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며듣는소설 미국가서 성공했다던 리사 언니의 속사정 '리사의 방문' | #책읽어주는남자 #책과함께하는하루단잠

책과 함께하는 하루 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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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며듣는이야기 #잠자리소설
하루의 끝, 조용한 밤.
당신을 깊은 이야기 속으로 이끄는 오디오북 채널, 책과 함께하는 하루 '단잠'입니다.
🛏️ 잠들기 전,
🚶♀️ 혼자만의 감성 산책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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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0:11 단잠의 아주 주관적인 감상평
00:55:09 클로징 음악 "지나온 시간을 뒤돌아 보면(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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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요약
AI 생성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리사와 커리어를 중시하며 아이를 거부하던 미주의 가치관 충돌, 그리고 예상치 못한 임신이라는 반전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와 생명의 가치, 여성의 커리어와 책임감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룬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께서도 흥미있게 들으실 만한 작품을 가져와 봤습니다.
이금미 작가의 단편 리사의 방문입니다. 이 소설엔 두 여성이 나오는데요. 아기를 절실하게 갖기 원하는 여성과
확신 없는 결혼, 특히 아기 때문에 억지로 결혼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여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반전도 있는데요.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여러분은 어떤 부분에서 공감을 하실지 자못 궁금한 소설입니다.
재미있게 감상해 주시길 부탁드리면서 작품 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
참, 좋아요와 구독은 채널이 발전하는 데 큰 힘이 되니까요. 꼭 눌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시간 나시면 댓글도 부탁드릴게요.
리사의 방문. 이금미.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샌프란시스코발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짐 찾고 입국 수속을 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테니 그 사이에 커피나 한 잔 하자는 진우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왠지 정성을 다해야만 리사 언니의 방문 목적이 이루어질 것 같은 조바심 때문이었다.
성미급한 사람들이 벌써 입국장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진우는 환영보드를 꺼내 접힌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질러댔다.
리사 언니와 해리슨의 사진을 확대하여 하드보드지에 붙인 것이다. 밝은 마음으로 입국하게 해주자며 진우가 직접 만든 소품이다.
진우는 보드지를 나한테 맡기더니 카메라를 만졌다. 누가 사진기자 아니랄까봐 리사 언니 부부가 나오는 순간부터 연속 촬영하겠다며 장비를 다 챙겨 갖고 왔다.
몇 달 전 세크라멘토 공항에서 만난 리사 언니는 환영보즈 대신 자기 몸집의 두 배쯤 되는 미국 남자를 대동하고 나왔다.
대학 시절 학교와 병원을 오가느라 남자 옆에 설 겨를이 없었던 그녀가 백인 남자의 두툼한 팔에 감겨 있는 광경이 영 낯설었다.
150cm를 겨우 넘는 키와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연약한 몸피는 대학 때 그대로였다.
노랗게 물들인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때문에 뚱뚱한 백인 남자가 끼고 다니는 인형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괜히 부여잡고 눈물바람을 하면 어쩌나 했던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언니는 미국식으로 세련된 허그를 하고는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는 미국으로 간지 꼭 10년 만에 나에게 전화했다. 숨 돌릴만 하니까 한국 친구들이 생겨났고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단다.
동문회 사무실에서 아주 유명한 여성 잡지사의 기자라고 일러주더라며 나의 성공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잡지사 기자에게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만큼 소박한 사회가 아니라고 해도 언니는 한사껏 대견스러워했다.
그렇게 연결되긴 했지만 자주 연락을 못하다가 마침 LA 취재권이 잡혀 일을 끝내자마자
세크라멘토로 날아간 것이다. 리사 언니가 미국 남자와 결혼했다는 얘기에 브래드 피트를 떠올렸던 나는 해리슨을 보는 순간
피실 웃고 말았다. 해리슨의 얼굴은 잘만 하면 cd 한 장으로 가릴 수 있을 만큼 작았지만 차라리 큰 게 나올 뻔했다.
두상이 작아 몸집이 더 커 보였던 것이다. 마치 낯술을 먹은 것처럼 낯빛이 불그레해 한 데다 머리카락이 몇 월 남지 않아
나이보다 10년은 들어 보였다. 언니는 그런 해리슨과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내가 왜 화들짝 놀라는지 깨닫지 못할 정도로 리사 언니는 이미 미국인이 되어 있었다.
미국 시민권자인 언니는 포드 승용차를 운전하며 유바시티의 집으로 가는 동안 즐거운 나와 한국말로 떠들었다.
간혹 리사 언니가 해리슨에게 지루하지 않느냐 이해하라며 양해를 구했다.
해리슨은 그때마다 어깨를 으쓱이며 노 플로브럼을 외쳤다. 우리는 그럴 때면 잠깐 눈치를 보다가 이내 큰 소리로 깔깔댔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크지 않은 캐리어에 핸드백 하나 얹어 나오는 걸 보니 기내로 짐을 갖고 들어간 부류 같았다.
리사 언니 부부는 보름 동안 머물기로 했으니 짐이 꽤 많을 것이다. 두 사람은 멀리서 봐도 눈에 딱 띄겠는데.
둘이 30cm는 차이나겠다. 우리처럼 15cm가 딱 좋은데 말이야.
진우는 해리슨과 리사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찍은 사진을 보다가 내 머리를 자기 뺨에 갖다 댔다.
언니 앞에서 조심해. 넌 오늘 포토로 따라온 거야. 그거 잊지마.
진우는 대답 대신 내 귀를 당기더니 밤에는 환상이 커플로 변하지 라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요즘 무슨 마음에서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사이를 알리는 데 열을 올렸다.
