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에 대처하는 신앙의 법칙ㅣ김영봉 목사ㅣ잘잘법 2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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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복불복 #김영봉목사
평생 신실한 신앙인으로 사셨던 저의 부친께서
우리 가정사에 어떤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을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 자주 하신 말씀입니다.
이게 너희들 잘해서 된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할머니, 증조할머니께서 그 어려운 시절에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고생하신, 희생하신
이 생각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성경을 읽어보면 성서적인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것을 하나의 원리 혹은 법칙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우리가 불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불행의 원인을 알고 싶고
행운을 얻는 비결을 알고 싶은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사기꾼들은 이런 불안감을 파고듭니다.
그들은 불행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행운을 잡는 비결을 비법을 전해줄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불행하게도 목회자들 중에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런 선전엔 너무도 쉽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성서 저자는 나홈이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이 진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인생사는 축복이 두렵다.
40세 즈음에 회심을 하시고 평생 신실한 신앙인으로 사셨던 저의 부친께서
우리 가정사에 어떤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을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 자주 하신 말씀입니다.
이 축복이 두렵다.
이 말씀 속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생각이 담겨있다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생여정의 복과 화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생각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복을 누리고 있다면
화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지금 누리고 있는 복이 분해 넘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누리지 못하는 복을 지금 내가 누리고 있다면
그 사람보다 내가 나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복이 두렵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씀이 있습니다.
이게 너희들 잘해서 된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할머니, 증조할머니께서 그 어려운 시절에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고생하신 희생하신 그 열매를 우리가 따는 거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생각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성경을 읽어보면 성서적인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출애굽기 20장 5절부터 6절에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3, 4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게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라고 하셨죠.
자신에게 어떤 좋은 일이 생길 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신 분들의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매우 좋은 미덕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의 원리 혹은 법칙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지금까지 수년째 자녀의 일로 고통받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도 목사의 아들이고요.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목사이셨습니다.
그의 가정은 오랜 시간 신앙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정도로 보면
그 친구보다 제가 더 나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에도 그동안에 그는 여러 가지의 어려움을 겪어왔고
얼마 전에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겨우 죽음의 문턱에서 꺼냈는데 만 1년 만에 하나님 품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 친구 가정이 겪는 고통을 생각하면
제가 누리는 행복이 참으로 미안합니다.
조상의 신앙으로 보나 우리 자신으로 보나
그 친구보다 내가 더 많은 복을 누릴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때로 제가 누리는 복이 두렵습니다.
만일 조상들의 신실한 헌신과 희생이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자손들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원리오 법칙이라면
이런 사례는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미라는 여인이 나오지요.
그는 사사시대에 살았던 사람인데요.
남편 엘리멜렉과 함께 베들레헴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한동안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고
나오미와 엘리멜렉은 모합당으로 이주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모합은 이스라엘에게는 원수 같은 나라입니다.
그러니 모합당으로 이주하기를 결심했다는 말은
그만큼 상황이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모합당에 이주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편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납니다.
이국당에서 타양당에서 나오미는
두 아들을 홀로 키워야 하는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됩니다.
어찌어찌해서 두 아들을 잘 길렀고
그리고 그 땅에서 결혼까지 시킵니다.
그런데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 고대시대에 아이는 가장 중요한 가정의
가장 중요한 축복으로 여겨졌죠.
그런데 한 아들만이 아니라 두 아들 모두에게
아이가 생기질 않습니다.
게다가 얼마 있다가 큰 아들이 죽고
또 둘째 아들도 죽습니다.
나오미는 이국당에서 모합 며느리 두 사람과 함께
홀로 남게 됩니다.
화는 홀로 다니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죠.
여러 가지의 불행이 한꺼번에 닥쳐오는 일을 두고
만들어진 속담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의 한 자매님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남편께서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리고는 고등학생 딸을 홀로 길러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6개월 만에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왜 이 자매입니까? 라는 탄식이 저에게서
저절로 나왔습니다.
