지회를 결성할 때 바로
안동 지회를 결성하는데 앞장
서셨습니다 그래서이 대한 협회 안동
지회는 바로 근대 자주 국가는 아까
말했지만 그런 대중의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대중 국민은 어떤
국민이어야 되느냐 그냥 모든 국민이
아니라 자격과 정신을 갖춘 국민이
필요하다 라고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어디에다가 방점을 두셨을까 바로 이런
자격과 정신을 갖춘 국민을 길러낼
교육의 아주 큰 뜻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상용 선생의 논문에는 이상용
선생의 교육관에 대한 그런 논문이
있을 정도록 교육에 많은 애를 쓰셨던
분이 이상용 선생이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유림 중심의 향약 아까
10년 전에 이미 향약을 했는데
그것은 유림 중심이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 이런 그런
반성들 바탕으로 10년 후에 대한협회
안동 지회를 아주 부흥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강한 국가를 위한
방법은 바로 각계 각층에 단체 여러
여러 조직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사들
간의 조직 뭐 농민들의 조직
노동자들의 조직 뭐 다양한 조직이
필요하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어 대한 협회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이런 자격과 정신을 갖춘
국민들 를 길러내 가지고 자치 활동을
해야 된다 그리고 토론을 해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서양 근대 사상과 제도를 많이 수용을
하면서 무엇을 했다 민주주의를
훈련했다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활동도
해야 되고 그것은 중앙에서만 내려
주는 것이 아니라 자치적인 활동을
해야 되고 또 이러한 것은 토론을
통해서 서로의 의견을 조종하고 어
서로 의견을 모아에서 실행에 옮기는
그런 민주주의를 어 훈련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입헌 국가
수립을 위한 헌법과 법률을 준비했다는
건데요이 부분이 안동 지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한
협회에서는이 위에 것까지는 같이 많이
했는데 이것을 준비한 지회는 안동
지회가 유일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뭐라 뭐냐면 더 미래를
내다보면서 이제는 우리가 국가의
형태가 어떠해야 하는가 이렇게 나라가
어려울 때 이미 국가의 형태까지도
고민을 하고 그를 위해서는 법이
준비가 되어 된다라는 어 이야기를
하시면서 준비를 했다는 것이 아주
놀라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교육에 힘
쓰셨는데요 도동 서수를 설립하 가지고
여기서 교육을 했는데 대표적인 과목이
바로 노노 맹자 그렇죠 유학자였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했고요 그다음에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 된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
그리고는이 역사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우리 민족주의적인 사관으로 다시
이루어지는 거죠 그런 다음에 윤리
그다음에 산수 서예 그리고
체육가방 쓰시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이런 체육 우리 몸이 또 중요하다라는
말씀을 하셨고요 특히 낮에는 일하는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을 실시했다 야
을 실시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이 대한 협회가 쭉 이어지다가
대한 협회이 서울 지부 중심 본회가
어떻게 되냐면 송병준이 그지 이런
세력하에 잡게 됩니다 그러면서 친일
쪽으로 이렇게 넘어가는 행각들을
일어나게 돼요 그리고 또한 향촌
유림이 이렇게 혁신 유림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그 지역의 유림들은 아직도
이러한 근대적인 이론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향촌 유림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1910년에
해산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안동
지회의 활동은 의미들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대한협회 회보가
이렇게 제 1호는 이렇게 대한협회
회복까지 나오는 어 것이었는데 이러한
것들이 어 1910년에 해산되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0년에 들어
가지고는 어 좀 재밌는 건
1910년에 들어서 무엇이 설립이
됐느냐 가족 단위라는 것을 또 결성을
했습니다 가족단 결성 아주 좀 독특한
건데요이 여러 가지 협회도 해보고
