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한반도에 살았던 도사 3명이 남긴 '한국의 충격적인 미래' | 국운 | 예언 | 미스터리

미스터리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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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JChYIEx-gA
한반도에 실제 살았던 세명의 도인 예언가들의
이야기와 미래예언 내용들을 영상으로 담아
정리해보았습니다 :)
대한민국, 한반도의 앞날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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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미스터리 #국운
1945년, 한국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로 평가되는 일제강점기가 무려 35년 만에 드디어 끝나고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북한의 명산 중 하나인 황해도 구월산에는 신도사라는 신묘한 도사가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구월산은 충청도의 계룡산처럼 당대 유명한 도사들이 많이 살았던 산이었습니다.
당시는 이제 막 해방이 된 직후라 사회적 이념이 충돌하면서 나라의 분위기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북쪽에서는 김일성이 세력을 잡으면서 부자들을 단속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흉흉하기도 했죠.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알고 싶어 했고 이북 지역 사람들 특히 개성에 살며 자신의 바치 50마직이 이상 되는 중산층들이 재산을 빼앗길까 두려워 앞날을 알기 위해 신도사를 많이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 당시 이 정도면 상당한 부자였기에 사회주의의 눈에 띈다면 재산을 몰수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철실한 마음을 갖고 찾아온 개성 부자들에게 신도사는 감명지를 건네주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명지는 한 사람의 사주팔자 전체 내용을 적은 종이를 감명지라고 부릅니다.
감명지에는 초년운, 중년운 등 언제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나열해서 한문으로 써주는데 신도사는 감명지의 끝머리 부분에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문장을 적어 내놓았습니다.
한자로 옴길이, 길도, 남영남, 아래하 짜를 써서 도사는 그를 찾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남쪽으로 이사를 가라고 한 것입니다.
간단하게 짐을 꾸려서 남쪽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집과 전답을 다 팔고 가산을 정리해서 식솔들과 함께 모두 내려가셔야 합니다.
남쪽에 어느 지역으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한강 아래로 가면 한번은 죽었다가 살아날 것이고 낙동강 아래로 가면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면 고향에는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자식대나 손자대까지는 돌아올 수 없고 증손자대가 되면 조상의 위패를 들고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도사의 조언에도 조상 대대로 이어왔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신도사의 말을 듣고도 이사를 가지 않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6.25 전쟁으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한강 근처로 이사를 갔던 사람들은 한강 아래까지 인민군이 점령해 거의 죽을 뻔했고 다시 한번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낙동강 밑으로는 인민군이 점령하지 못했는데 신도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낙동강 이남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모두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도사의 말처럼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져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을 맞이하여 온갖 희망에 부풀었던 그때는 6.25와 같은 참혹한 민족상잔의 비극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구월산 신도사가 써주었고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 누렇게 변색된 감명지는 지금도 그 부자들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도사는 어떻게 이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에게 남쪽으로 가라고 조언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는 증손자 때가 되어야지 조상의 위패를 들고 고향에 돌아올 수 있다고 했는데 현재 오랜 세월이 흘러 증손자가 태어나
조상의 위패를 들고 갈 수 있을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향후 몇십 년 안에 남북 간 왕래가 자유로워질 통일이 된다는 것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6.25 전쟁을 예측하고 사람들에게 남쪽으로 가라고 조언한 신도사.
그의 말처럼 정말 향후 몇십 년 안에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아직도 구월산 신도사의 예언서는 미스터리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회자되는 중입니다.
또한 우리나라 경상남도에도 구월산 신도사와 견줄 만큼 기이하고 예언 능력이 뛰어났던 도인이 살았다는 증언과 그 자료가 남아있어 충격을 줍니다.
그 도인은 바로 경남 창원시 진해구 경화동 조천마을에 살았던 성은 김씨역.
이름이 덕주 또는 덕조라고 불리웠던 도인으로 도인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치렁치렁한 상태로 다녔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는 아직도 머리가 단정하지 않은 사람을 보고 덕주머리 같다고 말하고는 합니다.
