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자유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 이승만5 /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의 시작), #이승만과자유민주주의의시작,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
161 팔로워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최수용,#글로벌디펜스뉴스,#성상훈의국내외정세분석,
1)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월정기 후원 바로가기 (https://me2.kr/exHVc)
2)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역사전쟁' 후원계좌 (우리은행 : 1005 -204-476779 : 예금주 :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본 채널에 영상이 한 동안 올라오지 않으면 구글코리아에 의해서 방송이 차단된 것으로 생각하시고 아래의 채널로 오세요.
1. http://www.k-cia.kr/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홈페이지 개설)
2. https://url.kr/of12r8 (글로벌디펜스뉴스)
3. https://url.kr/4ib1wo (성상훈의 국내외정세분석)
구글코리아가 본 채널의 영상에 대해서 '광고 적합' 메일을 보낸 뒤, 하루 뒤 '증오심 표현'으로 경고를 하고 임의로 영상을 삭제한 사례가 실제로 발생하였습니다. 언제든지 본 채널이 차단될 수 있으나,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홈페이지( http://www.k-cia.kr/ )로 오시면 중단없이 방송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 구글코리아가 광고적합 메일을 보낸 뒤, 임의로 삭제한 영상 바로가기 (https://url.kr/qklhnr )
(2편)북한, 보수유투버 파괴 지령 종북주사파에게 하달, 한국인터넷진흥원편
2. 구글코리아의 블랙리스트 언론탄압 '광고 붙여 놓고 임의 삭제' (https://vo.la/j1fsE)
- 최수용 올림 -
대한민국
군현대사를
성경적 세계관으로 열리고 전하는
대안역사문화원의
한국군용대사 발화하기 특강입니다
[음악]
자유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
5번째 이야기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간 이승만의 이야기입니다
우생마사라는 사자성어를 들어보셨나요
평상시
잔잔한 강이나 호수에 소와 말을
풀어놓으면
둘 다 헤엄쳐 살아 나옵니다 하지만
홍수가 나서 물살이 거셀 때 소아마리
강에 빠지면
헤엄이 서툰 손은 살아남고
힘이 세고 헤엄을 잘 치는 말은
죽는다고 합니다
말은 거센 물살을 거스르려고
발버둥치다 힘이 빠져 죽지만
손은 물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가며
육지를 밟고 살아나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이승만의
인생이 바로
우생마사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믿고
저항하던 때 오히려 절망뿐이었다면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난 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고
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며
놀라운 역사를 주도한 이승만의 행보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번 시간엔
먼저 이승만이 조선을 넘어 드디어
세계 무대로 걸어 들어가는 그 시작점
미국 유학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904년
8월 7일 이승만이 투옥된지
5년 7개월 만에 한성 감옥에서
추록했을 때 대한제국은
여전히
러일전쟁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전쟁의 양상은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져 있었죠
이승만은
초록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그의
비망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감옥에 낡은 철문을 걸어 나왔을 때
대한제국 정부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이미 분쇄되었고
승리한 일본군은 대안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일본은 대안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전 세계에 알려져
있었고 그래서
서방국가들의 정신적 내지는 물질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지금 일본은
대안을 그들의 군대 소나기에 넣었고
그들이 보호할 것이라고 약속했던 바로
그 삶을 대안에서
약탈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랬습니다
을사늑약이나 한일합방까지 갈 것도
없이 이미 조선은 일본의 소나기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죠
그런데이 상황이 전적으로 일본만의
만행일까요 우리의
책임은 없었던 것일까요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으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달 23일
덕수궁에서 한일 의정서가 작성됩니다이
의정서의 핵심은 대한제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대한제국을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한다는 것이었고이
의정서에 고종이 합의서명을 하면서
일본은
어떤 제재도 없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들여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1904년
8월 22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확정 지어갈 무렵 대한제국가
일본은 제1차 한일협약을
맺게
됩니다이 협약의 핵심은 일본인을
대한제국 정부 재정 외교 고문으로 안
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도둑에게 안방을 내어준 격이었죠