오해하기 십상인 말을 슬쩍슬쩍 던지고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고전적인 수법을 사용하여
3년 전 함께 밤을 보낸 뒤 내 쪽에서 한동안 진우를 못살게 굴었다.
진우의 마음을 확인하려다 시원한 답변을 못 얻어두면 전화로 들복 보냈는데 어느 틈에인가 내 쪽에서 미지근해졌다.
매달 열 꼭지 이상 쓰면서 프리랜서까지 관리하다 보니 진우를 닥탈할 기운이 남아나지 않는다.
그 즈음 회사를 그만둔 진우도 스튜디오 오픈 문제로 몹시 바빠 내 투정을 받아줄 겨를이 없었다.
진우가 진중한 거라고 주장하는 무덤덤함으로 우리 관계는 나른하게 이어지는 중이다.
리사 언니 부부를 편하게 모시기 위해 진우를 동원했으나 행여 두 사람 앞에서 너스레나 떨지 않을지 조바심이 났다.
한 달이면 반은 밤샘 작업에 시달리는 내가 유일하게 잠을 보충하는 데가 택시 아니니 운전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운전을 하지 않는 게 후회된다.
미국에서 돌아오던 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내게 파격적인 말을 했던 리사 언니가 진우를 예사로 보지 않을 게 분명하다.
미주야 내 말 똑똑히 들어. 혹시 임신하면 절대 지우지 말고 그냥 나아.
한국에서 낳기 힘들면 미국으로 와. 내가 돌봐줄 테니까. 서른다섯이면 일부러 실수라도 해야 할 판인데
판단 잘못하면 나중에 후회해. 일에 묻혀 살다 보면 결혼 안 하게 될지도 모르잖니.
결혼은 안 하더라도 애는 하나 있어야 돼. 언니는 몇 번 유산했다가 겨우 애가 들어선 딸을 걱정하는 친정엄마처럼 신신당부했다.
싱글 맘 되면 내 인생 책임질 거야? 한국은 아직 싱글 맘에 관대하지 못해.
유행이 빠르게 확산되는 나라라지만 그 부분은 앞으로도 힘들 거야.
혹시 싱글 맘 열풍이 불면 생각해 볼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뜨끔했다.
바로 한 달 전 내가 썼던 트렌드 기사 내용을 언니가 그대로 요약해서 말했기 때문이다.
낮은 출산율이 국가적 이슈인지라 내가 쓴 기사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국가에서 지원금 주고 육아시설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싱글이 아이를 가져도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아야 출산율이 안정될 거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골드미스의 자신감이야? 솔선수범해. 잡지가 발간되자 주변에서 대놓고 나를 놀렸다.
우리는 선글라스가 아예 없으니 안심하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그런 말에 대충 웃음으로 응대했는데 미국까지 와서 싱글 맘 얘기를 들을 줄이야.
사람들의 놀림을 받으면서 덜컥 임신했을 때 남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당당히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해봤다.
진우도 나도 대비를 잘하는 편이지만 가끔 술을 마실 때가 문제였다.
3년을 사귀면서 실수한 적 없으니 앞으로도 조심하면 될 터였다.
최소한 뜻하지 않게 생긴 아이 때문에 억지로 결혼하는 촌스러운 일은 버리고 싶지 않다.
한참 기다려야 나올 줄 알았던 리사 언니가 뜻밖의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어! 언니다! 리사 언니! 내가 사진을 흔들며 소리 지르자.
따분한 표정이던 진우가 마구 셔터를 눌렀다.
언니는 내 목소리를 못 들었는지 긴 여행에 지쳤는지 무표정하게 걸어 나왔다.
나는 다시 소리쳤다. 경자 언니! 여기야! 여기!
리사 언니는 경자라는 자신의 한국 이름에 그제야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뒤를 살펴봤지만 해리슨이 보이지 않았다. 언니는 답답하다며 빨리 공항을 벗어나자고 재촉했다.
해리슨이 오지 않았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해리슨이 와야만 이번 방문의 목표가 이루어질 수 있건만.
언니에게 인사하려는 진우의 팔을 당겨 뒤로 처지라는 눈짓을 보냈다.
세크라멘토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유바시티의 리사 언니 집을 방문했을 때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언니는 미국에 입성한 지 10년 만에 백인과 결혼하여 정원이 딸린 아담한 주택에 살고 있었다.
언니가 포드 승용차를 차고에 주차시킬 때 한쪽에 떡 버티고 있는 래퍼츠카가 눈을 찔렀다.
주말이면 그 차로 부부가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푹신한 양탄자와 앤티크 가구로 장식한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집안은 우리 잡지 인테리어 면에 싣고 싶을 만큼 감각적이었다.
거실 통유리 밖에 해리슨이 애지중지 길렀다는 푸른 잔디가 깔려 있었다.
수업 마친 뒤 월세 단칸방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병원으로 야간 근무하러 가던 경자 언니의 궁상스러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에서 언니의 꿈이 이루어질 줄은 정말 몰랐네.
언니 축하해 저택의 주인 경자 아니 리사 언니
나의 경탄에 언니는 해리슨이 반대해도 불구하고 집을 샀다는 걸 강조했다.
집을 사야 직성이 풀리는 거 보면 어쩔 수 없이 한국인 이라고 말할 때 언니의 표정은 몹시 흡족해 보였다.
해리슨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을 보고도 언니가 손해 보는 결혼을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 아들은 1년에 한 번 여름 방학 때만 머물다가 LA의 친엄마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중학교 2학년과 1학년이라는 존과 스티븐은 중국인 엄마의 영향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동양인 냄새가 났다.