그는 경화동 조천마을에 많이 살고 있는 선산 김씨의 30대 선이라고 전해져 내려오지만 족보에는 올라와 있지 않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그가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이유는 초인적인 축지법은 물론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1860년대에 출생하여 194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가 집을 떠나 돌을 닦기 시작한 것은 대략 1895년경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돌을 닦으며 살던 곳은 조천마을의 뒤쪽에 있는 장복산이었는데 그의 집은 장복산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바위들을 붙여서 지은 바위집이었습니다.
그 집은 그가 혼자서 주위에 있는 바위들을 짊어지고 날라서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날 남을 캐는 안학래들이 장똥만한 바위를 등에 쥐고 절벽을 오르는 그를 보았는데 이에 안학래들이 뭐하냐고 묻자
그가 바위를 내려놓았고 그 거대한 바위가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지 않고 절벽에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출입문은 커다란 바위 한개로 되어 있었는데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열 수 없는 무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집을 덕주집이나 덕주바위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도인 김덕주가 떠난 후 그 집이 무너져 덕주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곳으로부터 서남쪽 50미터 지점에 그가 사용하던 덕주샘이라고 하는 우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위를 등에 짊어 다닐 수 있는 것은 기운이 강한 물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평소에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김도인은 이 샘물이 이 지역에서 가장 소중한 약수라고 말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김도인은 가끔 마을로 내려와서 선산 김씨 친척이나 밀양 박씨의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농사일을 돕고 식량을 얻어가고는 했는데
비상한 괴력으로 무거운 돌절구나 곡식이 가득 든 가마니 등 무거운 것을 운반해주고 그 삭스로 가져가는 식량은 밥도 아닌
술지개미였다고 합니다.
그는 주식으로 밥을 먹지 않고 술지개미나 솔잎을 먹으며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장차 이 나라에 큰 난리가 나면 양식으로 삼겠다며 술지개미나 떡지꺼기를 모으기도 했다고 합니다.
마을에 내려와 볼일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갈 때 그가 비가 올 것이니 설거지를 하라고 말한 후 떠나면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그가 떠난 후 잠시 뒤에 덕주 바위가 있는 장복산 꼭대기에 불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부산에 친척집 결혼식에 가기 위해 친척들이 모두 모여 경화역에서 기차를 탔는데 그는 무려 부산까지 굳이 걸어가겠다며 기차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부산역에 도착해보니 김도인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또 여름이 되어 장마가 계속될 때 그는 밀양 박씨 한 집에 들렀다가 마침 그 집에 혼례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김도인은 박씨에게 그동안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제가 가진 것이 없어 날씨 부조를 할 것이니 혼례를 치르는 동안에 날씨는 걱정 마십시오 라고 말하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결혼식이 있는 날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부가 가마를 타고 밀양 박씨의 신랑 집으로 출발할 시각이 가까워지자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면서 해가 난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 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하객들이 모두 돌아가자 하늘에는 다시 구름이 끼면서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김도인의 설화는 경남 진해에서 구전되어 왔습니다.
김덕주 도인은 더불어 미래의 일을 매우 정확하게 예언하는 능력도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문명이어서 글자로 남긴 것은 없으나 그가 했던 예언들은 조천마을에 살았던 김덕주 도인의 지인들을 통해 구전되어 전해졌다고 합니다.
그의 예언들을 지금부터 바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905년 12월 일본 해군 육전대가 진해의 군항을 설치하기 위해 병사들의 다리에 흰 각반을 두른 채 우리나라 땅을 멋대로 측량하러 들어왔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예언처럼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협박해 강제로 울산의 계약을 체결하며 외교권을 침탈하였고 1910년에는 한일 병합을 감행하여 나라의 주권을 강탈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한일거리에 큰 도시가 생길 것이다 라는 예언은 조천리 남서부에 있는 한일거리는 원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1910년 6월부터 일본의 군항과 시가직 건설로 인해 진해의 9개 마을에서 철검인이 생기게 되었는데 한일거리에 이 철검인들을 강제 이주시키기 위한 격자형 도시가 만들어진 것을 예언했다고 분석되고 있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한일거리에는 큰 도시가 생겼고 지금의 경화동이 되었습니다.
이 예언은 풍호동에서 열렸던 장씨가 경화동으로 옮겨올 것을 미리 알린 것입니다.
