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스님의 어원으로 보는 불교 29강 사념처수행 두번째 자아가 허상이라는 것을 체득하는 수행 편입니다.
사념처(四念處) 수행은 흔히 신수심법(身受心法) 즉 사념처는 불교의 37도품 수행법 중 한 그룹으로, 몸, 느낌, 마음, 법을 관찰하는 네 가지 알아차림(sati, 사띠) 수행 또는 명상법을 말합니다. 이 네 가지를 각각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라고 합니다. 사념처는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팔정도 가운데 정념(sammā-sati)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사념처 수행을 바로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번역의 문제입니다. 부처님은 존재하는 사념처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네가지의 현상을 관찰하라고 했는데 이를 무언가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잘 이해하면 실제의 자아는 없으며 기억위에 세워진 허상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안녕하십니까 고강 있니다 오늘은 저번
시간에이어서 사념
처를 그 알아볼 건데요 저번 시간에는
그 4념처 그
[음악]
신념처럼 겠지만 그 우리는
염차경이라고 하는 그 경전이 제목이
말해 주듯이
어이 경전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염철 말하려고이
경전을이 경전을 말했고 그러기 때문에
경전의 제목도 염처 있니다 근데
우리는 희한하게 그 대념 책이라든가
다른 그 어
그 번역된 경전들을 보면 염처 대한
얘기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이게 왜 염처 아는 이름으로
붙여졌는지 이해도 잘 안 되죠 그래서
계속 얘기하면은 신념처럼 말하면서도
몸에 관한 얘기만 하고요 그다음에
수념처 말하면서도 느낌에 관한 얘기만
하지 정확하게 그게 수행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얘기들을 어 잘
안 되고 있죠 그래서 어
문장을 면밀하게 그 분석해서 보면 아
이거는 어 조금 잘못된 번역 때문에
그렇구나 하는 거를 알 수 있게 되죠
그래서 제가 이제
그 느낌을 조금 살려서 그 번역한
문장들을 한번 읽어 보면 어 두
번째의 강염 이제 보통은 신수 신법을
사념처 부르고 두 번째를 수라고 보통
많이 번역을 하는데요 그게 아마 기본
표준으로서의 지금은 불교 내에서는
수념처 말하고 있는데이 번역자는 그
수를 느낌을 외단 아라고 하는 느낌을
감각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이분은 강염
아고 번역했어요 그래서 어 그렇게
생각해
보면 어 우리가 깨달을 각자가 써
있다고 해서 이게 꼭 깨달음이라고
번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좀
인지했으면
좋겠고요 그래서 강염 관해서 다시
한번 그 번역된 걸 읽어 보면 비구라
자들이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즐거운
느낌을 느꼈다고 알고 괴로운 느낌을
느꼈을 땐 곧 괴로움을 느낀 줄 알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꼈을
땐 곧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꼈다고 알기에 즐거운 몸과 괴로운
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몸 즐거운
마음 괴로운 마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과 즐거운 식사 즐거운
괴로운 식사 괴롭지도 좋지도 않은
식사와 즐거운 굶음 괴로운 굶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굶음 즐거운
욕망 괴로운 욕망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욕망을 한다고 하고 욕망이 없을
땐 욕망이 없이 즐거운 느낌 욕망이
없이 괴로운 느낌 욕망 없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꼈을 때 곧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면서 욕망이
없는 느낌을 느꼈다고 아는
것이다라고음 비하는 자들은 말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느낌을 관찰할 때
이렇게 우리에게 지금 이것은 즐거운
느낌인지
인지 이런 것들을 알아서 즐거운
느낌은 어떻게 하겠어요 취하고 괴로운
느낌은 버리려고 하는 방식을 통해서
느낌 수행을 한다는 거죠 사실 저도
이제 미안마 가서 그이 수념처 공부할
때
어 그런 식으로 배웠던 거 같아요
그래서 아 느낌에
대한 느낌에 대한
것들은 내가 느낌을 잘 알아차려서 어
괴로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는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 줄 알고 또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 줄 알고 이것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날