겉으로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힘없는 나라가
굴복한 듯
보이지만이 협약 이면에는 한편의
막장 드라마와 같은
뒷거래가 있었고 그 결과 이런
굴욕적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로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은 한일 의정서 체결전인
1904년 2월 17일 이미 창덕궁
후원을 일본군 12사단에게
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일 의정서가
체결된 후인 3월 20일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의 특사로 보내
고종을 아련케 했습니다 일본의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아련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로
고종에게
뇌물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었죠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선물이라며
30만 엔을 안겨주었습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해 보면
약
400억에 달하는
거금입니다뿐만 아니라
고종에게 경부선 철도 지분도
보장해주고
앞으로 경의선 철도의 지분도
보장한다는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게다가 그날 그 자리에 함께한 일부
대신들에게도
입막음용 뇌물이 제공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8월 대한제국 정부의 일본인 재정
외교 고문을 앉히는 제1차 한일협약에
동의할
수밖에요이 일을 지켜본 민영화는이
분통 터지는 상황을 영국 공사 간의
방문해 영국 공사 조던에게 전하였고
영국 공사관에서는이
민망한 사건을 기록하여 영국 외무성
문서보전소에 보관해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종을 일본의 총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한 불쌍한 개혁군주처럼
믿고 싶어 하죠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을사늑약 체결전 이미 고종과 일부
조정 대신들이 일본에게 돈을 받고
대한제국을 넘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 대한 제국 조정
대신 중 나라를 걱정하던 한규설과
민영화는
고종에게 조미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미국의
밀사를 보내 일본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모색하려 했습니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1882년 조선이 서양 나라와 맺은
첫 번째
국제조약으로 미국과 맺은 것이었습니다
전문 14조로 이루어진이 조약의
제1조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은
즉각 이해 개입 거중 조정을
행사함으로써 조선의 안보를
보장한다라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한규설과
민영화는이 조항을 근거로
고종에게 미국의 밀사를 파견할 것을
주청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추천한
밀사는 다름아닌 이승만이었죠
그러나 고종은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규설과 민영환의 끈질긴
설득으로 이승만은 대한제국 조정의
밀사가 되어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이 사진은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죠
이승만은 대한제국이 발행한
여권을 가지고
1904년 11월 4일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대한제국 조정의 밀사로서 대한제국을
떠나
태평양을 건너 미국 워싱턴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이승만은 1904년 말
드디어 미국 la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먼저 미국에 와 있던
신금호 신흥호 형제 그리고 배재학당
학우들과 제외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것은 1904년 말이었지만
이승만은 곧바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이듬해인 1905년
8월 4일이 되어서야 그 만남이
이루어졌죠
이승만이 미합중국 대통령 루즈벨트를
만나 대한제국의 위태함을 알리고
대안의 독립을 보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러 가는 길에는 그 당시
하와이에 살던
윤병구 목사가 동행했습니다 이승만과
윤목사가
루즈벨트를 만나러 가는 그날
뉴욕 타임즈에는 대한제국 조정의 밀사
이승만과 김병구 목사가
시오도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게 될 것이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날 이승만과 윤병구
목사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려던
청원서입니다
1908년
기자
맥켄지가 자신의 책 대한제국의 비극
부록으로 대한제국
독립 청원서를 수록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내용을 알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뉴욕 동부
롱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 사가모어 힐에
있는 대통령의 별장에서
루즈벨트를 만나게 됩니다
루즈벨트는 아주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두 사람을 맞아주었습니다
이승만은 조미수호 통상 조약을 근거로
위태함에 처한 불쌍한 나라를 건져
달라는
독립 청원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정중하게 지금 당장 그
청원서를 받아주지 못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런 공적인 문서는 사적으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죠이
청원서를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다시