많이 해봤는데 잘 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조직들을 어
그만둬서 안 된다 이런 조직들을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된다 우리
가족이라도 해 봐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 그래서이 이상용
선생이 쓰신 가족 국가 단규 조례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이를 가족에
적용하면 가족단위 되고 사회 단위에
적용하면 사회 단 국가 단위에
적용하면 국가단위 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우선 우리
가족에게 이것을 시험해 보고자
한다라는 글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거
이러한 글로만 해서 어 가족 단이
있었나 보다 했는데 어 얼마 전에 그
안동 지역에 20 지역의 뭐 서적들을
이렇게 모으는 그런 과정에서 가족단
명첩이 이렇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어 가족단 이름들이
나오면서 이상용 선생이
구성하셨습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상용 선생은
혼자만의 그런 어떤 독 독립운동이
아니라 이렇게 조직들을 끊임없이
만들고 실험해 보면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 그랬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권을 결국에는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가 우리 민족 5천년
역사 이래에 처음으로 어 일본에게이
주권을 빼앗기는 그런 치욕에 나를
맞이하게 되었는데요 이러면서 이때
이상용 선생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서울의
신민회의 사람들이 안동까지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몇 몇몇 인사들과
신민의 인사들과 접촉을 한 다음에
이상윤 선생은 신민회의 집단 2주
사업에 동참하기로 결정을 하시고
가산을 처분하다 그리고는 노비 문서를
불태워서 노비를 해방시키고이 도동
서수 아주 애를 쓰셨던 그 교육의
애를 쓰셨던 도동 서수의 학생들에게는
뭐라고 얘기했냐 민족 정신을 보존하고
그리고 학업에 열중할 것을 당부한
다음에 만두 땅으로 가시게 됩니다
그러면서 1911년 1월 1일 가족
친지들을 모아 가지고 그 동네
사람들하고 큰 잔치를 버립니다 큰
잔치를 버리고 나서 1월 5일에
새벽에
일어나셔야 재를 예를 올린 다음에
신주와 위패를 땅에다가 묻고는 이제
떠나시게 됩니다 이제 공자 맹자는
시렁에 얹어 놓고 그리고 우리이
나라를 잃었는데 더 이상 조상에게
어떻게 제사를 지내느냐 나라를 다시
찾은 다음에 그때서야 다시 어
조상들께 인사를 올리겠다고 하고는 어
떠나시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암록
강에서 강을 건너시면 지으신 시가
있습니다 삭풍은 칼날보다 날카로워
차갑게 내 살을 내는구나 살 애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창자를 애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그러니까 몸 힘든
거는 참겠지만이 애 끌는이이 울분은
어떻게 하지 못하겠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옥토 삼천리 인구 2천만
즐거운 부모의 나라 지금은 누가
차지했는가 내 전토 다 빼앗고 또 내
처자 해치려 하네 차라리이 머리는
잘릴 지연정 무릎 종 될 수는 없다이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시게 되는 거죠
머리는 잘릴지 영전 내가 목숨을
내놓더라도 무릎을 꿇어서 굴복할 수는
없다 그래서 끝까지 한 거하고
독립운동을 하겠다라는 말씀 말을이
시에서 하시게 됩니다 그러면서 집을
나선지 한 달 못 되어 벌써 압록강을
건너니 누굴 위해 머뭇거리게 호연이
나는 가리라라고 이야기하시면서
뒤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는 날이
바로 1월 27일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어 이상용 선생이 1월 5일에 안동을
떠나서 떠나서 상주 그다음에 추풍령
걸어가십니다 도불 가신 다음에
추풍령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과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 도착한 것이 바로 1월
19일이 되겠고요 그리고 이제 요렇게
딱 강을 압록강을 건너시면 어 단동에
도착하신 다음에 요렇게 횡도 3과
집안을 거쳐서 마지막 종착지인 어
유하현 3원 포에 도착을 하시게
됩니다 그게
바로이이 몇 개월에 걸친 여정을
고난의 여정을 하시게 됩니다 1월
5일이니까 너무 춥잖아요 그래서 이
아들인 이준형의 관련된 그 이준형의
기록에 보면 뭐라고 나와
있냐면 여기까지 가는데 일제의 그런
그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지나간 그 여정이 나옵니다
그래서 거기 보면 이렇게 지금 압록강
그 건널 건너기 전에 일본인들에게
붙잡혀 가지고 왜 만주로 넘어가느냐
독립운동하는 거 아니냐 막 이렇게