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관찰하라고 배웠어요 근데 어 사실은이
염처경 말하려고 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은 부처님이 말했던게 아니고
부처님이
염처 일어나는 감각을 관찰하라고
했더니 비구 하는 자들이 이런 것이
강염 생각하면서 잘못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죠 사실
어 괴로운 느낌이 늘 괴로운 느낌으로
있지도 않아요 또 즐거운 느낌이 늘
그 즐거운 느낌도 아니에요 그래서
이거는 그런 괴로운 느낌이나 즐거운
느낌으로써 존재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그를 괴로운 느낌으로 창조해 내는지
즐거운 느낌으로 창조해 내는지 등등이
드러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정말로
느낌을 느낌으로 이해하려면 뭘 해야
되냐면 부처님 뭐라 그랬냐면 이러한
것을 어 비고는 안의 느낌을 느낌과
같다고 관찰하고 외부의 느낌을 느낌과
같다고 관찰하며 세워진 기억에 느낌이
있다고 해야 아도 있고 봄도 있으며
밝음도 있고 통달이 있는
이렇게 말해야 비구가 느낌을 느낌과
같이 관찰했다고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즉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우리에게 느낌은 외부에서 전해지는
느낌도 있고요 안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되는 느낌도 있어요 그렇죠 어
외부에서 그 니비 설신이라고 니비
신이라고 하는 외부의 느낌을 감각한
것도 있지만 자체 내에서 생겨난 각도
있어요
그렇죠 아플 때 없든 느낌이 막
나타나잖아요 그죠 그럴 때 그런 안에
내부의 느낌도 일어나요 그랬을 때
정말로 느낌을 느낌이라고 안다면 그건
뭐냐면 외부에서 그 느낌이 있을 때
외부에서 들어온 느낌이 있을 때
이것은 무엇에서 일어난 느낌이냐면
지금
염처 만들어낸 기억 위에서 만들어 낸
느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느낌이라고 하는게 아
바깥의 느낌이고 또 안의 느낌인데
이것이 어 염처 만들어낸 그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기억 위에서
세워진 느낌인 것이지 그 느낌이
느낌으로서 존재하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무언가를 느꼈다고 했을
때 아 지금 기억 위에서 느낌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 사실을 이해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느낌에
대해서 어떡할까요 우리는
반응이 만약에이 느낌이 실제의 느낌이
아니고 나의 기억 속에서 저장된
느낌을 끄집어내서 어 드러내고 있는
느낌이라면 진짜 느낌이 아니라 구현된
느낌이겠죠 그렇다면 부연 느낌은
실제의 느낌이 아니기 때문에 집착의
대상이 될 수가
없어요 아 나한테
이렇게 지금 즐겁다는 느낌으로 구현된
환상이나 하는 사실을 이해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비구 비구니가 이렇다고
했다면 매우 어릴지라도 지금 여기
이제 여시 소소라 말을 매우
어릴지라도고 번역했는데 요거는 소소라
말이 그냥 별볼 일 없는 것이라고 그
해석할 수도 있어요 근데
이제음 아주 그냥 소소하고 별볼 일
없는 것이라 지라도 감각을 이렇게
관찰했다면 어 요런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어요 그거는 문장을 보는
사람마다 다른데 저는 조금 다르게 그
여시 소서를 매우
어릴지라도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거
가지요 뭐 시비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느낌을 느낌으로 관찰한 자일
것이고 일을 느낌을 느낌이 염처
관찰했다고 이르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우리가 수념처 정말로 해야 될
것은 아 느낌이 이렇게 기억 위에서
세워진 느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느낌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게
돼요 우리는 대부분 느낌 때문에
느낌에 집착을 하죠 그래서 그 느낌에
집착하다 보니까 좋은 것은 갖고
싶어져요 그다음에 싫은 느낌을 은
버리려고 한다고요 근데 만약에 그
느낌이 사실이
아니라면 집착하거나 미워해야 될 일이
없겠죠 그래서 이렇게 아 지금 나한테
감각이라고 하는 진짜 좋은 감각 나쁜
감각이 있어서 그 감각을 내가
감각한게
아니고 기억에서 만들어진 감각이
생산된 된 것을 실제 감각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럴 때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감각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이거야말로 감각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고 이것이 강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느낌을 느낌의
염 처하고 이해 해야 된다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어 세 번 세 번째는
이제 신념 처가 되겠죠 그러면 지금