자신에게 전달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이 말은 아주 정중히 거절을
통보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루즈벨트의 속내를 알 길 없는 두
사람은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향했습니다
이승만과 윤병구 목사가
루즈벨트 별장에서 나왔을 때 수많은
기자들은이 만남의 결과를 궁금해
했습니다 이승만은
기자들에게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이
청원서가 대통령께 공식적으로 전달돼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간다고 말했고
기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일인 양 두
사람을 재촉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두 사람은
워싱턴에 있는 대한제국 공사관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 공사관에는 공사가
공석이었고 공사 서리가 그 업무를
대신했는데 공사
서린은 김윤정이었습니다
이승만은 김윤정을 통해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대한제국의
독립 청원서를 공식적으로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자 김윤정은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김현정은 이미 일본의 매수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결과가 나온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1905년
7월 29일 미국은 이미 일본과
비밀조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 조약이
바로 가쓰라 테프트 미략입니다
미국 육군 장관 테프트와 일본의 내각
총리 대신 가쓰라가
도쿄에서 맺은이 비밀협약은 두 나라가
서로의 식민지를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루즈벨트가 대한제국의 청원서를
받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이 일이 무산되자 이승만은
너무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승만은이 모든 과정을 자세히
민영환에게 편지로 알렸습니다
편지 일부를 살펴볼까요
다만 언제든지기에 있는 대로 조미수호
통상조약을 2년하여 불쌍한 나라의
위태함을 건져주기 바랍니다 하니
루즈벨트의 대답은
앞서 말한 것처럼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청원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승만과
윤목사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이승만을 놀라게 한 일도
적었습니다
그 시로
뉴욕에 와서 기차를 타고
밤을지나 아침에 워싱턴에 도착해보니
각 신문의 모두 나고
벌써 우리가 워싱턴에 왔다고
났으니이는 지금 우리나라 형편에
돈을 신문사에 준다 해도 이렇게
기사를 낼 수 없는 일이라
목석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어떻게
기쁘지 않을까
즉시 공사관에 가서 김윤정에게
청원서를 보이고
신문사에 돈을 줘도
기사인 줄 나가기 어려운 상황에
이렇게 많은 신문이 대안의 일을
보도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너무 놀라고
기뻐하는 이승만의 얼굴이 상상이
되시나요
그런데
공사대리 김윤정은
결국 그 청원서를 받지 않았다는 거죠
이승만은 그 분한 마음을
편지 말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실로 우리나라 원수는 일본 사람이나
러시아 사람이 아니요
실로
돈에 팔려 다니는 놈들이 우리의 제일
원수라 합니다이는 우리 말이 아니라이
나라 사람들이 땅을 치며 하는
말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너의 나라는
일본이 와서 마음대로 하여야
참 복이라고 합니다 김가를
당장 파직 시키거나 소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내가 물고
뜯기라도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나라는 어찌 되든 말든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내일도
그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1905년 11월 18일 대한제국은
일본과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을 빼앗기며 사실상 일본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 책임은
왕과 조정 대신 그리고
백성 모두의 것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밀사로서 사명을 마친 후 유학을
하기로 계획했습니다
선교사들 역시 이승만에게 유학을
권했고
언더우드 선교사와 개일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가 이승만을 위해 진
심어린 추천서를 써주었습니다 미국에서
추천서란 그 사람을 내가 보증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만큼 아무에게나
써주지도 않고 받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선교사가 이승만을 위해 추천서를
써주었다는 것은 이승만의 됨됨이가
훌륭했고
성실하고 유능했다는 것을 의미하죠
개일 선교사는
워싱턴 및 미국 각지에 있는 기독교
형제들에게 그리고
워싱턴 계약 교회의 루이스 햄님
목사님에게 보내는 두통의 추천서를
써주었는데 개일 선교사는이 추천서를
통해 이승만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추천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승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실함 한성
감옥에서의 개종과 한성 감옥의 기적
그의 세례 문제 그리고
앞으로 이승만의 학업에 도움을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언더우드 게일선교사와
여러 선교사의 추천서를 합하여 모두
19통의
추천서를 가지고 미국에 온 것입니다
개일 선교사의 요청으로 이승만은
1905년
4월 23일
워싱턴 계약 교회에
햄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 교회의
