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보기 전 완벽 정리!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작전, 그 모든 것

별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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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 비디오 조회수·2024. 12. 25.
그는 제국 헌법 재정, 각종 근대제 도입, 초대 내각 총리 대신을 역임하는 등
일본인에게는 근대 일본의 설계자라고 존경받지만
한국인에게는 한반도 주권 침탈 제1의 주동자로 평가받습니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이 되고 싶던 일본은
아시아 팽창의 전초기지인 한반도를 차지하고자 했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일으켜 본격적 한반도 침탈을 개시했는데
이것의 앞장선의가 바로 이토였죠.
그는 을사 늑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내정간섭기구인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인이 초대 통감에 앉았는데
그는 겉으로는 법과 질서를 내세우면서
뒤로는 교묘의 법과 어긋나는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직접 나서서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는 동시에
정리 7조약 등으로 대한제국의 사법 행정권을 불법 탈취했고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켰으며 이를 은폐하려고
신문 구독을 금지하고 한국 교과서를 소각했습니다.
한민족 개념까지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그에 맞서서
대대적으로 항일 의병투쟁이 벌어졌는데
그는 단 14개월 동안 일본군이 만 2천명의 한국인을
잔인하게 학살하도록 조작 및 방조했죠.
때문에 당시 한국인은 이토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했고
처단 여론이 고조되었는데
이를 직접 실행해 옮긴 이가 나타나게 되니
바로 안중근 의사였죠.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고
조부와 부친 모두 조선의 관리직을 지낸
부유한 양반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해서
몸소 나서서 갈등을 조율하는 경우가 많았고
무술을 좋아해서 사격을 특히 잘했습니다.
날아가는 새 정도는 손쉬운 표적이었죠.
한국사, 세계사, 서양사 서적을 섭렵하며
학문에도 조예가 깊던 그는
20대 중반 석탄 상점을 운영하다가
1905년 을사 늑약 소식을 듣고
즉각 항일 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재산을 털어
학교를 설립하는 등 인재 양성 운동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을 갚는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는 등
비폭력 운동을 먼저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1907년
대한제국군을 강제 해산하기에 이르고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죠.
결국 안중근은 무장투쟁을 결심했고
러시아 연해주로 떠납니다.
러시아령인 그곳은 일제의 영향이 덜 미쳐서
한인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통하고 있었죠.
그는 연해주 한인마을을 돌면서
이것이 대한의군인데
대한의군은 최재형 등
당대 의로운 한국 부자들의 지원을 받아서 성장했습니다.
참고로 최재형은 러시아 군수사업으로 거부가 된 사람인데
독립군을 아낌없이 지원해서
당시 민족 지도자로서 매우 존경받았습니다.
연해주 집집마다 그의 초상화가 걸려있었죠.
안중근 역시 직접 1억 3천만원 상당액을 투자했고
이에 힘입어서 안중근 부대 포함 연해주 독립군은
총 1천명 규모 전투장비와 훈련을 완비한
엄연한 군으로 성장합니다.
마침내 1908년 여름
연해주 독립군은 한반도 내로 진입하는
국내 진공작전을 개시하는데
이때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 중장이자
동의군 우영장이 되어 200명을 이끌었죠.
그리고 그와 함께 창의군 600명을 이끌며
진격한 독립운동가도 있었습니다.
바로 우덕순으로
그는 을사 늑약이 체결되자 연해주로 건너왔는데
독립군은 초반 연전연승합니다.
7일 홍이동에서 일본군 4명 사살
10일 신하산에서 일본군 1명 사살
5명 행방불명에 전과를 올렸죠.
그런데 신하산 전투에서
안중근의 인생을 관통하는 사건이 생깁니다.
이때 일본군 수명이 체포되는데
독립군은 이들을 즉결 처단하고자 했죠.
당시 일제는 생포한 독립군을
잔인하게 죽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없으니
국제법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
지금은 우리가 약하고 저들이 강하다.
따라서 법을 준수하는 의로운 거사로서
이토의 포악한 전략을 세계에 알리고
열강의 동정을 얻어야만 국권회복이 가능하다.
라며 법적, 도덕적 우의 확보를 강조했습니다.
결국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포로를 석방했는데
이 때문에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되죠.
하지만 이는 훗날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행동이 됩니다.
한편 독립군은 회령까지 진출
곧 다른 부대와 연합해
일제로부터 관북지방을 탈환하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걸
7월 21일 독립군이 영산에 이르자
갑작스럽게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맙니다.