여태까지 얘기한 거를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심념처 또 법념처
동일한 내용이 적용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우리가 여태까지 수행한 그
신념처럼이 가르침을 오해해서 일으켰던
수행이고 그것을 통해서는 절대로
나의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아요 무슨
일을 해도 잠시 내려놓을 수는 있어도
그게 완벽하게 해소되진 않아요 그래서
어 선방에 다니거나 아니면 수행처
있을 때는 그런 것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울 수 있는데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다시 다 원상 복기 된다는 거죠
그런데 비해서 어 그래서 이제 우리도
그 여기서 이제이 심념처 왜해야 되
면 마음의 염을 왜 생각해야 되냐면
우리는 마음이 실제로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렇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마음이 있어
가지고 감각 기관을 통해서 깥 대상을
볼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집착을
합니다 마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집착을
해요 그러다 보니까 어이 마음을
어떻게 관찰하면 어 비구라는 자들이
욕망이 있는 마음으로 욕망 욕망의
마음이 진짜로 있는 줄 알거나 욕망이
없는 마음으로 욕망의 마음이 진짜로
없는 줄 아니 성성 성냄이 있다거나
성냄이 없다고 하며 어리석음이
있다거나 어 어리석음이 없다고 하며
더러움이 있다거나 더러움이 없다고
하며 모임이 있다거나 흩어짐이 있다고
하며 낮음이 있다거나 높음이 있다고
하며 작음이 있다거나 큼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닦을 것을 닦지 않고 선정에
들어야 하는데 선정에 들어가지 않기에
해탈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고 하니
해탈하지 않는 마음이 진짜처럼 있는
줄 알고 존재하는 해탈이 마음으로
해탈이 마음이 진짜처럼 있는 줄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즉 다시 말하면에
는 해탈한 마음이 있고 해탈 될
마음이 있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는
거죠 근데 사실은 마음도 어떻게
드러나고 있어요 부처님이 연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염처 네이처와
웨이처치 자기의 마음이라고 여기고
외처 외부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그
작용으로 네이처와
외쳐가며 마음도 드러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실제로 마음이 있어 가지고
대상을 본게 아니라 내 마음 내가
안에 있는 그 내 입처 내 입처 아고
하는 그 마음의 작용이라고 하는
그것이 어 백가의 대상을 마치
바라보는 것처럼 그런 의식이 생성될
뿐이죠 그러니까 지금 나의 의식이
생성됨으로써 제로 그게 외부의 대상이
늘어났던 거 아니죠 왜냐하면 외부의
대상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죠 실제로 어 요즘에
생물학적으로도 또 그다음에 어 보면
바깥에 외부에 있는 그 신호가 생체
신호로 바뀌어서 뇌에 전달된다고 하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죠 근데 그것을 생체 신호가
들어온 신호를 해석해서 세상이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그 실제로 외부의 대상이 있는 것을
내가 마음이 속 안에 있어서 존재해
가지고 그 대상을 보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놀라운 것은 부처님께서 3천년
전에이 얘기를 하셨다는게 놀랍다는
거죠 어 지금은 사람들이 온갖 과학
장비들을 이용해서 그런 것들을 어
밝혀내고 있지만 부처님은 순수한
사유만으로 그 결론에 도달했고
더군다나 더 중요한 건 그 원리를
이용해서 어떻게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수행까지 가르쳤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지금이 사념처
아고 하는 수행을 통해서 어떻게이
환상을 느꼈다면 그 환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가를
트레이닝 시키기 위해서이 심념처 말했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어 마음이
일어나서 이거는 내 마음이야 아니면
무슨 좋은 느낌이 있어 가지고 뭘
느꼈어 아니면 내가이 좋은 마음이
있고 어리석은 마음이 있고 성내는
마음이 있어 뭐이 우리 그런 식으로
말하잖아요 성내는 마음 또 그다음에
좋아하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런
식의 생각들이 있어서 나는 지금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났고 성내는
마음이 일어났고 또 화 무슨 어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났고 탐심이