얘기할 때 아 우리는 좁쌀을 팔아서
먹고 살려고 한다라는 그런 변명
거짓말을 하면서 건너가야 됐던 그
구차함 그 괴로움들을 이야기해 놓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또
넘어 가셨는데 1월에 넘어가셨다는
영하 40도의 혹한을 맞닥뜨리게
됩니다이 경상도 지역 안동 지역은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따뜻한 지역에
속하지아요 그런데 처음 느껴보는 영하
40도의 추위에서 동상이 걸려 가지고
손발을 어 잘리는 분들도 있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었다 이런 내용도 나오고요 어렵게
어렵게이 참아서 출발을 했는데 며칠
안돼서 다시 돌아오는 그런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그 돌아온 건 뭐냐면이
중국인들이 갑자기이 조선 사람들이
넘어오면서 그 그 사람들이 조선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우리나라를
침략하러 오는 사람들인지 확인할 수도
없었고 중국 사람들로서는 중국 사회를
어 교란시킨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들에 대해서 나쁜 그 소문들을
퍼뜨렸고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들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 이런
거짓말을함으로써 출발을 했다가 중국
사람들의 공격에 어 위협을 느껴서
다시 돌아온 돌아와서 몇식 며칠이나
어 대기했다가 다시 출발하는 그런
고통스러움을 표현해 놓은 글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일본인들에게
수색을 당하는 수모를 당했던 기록들도
남아 있고요 김대락 선생은 그런 걸
통해서 분통 아라는 것을 이렇게
쓰셨습니다 우습고도 분통하다 나라
없는 백성이 되었단 말인가 부모를
떠나고 나라를 떠났단 말인가 저들의
노예가 된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어 아주 분통을
터트리셨는데 그 당시에 패딩이
있었겠어요 아니면 그 부츠가
있었겠어요 그런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보면 그 하루 아침에 평창동 부자라고
해야 될까요 뭐 청남동 부자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부잣집의 어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이렇게 추운 날 그
고통스러운 망명의 길에 올랐던 걸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 그
이후로는이 만주에 가셔 가지고 그
만주에 정착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될까라고 했을 때 만주 고토를이야
하십니다 이상용 선생은 아까도 앞서
얘기했지만 그런 이제 우리가 노예적인
삶 중국이 중심이었던 공자와 맹자를
어 평생에 공부하셨는데 아 그것이
아니구나 이제는 그런 공자와 맹자와
화이론적 중심에서 이제 벗어나야
된다라고 얘기하시면서 고대사 연구에
또 몰두 하시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주해 가지고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은이 만주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하시면서 그 지역에서
있었던 종족이라는 그 일대의 강역에
대해서 공부를 하시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제 만주 원류고든지 이러한 책을
보시면서 아이 만주 지역은 기자
조선을 이제 우리가 중심으로 삼아선
안 된다 기자 중심으로 해서 사안과이
신라로 이어지는 그 한반도 내에
우리가 속해 있어 있으면서 명나라의
그 눈치를 봤던 그 시대를 이제
벗어나야 된다 그러면서 우리의 어
만주 지역이 고조선 단군 조선의 그
중심지였던 고조선과 그로 이어지는
부여와 고구려의 그 역사를 중심으로
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시게 됩니다
그러면서이 만주 지역이 결코 이역이
아니고 남의 땅이 아니고 우리 옛날
우리 민족의 시원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이 땅에서 우리가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어 깨닫고
여기서 독립운동을 해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시면서 단군조선과 백두산을
강조하시기 됩니다 그래서이 부분은
저희가 볼 때 대종교의 김교헌
이라든지 윤세복 이라든지 이런 분들도
서한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어
거기에서도 백두산을 아주 민족의
성지로 이야기하셨던 부분이기 때문에
좀 일맥 상통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상용 선생의 쓰신
글에 보면 아 단군 일의 5천년
역사는 영원하며 단절이 없다는 것을
의심치 않노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는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져 왔는데 지금 잠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단절이 생겼는데