세상은 이렇습니다.
불행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의 삶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때로 그 일은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이 나우미에게 닥친 불행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칩니다.
흉년애, 이민애, 남편의 죽음애, 아들들의 불임애,
그리고 두 아들의 죽음까지
해도 해도 너무하다 할 정도로
운명의 화살은 나우미를 계속해서 어렵게 합니다.
아마 나우미의 영혼은 이 계속된 충격으로 인해서
그의 영혼이 텅 비어버렸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우미의 불행을 모압당으로
이주한 데서 찾기도 합니다.
엘리멜릭이 그릇된 선택을 함으로써
이 많은 불행이 나우미에게 떨어졌다는 것이지요.
이런 해석에 근거하여서
어려움이 닥쳐도 선자리를 떠나지 말라
하는 그런 식으로 설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해석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하나님을 심하게 오해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떠났다고 해서 쫓아다니면서
불행을 안겨주는 분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모압에도 안문에도 애돔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피신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가정이 모두 엘리멜릭의 가정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화를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성공하고 번창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엘리멜릭이 믿는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엘리멜릭에게만 이런 화를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두었겠습니까?
엘리멜릭의 가족이 연속적으로 당한 이 불행은
엘리멜릭이 약속의 땅을 떠난 그 이유를 찾아서는 안됩니다.
그가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은
약속의 땅을 떠난 때문도 아니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그의 욕망 때문도 아닙니다.
그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가 있어서
이렇게 되었던 것도 아닙니다.
저자는 독자에게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그런 일도 일어난다고
나우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나우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왜 이런 불행을 당했느냐를 따져 묻기보다는
나우미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
이 고난에도 뜻이 있겠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계속 이어지거나
혹은 고난이 점점 더 깊어져서
견디기 힘든 순간이 오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런 고난을 나에게 주셨는가
따져 묻게 됩니다.
분노의 감정을 하나님 앞에 가지게 되는 거죠.
하나님에게 항의하기도 합니다.
두 아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죽었을 때
아마 나우미가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믿었던 하나님에게 끝내 버림받은 것 같은 그런 느낌
혹은 하나님이 자신을 표적삼아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예레미야 애가에 보면
이 나우미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드린 기도 같은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에 얻어 맞아 고난당하는 자다.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어 빛도 없는 캄캄한 곳에서 헤매게 하시고
온종일 손을 들어서 치고 또 치시는 나.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게서 평안을 빼앗으시니 나는 행복을 잊고 말았다.
나우는 이 탄식뿐이다.
이제 내게서는 찬란함도 사라지고
주님께 두었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
누구든 나우미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이 모든 불행이 팔자소관이라고 하면
그냥 체험하면 체념하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말은
그분이 생각하시고 판단하시고 결정하시고 선택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니 이 불행을 막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생각하면 그분이 야속해지고 버림받은 것 같고
또한 그분에게 분노하게 되는 것이지요.
나우미가 모합에서의 이민생활을 마침내 청산하고
페들레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며느리들이 따라오려고 하지요.
그때 며느리들을 만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서라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주님께서 나를 손으로 치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그동안 고난당한 것이 하나님이 보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고백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작심하고 자신을 괴롭힌 것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하나님이 아시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니
이렇게 느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우미가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고향 사람들이 나우미를 보고 뭐라고 말합니까?
이게 나우미 맞는가? 그렇게 말합니다.
이건 무슨 말입니까?
나우미가 모하베에서 산 시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20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나우미가 얼마나 변했길래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까?
추측한데 이 거듭되는 고난을 당하면서 나우미가 피폐해졌을 거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고향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그때 고향 사람들에게 나우미가 하는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우미라고 부를 까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말 속에 하나님께 대한 나우미의 애증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불행이 쏟아지는 것을 그대로만 보고만 계셨던 하나님이 야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나우미는 연이어 터지는 고난을 겪으면서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냈을 것입니다.