언니가 낳을 아이를 떠올리느라 나는 두 녀석을 유심히 봤다.
2주 후면 돌아간다는 녀석들은 스텐맘 리사와 스스럼 없이 스킨십을 했다.
이제 이 집에 필요한 건 딱 하나 리사와 해리슨 사이에서 태어날 2세뿐이다.
결혼하고 1년 안에 자연 임신이 안되면 불임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해주려다
취재를 하면서 주어들은 박학 따식이 이럴 땐 오히려 불편하다.
내가 초덜급 샀다고 명동에 데리고 가서 영양통닭 사줬을 때 얼마나 감격했던지
언니는 지방 간호전문대를 졸업하고 작은 병원 간호사로 일하면서 주사를 놓을 때마다 마음을 맑게 할 시가 쓰고 싶었단다.
정작 대학에 진학한 언니는 시를 쓸 겨를이 없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야간에만 근무하는 병원에 취직했기 때문이다.
낙제 과목이 쌓이는 바람에 결국 3학년 2학기부터 병원을 그만두고 학점을 이수하긴 했지만 언니가 발을 들이밀 곳은 없었다.
경력도 없이 나이만 많다며 문턱을 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봉투를 준비하면 모처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언니는 미련없이 학원에 등록해버렸다.
미국 간호사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국문과를 졸업하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우려했던 언니에게 시를 쓸 기회는 오지 않았다.
여성 잡지사에 취직하여 교육 받느라 정신이 없는 나를 찾아와 언니는 마치 출사표를 던지듯 비장하게 말했다.
나 미국 간호사 시험에 합격했어. 내가 대한민국을 버린 게 아니라 대한민국이 나를 버렸어.
나이 들어서 공부했다면 더 격려하고 더 기회를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돈을 싸들고 와야 취직시켜 주겠다니 말이 돼?
두고 봐. 반드시 성공할 테니. 그 전에 이 땅 안 밟을 거야.
볕이 잘 들지 않던 언니의 자취방. 뒷돈을 요구하며 언니를 밀어낸 취업전선.
자신의 시를 거부한 대한민국에 언니는 넋 그니 복수한 것 같았다.
언니는 일반 병원이 아닌 주정부 병원에 다닌다는 걸 강조하며 처우가 만족스럽다고 했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환상적인 조건과 리타이어 하면 연금으로 노후를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도 빼놓지 않고 말해 주었다.
언니는 뚱뚱한 환자가 많아 잠자는 자세를 바꿔줄 때 팔이 아픈 것만 빼면 퍼펙트하다고 했다.
숯불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닭이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언니는 닭을 뒤집는 동안에도 미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알려주느라 바빴다.
9.11 테러나 총기 사고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라는 걸 특히 강조했다.
한국에 집집마다 시칼이 있어도 싸울 때 다 칼 휘두르는 게 아니듯 총도 무섭지 않다는 걸 나에게 주지시키려고 애썼다.
나는 언니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언니는 세금을 제대로 사용하는 이 나라에서 살게 된 건 행운이라고 했다.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지내는 가정제일주의 남편들에 대한 칭송도 잊지 않았다.
금융위기로 미국이 좀 힘들어졌다지만 자신은 별로 타격이 없고 부자 나라가 이 정도가 꼭 끄떡하겠느냐는 전망도 곁들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도 언니네 집값이 많이 떨어지지 않았다니 다행히 아닐 수 없다.
우리 엄마가 여기 와보고는 내가 천당에 사는 것 같다며 좋아하셨으니 내 인생 성공이지 뭐.
결혼 안 한 나 때문에 늘 한숨 쉬는 엄마를 생각하니 효도까지 확실히 한 언니가 대견스럽기만 했다.
언니는 잘 익은 바비큐를 큰 접시에 나누어 담더니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정원 한쪽 귀퉁이 담장 바로 아래 도톰하게 흙을 도두어 만든 밭이 있었다.
빨간 방울 토마토와 오이만한 풋고추, 잎이 넓은 상추, 너무 색깔이 짙어 까맣게 보이는 가지가 소담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넓은 잔디밭 귀퉁이의 손바닥만한 공간에서 빽빽하게 자라는 채소를 보자 방정맞게 눈물이 핑 돌았다.
드넓은 미국에서 까치발을 하고 겨우 끼어든 미사 언니의 환영을 본 듯해서였다.
한국에서 공수해온 씨앗이 미국 서부의 강렬한 햇살 아래서 탐스럽게 자라고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언니는 풋고추를 따서 한입 베어물더니 해리슨과 아이들이 김치를 좋아한다고 자랑했다.
저녁마다 된장국에 쌀밥 말아서 김치하고 먹어야 속이 풀려.
해리슨은 다른 건 다 잘 먹는데 된장국은 냄새나서 싫대.
그렇게 말하며 희죽 웃는 언니의 얼굴 어디에서도 미국 냄새가 묻어나지 않아 가슴이 찌르르 했다.
다음날 언니는 네바다주와 접경지역에 있는 레이크 타호 쪽으로 차를 몰았다.
해리슨과 그 아들들은 근처 계곡으로 레프팅을 하러 간다며 먼저 집을 나선 뒤였다.
아무리 멋진 경치도 함께 탐복할 사람이 없으면 감동이 반감된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미 세 번이나 와봤다는 리사 언니는 여기저기 차를 대고는 가이드처럼 설명하면서 내가 구경을 끝내길 기다렸다.
한 바퀴 돌면서 자동차로 반나절이나 걸린다는 크고 아름다운 호수 앞에서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질렀다.