일어났고 이런 식으로 마음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각각의 마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고 근데 그런
마음들은 사실은 그렇게 존재했던게
아니죠 그래서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마음을 부처님이 어 이해하라고 그런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무엇을 해야
되냐면 아이 마음도 내 입처 외
입처서 만들어진 인식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마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확인하고 어 그 생각을
확립시키는
거예요 그러면이 마음이 계속해서 이런
마음을 확립 시키게 되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내 마음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버리게
돼요 그래야 벗어날 수 있어요 내
마음이 속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탐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해탈 한다고요 저희 그
극락세계에 간다고 바뀔까요 아니 안
바뀌어요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느낌은 계속 똑같이
지속되지 않아요 계속 변하기 때문에
다른 감각으로 바뀌어요 그러니까 내가
극락세계에 가서 있는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모래로 쫙 깔려져 있고 팔공
덕수 다 갖춰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보고 있으면 지루합니다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그래서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 마음에서 일으키고
있는 탐진 치료부터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이 아
이건 내 마음이야고 말할 때마다
어떻게 해요
이것은 그 세워진 기억 속에서 그
마음이 작동하고 있다고 이렇게
이해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것을 비구가
아이 마음이 마음과 같다고 관찰하고
밖의 마음도 마음과 같다고 관찰해야
세워진
기억에 번역이 잘못됐네 어 마음이
있다고 아는 것이고 암도 있고 봄도
있으며 밝음도 있고 통달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야 비구가 마음을
마과 같이 관찰한 것이다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념 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세워진
기억 위에 우리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지 마음이 있어 가지고
뭘 일으킨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 지금 내가
이거는 나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그러면 나는 그런 사랑하는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게 아니에요 그런 마음이
있어 가지고 뭘 한게 아니고 아 그런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것을 끊임없이 마음
이건 내 마음이야고 하는 느낌이 또
그다음에 내 마음이라고 인지가 일어날
때 항상 이것은 아 기억 위에 세워진
마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자기 자신에게 확인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의심이
없으면
아 내 속에 그렇게 존재하는 마음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겠죠 그러면 이때
뭐가 되겠어요 아 내 속에 잘하는게
있다는 생각이
사라진다고 부처님은 그래서 사념처
수행을 통해서 무화를 완성시키는
거예요
이게 부처님이 무화를 단순히 말했다고
해서 무아가 완성될까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끊임없이 자라 생각이
일어날 때
것이 기억 위에서 세워진 자라고 하는
사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럴 때
그것이 완벽하게 이해되고 그럴 때마
그랬을 때에
무아가 드러나서 더 이상 그것으로부터
어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드러나겠고요 우리가 사양 사과를
배우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
그죠 여기에 하나씩 하나씩 제거
되겠죠 수다원 과에서 뭐가 제일 먼저
그 사라진다 그랬어요 어 유신견이
사라진다 그랬어요
그렇죠이 몸이 존재한다고 하는 생각이
사라져요 그러면 거기서 두 번째
감각에 관한
신념처럼 더 이상
그 강염 수념처
그 제대로 작동하게 되면 그래서 더
이상 의심하는 마음이 없게
되면 뭐가 될까요 그때는 이제 수
수다원과에서 다과가 완성되겠죠 그렇죠
그다음에 여기서 다시 그이 심념처
어 확고하게 돼서 더 이상 마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는 생각이 떨어져