그 어둠의 터널을 지나 그는 희로애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삶을 터득했던 것 같습니다.
베들레엠에 정착한 후 나우미의 삶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행운이 이어집니다.
상실과 이별을 거듭해야 했던 나우미는 며느리 루스를 통해 보아스를 얻고 보아스를 통해 손자를 얻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나우미는 스스로를 텅 비었다고 했는데
그의 텅 빈 삶이 다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나우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을 말하라고 쓴 쓰다고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는데
이제 그의 이름 나우미의 이름 뜻 기쁨이라는 그 의미를 되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게다가 나우미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오늘 나우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의 손자 오베드에게서 이세가 나왔고 이세에게서 다위드 왕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삶 전체가 텅 비어버렸던 나우미에게서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 나왔고
그 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왔습니다.
무엇이 나우미의 인생을 이렇게 바꿨습니까?
모압에 있을 때 하지 않았던 어떤 일을 베들레엠에 와서 행했습니까?
모압에서 행했던 어떤 죄를 베들레엠에 와서 끊었습니까?
베들레엠에서 모압으로 간 것이 그의 불행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베들레엠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 복을 얻었다고 답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나우미가 모압 땅에서 불행을 당한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고요.
베들레엠에 와서도 그의 대답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은 알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사는 자주 복불복처럼 보입니다.
복과 불복, 행과 불행, 이것이 어떤 규칙과 원리에 따라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룻기의 저자는 나우미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서
인생사가 복불복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복을 피하고 복만을 거머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신이고 무속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복불복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의를 믿고 끝까지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사에 일어나는 일들은 수천수백 가지의 요인들이 합하여 일어나는 일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도모하여 성공하거나 실패했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 초상에게서 전해진 영적유산, 개인의 노력, 주변의 도움,
시기적인 조건, 사회적인 조건 등등 수많은 요인들이 합해서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따라서 어떤 결과를 놓고 무엇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겼는지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고차방정식을 푸는 일과 같습니다.
그 고차방정식은 오직 하나님만 풀 수 있습니다.
어떤 불행을 만났을 때, 어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우리가 불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불행의 원인을 알고 싶고 행운을 얻는 비결을 알고 싶은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지요.
영적인 사기꾼들은 이런 불안감을 파고듭니다.
그들은 불행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행운을 잡는 비결을 비법을 전해줄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불행하게도 목회자들 중에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런 선전에 너무도 쉽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성서 저자는 나오미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이 진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인생사는 자주 복불복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이유를 알려고 분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문제의 한 일부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일을 당하여 과연 그분이 존재하시는가,
그분은 정말 정의로우신가, 그분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묻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어떤 일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정의로우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예수 크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부당한 일을 당하고 가장 억울한 죽음을 죽으셔야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사에서 아무리 억울해 보이고 아무리 부당해 보이는 일을 당한다 해도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이보다 더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신 예수 크리스도를 생각한다면
그 일을 담담히 겪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제연습이라는 책에서 브라더 로렌스가 남긴 고백입니다.
그는 때로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신이 당한 일들로 인해 오히려 기뻐했다고 하지요.
하나님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커대한 계획 속에서 우리 각각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나오미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실 때 하나님은 그에게서 나올 다윗을 보셨고
그에게서 이어져 나올 예수 크리스도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나오미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의 처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하나님에게 야속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나 하나만 떼어놓고 보면 때로 하나님의 처사가 이해되지 않고요 때로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크고 길게 보면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고 그분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룻길을 읽으면서 깨달아야 할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 우리가 겪는 일들로 인해서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이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때로 너무도 어려운 일을 당해서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은 저도 겪어보아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혹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뿌리쳐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상수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정의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상수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대한 든든한 믿음 안에서 때로 억울해 보이고 때로 부당해 보이고 때로 모순되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합하여 그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고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치의 고난을 견딜 때
그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만들어내는 그 일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