성도로 미국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승만이 그때까지 세례를 못 받은
상태였는데 그 이유는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당시 서울에 있던 많은
선교사들 모두 이승만에게 세례를 주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이 서울에 있을 때 개일
선교사님에게 세례를 받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개일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들의 마음을 생각하여
미국의 햄님 목사에게 세례를 부탁한
것이죠 또 개의 선교사의 부탁대로
햄님 목사는 자신이 다니마는
워싱턴 계약 교회의 성도인 조지
워싱턴 대학 총장에게 이승만을
추천했고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한 학력이 인정되어
조지 워싱턴 대학 2학년 2학기로
편입하여 2년 동안 영어 미국사
유럽사
프랑스어
철학
천문학
경제학 등을 수강하며 1907년
6월 5일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어서 하버드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했는데요 그는 1년
만에 석사 과정을 마쳤다고 합니다
정말 빠른 속도였죠
1907년부터
1908년까지 1년 동안 미국사
유럽사
경제학
국제법과 중재 등의 과목을 수강했고
19세기 이탈리아 건국가정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게 되었죠
논문 제목만 봐도 이승만이 얼마나
역사와
국제정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사실 이승만의 하버드 시절은 너무나
큰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친일인사인 대한제국 정부 외교 고문을
맡고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저격당해 살해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를 저격한 사람은 전 명운과
장인환이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친밀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일본의 실체를
알지 못했던 터라이 사건 이후 한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는
얼음장 같이 변했습니다
이승만에게도 그 여파가 미쳐
석사 과정을 받는 동안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 시간을
견뎌낸 것이죠
그리고 이승만은 1908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과정에 들어갔습니다
프린스턴에서 이승만은 정치학과
국제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국제법과 외교 미국 헌법사 미국사
철학사뿐 아니라
심지어
신학교 기숙사 칼빈 클럽의 기숙하며
신학 강좌를 개절학기로 수강하여
신학 학사하기까지 취득했다고 합니다
학부부터 박사 과정까지 그의 수강
과목들을 보면
역사가 한 번도 빠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10년 이승만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주의라는
박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명문대학을 그것도 세 곳을 다니면서
5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니
정말로 놀랍죠
더구나 그의 박사 논문은
우수 논문으로
후일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할만큼 수준 높은
논문이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몇 년 후 이승만 박사가 일본의
탄압으로 미국 망명 생활을 시작하면서
단행본으로 나온 그 논문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엄친아 엄마 친구 아들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승만 박사가 바로
원조 엄친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미국인의 대학 진학률은
인구의 5% 밖에 안 되었다고 하는데
이승만 박사는 대학 대학원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미국 사람들도
부러워할 만한 학력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이승만 박사보다 뛰어난 학력 소지자가
없었다고 하니 이승만 박사는
당대에
엄친아 중 최고였다고 할 수 있죠
동시대의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더
유명한 대학을 다녔고 또 최초로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따냈기 때문에
군계일학적이었다고 하겠다 미국
대학에서 2년여 기간에
입문 사회과학 분야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한국인으로서 이승만이 최초일뿐 아니라
미국인으로서도
극히 드물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걸쳐 일본과 중국에서
우리보다 먼저 수많은 유학생을
구미에 파견했지만 그들 중에 이박사의
학력에
필적할 인물은
그리 많이 배출되지
않았다네 이승만은 정말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승만이 공부를 한 목적은 자신의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엔
늘 조선의 독립이 가장
간절했습니다
때문에 이승만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공부함과
동시에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강연과 연설을 하며 조선을 알리는
일에
힘을 다했습니다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을 졸업할
무렵부터
5년 동안
약 200번이 넘는 강의와 강연을
했다고 하는데 많으면 한 달에
13번까지 강연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일본의 처사가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예로 그의
인터뷰 기사들을 몇 가지 소개할까
합니다 그가 미국에 간지
얼마 되지 않은 1905년
6월 이승만의 인터뷰 기사가