우리는 이것을 끝까지 지켜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나라를 잃었을 때도
이런 정신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
나라를 찾아 가지고 전 세계에 몇대
강국에 지금 들어가고 있는이 상황에서
요새 무슨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까
단군을 신화라고 이야기하고 단군을
이야기하면 사이이 종교라고
이야기하는이
21세기가 도대체 우리이 선조들이
독립운동 하셨던 분들이 보면 얼마나
속상해 하실지 그걸 생각하면 참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때
독립운동가들의 그 정신이 어땠고
그분들이 보는 역사가 어땠는지를 우리
오늘이 시점에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를 인식을 하게
되면서 독립운동을 그냥 일시적인 이걸
그냥의 움 막 분기 탱천 해 가지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야 될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독립운동이 이론적으로 정신적으로 어
기반이 주어져야 주어져야 된다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잣집에서 갑자기 땅을 건너가 가지고
이렇게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은 뭐예요 편안함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에 반드시 이게
변절한 수 있는 그게 많습니다 환경이
그랬을 때 이런
그 유학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냐면
이론과 정신이 무장이 되어야 된다
그런데 그런 정신은 무엇이 바탕이
돼야 되느냐 반드시 역사 의식이
바탕이 되어야 된다라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상용 선생은 무슨
책을 썼나 대동 역사라고 하는 책을
쓰셔 가지고이 역사 책을
신흥무관학교에 교재로도 사용을
하시면서 신흥무관학교 무력을 준비를
했지만 그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역사 교육이든 그
역사를 어 어느 역사로 했다 바로
우리의 고대사 단군조선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그런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를 교육했다 그 바탕이 우리가
독립운동을 했고 나중에
신흥무관학교에서 길러진 사람들이 우리
어 독립운동사에서 아주 큰 승리를
이루어냈던 청산리 전투 홍범도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좌진 장군이
그 매일 새벽 일어나 가지고 그 환인
환웅 반군에게 제사를 지내고 품속에
독립운동가들이 들고 다녔던 것이 바로
천부경이 그런 글들을 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는 것이 이러한 일맥
상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어 이렇게
압록강을 건너서 가셨죠 가셔 가지고이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면서
특히 어 처음에 이제 북간도 해서이
북간도 있었고요 그다음에 북간도에
대비돼서 이렇게 서간도
지역을에서 일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안동 지역에서 올라가신
분들은 서간도 지역에서 많은
독립운동을 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뭐 어
중고등학교 때 많이 외우셨어요 이제
서한도 지역 이게 삼원보이 지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시게 되거든요
안동에 있던 분들은 그래서 처음에는
신흥 강습소 했다가 나중에 3일운동
이후에이 국민들의 염원을 어 받아서
이제 무관 학교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달고 어 여기서 교육을 하셨고요
처음에는 경학사를 그래 가지고 밭도
갈고 공부도 하는 그런 경학사 있어요
그러다가 부민단 부여를 어 이었다라는
부민단 이거든요 부민단 그다음에
한족회 이렇게 해서 여기서 서로 군종
서을 만들게 되고요요 북간도 지역은
이제 우리가 윤동주 많이 알려져 있죠
윤동주의 외삼촌인 그 김양연 선생
해서 명동학교 이쪽에 독립운동을
하시게 되는 그런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국경을 가까이해서 여차하면
우리 국토를 다시 회복해야 되기
때문에이 국경을 어 접한 지역에서
활발한 독립운동 특히 무장
독립운동은이 지역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서간도 북간도 연애주 그리고
이제 외교를 하는 외교를 중심으로
해야 된다 하면은 이제 상해 지역 그
상해가 이제 서양에서 많은 외국 그
조계지가 있고 했기 때문에 외교를
중심에 했던 사람은 상해로 갔지만
진짜 고생하고 정말 독립운동했던 그
실천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곳은 다
