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강) 자유를 위해 싸우다1 -고독한 망명자 이승만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
161 팔로워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최수용,#글로벌디펜스뉴스,#성상훈의국내외정세분석,
1)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월정기 후원 바로가기 (https://me2.kr/exHVc)
2)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역사전쟁' 후원계좌 (우리은행 : 1005 -204-476779 : 예금주 :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본 채널에 영상이 한 동안 올라오지 않으면 구글코리아에 의해서 방송이 차단된 것으로 생각하시고 아래의 채널로 오세요.
1. http://www.k-cia.kr/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홈페이지 개설)
2. https://url.kr/of12r8 (글로벌디펜스뉴스)
3. https://url.kr/4ib1wo (성상훈의 국내외정세분석)
구글코리아가 본 채널의 영상에 대해서 '광고 적합' 메일을 보낸 뒤, 하루 뒤 '증오심 표현'으로 경고를 하고 임의로 영상을 삭제한 사례가 실제로 발생하였습니다. 언제든지 본 채널이 차단될 수 있으나,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홈페이지( http://www.k-cia.kr/ )로 오시면 중단없이 방송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 구글코리아가 광고적합 메일을 보낸 뒤, 임의로 삭제한 영상 바로가기 (https://url.kr/qklhnr )
(2편)북한, 보수유투버 파괴 지령 종북주사파에게 하달, 한국인터넷진흥원편
2. 구글코리아의 블랙리스트 언론탄압 '광고 붙여 놓고 임의 삭제' (https://vo.la/j1fsE)
- 최수용 올림 -
대한민국 대를 성령
세관으로고 전하는 대한역사 문화원을
한사 바로기 특강입니다
[음악]
자유를 위해 싸우다 첫 번째 이야기
조국의 자유를 찾기 위해 고독한
망명길에 오른 이승만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이승만 박사가인 사건으로
일본의 표적이 되자 존모 교와 필립
질레트 선교사는 이박사를 보호하기
위해 미동부 미네소타주 미니의
폴리스에서 열리는 감리교 총회에
이박사를 한국 대표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1912년 3월 9일 14기 감리교회
지방 평신도 대표 회의를 통해 이승만
박사를 한국대표로
선출하였습니다
192년 26일 이박사는 남대문역에서
오전 9시 35분 발 부산행 열차에
올라 서울을
떠났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이날부터
자신이 미국에은 33년의 치열한 삶을
로그북 오브 SR 이승만의 항해
일기라는 제목의 일지에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특별히 서울을 떠나던
1912년 3월 26 부터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1913년 2월 3일까지 1년의
행적은 그 어느 해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지금부터 그 1년의
행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미니애 폴리스로 가는 길에
이승만 박사는 3월 27일부터 4월
10일까지 약 보름 동안 일본에서
조선 기독교인 유학생을 위한 출영
유학생들을 위한 전도 강연 집회를
인도하고 유학생들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며 조선 유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독립의 의지를 심어 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박사의 일본 방문길에
서울 YMCA 미국인 총무 질레트
선교사 이상제 선생 그리고 감리교
선교사 윌라드 크레이
동행했습니다 이승만 박사와 그 일행은
부산을 출발해 다음 날인 3월 27일
오전 8시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교토를 거쳐
29일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이박사 일행이 도쿄
신바시 역에 도착했을 때
한국유학생 23명이 이박사를
맞이했습니다 당시 한국 사람 중 가장
유명 인사였던 이승만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날 밤에는이 박사의
도착 시간을 잘못 알고 나온
100여명의 학생들이 허탕을 치고
돌아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승만
박사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높은
기대감을 실감하게 되는 이하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30일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97km 떨어진
가마쿠라에 도착해 가마 쿠라 출회를
인도했습니다 가마쿠라 출회 서울
YMCA 도쿄의 조선
YMCA 공동으로 계획하고 주최한
행사였습니다 이승만 박사가이 집회에
대해 YMCA 국제위원회 보고한
보고서에 따르면 가마쿠라 출에
1912년 3월 30일 오후 7시에
14명의 기독교인 한국 유학생과 서울
YMCA 소속 질레트 선교사 이상제
크램 선교사 그리고 공동 주체자인
도쿄의 조선 YMCA 총무 김정식
부총무 최상호 등이 참석했다고
합니다이 박사는 부총무 최상호 대한
설명을 덧붙였는데 최상호는
1911년 개성 한 서원 하령회 끝난
뒤 도쿄로 파견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지난 여름 개성 한영서원
하령회 열매였다
것이죠 이승만 박사의 개막 연설로
시작된 가마쿠라 출력에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집회를 인도했던이 박사는
물론 유학생을 비롯한 모든 참가자가
영적 회복 과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이 집회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동네 주민들이 령에서
흘러나오는 찬양소리에 이끌려 집회
장소 창가로 모여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마쿠라 출력에는 집회와 강연
성경 공부 기도회 그리고 토론 등으로
진행되었습니다이 박사는 집회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이 아 공부였고 하면서
성경공부에 임하는 학생들의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를
칭찬했습니다 학생들은 성경 연구와
함께 기도 시간도 철저히 지켰고 집회
도중에 사회자가 공동 기도를 요청하면
두 세 사람씩 앞을 다투어 기도를
했다며 출력의 성경 공부 시간의
열기를 보고서에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특별히 토론 시간에는
기독교인으로서 학생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주제가 제시되자 복음을
전하는데 시간을 헌신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져 학생 복음 전도단이