내 즐거움보다 언니의 지루함을 덜어줘야 할 의무가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호텔 도박장에서 블랙잭을 한 뒤 하드록 카페 구경도 순식간에 끝냈다.
커피숍으로 옮겨 커피를 마실 때 언니는 웬일인지 침묵했다. 커피를 다 마시도록 한숨만 푸우푸우 내쉬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잠자꾸 기다렸다. 임신하려고 무던히 애썼는데 잘 안 돼.
해리슨과 결혼하기 2년 전부터 거의 같이 살다시 피했어. 그때부터 피임을 안 했는데도 결혼해서 1년이 넘은 지금까지 아이가 안 생겨.
둘 다 문제가 없다는데도 조바심이 나서 얼마 전에 인공주정까지 했어. 첫 번째는 대개 실패한다면서 몇 번 더 해봐야 된다고 하더라.
세계에서 시험관 아기 수술을 가장 잘하는 나라가 어딘지 아니? 답을 알지만 잠자꾸 있었다.
한국이야. 한국 사람들 대를 잇는 일에 관심 많잖아. 뭐든 필요한 곳에서 발달하기 마련이니까.
미국은 비용이 너무 비싸. 미국에서 한 번 할 돈이면 한국 왕복 비행기 티켓 사고 몇 번 더 시술할 수 있대.
그래서 내가 해리슨한테 한국 가자고 했더니 거절하는 거야. 언니가 시험관 시술까지 할 정도로 아이를 절실히 원하는 줄 몰랐던 터라.
새삼 가슴이 아려왔다. 헤리슨은 아이가 둘이나 되는데 자신은 하나도 없는 게 억울하고 불공평하다고 했다.
한국 남자라면 알아서 서둘렀을 거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다 식은 카페라떼만 홀짝였다.
이 넓은 땅에서 내 핏줄 하나 없이 어떻게 살아? 아기를 안 갖겠다는 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야.
헤리슨은 애한테 집착하는 게 이해 안 된대. 동양의 촌스런 핏줄 중독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남의 얘기 하듯해.
시험관 시술을 몇 번 하다 보면 빚을 져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는 거야. 나한테 집착이니 중독이니 하는 건 다 핑계고 본심은 돈이야.
언니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집 살 때 자신이 돈을 더 냈고 앞으로도 자신이 계속 일을 할 텐데 그런 말 하는 게 야속하다고 했다.
내가 애 낳는 동안 일을 못하거나 혹시 애 낳고 들어앉으면 어쩌나 그게 걱정이겠지.
미국 놈들은 너무 심리적이야. 한국 사람들처럼 무대보가 없어. 그게 좋은 줄만 알았는데 지릴 때가 많아.
내가 한국에 가면 돈이 얼마 안 된다. 2주만 휴가를 내라. 한국 가족들과 인사도 해야 하지 않냐고 했더니 너하고 결혼했는데 왜 다른 사람한테 인사하냐는 거야.
한국 남자들도 여러 명 사귀었는데 하나같이 제대로 된 잡이 없어서 미국 남자를 선택했더니 지금은 후회가 돼.
10년 사이에 언니의 사고가 뒤죽박죽 된 것 같았다. 미국식이 좋았다. 한국식이 좋았다. 갈피를 못 잡았다.
결국 언니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나왔다. 해리슨의 월급 가운데 많은 부분이 두 아이의 양육비로 나간다며
결국 자신이 남의 아이 키우는데 힘을 보태는 꼴이라고 했다. 언니는 가슴의 응어리를 모국어로 토해놓는 데 열중했다.
나는 그저 듣고만 있으면 됐다. 속을 다 까놓으면 편안해지고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테니까.
실제로 언니는 나한테 털어놓은 뒤 마음이 후련해졌다고 했다. 대신 무거움이 내 마음으로 옮겨왔다.
경자 같은 생각은 버리고 멋진 리사로 살아가면 좋으련만. 언니는 돌아오는 길에 세크라멘토 시내에 있는 근사한 일식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인테리어에서부터 종업원 복장까지 나무랄 데 없는 일본식이지만 정작 주인과 종업원들은 한국인이었다.
미국인들이 회덮밥에 벌건 초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벼 먹었다. 우리도 회덮밥을 시켜 초장을 듬뿍 넣었다.
매운맛 덕분인지 언니의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 보였다. 너라면 어떡하겠니?
나는 마흔이고 아이를 못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불안해. 시험관 아기 시술이 정말 집착이고 중독일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언니를 기분 좋게 하기보다 내 마음을 정직하게 전달하기로 결심했다.
갑자기 회덮밥이 짜게 느껴져 미소 국물을 서너번 떠먹고는 입을 열었다.
언니, 결혼은 약속이잖아. 서로 원하는 걸 들어주기도 해야 하지만 한쪽이 원하지 않으면 안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언니는 눈을 짓떴다. 내친김에 말을 이었다. 아이가 뭐가 중요해? 언니 인생이 중요하지. 그냥 쿨하게 살아.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거면 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언니는 반이나 남은 회덮밥을 옆으로 밀더니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너 언제부터 미국식이 됐니? 유명한 잡지사 기자 그게 그렇게 중요해?
결혼이 시시해? 아이가 우스워? 리사 언니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아이 얘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언니 앞에서 조심하지 않은 게 실수였다.
나도 너 못지않게 열심히 살고 있어. 내가 아주 촌스럽게 보이겠구나.
미국까지 와서 백인 남자한테 애낳자고 애걸하는 게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해?
