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명의 잊혀진 이순신급 구국영웅,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인물 황진

역사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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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황진 장군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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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서 돋보기입니다 조선
시대 일본이 우리를 7년이나 괴롭혔던
전쟁 임진 혜란 하지만 조선에서
열렬히 싸워 주신 영웅들 덕에 우리는
일본군을 격퇴하고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이 영웅들은 굉장히 많은
분들이 스스로를 희생하며 활약을 해
주셨습니다 다만 이순신 권율 곽재우
등 워낙 유명한 영웅들의 이름의
무게가 확고하다 보니 다소 명성과
인지도가 그만큼 각광받지 못한
영웅들도 있었는데요 그중에서
황진이라는 인진 란의 또 한 명의
구국 영웅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황진의 대한 구체적인 설명 전에
조선왕족 실록에서 황진의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장대한 체격에 아름다운 수염을 지니어
모습이 뛰어나고 훌륭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으며 완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강건하며 민첩함이
나르는 호랑이와 같았다 황지은 고상
황희의 대손으로 써 용맹 권장하고
화를 잘 수 왔으며 엄중하고 충진하여
기절이 남보다 뛰어났다 진무가 파하고
나면 갑옷을 입고 말을 달리면서 혹은
뛰어넘기도 하고 위로 솟구치기도 하며
용맹을 익혔다 하나같이 그의 용맹함을
극찬하는 기사들이 황제는 그 유명한
황위 정승 집안의 후손으로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었다 갓 무과에 급제했던 무렵엔
북방의 야인 여진 족들의 약탈이
심해질 때였습니다 1583년 니탕개의
난이라고 야인 여진이 대규모로 조선을
침공해 왔는데 이때 실리를 보조하며
니탕개의 난 진남 전에 참여하였으며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산을
침공한에만의 정보가 돌 때 진상
확인차 선조는 황윤길 김성일을
일본으로 보냈는데 황진 역시이 사신단
행렬에 있었답니다 이후 전라도 화순의
현감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조선의 구왕
선조는 부사 김성일의 말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쪽을 믿었던 반면
역시 함께 일본에 다녀온 황지은
전원을 금세 감지하고 그가 발령받은
고울 만이라도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였습니다 조선왕족 실록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황지은 김성일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 외변이 장착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매일 공무가 끝나면 곧바로 말타기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 그러다 결국
임진 해란이 터졌고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했습니다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한양을 점령할 계획이라 후방을 다
정리하지 않은 채 빠르게 북상했다
한반도 삼남 지방의 병력들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광이 이끄는 전라도
병력 윤국 형이 끄는 충청도 병력
김수가 끄는 경상도 병력 도합 6만
명이 한양 쪽으로 북상하다가 용인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일본군과
맞닥뜨립니다이 전투가 용인 전투인데
6만 명의 조선군이 고작 1600명의
일본군에게 패전하여 와해되어
버렸습니다 화순의 현감이 있던 황진
역시이 용인 전투에 참전해 있었습니다
용인 전투에서의 패배는 숙련되지 않은
지휘부의 조직적이지 못한 군율 때문에
패전하는 것이었죠 다만 조선왕족 실록
기록에 의하면 6만의 조선군이 모두
와해 될때 오직 황진의 부대만이
온전하다고 합니다 한편 바다에서는
이순신장군이 연이어 승전고를 울리며
남해안 재해권을 장악하고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보급을 해 주지 못해
일본군 전체에 비상이 걸립니다
이순신의 활약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충청도를 담당하고 있던 제 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게 육지를 통해
이순신의 뒤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조선
육군이 이순신을 치러 호남 지방으로
내려가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막기
위해 출전하니이 전투가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이자 웅치 이치 모두
충남에서 전라도로 진입할 때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고객들입니다이 웅치과
치에서는 아주 치열한 싸움이 전겨
되었습니다 용인 전투 이후 황제는
남원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웅치 올라 라는 지시를
받아 뒤늦게 웅치 향하였습니다 황진이
웅치 향했을 땐 이미 조선 관군과
의병 부대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받고 일본군이 막 웅치 뚫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황진의 부대가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했고 놀란
일본군은 도주하자 이렇게 웅치
방면에서 일본군의 진구는 저지되었다
웅치 전투 이후 황지은 곧바로 이치로
넘어가서 이치 전투를 지휘하던
권율장군의 부대와 합류합니다 이치
전투에서도 황진의 맹활약으로 조선군은