조직되기
했습니다 가마쿠라 출력에는 한한국
유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열정과
나라사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끝까지
감당할 책임감이 부어지는 놀라운
시간이 되었고 이때부터 도쿄 조선
YMCA n 해마다 봄이나 가을에
정기적으로 이와 같은 학생 집회를
열어 복음을 전하고 나라에 대한
책임감을 깨웠다고 합니다 약 5일
동안의 집회를 마친 이박사 일행은
4월 6일 오전 가마쿠라를 떠나
도쿄로
향했습니다 도쿄에 도착했을 때 유학생
친목회 대표 24명이 이승만 박사를
위한 환영의 겸 송별의 자리를 마련해
두고 이박사를
맞았습니다이 사진이 바로 그날
이박사와 학생 대표들이 비를 맞으면서
호텔 현관 앞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날 저녁 도쿄 조선
YMCA 회관에서는 유학생들을 위한
특별 전도 강연회가 열렸는데
28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모여들어
에까지 서서 이박사의 강연을 들었다고
합니다이 집회에서 이승만 박사는 한국
학생들에게 거는 기대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신앙과 나라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강의가 끝나자 그 자리는
성령 충만함과 애국심으로 불타
올랐다고 합니다 그날 학사의
강연을들은 양반 출신 유학생 중
여러시 기독교로 개종했고 다음 주일
아침에는 도쿄 교회에서 명이 세례를
받고 36명이 학습 교인이 될 정도로
강연의 여파는
대단했습니다 비록 이박사가 일본에
머문 시간은 약 보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이박사가 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이박사의 강연을 들었거나
개인적인 만남을 가진 유학생 중 후일
28 독립선언과 3일운동 그리고 임시
정부 활동을 포함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중추적 역할을 한 이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사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우연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분명히 이승만이 한 사람을 들어 우리
민족에게 자유를 선물하시려는 하나님의
완전한
인도하심이
1912년 4월 10일 이승만 박사는
감리교 목사 해리스 감독과 함께
요꼬하마 항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내내이
박사는 해리스 감독으로부터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거북한 충고와 함께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감리교
총회에서 일본에 대한 그 어떤 비난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박사는 해리스 감독을 설득하려
했지만 마치 바이에 되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드디어이
박사는 미니애폴리스에 도착해 26차
감리교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박사는 그곳에서
큰 실망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박사가 기독교나 민주주의 정신은
약자를 보호하데 있다 지금 일본은
무력으로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한국인을 지독히 탄압하고 있다 그러니
전 세계 기독교인은 모름지기
결단하여이 핍박받는 민족을 하루빨리
해방하고 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고 가
세계 평화 유지에 이바지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호소했지만 총의
참석자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시아
선교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박사의 발언에 대해 싸늘하기만
했습니다 감리교 총회가 끝난 후
이박사가 하와이 정착을 결정하기까지
1년 가까운 고뇌의 시간을 보내
했습니다이 박사가 미국에 오면서 가장
기대했던 것 중 하나는 프린스턴 시절
은사인 우드로 윌슨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드로 윌슨은 1910년
민주당 소속으로 뉴저지주 지사에
당선되어 정치가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2년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급부상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박사는 윌슨이 한국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6월 19일
드디어 우드로 윌슨가의 만남이
성사되었습니다 윌슨은 이박사를 뉴저지
시 거트의 있는 주지사의 여름
별장으로
초대했습니다 스승인 우드로 윌슨을
만난 이승만 박사는 한국의 독립을
세계에 호소하는 청원서의 동의서명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윌슨은 다음과
같이 정중히 거절합니다
나 개인으로서는 거기에 물론 서명해
드리고도 쉽소 서명할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을 도와 주려고도 하오
그렇지만 미국의 정치를 위해서는
아직은 내가 당신의 성명서에 도장을
찍을 때는 아니요 그러나 이제 우리가
같이 일할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니
그것을 믿으시오 그렇지 않아도 나는
벌써부터 당신의 조국 한국을 포함한
모든 약소 민족 국가들의 일을 생각해
오고 있는 중이요 하지만이 박사는
다시 한번 윌슨을 설득하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상 유지의 정치보다
정의로운 미래를 위해 재편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자 윌슨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이요 그렇지만
모든 일의 해결에는 그 적당한 때가
있는 것이요 하여간 내 당신의 갸륵한
뜻을 명심해 두리다 윌슨은이 박사에게
지방 순해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사람을 소개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당신은 나 한 사람의
도장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미국
국민 마음의 도장을 모두 받도록
하시오
1912년 8월 사는 네브레스카 주의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옥중 동지이자 의형제 박용만을
방문합니다
이박사와 박용만은 앞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들의 진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당시 미국내 한국동포 들이 가장 많은