성취를 위해 내가 받은 생명을 이어가지 않는 거, 일 때문에 결혼을 부담으로 여기는 거, 그건 자유가 아니라 죄악이야.
언니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어갔다. 처절하게 체험한 뒤 보물처럼 쏟아놓는 언니의 말이 가슴에 콱콱 박혔다.
유바시티로 돌아가는 내내 언니는 말이 없었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생각해봤다.
서른다섯이면 적은 나이가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서른다섯부터 임신 확률이 급전직하로 떨어지고 기형아 낳을 확률이 확연히 높아진다는 기사를 쓴 적도 있다.
아이에 대해서라면 나도 언니 못지않게 조바심을 내야 할 나이지만 아이 때문에 억지로 결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우는 나를 희귀종이라고 판정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자가 더 집착하기 마련인데 나는 점점 달아나고 있다며
일 때문이라면 자신이 밀어줄 테니 일에 투자하는 시간의 10%만이라도 결혼에 할애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강권하기도 했다.
결혼은 노력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멋저럭 보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남자가 나타나는 행운이 내게 다가오길 기대할 뿐이다.
위대한 세익스피어가 첫눈에 반하는 게 사랑이라고 했으니까 같은 직장에서 만난 진우는 커피향처럼 내게 스며들었을 뿐이다.
진우는 텔레비전을 볼 때 그저 편안하게 끌어안고 있는 푹신한 쿠션 같은 존재였다.
안고 있으면 푸근하지만 놓아버려도 그리 섭섭하지 않은
진우가 싫은 건 아니지만 싫지 않은 감정 정도의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실려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말없이 운전하는 언니 옆에서 결혼과 아이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내가 비정상은 아닌지 골똘히 생각해봤다.
분명한 건 열심히 일하며 즐겁게 사는 내가 이상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집안에 들어설 때 뽀송뽀송한 양탄자의 발이 푹푹 빠져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언니가 지금까지 잘 가꾸어온 것들에 애착을 갖고 평안해지길 기대했다.
얼굴이 벌겁게 익은 해리슨이 아들들과 함께 식탁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낄낄대는 그들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싸했다.
저녁에는 꼭 쌀밥을 먹는다는 언니가 그들에게 느낄 이질감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했다.
미국을 떠나던 날 리사 언니의 온 식구가 샌프란시스코로 출동했다.
세크라멘토에서 서울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없어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이용해야 했던 것이다.
저녁 비행기를 타기까지 남은 시간 동안 시내도 돌고 금문교도 건너면서 나는 어떻게든 언니와 얘기를 더 나누려 애썼다.
언니는 이혼하겠다던 해리슨과 손을 잡고 다니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둘이서 수시로 입을 맞추는 것도 여전했다. 언니에게 미련을 버렸느냐고 물었다.
언니는 지금은 나를 배용하는 일에만 열중하고 싶다고 했다.
이혼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아. 이혼하면 재산을 반으로 나누어야 하는데 집을 살 때 내가 돈을 훨씬 많이 냈고 변호사 비용도 만만치 않아.
서브프라임 때문에 집이 잘 팔리지 않는 데다 집을 팔 때도 비용이 많이 들어.
자칫 하다간 10년 동안 모은 돈이 다 날아갈 수도 있어. 혼자 살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해리슨이 싫은 건 아니거든.
해답은 언니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혼하지 않고 이대로 사는 것이다. 완벽한 삶.
언니에게 이제 아이만 있으면 미국은 유토피아가 되는데 신은 아쉽게도 그 한 가지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언니는 좀 더 빨리 아이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것이 아쉽고 포기하기엔 미련이 너무 많이 남는다고 했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리사 언니에게 시험관 시술과 관련된 자세한 사항과 국내 유명 병원 리스트를 정리해서 메일로 보냈다.
잘 돌아왔다는 보고도 할 겸 전화를 하여 한국 아이를 입양하는 건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언니는 심심해서가 아니라 내 핏줄을 안고 싶은 거라고 절규하던 말했다.
언니는 아직 살아보지 않은 날에 대해 자신 만만한 건 오만이니 후회하지 말고 결혼과 아이를 심각하게 고민하라고 일침을 놓았다.
언니가 생각날 때면 어김없이 내 나이와 부리무이 상관관계가 안 풀리는 수학 문제처럼 나를 괴롭혔다.
살아보지 않은 날에 대해 오만하지 말라는 충고와 생물학적인 나의 인생이 하향국선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현실이 문득문득 내 뒷덜미를 잡았다.
시험관 아기도 절박한 언니 사정도 안심할 수 없는 내 처지도 자주 떠올릴 겨를이 없을 정도로 두근거리는 일이 생겼다.
편집이사가 회사에서 라이선스 패션 잡지를 인수하게 되었고 내가 편집장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꿈처럼 원하는 고지가 다가가고 있었다. 한 단계 도약하지 않으면 자칫 좌절하기 쉬운 즘이어서 다행스럽기 그지였다.
때마침 언니도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보름 휴가를 내서 해리슨과 한국에 가기로 했다는 언니의 목소리가 한껏 밝았다.
시험관 시술을 받고 해리슨과 고향에 들렀다가 제주도로 여행 갈 거라며 들떠있었다.
시험관 시술 후에 절대 안정해야 하니 여행계획은 세우지 말라는 내 잔소리에도 언니는 흐흐 웃기만 했다.
해리슨이 언니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니 정말 잘된 일이다. 그런데 언니는 오늘 혼자 입국했다.
인천공항에서 강남에 있는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우가 슈베르트 송어를 걸어 볼륨을 높인 덕에 어색한 공기가 더욱 희석되었다.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언니는 해리슨과 함께 묵기 위해 예약한 호텔을 고집했다.