워싱턴 타임즈의
실렸습니다이 광고는 어제 우리
타임지의 칼럼난에
게재할 것을 요청받은 것으로이
어린아이의 아버지인 이승만을 도와 그
소년이 거주할 곳을 찾아 주려는
목적이다
이 광고의 이면에는 어느 한국
출신자의 비상한 용기와 인내심
박해와 투옥에도
굴하지 않은 결심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이승만의 표현대로
한국은 지금 절실하게 기독교를 필요로
하고 있다
기억도 할 수 없이 오래전부터 그
나라를 지배해 온 유교를 대체하기
위해서이다 사실이
기사의 목적은 상의도 없이 미국으로
보내진 아들을 자신이 공부할 동안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인터뷰였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
기회를 잡아 조선의 상황을 이야기했고
그를 인터뷰한 기자는 이승만의 말에
매료되어 이승만의 말들을 신문에
고스란히 옮겨 주었습니다
이승만은
러일전쟁에 영향에 대해서
신문을 통해 일본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며
한국은 명목상의 독립만을 유지할
것이고 일본의 군사적 지배가
은자의 왕국 구석까지
퍼질 것이다라고
담대하게 외친 것입니다
1907년
6월 13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이승만이
ymca에서
강연한 내용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습니다
이승만은
강연에서
한국의 풍물 사진까지 동원했다
이승만이 보여준 100매가 넘는 사진
중에는
장 옷을 입고 언제나 눈을 내리 깔고
나들이 하는 중인계급 부인들의 사진도
포함되어
청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국의
양반집 여인들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는
지체 높은 여인네들은 집 밖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설을 마치자
청중 수백 명이 이승만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조선의 문화를 알리는 것이
무슨 나라를 구하는 일인가 싶으시죠
당시 미국에는 조선과 일본이 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또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조선의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죠
일본의 언론 플레이는 정말
놀라웠으니까요 때문에 이승만은 조선의
고유한 문화를 알려 조선이 독립적인
나라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뉴저지주 뉴욕크에서 발행한 모닝
스타지 1907년 7월 25일자
이승만 인터뷰 기사는 아시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일본과
러시아의 야욕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방법에서 두 나라는 다르다
지나친 자만으로 충만한 러시아는
러일전쟁 기간 중
외부 비판의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선량해 보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서양 문명이라는 양가죽으로
늑대 본성을 위장하려고 애썼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빈 수레가 요란한 셈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총은 조용히 적의
심장을 겨눈다 일본의
굴복한 한국인은 아무도 없다
강대국들은 정의의 대의를 위해
한마디도 못하고 있다 일본을 자극해
극동의 상업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 보이지 않는가
약속 국들에 대한 불의로
얼룩진 평화를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다
이승만이 하버드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할 당시인 1907년
평양에서는
장대현 교회를 시작으로
놀라운 대부흥이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습니다
1908년
피츠버그 1차 세계선교대회에서
이승만은 미국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지금 조선은
기회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미국의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은 여러분의
기회입니다 이러한 사정에 있는 나라가
무엇을 필요로 할 것인가 생각해
보시고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보살펴
주십시오
빨리 조선 땅에 들어가라 그리고
조선을 깨워라 그리고 조선을 도우라는
호소이자 조선을 살리려는
필사의 외침이었죠
이승만은 조선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꺽지 않았습니다
1908년 1월 1일
콜로라도 한인 애국 동지 대표자 대회
연설에서 그의 굽히지 않는
독립 의지와 간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조선이 일본에 질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조선의 역사는 일본보다 뛰어나다
조선은 반만년 이상 보존되어 왔으며
결코 지구상에서 말살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 연대론 대동화
공영을 외치며 아시아 일대를 소나기에
넣으려 했습니다
아시아 연대론이라는 것은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일본과 힘을 합쳐서
서양 나라를 막아내자는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일본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고 있을 때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일본에 의해 외교가 단절되어 버린
대한제국의 상황을 알리는
외교관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외교 통로가 단절된 상황에서 미국
대중에게
직접 대안 제국의 독립이 위협받는
상황을 알리는 공공 외교관으로 대안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인식시키는
문화 외교관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