나간다면
떨어져
나간다면 우리는 아과의 성취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러면네 번째 남아 있는
법념처 우리는 법이라고 하는 것을
실제의 진리가 외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죠 그래서
부처님 법이 있을 거라고 다시 집착을
하게 돼요 진리가 따로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것에 대한 이제 설명
이제이 법념처 그래서 법념처 굉장히
좀 길긴 한데 그 부처님이 이제 법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법에 대해서 또다시
집착을 일으켜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말했던 법도 있지만
세 가지의 얘기를 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신수 심이라고 하는 세
가지의 염처 말했던 거와 같이 법도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법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의 대상으로서 드러나고 있는
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아 법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마음과
함께 드러나고 있는 것이고이 법조차
어떻게해요 세워진 기억 위에서
드러나고 있는 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는
즉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 법이라고
하는게 만호와 즉 의의 의근 의이
선행하고 난 다음에 의가 선행하고 난
다음에 만호가 선행하고 난 다음에
법이
드러나죠 그래서 이것이 서로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이제 법념처 돼요 그러면
우리가 어 진리가 있으니까 그거를 막
찾아가야 되
이렇게 생각하죠 수행을 할 때 그
진리를 내가 궁극의 어떤 진리에
합해야 된다든지 뭐 이런 식의 생각을
해요 근데 부처님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게 자기 나
안에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고
그래서 선사들도 항상 얘기하죠 진리는
깥 찾을 일이 아니라고 깥 구할 일이
아니라고 말해요 이거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에요 그래서이
법들이 벌어지고 있고이 법들이 되
법들 인해서 만들어진 세계 그것이
법계가 되겠죠 다르마 다투라 하는이
법계가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다면이 법계가 어디에서 드러나고
있냐면 그 세워진 기억 위에서
드러나고 있는게 법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몸 또 그다음에 느낌
마음 법 이네
가지가 결국에는 세워진 기억 위에서
아 기억 위에서 세워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겠죠 그래서 완전히이네
가지를 더 이상 의심이 없어 어 몸에
대해서도 느낌에 대해서도 마음에
대해서도 그 마음의 대상이 되는
법까지도 의심이 없어요 완벽하게
이해했고 더 이상 볼 때마다 그것이
실제라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면 더
이상 배울게
없겠죠 그래서 그거를 우리는 뭐라고
불러요 무학이 부르고 라한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더 이상 배울게 없는 거예요
사념처 수행이 부처님의 수행의 전부
전부이자
어 또 다른 뭐 수행이 있을 수
없어요 그래서 사념처 수행하면 해탈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부처님들 늘
얘기했어요 근데 우리는 수행과
부처님이 말과 늘 괴리돼
있어요 그러지 않나요 사양 사과를
배우지만 사양 사과는 따로 있고
우리는 선방에서 따로 해요 화두 정진
한다고 미안마 가면 뭐 다를 거
같으세요 태국 가면 뭐 다를 거
같으세요 아니요 다
비슷해요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 그 생각은 부처님께서는 자기
깨달음에 대해서 말했고 수행 책에도
분명하게 말했지만 우리는 그 책을
보면서 엉뚱하게 잘못된 인식을
일으켜서 엉뚱한 수행을 하니까 드린
노력에 비해서 늘 결과가 별로 어
신통치 않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그 비구계를 받을 때 어 이런
얘기를
해요 거짓말 말아라 사바라 이죄 중에
하나요
불어가 우리 일상 생에서 늘
거짓말하고 살지
않나요 밥 먹기 싫으면 밥 먹었어요
이러 말하잖아요 어 그냥 늘 해요
그러면 그게 그렇게 내가 승려 생활을
그만둘 만큼의 그 그런 그 엄청난
바라이죄 그 승의 목숨을 잃을 만큼의
단재를 받아야 될
죄일까요 그러지 않아요 그건 그냥
대중들한테 사과만 하면 될 정도의
문제인 것이지 그게 엄청난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나 여기서대 바라이
바라이죄 아고 하는 것은 부처님 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서 맞지
않은 것처럼
말하면 이게 제 그 사람의 일생을