진우를 보내고 호텔 인근의 한정식 집에 갔을 때 언니는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미국 놈들이 감정 정리가 빠르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말 놀랐어.
갑자기 어제 아침에 자기는 한국에 안 가기로 결심했다는 거야. 애가 자연스럽게 생기면 모르지만 한국까지 가서 그러기 싫다면서
그럼 이혼하자고 했더니 예스라고 하더라. 애들 방으로 잠자리를 옮기더니 바로 매칭 사이트에 가입해서 검색을 하는 거야.
기가 막혀서. 해리슨이 그렇게 차가운 인간인지 몰랐어. 일부러 떠보려고 잠이 안 온다고 했더니
리사 이제 혼자 자는 연습을 해야 돼 그러면서 침대로 들어오더라. 그런데 날 털끝 하나 안 건드리는 거야.
하루도 안 거르던 놈이 말이야. 언니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뜨거운 곡만 떠먹었다. 언니는 내일 예정대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겠다고 했다.
다음날 호텔 코앞에 있는 병원으로 향할 때 마음이 무거웠다.
해리슨과 함께라면 비록 실패하더라도 위안이 될 텐데 하는 생각에서 언니의 집착이 이해되진 않지만 남편이 벽이라니 갑갑한 일이다.
병원에 들어서는 언니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이 참혹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뜻밖에도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언니는 자신이 예약했다며 진찰실로 나를 밀어넣었다.
미국에서 내 특징까지 예약했어. 한국에 오지 않을까 했지만 기왕에 받은 휴가고 미국에 있다가는 돌아버릴 것 같아서 온 거야.
예약을 취소하려다가 미련이 남아서 그냥 왔어. 내 상태가 어떤지 점검이라도 해보려고.
너도 잔말 말고 진찰받아. 울음 섞인 언니의 말에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얼떨결에 환자가 된 나는 기왕에 온 거니 서른다섯이면 정말 임신하기 힘든지 알고 싶어 의사에게 자궁이 튼튼한지 봐달라고 했다.
초음파 기기로 자궁 속을 살펴보던 의사는 일상적인 말투로 임신입니다 라고 했다.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려는 나를 의사가 제지시켰다. 의사는 모니터에 보이는 검은 점이 착상된 증거이며
자궁은 아주 튼튼하다고 말했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원하지도 않는 나에게 한 생명이 느닷없이 들이닥친다는 것. 지난달 기획회의 때 갑자기 생리혈이 나오는 느낌이 들어 화장실에 다녀왔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달은 마감이 끝났는데도 조짐이 없다. 의사는 당황해하는 나에게 생리 찌꺼기가 고여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니
소변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이미 검은 점이 악이라는 걸 확신했지만 말없이 소변검사에 응했다.
똑같은 핏덩이지만 찌꺼기와 착상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는 생각을 하니 아득해졌다.
의사는 대책 없이 산모가 된 내게 판결을 내리듯 말했다. 소변검사 결과도 임신으로 나왔습니다.
임신 사주입니다. 자궁에 근종이 있지만 크게 문제될 건 없습니다.
임신 기간 내내 조심해야 하지만 4개월까지 특히 유의해야 합니다. 과로하지 말고 너무 누워있지도 말고 가볍게 운동하면서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나는 낙태에 관한 질문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생명을 얻으려다 이혼을 목전에 둔 리사 언니가 떠올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슷한 시각에 검사를 끝낸 언니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리사 언니는 자궁이 튼튼하고 깨끗하다는 진단을 받았다며 허탈해했다.
폐격만 되지 않으면 언제든 임신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의 말에 그나마 위안을 받았단다.
황망할 터인데도 잊지 않고 내 검사 결과를 물었다. 언니의 질문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음 괜찮대. 좋대. 고마워 언니. 덕분에 검사도 받고.
다행이다. 나 고향에 가서 엄마랑 지내다가 여행 좀 하고 그럴래.
떠날 때 어차피 인천공항에 가야 하니까 그때 서울 와서 전화할게. 하루 쯤은 나랑 놀아줄 수 있지?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니? 이제 나 괜찮아. 돌아가면 해리슨을 설득해봐야지.
의사가 해볼만 하다니 더 미련이 남아. 언니의 얼굴에 쓸쓸함이 진하게 감돌았다.
언니는 무궁화 호를 타고 천천히 고향에 가겠다고 했다. 대학대로 돌아가 추억도 떠올리고 생각도 정리하겠다며.
내일은 혼자 움직일 테니 서울역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나도 속히 언니와 헤어져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전화를 한 진우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리사 언니 결과가 어떻게 나왔느냐고 물었다.
밀려드는 일감에 정신을 못 차린다면서도 진우는 나와 관련된 일을 언제나 꼼꼼하게 챙겼다.
어쨌든 진우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차 한잔 하자고 했더니 곧 촬영이 있다며 스튜디오 근처로 오라고 했다.
검정색 바지에 검정색 셔츠 차림의 진우는 활기가 넘쳤다.
요즘 진우가 찍은 톱스타 프로필 사진이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올라있다.
따지고 보면 진우 정도면 괜찮은 신랑감이다. 무엇보다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균형을 가졌다.