이치를 막아 내었습니다 조선 왕족
실록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죠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피하였고 피가 흘러 초목 아지
피비린 내가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 권율이
장사들을 동료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현재 온전한 부대를
이끌고 있는 장수들에게 전주로 다
모이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전주는
전라도의 행정 중심지 였기에 전주만
그은 지켜야 했죠 황진 역시 전주로
들어가 우주 방어에 임했습니다 웅치
이치에서 이미 막힌 일본군은 비록
전주로 내려오지 못해 전주에서는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 모두 참전했던 황진 더어
백성들은 황진이 전라도를 지켜 냈다며
환호했습니다 이순신장군이 육로로 남아
수 있는 일본 육군을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해전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 두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끈 황진의 공이 대단하다고
봐야겠죠 황진의 권유를 잘 따랐다고
합니다 전라도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이후 권유를 황진의 이제 전세가
조금씩 기울고 있으며 일본군은 반드시
북쪽에서 한양 쪽으로 후퇴하여 내려올
테니 주 전장은 경기도가 될 것이라는
말에 황지은 수원에 들어가 전장에
대비했습니다 한번은 수원 근처를
황진이 소수인원만 데리고 순찰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수십명의 일본군과
마주쳤고 황진의 부장들이 전부
도망가자 황진 혼자서 그 일본군을
모두 처리하였다 일화도 전해지죠
연이용 공로의 1593년 황지은
충청도 전체의 군사권을 지휘하는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습니다
충청 병마절도사로 있으면서 성
보수공사를 지시했는데 뭐 일반
병사들과 허울 없이 상의를 탈이라고
본인도 직접 돌려 날랐다고 합니다
이후 경기도 안성의 죽주 산성에서
천여명의 병사들로 황지은 4천여명의
일본군과 싸워 무찔렀고 도망치는
일본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경북
상주에서 그들을 모조리 토벌
하였습니다 1593년 중반기부터 이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휴전 회담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명나라 측에선
신유경이 조선으로 와서 고니 시와
강화 협상을 시도하는데 하의를 전혀
보지 못한 부분에서 대화가 나아가지
못하자 일단 합의한 부분을 먼저
이행하기로 합니다 먼저 전 일본군
병력을 남해안 일대로 철수시킬 테니
철수를 보장할 것 그리고 일본군이
인질로 데리고 있던 선조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 무사 귀환시 Que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일단 일본군
전 병력이 남해안으로 이동하는데
일본에 있던 도요토미 히우 씨는
일본군 각 부대 대장들게 밀령
내렸습니다 한반도 남해안 쪽으로 전
부대가 철수하는 대로 진주성 만큼은
함락 시키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진주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혹시 나중에 협상이 결
되고 전쟁이 제기하면 당장에 이순신의
조선 수건부터 공격할 목적으로 진주성
만큼은 함락하자 것이었죠 일전 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 시민이
지휘하는 전쟁에서 일본군이
졌단다 어떻게든 진주성은 함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임진한 투입된 전 일본
병력 10만 명이 전부 진주성 하나에
투입된 겁니다 당연히 휴전이 성사된
줄 알고 명나라는 조선은 전혀 생각을
못 하고 있었죠 인근 관군과
의병장들이 모두 진주성으로 급히 모여
진주 성을 지키려고 했지만 고작
6,000명 제 2차 진주성 전투는
너무 말이 안 되는 전투였습니다 이때
황지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누가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병사들을 이끄며 진주성으로
들어왔습니다 함께 싸우겠다고
6,000명의 조선군이 10만 명의
적군을 상대로 파리를 버텨냅니다
역시나 황진의 활약은 눈부셨어 그러나
전투 7일 만에 황진의 조총에 맞아
전사합니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날
6월 29일 결국 진주성은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진주성 입성 후진 주성 민간
백성들에 대한 너무나도 끔찍한
대학살을 자행하다 징비록은 당시
상황에 대해 외적은 성을 파괴하고
참모를 메웠을뿐 아니라 우물도
묻어버리고 나무도 모조리 베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러 지난 패배에 분풀이를
했다 달과 개마저 남은 것이 없었다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우리 병사와 백성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니 외적의 침입이
시작된 일에 이처럼 많은 사람이 죽은
적은 없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마저 황진의 전사 소식에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황진 무하고 황진의 공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후대의 조선 조정과
그리고 민간 백성들까지 황진의 활약에
감사했으며 오늘 날에 우리도 황진의
공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역서 돋보이 있습니다
저희 역서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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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리겠습니다 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