서간도 북간도 연애 주라는 것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
2019년에 코로나 되기 직전이었고
그때 여름에 저희가이 독립운동사
탐방을 갔습니다 그 그래서 이제 거기
환인현 서간도 지역이죠 여기에 이제
대종교의
계열에 사람들이 가서 만 든 학교가
동창 학교인데요 그 동창학교 자리를
저희가 찾아갔어요 찾아갔더니
가구점이 크게 이렇게 운영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표지석 하나도 없어
가지고 정말 길 건너에서 이제
쳐다보다가 그냥 우리 한번 건물
들어가 보자 해 가지고 아무 정보
없이 그냥 계단으로 이제 올라가
봤어요 근데 의외의 그 표를
만났습니다 뭐냐면 한글이 딱 있는
거예요 너무 반가웠어요 한글로
조선민족 문화 활동 중심이라 그래
가지고 지금으로 보면 이렇게 무슨
문화센터 같은 곳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장구도 배우고 뭐 우리 그 조선족의
그런 춤을 배우고 뭐 이렇게 악기도
다루고 하는 곳이었는데 우리 민족의
어리 잠긴 문화 요람으로 어서
오세요라고 해 가지고 이렇게 한글이
있어서 너무 반가워 가지고 야 이게
어이 사람들은 여기가 동창학교
자리인지 뭐 독립운동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렇게
조선족들이 여기서 이터에서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지 참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수님들고 일행들이
이렇게 찍 었던 그런 사진이고요
그리고는 이제이 횡도 1이 과연
어딘가 처음에 김대락 선생이라는 이런
분들이 가서
도천의룡기 볼 것도 없다 그 시골길을
왜 가냐 아이 우리가 꼭 가야 된다
우리 이래 가지고 막 설득을 해
가지고 갔어요 근데 차가 그냥 완전히
덜렁덜렁 하면서 그 비포장도로를 이제
막 가서 내려 가지고 이제 가봤더니
제 키보다 높은 그 옥수수밭이 그냥
끊임없는 옥수수밭이 있고 거기서 골목
그 옥수수밭 사이에서 쳐다보면서
저쪽이 어 횡도 천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이제 예전에 수몰이 됐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 지역을 이제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버스를 타고
와도 이렇게 힘들고 깊은 산 속인데
그 당시에는 그런 것도 없이 그
추위에이 산첩첩 산중 그 골짜기에
그분들이 오셨을 거 생각하니까 진짜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이런데 숨어 가지고 그 나라를
되찾겠다고 그분들 그리 모여 있었을
거 생각하니까 지금도 진짜 울컥
하는데요 이런 곳에서 그 독립운동을
이렇게 꿈꾸셨던 그분들을
생각하면서이 땅의 역사 그리고 우리가
지금은 남북이 갈라져 있지만 정말
우리의 터전이었던 이곳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이제
하게 되었던 곳입니다 지금 가면 뭐
팻말도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
이제 여기 뿐만이 아니고 그다음에는
이제 우리가 신흥 강습소 있던 곳을
이제 찾아갔어요이 사진은 김동우는
분이 요새 TV 그래도 많이 나오고
이제 유퀴즈에 나오셨던데 독립운동
사적지를 전 세계에 있는 곳을 가서
찍는 그런 아주 훌륭하신 그런 사
작가의 사진인데요 여기가
신흥무관학교의 터였다 그래서 유아원
사포에 있는 터입니다 그래서요요 산
앞에서 이제 결기를 다졌던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요 이제 저희도
여기 찾아갔어요 찾아갔는데 정말 말
하나도 없고 여기 탁 도착해서 우리가
뭐 더 너무 뜨거워졌고 뜨거워져
가지고 여기서 신대하 통군 백만
용사야 뭐 나가 나가 이거 노래
부르다 말 이러면서 벌써 이제 우리
눈물이 그런 거지고 했는데 못 하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2019년인데 가서 무슨 플랜 카드
하나 펼치 아아 그럼 공안한테 신고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뭐 한국 사람들이
막 모여 가지고 뭐 한국말로 뭔가를
한다 이러면 막 신고 들어가고 이래
가지고 말도 못 하고 노래도 못 하고
그냥 사진만 찍고 이제 차에 타서 차
안에서 이제 막 이제 노래를 불렀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지역들을 우리가 답사도 가고 어
하면서 이 이러한 역사들을 잊지 말고
우리가 어 후손들에게도 알리고 그렇게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그런
곳입니다 자 그래서이 지역에 가서
이제 저희가 느낀 건 뭐냐면
독립운동을 누가 뭐 이상용 선생이
누구 했다더라 뭐 안중근 의사 뭐
윤봉길 의사 우리는 인물 하나하나만
알고 있잖아요 여기 가서 느낀게 뭐냐
독립운동은 독립운동 가만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주 한인 사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이 서간도 북간도이
간도 지역은 어느 지역이냐 men
만주족이 그 청나라 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기면서 특히 여기는 아주 신성하