망치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바라이죄
해당됩니다 이것을 대망호 이제라고
말하죠
우리가 그 수행을 통해서 오랜 시간
동안 헤매게 된 이유는 사실 따지고
우리 잘못이 아니라 어 우리를 그렇게
인도했던 그 사람들 때문에 그 목매
아면서 벗어나지 못해서 생긴 일인
거죠 우리는 그를 절대적으로 심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해야 될 일은 뭐냐면 부처님의
마지막
유에서 명이라는 말을 했어요 다르마의
의지하고 그다음에 자기 자신의
의지하라고 말했어요 마치 섬과 같이
우리는 망망대 있을 때의
섬이 망망대해 섬을 만난다면 살길이
아아 그죠 그것처럼 의지해야 될 것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야 돼요 그러면
내 자신에게 의지해야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내가 법을 찾기 위해서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 배 깥 어디로 막 돌아다니면서
할게 아니라 자기 안에서 정말로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확인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확인해야 돼 근데 우리는 확인을
어디서 하려 그래요 책에서 확인하려
그래요 부처님이 경전 속에 이런
내용들이 있으면 내가 내 자신 안에서
확인해 보세요 그게 정말로 그런지
아닌지 확인이 됐다면
믿어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믿을
일이 아니에요 의심해야 될 일이고
버려야 될 일인 거예요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확인해야 되고 그다음에 이게
법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과 상하는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된다는이 과정을 거쳐야만
그래야 깨달음으로 갈 수 있고 그게
올바른게 될 수 있죠
부처님은 부처님이 법을 설명하실 이런
말씀을
하세요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설명을 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의견을 따르겠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아직까지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설명보다 훌륭한 설명을
아무도 자기는들은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어 법을 설랬죠
그러면
어 지금이 시대에 만약에 부처님이
태어난다면 지금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다 확인해 보고
사실인지 아닌지를 어 어 검증한
다음에 설명했죠 그러면 설명 방식이
다를 수 있어요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이게 가장 최선이 설명이
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이 신수 신법의 사념
처를 다시 한번 재고해 봐야 되고
부처님 경전이 쓰여져 있는 것이
사실 그 안에 어떤 그 잘못돼서
번역되었을 수도 있고 이런 것들을
꼼꼼하게 따져보고 내가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 그런 것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게
된다면 정말 수많은 퍼즐들이 있는데
그 퍼즐이 완벽하게 제자리를 맞는
순간이
있겠죠 저 자신도 어 제가 이렇게 뭐
말하고는 있지만 제 말을 다
여러분들 다 확인하셔야 되고요
그다음에 경전 속에서 제가 이렇게
말하고 난 다음에 강의하고 난 뒤에도
저 끊임없이
내장이을 궁금하면 뒤져보고 하는데 아
내가 그때는 이렇게 설명했는데 아
요거는 요렇게 설명했으면 훨씬 더
좋았을 거라고 하는
후회감 계속 생겨요
그렇지만 그런 작업을
통해서 내가 한 설명이 분들이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었던 것에 대한 모티브가
되어서 조금 더 훌륭한 이해가 되는
얘기를 할 수 있다면 저는 뭐
그것으로서 만족하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제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이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 실제로 우리가 부처님 경전을
이해하려면 지금요 번역 연대가 벌써
거의 한 2천년 정도 지난 한문으로
번역된 그 정도의 여년의 시간이
지난 경전이 그 당시에는이 단어들이
어떻게 쓰여 있 쓰였었는데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고 정말로 내가 요즘
이해한 식으로 번역을 해서 이해를
했는데 읽어 보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데 그렇다면 한번 꼼꼼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는게 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입니다 자 그럼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