너무 앞서가지도 너무 쳐지지도 너무 답답하지도 너무 튀지도 않는
그래서 좀 지루하긴 하지만 진우는 내 기색을 금세 알아차리고 기운 없어 보인다며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리사 언니 결과가 안 좋대? 기운 없어 하니까 너 가지가 않아. 요즘 내가 너무 바쁜 것 같아 내가 안 갔더니
기를 못 받아서 그러는 거지? 오늘 밤에 갈 테니까 기다려. 진우는 내 귀에다 대고
오늘 밤 확 보내주겠어 라고 덧붙이며 내 볼을 만졌다.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미국 여자랑 사는데 애가 안 생겨 그 여자가 미국 가서 시흥관 아기 만들자고 하면?
진우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그럴 거 뭐 있냐? 둘이 재미있게 살면 되지.
리사 언니 너무 19세기 아냐? 애 만들겠다고 남의 나라까지 가서 법석 떨고 뭐 있어?
쟤 아무리 예쁜 여자라도 남의 나라 병원에 가서 애 만들자고 하면 바로 헤어진다? 난 해리슨이 안 온 거 100번 이해해.
리사 언니는 미국에 오래 살았다면서 웬 청승이야? 남자가 안 하겠다고 하면 쿨하게 그러자 해야지.
나도 애 별로지만 너 일 욕심 많은 거 아니까 딩고 쪽으로 쭉 가자고. 우리 둘이 재미있게 살자 이거지.
담배를 물면서 시니컬하게 말하는 진우에게 주스를 끼얹을 뻔했다. 너 그런 놈이었어? 그 정도밖에 안 돼?
생명은 귀중한 거야. 언니의 절절한 마음을 모독하는 거야? 너 같은 놈은 아버지 될 자격이 없어.
남자란 놈들은 다 똑같아. 내가 화를 내자. 진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난감해했다.
목소리 낮춰. 사람들이 보잖아. 지금 내가 한 말 내 기사 읽고 정리한 거야.
내가 거기에서 늘 주장하는 거잖아. 인생 쿨하게 가자고. 갑자기 코웃음이 나왔다.
쿨하게. 그래 그게 나의 구호지. 진우를 만나는 게 아니었다.
이런 날은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나았다. 내가 일어서려고 하자 진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정색을 했다.
언젠가 나에게 한 얘기였다. 내가 자신을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나를 안고 있어도 나를 다 갖지 못하는 것 같은 자괴감에 관해서였다. 진우는 그때보다 한 발 더 나갔다.
이제 솔직히 지쳤다. 너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진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처음 있는 일이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리가 정지된 것 같았다.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내가 아기 엄마가 되었다가 언니가 아기를 낳았다가 뒤죽박죽이었다.
전화벨이 울려 일어났을 때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리사 언니는 오전 11시 출발이라며 서울역으로 나와달라고 부탁했다.
거울 속에 나를 봤다. 헝클어진 머리에다 비쩍 마른 몸피가 가관이다.
어느 틈엔가 아랫배와 골반 쪽에 지방이 올라 붙었다. 아랫배에 지방이 쌓이는 건 자궁을 보호하려는 본능이라는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달한 적이 있다.
얼마 전부터 지방이 자꾸 감겨든 건 느닷없이 온 아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였단 말인가.
쿨하게 나는 거울을 보며 희죽 웃었다. 아가야 대체 어떻게 하는 게 쿨한 거니? 그 질문에 답이라도 하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오후에 사장과 미팅이 있고 내일 라이선스 잡지 미국 본사 사람들과 상견례가 예정되어 있다.
회사에서는 잠정적으로 나를 편집장으로 결정한 것 같았다.
4월까지는 조심해야 한다는데 지금부터 거의 밤샘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배부터 불러오는 건 또 어떡할 것인가? 결코 이를 놓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진우는 아이 때문에 결합하는 건 우리 둘 다에게 좋을 리 없다.
우린 너무 지나쳐왔다. 긴빠져버린 상황에서 나른하고 지루하게 시작하는 건 인생을 모독하는 일이다.
머릿속에서 불이 막 옮겨다니는 것 같다. 뜨겁고 어지럽다.
그런 가운데서도 최근에 약을 먹었거나 심하게 음주를 한 일이 없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북적대는 대합실 의자에 언니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기차 출발까지는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커피 전문점에 갔을 때 언니는 나에게 묻지도 않고 토마토 주스를 두 잔 갖고 왔다.
앞으로 커피 마시지 말고 이런 거 마셔. 순간 깜짝 놀랐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갔다.
아마도 내 낌새가 이상해서 진우가 리사 언니에게 전화했을 테고 언니가 병원에 연락했겠지.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면서도 왠지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미주야 어제 진우씨가 나한테 전화해서 무슨 일이 있냐면서 내가 이상하다고 하더라.
진우씨는 내가 산부인과 진찰받은 거 모르니까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있나 걱정돼서 전화했더라.
사람이 참 자상하고 반듯해. 초음파 사진을 cd에 담아 가려고 병원에 들렀다가 알아봤어.
내가 임신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면서 마음이 정리되더라.
말과 달리 얼굴에 심란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한참 뜸들이던 언니가 선고라도 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해리슨에게 돌아가기로 했어. 내 말이 맞아. 안 되는 거 억지로 하지 않을래.
너도 너한테 온 그 아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서울에 오길 정말 잘했어.
내가 안 왔으면 널 설득할 기회를 못 얻었을 테니까. 진우씨가 나한테 신신당부하더라.
너 회사도 다니게 하고 자기가 일을 좀 못하더라도 육아를 책임질 거라더라.
내가 애를 포기하면 어쩌냐고 얼마나 조바심을 내는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언니의 표정은 허탈하고 서늘했다.
내가 아기 가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서 탁 하고 매듭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단다.