때문에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놨어요 그래서 금지
구역으로 이렇게 해 놨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냐
1860년대이 막 그 안동김씨 뭐
세력들이 막 이렇게 자기들끼리 그냥
정치 싸움하고 막 나라가 피폐해지고
민시 척척이 나쁜 짓하고 이래 갖고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이 백성들의 생 생활이 점점
피폐해지고 이러다가 1860년대에 더
이상 여기서 못 살겠다고 해서
압록강을 조금씩 넘어가기 시작한
겁니다 그 갔더니 중국 사람이 없어
왜 여기 봉금 지역이야 그래가지고 어
땅 주인도 없고 하니까 잘됐다 그래서
이제 그 씨만 착 뿌리고 나와 이제
다 왔다가 좀 몇 개월 있다 가보면
막 자라 있고 이렇게 된 거예요
그리고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뭡니까
개척을 너무 잘해 그렇죠 그래서
스탈린이 우리 그 연해주에 있던
사람들을 강제로 그냥 무슨 그 스탄
어 중앙아시아에 그냥 다 뿌려 놨잖아
많은 사람들 죽었지만 그 척박한 땅을
기적같이 일구어낸 사람들이 우리 우리
조상들 있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어디에다 갖다 놔도 다 해 우리
쿠웨이트가 가지고 전 세계에서
쿠웨이트 가서 그 뜨거운 열기
아래에서 돈 벌어낸 사람 바로 우리
민족 아니겠습니까 이러다 보니까이
사람들이가 가지고 거기를 읽은 거예요
그래 가지고 여기에서 한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910년대에는 30만 명이나 이렇게
우리의 땅처럼 만들어진 거예요 그이
지역에 보면 그 서한도 지역에 혼강이
흐르는데요 우리는 항상 논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수전 논이었다아요 근데이
여기가 얼마나 추우면 물의 온도가
너무 차 가지고 처음에 이 수전이
계속 실패했다는 기록이 나와요 그
정도로 방한 딱이었는데 뭐다 구원했다
그래서 지역의 경제력이 증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쪽에 있던
중국 사람들에게 이런 수전동 갈아
주는 그런 지경이 이르렀다는 거죠
그런 어 그렇게 우리 강인한 민족성이
있는데요
1911년에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주
했잖아요 그 해에 뭐가 있었냐
세계적인 기근이 또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풍토병이 있었고요 또
물이 부족을 부족했다는 기록들도 나와
있어요 그리고 40도 영화 40도에
이르는 추위 처음 겪어 보는 그런
추위로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고
어린이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어 그런
기록들이 남아 있어요 거기에다가 현지
중국인들이 배척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이 유림들이 처음에는 막
팍 하다가 안 되겠다 이제 우리가 어
친화 정책으로 해서이 사람들하고 같이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면서 변장
운동이라는 는 걸 하게 돼요 그래서
집안에서는 한복을 입었지만 밖에 나갈
때는 중국 복식을 옷을 입고 나가서
중국 사람들과 만나고 우리는 일본
사람들처럼 중국을 침해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이야기 시켜 주기 위한 친화
정책을 많이 펼쳤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 한인
사회가 있었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우리가 가도 거기에서 어느 정도이
독립운동가들이 그 발을 붙일 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알았기 때문에 나중에
일제는 어떻게 했나요 청산리 봉호동
전투 이후에 아이
독립운동가들과만의 전쟁이 아니구나
하면서이 한인 사회를 초토화시키는
간도 참변을 일으키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
다문화 이야기도 많이 하고 뭐 조선족
사람들이 뭐 와서 경제 활동하는 거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편하하게 있는데
이런 역사를 따져보면 우리가 전혀 그
조선족이나 이런 분들을 화하면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이 뭐 이민청의 설립하는 뭐 이런
이야기를 경제적인 이유에서 하지만 그
바탕에는 우리가 독립운동을 했을 때
거기에서 이렇게 한인 사회를 형성했던
후손일 수도 있고 그리고 독립운동을
했던 후손이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민을 이민청 준비하고
어 외국인 노동자들을 이게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가 해야
될 어 지점이 있다 그리고 특히
고대사 부분에서도 어 이런 현대의
우리 한 대한민국의 그 경제
발전에도이 역사가 접목해야 될
부분들이 아주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