원래는 풍호동에서 38일로 열리는 풍덕계 시장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일본군의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1914년 풍덕계 장씨가 경화동으로 옮겨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예언 중 웅동에서 뱀들이 꼬리를 물고 몰려올 것이다 라는 예언은 웅동에서 물을 끌어올 송수관이 부살된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1914년 일본 해군에서 군항 설치 공사를 하면서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웅동에서 물을 끌어다 쓴 것입니다.
뱀은 송수관을 뜻하며 뱀들이 꼬리를 물고 몰려온다는 것은 송수관이 웅동에서 진해까지 줄줄이 이어지는 모양을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그의 예언은 선산 김씨 문중에서는 벌통같은 집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미량 박씨의 문중에서는 닭장같은 집이라고 전해옵니다.
여기서 벌통이나 닭장같은 집은 바로 아파트를 뜻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아파트에 사람들이 입주하면서 사람들의 인심이 각박해질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세상이 다 된다는 것을 다르게 해석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뒤집힐 만한 일이 일어나거나 세상이 종말하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김도인은 초인의 힘을 지니고 축지법을 썼으며 예언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생활을 하며 속세와 절연한 삶을 살았습니다.
1930년대 중반 무렵 그는 경화장시에서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일본 헌병에게 불심 검문을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항하다 달아났지만 일본 헌병이 장복상까지 수색하러 오는 것을 보고 그 길로 몸을 피신했는데 그 후로 아무도 그의 행적을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거처를 둘러본 순사들은 그가 산신처럼 생활한 것을 보고 그를 선인이라 불렀고 그가 살던 바위집을 선인굴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김덕주 도인이 피신한 후 마지막으로 김해 장유면에서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김해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설과 계룡산으로 옮겨 돌을 닦으며 여생을 마쳤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그가 남긴
는 예언은 정말 오늘날 각박해진 인심을 예언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미래의 세상이 크게 변할 정도의 대사건을 예언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마지막 한 명의 도인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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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한 마이산의 도인 이감룡 처사의 예언에 대해서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전라북도 진안군에는 신비한 모양의 산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산은 거대한 암석으로 된 두 개의 봉우리가 말의 귀를 닮아 한자인 말마와 귀이를 붙여 마이산이라고 불립니다.
동쪽 봉우리를 수마이봉, 서쪽 봉우리를 암마이봉이라 부르며 마이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산입니다.
마이산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신라시대에는 서다 또는 솟다는 뜻의 서다산으로 고려시대에는 소사오르다는 뜻의 용출산이라 불렸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마이산을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겼는데 이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전설이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설화에 따르면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기 전 국가를 잘 경영하라는 게시와 함께 신선에게 금으로 된 자를 받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고려 말 이성계가 전라도 운봉 황산전투에서 외구를 물리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 산을 보고 꿈에서 금척을 봤던 곳과 너무나 똑같아 용출산이라 불리던 것을 금척산이라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마이산이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 때부터입니다.
신증 동궁 여지승남을 살펴보면 태종이 남행하여 이 산 아래를 지나다가 그 모양이 말의 귀와 닮았다고 해서 마이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마이산은 금강산처럼 계절에 따라서도 부르는 이름이 달라집니다.
봄에는 두봉울이가 바다에 떠있는 돛대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 푸르름이 만개하면 용의 뿔처럼 보인다고 하여 용각봉.
가을에는 단풍이 든 모습이 말의 귀 같다고 하여 마이봉.
겨울에는 눈 덮인 풍경 속 돌산만 눈이 쌓이지 않아 마치 머글머금은 부처럼 보인다고 하여 문필봉이라 부릅니다.
이런 절경을 자랑하는 마이산에는 몇 가지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강한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80여개의 돌탑을 거느린 탑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탑사의 재단에서 겨울에 보이는 역고드름입니다.
겨울이 되면 주변에서 고드름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일반적인 고드름은 처마 밑으로 길게 늘어진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이산 탑사에서는 겨울에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중력을 거슬러 하늘 위로 솟아나는데 가장 길게 솟아오른 것은 길이가 30cm나 됩니다.
역고드름은 1928년 원불교에서
마이산에서 청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면 물이 거꾸로 올라와서 기묘한 얼음이 된다.
라는 기록이 있을 만큼 오래전부터 신비롭게 여겨졌습니다.