언니는 사람이 계획한 대로 다 된다면 신은 필요 없겠지. 라고 읍졸였다. 앞으로 내 아기를 내 아기라고 생각할 거야.
내가 너무도 아기를 원하니 내가 좋아하는 너한테 아기가 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알 수 없는 게 인생이야.
넌 우선순위를 가릴 줄 아는 현명한 애니까 걱정 안 할게. 미국 가서 매일 전화할 거니까 그런 줄 알아.
혹시 내가 다른 생각하면 나 어떻게 될지도 몰라. 언니의 눈이 빨개졌다. 이상하게도 언니의 협박이 고맙게 들렸다.
언니는 빨리 결혼식을 올리라며 해리슨과 함께 축하하러 오겠다고 했다. 결혼이라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들면서 내가 쓴 기사 내용이 떠올랐다.
꼭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건 우리 사회의 집단 고정관념이다. 아이 때문에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는 게 오히려 족쇄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너부터 그럴 자신이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묻는데 푹 웃음이 나왔다.
내가 머리로 쓴 긴 기사보다 내가 받은 생명을 이어가는 일 소중하게 여기라는 언니의 간절한 한마디가 훨씬 힘이 있다는 걸 그 순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니는 아이가 진우를 닮아 현명하면서 예쁠 거라고 했다. 갑자기 머리가 짖근거렸다.
그가 아빠 자격을 갖는 건 당연하지만 그 다음은 다른 문제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원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무능해 무책임 아닌가.
그런 질문을 했지만 아무런 답변도 떠오르지 않는다. 장항행 무궁화 열차가 곧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언니가 짐을 챙겼다.
언니는 개찰구 앞에서 잡고 축하한다며 내 손을 잡았다. 여전히 진한 아쉬움이 배어있는 언니에게 그저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언니는 개찰구를 빠져나가면서 몇 번이고 손을 흔들었다. 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뒤돌아서는데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면서 현기증이 잃었다.
눈물이 곧 떨어질 것만 같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만 정물이 되어버렸다.
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느낌이다. 문득 기둥에 기대서서 날 지켜보는 진우가 보였다.
진우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피실 웃더니 다가와 꽉 껴안았다.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두 주인공 입장에서 정말 고민될 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핏줄을 낳고 싶어하는 여자와 아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결혼은 반대 입장인 여자.
너무나도 현실적인 고민들이라서 저도 모르게 집중해서 읽어 나갔는데요. 소설의 결론이 제가 생각했던 너무나 당연한 듯한 결론으로 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긴 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약간은 아쉬웠다는 고백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어쩌면 미주 씨가 자신이 주장한 대로 아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바꾸지는 않길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아주 조금은요. 좀 모린정해 보일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능력 있고 자신 만만하게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 오던 여성이
아기를 가진 후부터 아기의 엄마로서의 역할에만 매몰되는 것이 좀 안타깝다고나 할까요?
여성의 역할이 자손을 낳고 키우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닐텐데 그런 역할만을 강요하는 듯한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반감일 수도 있구요.
물론 아기를 키우면서도 사회인으로서 훌륭하게 자기 삶을 가꾸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현실적으로 많은 지원과 희생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우선 육아에서부터 전적으로 여성이 키우진 않는다 하더라도 아기는 엄마의 손이 거의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하게 될 것이고
남편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 부분만큼 경제적인 면에서 구멍이 생길 것이 뻔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양쪽 집안에서 경제적으로 강한 지원을 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쉽지 않죠.
모두가 부자는 아니니까요.
그러니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는 것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책임과 현실적 타협이 필요한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요즘 우리나라 같은 상황에선 아이 낳아 기른다는 게 정말 녹록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어려움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리사는 절실하게 자신의 아이를 갖는 것을 원하고 있는데요.
그녀에겐 낯선 타국에서 자신의 핏줄 하나 없이 산다는 것이 너무나 쓸쓸하고 외롭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용이 적게 드는 한국에 와서 시험관 시술이라도 하자고 남편을 설득해 보지만 역시 미국인은 쿨해서 그런가요?
아니면 자신은 이미 자식이 있으니 절실함이 없어서인지 리사의 그런 욕망을 이해할 수도 없고 촌스럽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저도 그 미국인 남편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남자에겐 이미 자녀도 둘이나 있겠다. 굳이 아이 만들려고 머나먼 한국까지 가야 한다니 마음에 들지도 않고 마음 먹기도 쉽지 않았을 거에요.
그래서 결국 리사 혼자서 한국에 오게 된 건데요. 그런데 인생이란 참 모르는 것이 결혼이나 임신은 꿈도 안 꾸던 미주가 임신을 하다니.
그죠? 원하던 사람에겐 안 오고 원하지 않던 사람에게 덜컥 오다니 이게 무슨 조화인지.
낳을지 말지 결정은 미주씨가 하는 거겠지만 아이 때문에 억지 결혼하는 것에 대해선 저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결정을 해도 잘 살지 모르는 게 결혼인데 아기를 가졌기 때문에 확신 없이 결혼을 하는 건 왠지 불안하거든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방법을 찾아야겠죠. 아기 아빠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해봐야 합니다.
해보고 확신이 들게 되면 그때 결혼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만약 그래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상상하고 싶진 않은데요. 그 다음은 여러분의 상상으로 맡기겠습니다. 아기를 갖고 싶은 여자와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한 여자의 이야기
어떤가요? 공감이 가시는 부분이 있으셨나요?
저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어느 쪽에도 공감을 할지 궁금합니다. 이금미 작가의 리사의 방문을 읽어드렸습니다.
다음에도 재미있는 작품으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드리면서 그때까지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