하와이에 독립운동 전진 기지를 만들어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펼치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때 이박사가
하와이 행을 완전히 결정지은 것은
아니지만 박용만과 만남은이 박사가
하와이 정착을 결심한 큰 이유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합니다 1912년이 저물어가는
연말 타코마에 있던
박사는 하와이 제일 감리교의 감리사
와이드먼 목사를
만납니다 와이드먼 목사는 1904년
이박사가 밀사의 자격으로 미국에
오면서 하와이에 들렀을 때 동포들을
상대로 연설하도록 저녁 집회를 주선해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와이드먼 목사는 이승만
박사에게 미감리회 운영 중인 하와이
한인학교 교장직을 제안했고 이박사를
하와이로
초청했습니다 이런 여러 조건이 모여
이박사는 하와이 행을 확정지었고
그동안 포기하지 못하고 있던 귀국의
간절한 희망을 접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망명 생활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이 박사는 1913년 1월
28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로
향했습니다 약 일주일의 항해 끝에
이승만 박사를 태운 배는
1913년 2월 3일 오전 8시
하와이 오하우섬 호놀룰루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하와이에 와 있던
박용만이이 박사에 대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선전을 했던지 수많은
동포가 한구에 나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이박사를
맞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박사를 마중
나온 동포들의 얼굴빛은이 박사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하다고 하기엔 너무
어두웠습니다 그 이유는 이박사가
도착하기 전이 박사에 붙인 이경선
옹이 두 달 전인
1912년 12월 5일 별세했다는
소식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그 슬픈
소식을이 박사에게 전해야 했기
때문이었죠 이박사를 한은 동포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와이의 유력한 인사들
역시이 박사에 대한 관심을 신문
기사로
표했습니다 하와이에서 영향력 있는
신문 중 하나인 호노룰루 스타 리트는
1913년 2월 8일자에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입성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이승만
박사보다 더 위대한 종교 지도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제일감리
교회의 한국인 및 일본인 관계 사업
책임자 와이드먼 박사의 초청으로
호놀룰루를 방문하고 있다라고 시작하여
이박사의 젊은 시절 신문과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과 활동
그로 인한 한성감옥 투옥과 한성
감옥에서의 일들 그리고 미국 유학
가정 및 박사 하기 취득 등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또 함께 실린 다른
기사는 다음날인 일요일에 있을 중앙
연합 교회에서의 강연 계획을 알리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한국인이다 그는 7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했고 2년 동안
서울 YMCA 총무로 활동했다 그러한
그가 오전 예배 시간에 그의 경험에
대한 흥미 있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많은 참석자들이 이승만 씨를 환영할
것이
기대된다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한국인으로 소개되었고 하와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에서 강연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다른 어떤 한국
사람도 기대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이 박사가 이렇게 된 것은
운이 좋아서도 자신의 탁월함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이
이박사는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늘 고백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박사를 한성
감옥이라는 훈련소에서 단련하시고 미국
유학을 통해 지도자적 면모를 갖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동포들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의 눈에도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 준비된 희망으로 보이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제 이승만 박사는
조국의 자유를 찾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싸우는 독립운동가의 삶을 이곳
하와이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용을 정리해 볼까요
이승만 박사는 배인 사건으로 고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정해진
목적지는
미니애폴리스 미니애폴리스 가기 전
이박사는 일본에 있던 한국 유학생을
위한 가마쿠라 출영 도쿄 조선
YMCA 전도 강연 집회를 인도하게
됩니다 약 보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박사의 외침은 한국 유학생들의
마음에 기독교 신앙과 독립의 열망을
가득
불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감리교 총회에
참석한 이승만 박사는 미국
기독교인들을 향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지만 아시아 선교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박사의 호소는
외면당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대했던 우드로 윌슨과 만남도
마찬가지
결과였습니다 그후 이승만 박사는 옥중
동지이자 의제였던 박용만을 만나며
미국 내에 한국 동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하와이에서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구상합니다
하지만 이박사의 마음은 그때까지도
고국으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를 하와이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박사는 이제 귀 소망을
접고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과 하와이
유수 언론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독립운동을 위해 하와이에
[음악]
입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