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강) 일제시대 때 믿음으로 일제를 이긴 그리스도인(1)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의 시작) #이승만과자유민주주의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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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1. 26.
우리은행 1005 -204- 476779 (예금주 :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의 시작'(역사전쟁)에 후원하실 분은 후원해 주세요. 다음 프로그램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기원" 입니다. 많은 후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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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기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후원 부탁드립니다.
여러분께서 내어주신 후원금으로 제작한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의 시작'은 7월 3일(월)부터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 저녁 8시에 방송 합니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제작을 하다보니 제작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1주일에 한 편씩만 내보내고 있습니다.
대한역사문화원,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글로벌디펜스뉴스 홈페이지에서 지난 방송을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hiskeepers.or.kr/news/section.html?sec_no=100 [대한역사문화원]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시작 과거영상 보러가기
http://www.k-cia.kr/news/section_list_all.html?sec_no=109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시작 과거영상 보러가기
대한민국 대자를 성령 세관으로 알리고
전하는 대한역사 문화원을
한국사 바로기 특강입니다
자유를 위해 싸우다 여섯 번째 이야기
믿음으로 나라를이긴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입니다 1905년 조선은 을사
약으로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5년 후 190년
나라의 주마 내어주며 자유를 빼앗긴
채 36년 동안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일제 식민 통치는이랑 히로이 항복으로
마침표를 찍고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여러 강의를
통해서이 해방이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했죠 시편 44편
3절이 말해주듯이 모든 일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었고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하신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와
믿음으로 나라를이긴 그리스도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은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성경에는
거대한 적이나 핍박에 맞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들은 적들에 비해 약하고
무능력해 보입니다 현실적인 눈으로
보면 백전 패가 예상되죠 그러나
놀랍게도 그 초라한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간 강한
변합니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승리의 주인공이 되죠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사 속 일제
시대에도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일본이라는 거대한 나라를이긴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믿음으로
나라를이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볼까요 일본이 조선 통치를
시작하면서 가장 큰 골칫거리는
교회였습니다 일제는 교회가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 집단이므로 교회를
무너뜨리지 않고는 조선 통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죠 그 이유를 이승만 박사는
한국교회 핍박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일본 생각에는 한국 교회는
독립사상을 배향하는 곳이요 한국
교인들은 장래의 혁명을 주창할 자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한국 교회를
통제하고 한국 교인들을 다스리기
전에는 장래의 화근을 막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일본은 105인 사건을
시작으로 한국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고 한국 교회를 철저히 감시하며
예배까지
통제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기드온의 용사가 13만 5천의
미디안 연합군을이긴 이야기 요나단과
그의 무기든 소년이 블레셋을이긴 것과
같이 약자가 강자를이기는 내용의
설교를
금지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
학교의 예배와 성경 교육도
금지했습니다 또 여름 수련에도
금지하고 주일저녁 수요 예배도 금지
그리고 사도신경 고백도
금지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까지 한국
교회를 통제한 것을 보면 한국 교회가
일본에게 상당히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일본의 한국 교회 핍박은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 더 분명해집니다
일본의 무단통치가 절정에 다다른
1919년 3월 1일 대한의 독립을