역고드름 현상은 마이산 외에도 몇몇 동굴에서도 나타나지만 이는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쌓여 생기는 현상으로 마이산 역고드름의 생성 원인과는 다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역고드름이 생기려면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야 하고 바람이 불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조건에서 냉기가 그릇 아래부터 전해져 물 표면이 아닌 바닥부터 얼음이 얼어야 하는데 그릇에 담긴 물은 가장자리부터 얼기 시작해서 중앙으로 얼어갑니다.
이때 얼지 않은 중앙 부분에 작은 구멍이 만들어지는데 내부에 얼지 않은 물이 점점 차가워져 부피가 늘어나 구멍으로 밀려 나오면서 역고드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고드름의 생성 원인은 과학적으로 추정이 가능하지만 어떻게 그 고드름이 무려 30cm 이상 거꾸로 솟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요즘도 겨울철이면 기도하기 위해 탑주위에 떠 놓은 정화수가 얼면서 빗살이 하늘을 향하는 역고드름이 맺힙니다.
역고드름의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돌면서 매년 겨울이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이산 탑사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미스터리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마이산 탑사에 있는 돌탑은 매우 특별합니다.
단순히 돌 위에 돌을 올려놓았을 뿐인데도 긴 세월 동안 무너지지 않고 장관을 이루고 있는 이 돌탑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에 세워졌습니다.
탑들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옵니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언덕에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째 뽑히는데 신기하게도 이곳의 돌탑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 뿐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전해집니다.
놀랍게도 이 돌탑은 이갑용이라는 처사가 30여 년 동안 혼자서 쌓아 올린 것이라고 합니다.
접착제를 쓴 것도 아니고 시멘트를 바른 것도 아니며 인위적으로 홈을 파서 끼워 맞춘 것도 아닙니다.
이갑용 처사에 따르면 이 돌탑은 음양의 위치에 따라 축조했다고 합니다.
돌에도 암수가 있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했으며 돌탑의 위치와 모양은 제각기 음양호행의 위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원리를 담았다고 합니다.
한 연구자의 견해에 따르면 이 돌탑은 허튼층 쌓기라는 기법으로 쌓은 것으로 최대한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작은 돌을 여러 개 끼워 견고하게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틈새를 완전히 메우지 않고 어느 정도 공간을 두어서 바람이 통하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신비한 돌탑을 쌓아올린 인물 이갑용은 1860년 3월 25일 전북 임실군 둔남면 분동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16대선이었습니다.
본명은 이경애이며 자가 감룡인데 본명보다 이갑용 처사라고 불렸습니다.
어릴 적부터 효성이 남달랐던 그는 어머니의 임종 직전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무려 세 달이나 어머니를 더 살게 했다고 합니다.
16살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출산 때까지 식음을 점폐하는가 하면 3년에 십여살이 동안 손립으로 연명하며 잠시도 묘옆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십여살이를 마친 후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19살에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수행을 위해 25살 때인 1885년 마이산에 들어와 손립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하던 중 수많은 백성에 대한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하는 석탑을 쌓아가는 신의 게시를 받게 됩니다.
당시는 이목울란이 일어나고 동항농민운동의 지도자 녹두 장군 전봉준이 처형되며 시대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갑룡 처사는 이를 한탄하며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30년을 한결같이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기도를 하며 탑을 쌓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탑이 108개인데 현재는 관광객들로 인해 일부가 무너져 80여개가 남아있습니다.
작은 돌들은 보통 주변 12km 이내에서 주워와 쌓아올렸고 큰 바위는 전국 명산을 돌며 망태기에 담아서 메고 왔다고 합니다.
그는 명산으로부터 마이산까지 먼 길을 축지법을 사용하여 단숨에 왔다고 전해집니다.
어느덧 탑이 하나둘 완성되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하고 시주를 했고 그렇게 시주를 받은 돈은 상당한 액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갑룡 처사는 이 돈을 모두 그저 소를 사는데 썼다고 합니다.
그 당시 소 한 마리는 매우 큰 값에 거래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이갑룡 처사의 가족들은 가난을 면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구매한 소들이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갑룡 처사가 돌탑을 쌓으며 생활하던 마을은 훌륭한 은신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독립군들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마이산을 찾아왔으며 그때마다 이갑룡 처사는 독립군에게 소를 주워보냈다고 합니다.
