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 읽기 전, 필수 시청 영상 ※ 사복음서의 차이점을 알려드립니다ㅣ김학철 교수ㅣ잘잘법 209회

잘잘법 :잘 믿고 잘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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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상 말미에 등장하는 에필로그의 출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
[복음서와 만나다 : 예수를 그린 네 편의 초상화] (리처드 A. 버릿지 지음, 비아)
원제: Four Gospels One Jesus? : A Symbolic rea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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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사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김학철
복음서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신약 성경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내 복음서의 보도가
완전히 서로 다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서로가 완전히 달라 가지고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죠 여기에 사실 고민이
있습니다 왜냐면 완전히 다르면 완전히
다른가 보다 하고 완전히 같은 같은가
보다
하는데 어느 것은 같고 어느 것은
다르기
때문인데요 다른게 있어라고 반문하시는
분에게 복잡한 얘기 말고 간단하게
마태복음서 21장과 꼭 병행 본문들
같은 내용을 다루는 병행 본분들
차이를 얘기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서
21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들어가는
장면 보던 거거든요 그때 예수께서
예루살렘 들어갈 때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데 마가복음서 누가복음서
요한복음서 모두 나귀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가셔요 근데 마태복음서 되게
재밌
예수께서 나귀와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무슨 말이냐면 두 마리이
두 마리를 끌고 오라 그러셔서 안장을
얻는데 그것들 위에 안장을 얹고
그것들 위에 타셔요 그니까 두 마리
타고 들어가신 거예요 머릿속에 한번
그려 보시죠 마가 누가 요한은 한
마리 타고 들어가는데 마태는 두 마리
타고 들어간단 말이죠 맨처음에 생각할
때게
재밌었는데 왜 그렇게
마태가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라
그랬는지 참 의아합니다 아
왜냐하면
마태복음서 마가복음서 알았던 거
같거든요 제가 지금 방금 드린 말씀이
이른바 공관복음 문제라고 하는 겁니다
[음악]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에서는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그리스도교 문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복음서라고 불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요 복음서 외에
복음서도 여럿 있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들이 있는데 가령 베드로
복음서 진리 복음서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 히브리 복음서 뭐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한 거 말고도
도마복음서 이런 거 말고도 여러가
있는데 그중에네 개의 복음서가 굉장히
보편적으로 읽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서라고 하는 저작이 한지
탄생했을 것이 분명하고 한 교회 혹은
공동체 지원으로 탄생했을 것이
분명하거든요 근데 이것이 복음서가
7년에서 100년 사이에 기록됐다고
많이 하는데이 복음서가 예를 들면
마가 복음서가 시리아에서 기록됐으며
시리아에서 굉장히 널리 읽혔던 거
같아요 마태복음서 그렇고 누가복음서
요한복음서 모두
각자가 탄생한 곳에서 꽤 인기가 있이
인기를 얻고 이렇게
성장했고 그 교회 공동체를 떠나서
다른 지역에서도이 복음서를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초대 그리스도교
사회에서이 복음서의 내용이 다른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우리 지역에서 제일 인기 있는
복음서는 예를 들면 마태복음서 마태
복음서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돼요
그런데 이제 시간이 지나고 2세기
초반이 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면이 서로 다 봉서를 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150년 넘고
170년 경 가면 어떤 일이