갈망하는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임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의
독립을 간절히 호소하는 만세 함성이
울려퍼졌습니다 3일 운동 당시 조선
인구는 179만 명이었는데 인구의
12% 해당하는 연인원 200만이
넘는 조선 사람이이 거룩한 거사에
참여했습니다 3월 1일에 시작된 만세
운동은 4월 말까지 전국 각지로 퍼져
갔습니다 전국 218개 부군 가운데
212개 부근에서
152건의 만세 가 일어났죠 3일
운동의 전 과정에서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당시 조선의 기독교
인구는 조선 인구의 1% 1.5%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근거로 3일 운동의 주동 세력이
한국 교회라고 말하는지 궁금하시죠
지금부터 그 근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독립선언
중 가장 먼저였던 2일 무호 독립
선언이 있었습니다 2일 무호 독립
선언을 주도했던 것은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그리고 일본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에 서명했던 한국인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이승만 박사가
인도한 도쿄 YMCA 전도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기도 하죠 또 2월
간도 지린에서 발표된 대한독립 여자
선언서 한국기독교 여성들이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독립 선언서 문구 중
의리의 전신 갑주를 입고 실력의
방패와 열성의 비수를 잡고 유진
태하는 신을 신고 일심으로
일어나면 같은 은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를 인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3일 운동전 기독교인 이승만
박사가 국내와 일본 중국 등지의
독립운동가 동지들에게 민족 총 걸기에
때가 왔다며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드러낼 퍼포먼스를 일으키라는 지령과
밀서를 보냈고 이승만 박사의 저서
독립 정신은 3일 운동에 출발
되었죠 그리고 국내에서 전개된 3일
운동의 준비와 시위의 전개 및 실행
단계에서도 이승만 박사의 밀지를 받은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3일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16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이으로 산정할 경우에도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6인의 기독교인
외에 김도태 김세완 김원벽 안세환
정노식 함태영 등이
기독교인이었다 아는 지도자들이
기독교인이었다 평양 등 아홉 개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난 만세 운동은
한국 교회가 주동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만세 시위
또한 대부분 교회
중심이었습니다 만세 운동에서 주동
세력이 뚜렷한 지역이 311개 처인
기독교 주도가 78개 천도교가 66개
기독교와 천도교의 합작 지역이 42개
지역으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3일
만세 운동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1919년 6월 말까지 3일 운동에
참여했다가 피검은
9458 중 기독교 신자가
207명으로 전체 피검자의 22%
달했습니다 1919년 12월 말까지
3일 운동으로 보격 중인
19525 중 기독교인은
3373 17% 달했습니다 실제로 된
사람 의 17에서
22% 기독교 신자라는 것은 3일
운동에 한국교회 기여도가 엄청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죠 조선 총독부
법무국이 1920년 1월 작성한 망동
사건 처분에 의하면 만세 운동으로
1954이 검찰에
라고 답한이가
9255 종교가 파악되지 않은 인물이
3809이었습니다 피검자 전체를
대상으로 종교를 조사한 결과
기독교인이 총
365명 천도교가
268명 유교
346명 불교 220명 순이었고
사제들이 만세운동에 부정적이었던
천주교는 54명 뿐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종교가 있다고 밝힌 피검자 중
기독교인이
365명으로 전체 종교인의 51%
해당했고 전체 피검자 중에
16.1%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65.4%
기독교인이었다 있는 여성 피검자 중
95.1% 기독
여성이었습니다 당시 인구의 1.5%
미만의 기독교인 피검자가 전 인구의
10% 달하는 천도교 피검자
268명 다 월등이 많았다는 점은
기독교인들이 3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증명해 주고 또 기독교
신앙은 애국심이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일운동은
비폭력 시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무력 탄압은 거셨습니다 때문에 3일
운동의 불길은 4월 말 이후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사망자가
7,500
9명이었다 되었습니다 7세 미만의
어린이도 300여명에 달했습니다
부상자가
4556 2명 체포된 사람이
49818이나
되었죠뿐만 아니라 59개의 교회와
학교 세 곳이 전소되었고 민가도
715 7나
파손되었습니다 59개의 교회가
전소되었다 것은 일본이 한국 교회를
집중적으로 탄압했다 증거이기도 하죠
이런 일본의 만행에 대하여 미국
하원의원 폭 W 는 미 하원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곳에 따라서는 수십명의
한국인들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기도 하였다 이런 일본의 잔인한
만행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기독교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였다 화성 제압 이에서 끔찍한
학사를
자합니다 삼일운동 당시 자행된 강경
진압에 대해서 사과한다는 구실로
경기도 화성의 제압이 주민을 제압이
교회로 유인하여 교회에 가두고 밖에서
교회 문을 폐쇄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쏴 학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지뿐만 아니라 제암리 인근
동네까지 불을 질러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암리에서 벌어진 이