소는 안전한 곳에서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상해 임시정부나 독립군에게 전해졌던 것이었습니다.
이갑룡 처사의 돌탑이 신비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 돌탑들은 한 명이 쌓았다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합니다.
일자형과 원뿔형의 돌탑들은 크기와 높이도 다양한데 1에서 2미터의 작은 것부터 최대 높이 15미터 둘레 2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돌탑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제대로 딛고 설 수 없는 절벽에도 이런 탑들이 쌓여져 있으며 그중 많은 돌들이 감히 혼자서는 들어 올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무게입니다.
심지어 어떤 돌탑에는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1톤이 넘는 무게의 바위가 놓여 있습니다.
중장비도 트럭도 없던 당시 어떻게 이렇게 무거운 바위를 쌓아 올릴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쌓을 수 없는 크기인 탓에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감룡 처사에 대한 신비로운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이감룡 처사가 공중부양과 축지법을 사용하여 돌탑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먹지 않고 소량의 생식만을 했으며 항상 호랑이를 옆에 데리고 다녔다는 비범한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처럼 이감룡 처사는 마이산 인근 사람들에게 전설적인 인물로 기억되며 생전 숱한 일화들을 남겼습니다.
이감룡 처사는 서른아홉 살의 축지법을 터득했다고 합니다.
축지법의 원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옵니다.
어느 눈 내린 겨울날 마이산을 오르던 한 등산객이 눈 위에 기이하게 찍힌 사람의 발자국을 보았다고 합니다.
왼발이 찍혀있으면 바로 1미터 안팎에 찍혀있어야 할 오른쪽 발자국이 무려 5미터나 떨어진 곳에 찍혀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시절의 끝무렵 그의 나이 80살 때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난 경찰서장이 이감룡 처사를 찾아가 만난 후 차를 타고 전주로 갔는데 놀랍게도 그곳에서 이감룡 처사를 다시 만났다고 합니다.
이감룡 처사는 볼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고 이를 기이하게 여긴 경찰서장이
언제 전주에 오셨습니까? 라고 묻자.
당신이 떠나고 바로 출발해서 왔어?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감룡이 마흔 살 무렵 어떤 사람이 제자가 되고 싶어 마이산을 찾았다가 산끼숙에서 이감룡을 우연히 만났다고 합니다.
그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이감룡은 산 밑에서 할 일이 있으니 먼저 올라가 있으라고 말했고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산을 올라 마이산 탑사에 도착했는데 도착하고 보니 이감룡은 이미 그곳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고 합니다.
안마이봉은 누구나 올라갈 수 있으나 수마이봉은 암벽타기 전문가가 장비를 동원하지 않으면 오를 수 없이 험한데
이감룡 처사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수마이봉을 단지 집심만 신고 아무런 장비도 없이 아침 저녁으로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또한 수마이봉과 안마이봉이 서로 외면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896년 여름 두 마이산의 머리를 명주 끈으로 연결시켜 놓고
그리고 기공법도 연마하여 무거운 돌도 거뜬히 들어올렸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초저녁엔 기도를 하고 밤이 되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돌을 하나씩만 쌓았다고 전해집니다.
한 번은 몇몇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돌을 쌓는 것이 하도 신기해 몰래 구경하려고 구석에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자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높은 돌탑 위에 커다란 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탑 주위에는 나무, 구조물 등 다른 물건을 사용한 흔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35년 마이산 탑사에서 태어나 이감룡 처사가 세상을 뜰 때까지 함께 살았다는 손자 이왕선 씨의 목격담에 의하면
돌탑을 쌓을 때는 이감룡 처사 혼자만의 힘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외줄탑의 경우 양쪽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두 사람이 바위를 등에 쥐고 동시에 한걸음씩 균형을 맞추며 올라가 쌓았다고 합니다.
쌓아올리기를 마친 뒤에는 두 사람이 동시에 한걸음씩 내려왔다고 합니다.