사실 일본군은 국가 차원의 자금력으로
독립군의 수많은 밀정을 심어두었습니다.
따라서 진경로를 간파하고 있다가
불시에 기습한 것이죠.
이때 독립군은 400여 명으로 적지 않았지만
훨씬 많은 일본군에겐 역부족인데다
폭우로 시야 확보까지 어려웠습니다.
결국 독립군은 참패, 뿔뿔이 흩어져 퇴각했고
우덕순까지 일본군에 잡혀 투옥되죠.
안중근은 한 달 반 동안 일본군에 쫓기며
겨우 탈출에 성공했는데
어찌나 고생했던지 친구들도
그의 몰골을 못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이 패배는 타격이 컸죠.
안중근은 다시 연해주로 가서 독립군을 규합했지만
회의적인 분위기가 퍼져
잘 모이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일제는 탄압을 강화해서
독립군 가담자가 나오면
그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리고 있었죠.
추진력이 꺾인 위태로운 상황.
하지만 안중근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꺾이면 한민족은 잠깐 저항했다가
무기력하게 체념한 민족으로 기억되고
일본은 한반도를 조여오기가 더더욱 용이해집니다.
결국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은 결단을 하죠.
바로 단지 동맹이었습니다.
연해주 카리라는 지역에서
12인의 동지들과 함께 왼손 약지를 끊고
그 선열로써 태극기에 대한 독립을 써내려갔습니다.
대한국의 독립 회복과 동양의 평화 유지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국가에 바친다는 증표였죠.
이로써 독립군의 정신은 무너지지 않았으며
도덕적 정당성은 독립군에게 있음을 천명했죠.
이렇게 명분을 강화하고 사기 진작에 성공한 안중근.
하지만 현실적 고민도 생깁니다.
나라가 풍전 등화인 1909년 현재
도대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가였죠.
그러던 안중근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침략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가
연해주와 가까운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러일 양측은 러일 전쟁 이후
만주 세력권을 정확히 확정할 필요성이 생겼고
이를 위해 이토가 직접 러시아령인 하얼빈에 방문하는 것이었죠.
하늘이 주신 기회였습니다.
안중근은 다른 열혈 한인 청년들을 자제시키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짊어져
이토를 처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침 우덕순도 탈옥의 성공
안중근은 그를 찾아가 거사를 논의했고
결국 안중근, 우덕순
그리고 고종폐위 반대운동을 전개한 조도선 등이 최종 참여해
이토를 처단하기로 결의했습니다.
하필 이토를 겨눈 이유는
그는 앞서 말했듯 고종폐위, 각종 불평등 조약, 학살, 군대해산 등으로
한국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처단 여론이 고조되고 있었고
세계사에 빠삭한 안중근은
여기에다 침략 행위로 동양의 평화를 깨트렸다라는 이유를 더해
그 책임이 있는 이토를 저격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죠.
이는 안중근 체포 후
그가 제시한 이토의 15가지 죄목에서 상세히 나타나게 되죠.
거사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안중근은 이토의 행선지인 하얼빈역
나머지 2명은 이토가 거쳐가는 반환점인 채가구역에서 대기하며
가능한 자가 먼저 이토를 처단하기로 했죠.
하지만 일본군은 밀정을 통해 이 낌새를 눈치챘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측에 삼엄한 경비를 요청한 상태였죠.
그래서 이토 도착 이틀 전인 10월 24일
안중근 일행이 먼저 채가구에 도착하자
그들은 러시아 헌병의 추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일행 중 조도선이 유창한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고
가족을 만나러 왔다고 둘러대어 모면할 수 있었죠.
그리고 마침내 이토의 열차가 출발했다는 첩보가 도착했습니다.
안중근은 일행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남기고
홀로 하얼빈으로 향했는데
목격자에 따르면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태도는 비장했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대망의 26일 아침 6시경
이토의 열차는 먼저 채가구역에 진입했는데
우덕순과 조도선은 권총을 준비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기차의 출입구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헌병들은 선수를 쳐서
한국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출입구를 잠겼던 것이었죠.
1차 관문은 실패, 남은 건 하얼빈 뿐이었습니다.
한편 하얼빈역, 이른 아침부터 안중근은 이토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전 9시, 막 이토를 태운 열차가 역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안중근은 역내로 진입에 성공했고
얼마 뒤 이토가 열차에서 내렸죠.
러시아 의장대가 이토를 맞이하자
안중근은 의장대 뒤편으로 숨어서 기회를 노렸는데
마침내 9시 30분경
이토가 안중근과 열걸음 거리까지 다가왔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데 문제가 있었죠.