끔찍한 소식을 전해들은 스코필드
박사는 수원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수원역에 내린 스코필드
박사는 정신없이 자전거를 타고 제압
이로 달려가 그 참혹한 현장을 사진에
담고 사건의 진상을 기록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폭로했습니다 화성시 제암리 삼일운동
순국 기념 간에는 삼일운동과 제압이
학사를 취재하여 세상에 알린 스코필드
선교사의 기념관을 만들어 그의 거룩한
행동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3일운동 보고서를 작성해 개로 가지고
나가 후일 일본의 잔혹함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유인
1968년 스코필드 선교사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습니다 대한독립의 간절한
요구는 전국과 세계 각지 한인들에게
퍼져 나갔고 외신들도이 거룩한
움직임을
보도했습니다 가장 먼저 3일 운동의
소식을 전한 외신은 미국의 오클랜드
트리뷴이었습니다 한국이 세계의 독립을
요구하다 제목으로
199년 3월 10일 조선의 마음을
세상에
전했죠 에드 타이는 삼일운동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조선의
독립 의지를 세상에 전달했고 여러
나라의 외신도 삼일운동에 간절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삼일 운동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할 사람 중 유관순
열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삼일운동 당시
17살의
소녀였습니다 한창 애 고등학교 1학년
소녀였고 17살 안순 열사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1919년 3월 1일 기꺼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3월 5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지금의 서울역
앞에서 다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을
때도 그 자리에 있었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선교사들의
강력한 항의로 풀려나게 되었었죠
일제는 거듭되는 시일을 막고자 3월
10일 모든 학교에 일제의 휴교령을
내렸고 유관순 열사는 고향 병천
돌아와야 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 열사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향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고향에 돌아온
주일 저녁 약 20명이 모인 자
에서이 어린 소년은 당돌하게도 3월
1일 서울과 같이 이곳에서도 만세
운동을 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우리도 죽은 듯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요구를 흔쾌히
발표하라고 했는데 우리도 이제 그
일을
해야겠습니다 17살 소녀의 당찬
외침은 어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렇게 병천 아운의 장터에 만세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구색에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는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암송하면서 멀고 가까운 마을을
찾아다니며 만세 운동 참여를 권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거사를 하루 앞둔 날
그녀는 매봉산 봉화대 앞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일본을 물리쳐
주시고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 각 대표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이 땅이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1919년 4월 1일 음력으로 3월
1일 정후 아오의 장터에 약 3천명의
사람이 모였습니다 손에 태극기를든
사람들의 만세 함성이 아운의 장터에
가득했습니다 일제는 무력으로이 비폭력
시의를
진압했습니다이 과정에서 안순 사의
부모님이 제 강경 진압으로 죽임을
당했고 유관순 열사도 체포되어 천한
헌병대로 끌려갔다가 공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고 7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이 형량은 어처구니 없는
[음악]
처분이었다 형무소로
이감되나 에서 3년으로 그 형기가
줄었고 또 영친왕의 결혼으로 특별
연영이 내려져 형기가 1년 6개월로
줄어들게 되었죠 1년 6개월만 잘
참고 있으면 곧 출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0년 3월 1일
서대문 형무소 여자 감옥에서는
1919년 3월 1일에 만세 운동을
기념하며 다시 한번 의 독립을 바라는
만세의 함성이
폭발했습니다 여자 감옥에서 시작한
만세 함성은 남자 감옥으로 그리고
서대문 역무소 주변까지 퍼져 나갔고
그 일로 유관순 열사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치스럽고 지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극심한 고문으로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됩니다 유관순
열사는 일제의 고문으로 1920년
9월 19일 18살의 어린 나이에
석방 3개월을 앞두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 했습니다 일본은
그녀의 장례식에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했고 장례식은 쓸쓸하고
초라했지만
천국에서는 예수님의 엄청난 환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재판 때마다
늘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아고 말했다고 합니다 한창
친구들과 소란스런 수다를 떨며 환하게
웃고 사춘기의 유세를 부려야 할
나이에 유관순 열사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이 소녀가 바로 히브리서
11장
33절에 믿음으로 나라를이긴 그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나라를이긴
그리스도인은 다음 시간에
[음악]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