원뿌령 탑은 둥근 나산형 방향으로 돌을 튀어나오게 쌓아 원형 계단으로 이용해서 오르내렸고 탑이 완성되면 돌망치로 튀어나온 돌을 쳐서 들어가게 하면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사가 급해지면 우물 정자형의 디딤대를 둘러 엮은 뒤 그것을 밟고 작업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탑의 높이가 높아지면 기존의 디딤대 위에 겹쳐서 좀 더 작은 크기에 우물 정자형 디딤대를 엮어놓고 돌을 쌓았습니다.
그렇게 돌탑을 다 쌓으면 맨 위에서부터 차례로 철거해 내려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작업 방식에 대한 비밀은 풀렸지만 그 높은 장소에서 이감룡 처사가 수많은 돌을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또 장비가 없던 그 시절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옮겼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범상치 않은 인물인 이감룡은 생전에 여러 예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감룡 처사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전쟁이 터질 것인데 이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한반도에는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다는 그의 예언처럼 6.25 전쟁은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휴전 상태로 멈춰 있습니다.
또한 우리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예언도 있었습니다.
조선이 지금은 운이 다하여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지만 앞으로는 우리 민족과 나라의 운이 일본을 뛰어넘고 동양에서 제1가는 북극이 될 것이다.
이에 일본이 땅의 구멍을 뚫어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 민족은 그것을 무산시킬 것이다.
그의 예언처럼 우리나라는 온갖 고난들을 극복하고 세계에 자랑할 만한 엄청난 국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노벨문학상을 아시아에서 12년 만에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갑룡 처사는 세상의 변화에 대한 예언도 남겼습니다.
머지않아 몇 만리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안방에서 볼 수 있는 때가 올 것인데 그것에는 거짓과 진실이 함께 들어있으니 항상 의심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는 물건을 한 번만 쓰고 버리는 세상이 올 것이며 자기가 버렸던 물건을 자기가 뒤집어 쓰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서너 가지 말을 해야만 대접받게 된다.
북이다 남이라 해서 아들 딸 많이 둔 것이 지금은 자랑일지 몰라도 앞으로는 수치가 될 것이다.
이갑룡 처사는 95세에 한 번 사망하였다가 하루 반나절 만에 죽음의 시기를 잘못 정했다며 스스로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2년을 더 살다가 97세에 단식에 들어갔는데 아들은 말렸지만 이갑룡 처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의 모든 때를 씻고 몸속의 더러운 오물을 완전히 제거해서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이 세상과 하직하고 싶고 내 몸이 정화되어야 이 세상에서 열심히 도를 닦은 내가 부끄럼 없이 조상을 찾아갈 수 있느니라.
그는 봉두봉위에 자리를 정한 후 98세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이갑룡 처사가 남긴 예언 중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충격적인 예언도 존재합니다.
앞으로 엄청난 재앙이 온다. 사람들이 삼대 쓰러지듯 한다. 심리길에 사람 하나 볼 듯 말 듯하게 그렇게 인정이 귀해진다.
그때는 천심을 가진 사람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손에 시암만 남아 여순 세계가 올 것이다. 영화 세계, 미륵 세상이 온다.
도인 이갑룡 처사가 남긴 미스터리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30년에 걸쳐 돌탑을 완성한 후 주로 수행과 기도로 삶을 보냈는데 60세를 넘겼을 무렵 틈틈이 개시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쓴 책이 무려 30권에 이르는데 이 책을 신서라고 부릅니다.
안타깝게도 30권 중 27권이 일제강점기 때 사라졌으며 현재는 단 2권만이 마이산 탑사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신서는 이갑룡 처사가 신의 개시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이 책 속에 담긴 문자를 전혀 해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서에는 마치 부적처럼 생긴 정체불명의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데 한글도 한자도 아닌 제3의 문자가 적혀 있습니다.
이갑룡은 죽기 전 신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갑룡 처사의 손자 이왕선 씨에 따르면 이갑룡 처사는 생전에 이 신서의 해독에 대한 실마리를 남겨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신서가 이갑룡의 사대선에 의해 해독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갑룡의 사대선은 현재 어린 소년이라고 합니다.
마이산에서 30여 년에 걸쳐 미스터리한 돌탑을 세운 이갑룡 처사.
대재앙이 일어난 후 평화가 찾아온다는 그의 예언은 과연 일어날까요?
그가 남긴 세상을 구한다는 신서 중 잃어버린 28권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리고 그 신서의 비밀이 풀릴 때는 언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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