안중근은 신문 사파로만 이토의 얼굴을 접했습니다.
정확한 인상착의까지는 알지 못했죠.
하지만 러시아 대신과 엉켜 인사하는 폼을 보고
그가 이토임을 직감했고
러시아인을 쏘지 않도록 이토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죠.
마침내 이토 혼자 남은 그 짧은 틈에
안중근은 곧장 뛰쳐나가서
브라우닝 6연발 권총을 발사합니다.
첫탄과 제2탄이 이토의 흉부,
제3탄이 복부를 관통했고
이토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죠.
장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장교들이 황급히 안중근의 목과 팔을 붙들었습니다.
하지만 안중근은 초인적인 기세로
나머지 탄을 이토 주변인물에게 발사했죠.
자신이 처단한 게 이토가 아닐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른 일본 고위급 3명이 중경상을 입게 됩니다.
거사가 완료되자 안중근은 코레아 우라를 부르고
태연하게 체포되죠.
피격당한 이토는 급히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20분 만에 절명했고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한반도 침략의 주모자 이토가
그를 단죄하려는 한민족의 대표자에 의해 처단되던 순간이었습니다.
참고로 러시아인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죠.
한편 체포된 안중근은 자신에 대해
또한 이토 1호 부미의 죄목 15개조를 낭독하며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전쟁 행위임을 강조했죠.
아까 말씀드렸듯 이 15가지 죄목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콕 집어 처단한 이유를 알 수 있으며
자신 주장의 법적 설득력을 위해
일전에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을 자극하는 것이 껄끄러웠던 러시아는
법적 절차를 건너뛰고 일본의 안중근을 인도했으며
일본 사법부는 일본의 법률을 적용해
안중근을 살인자로 규정했죠.
그러나 일본에게는 한국인, 그것도 제외의 한국인인 안중근을
을사 늑약이 맺어졌어도 주권까지 넘어간 게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을사 늑약은 일제가 대한제국에 강요한
명백히 불법한 조약이므로
안중근은 그를 강요한 일제에 항존한다는
법적, 도덕적 우위에 서있었죠.
그러나 일본은 안중근의 진술권, 교력권을 박탈했고
판검사, 변호사, 방청객을 일본인으로만 채우며 재판을 강행했죠.
그렇게 어떻게든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도록 해서
안중근에게는 부당하게 사형이 선고된 것입니다.
한편 일제는 가혹히 안중근을 신문하면서도
3일마다 찾아가 이렇게 회유했죠.
이토를 살해한 것은 그의 정책을 오해해서라고
단 한마디만 하면 무사히 석방시켜주겠다.
하지만 안중근은 단호히 거부하고
오히려 옥중에서 동양평화와
대한 독립의 정당성을 담은 책을 집필했죠.
죽음보다 평화와 독립이 중요했던 그였습니다.
결국 1910년 3월 26일
비록 안중근 의사는 순국했지만
그의 의거는 독립운동사의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안중근의 재판은 전국적으로 신문 중계되었으며
수많은 한국인들이 소식을 접하고
그에게 지지와 동정을 보냈죠.
그렇게 하얼빈 의거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항전의지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1945년까지 지속되는
항일독립투쟁의 중요한 동력을 제공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얼빈 의거의 전모를 살펴보았는데
일각에서는 의거로 인해
오히려 한반도 침탈이 가속화되었다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토는 한반도 침략에 있어 비교적 온건파였는데
그를 살해했으니 더 빠르게 합병되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건 표면적인 해석일 공산이 큽니다.
당시 한국인들의 증언을 보면
오히려 이토가 빠르게 한반도를 침탈한다고 느꼈고
애초에 이토는 합법처럼 보이는 교묘한 위법행위로서
한반도를 장악하려 한 인물입니다.
일례로 1만 2천명의 의병이 학살된 뒤에도
나는 주의를 시켰는데 학살은 내가 없을 때 일어났다
라며 책임을 회피했으며
의병 탄압에 대해서도 법적으로
대한제국 측이 일본에게 치안을 요청하는
모양새로 교묘히 세팅했죠.
애초에 이토는 일본 중앙정계에서 밀려나니
어떻게든 공을 세우기 위해 한반도로 간 측면이 컸습니다.
생존했다면 공적을 위해서라도
더 교묘히 한반도의 독립을 막아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안중근은 전생에를 바쳐
법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신의 의거가 국제법상 정당한 한 거였음을
입증하려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10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대한자주독립정신의 법적 정당성은
대한민국에 있게 되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