발생하냐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
특별히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 같은
경우에는 아주 구조가 비슷한데이
복음서들이 권위를 얻게
되는데 서로 내용이 다르단 말이죠
그래서 170년 경에 타티아스 하는
분이 디아테사론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
만들게 됩니다 이건 뭐냐면 마태
복음서를 중심으로 마태 복음서를
중심으로 다른 복음서가 갖거나 다르면
걸 삭제하거나
혹은 달리 변경하거나 혹 다시 쓰거나
해가지고이네 개 복음서를 하나의
복음서 형태로 만들고 이것이 시리아
지역에서는 5세기까지 굉장히 유력한
복음서로 읽히게 됩니다이 말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요 하나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이네 복음서가 굉장히
권 있었다 왜냐면이네 복음서 다른
복음서가 아니라이 복음서를 가지 만들
생각을 했으니까요 동시에이 내
복음서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권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처럼 권위가 있었다면이
내용을 그렇게 바꿀 수가 있
있겠습니까 그냥 그대로 놔둬야지 근데
이것을 어떤 건 빼고 더하고 빼고
더하고 하면서 대소련이라고 하나
하나의 복음서를 만든 것은이 내
복음서가 굉장히 권위가 있었지만
동시에 문자 하나 그대로 바꾸면 안
된다라고 하는 의식은 없었던 거예요
이 복음서가 5세기까지 굉장히 인기가
있었다 그런 얘기는 이미 복음서가
탄생하고 어느 시점이
지나니까 복음서들 사이에
일치하고 일치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고민이 생긴 거예요 더 큰 고민은
어떻게 된 발생하게 됐느냐 이른바
정경화 과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에서는
거룩한 문서들이 꽤 있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제가 여러 복음서 있잖아요
그 복음서 말고도 여러 편지들도
있어요 뭐 헤르메스의 뭐 서신
등등에서 여러 서신들 있었는데 아
2세기에 지금은 굉장히 유명한
이단으로 되어 있는 마르키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의 신학 기준에
따라서 누가복음서
편집하고 다른 바울 서신들을 합해서
정경을
만듭니다 수많은 거룩한 문서들이
있어요 각각 공동체에서 거룩한
문서라고 알려져 있어요
근데이 마르키온이 한 건 뭐냐면 요런
거룩한 문서 중에 우리 교단 나의
공동체를 위해서 복음서 누가 복음서
나를 택하고 수정해서 그다음에 바울
서신을 택해서 우리 교단 우리
단체가 사용하는 캐논 정경을 만든
거예요 목록을 만든
거예요
여기에 아주 조류 기독교라고 말하는
이
이곳이 각성된 거예요 거룩한 책들은
많지만 실제로 우리 삶에 우리 삶을
완전히 규정할 수 있는 목록을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만들었어야 됐어요이
목록을 캐논이라 불러요 정경
목록입니다 캐논 캐논 원래 카논의
나온 말인데 카논은 갈대라는 건데
재는 겁니다 재 자 그래서 초기부터
모든 사람들 많은 사람들에게 권위
있게 읽히고 사도성이 있다고 주장되는
네개의
복음서가 정경의 목록 안에 들어온
거예요 그니까 문제가 더 심해졌죠 한
지역에서 한 복음서 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목록 안에
들어오니까이 내 복음서의 차이를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겁니다
제가 아까 마태복음서 얘기할 때 그런
것 어떻게 보면 작은 문제일 수
있어요 설명해야 할 필연성이 생기게
됐습니다 제가 이전에 사우디 아라비아
학생들 역시 가르쳐 적이 있는데
그때도 성경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성경에는
예수님을 다룬 전기 같은 어 기록물이
있는데네 개가 있다 그렇게
얘기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사우디
아라비 학생들 무슬림이 딱 나오는
질문이 뭐냐면네 개가 모두 똑같은
말을 합니까 그럼 뭐로네 개가 있어요
아니 조금씩 다 다른데 그랬더니 그
사우디아라비아 학생이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이겁니다 그러면 그중에
셋은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공간 복음의 문제예요 야
이걸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지 아이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가 성경의
기록이 어떻게 됐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되겠죠 제가 자주 드는 예인데요
마태와 천사라고 하는 서양 미술사에
그리는 그림 패턴이 있습니다 마라고
하는 저자가 있고 또 마테는 늘 천사
영감을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혹은
성경을 기록하게 해주는 천사같이
등장하는데 아주 대비되는 두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라바라고 하는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인데 그 그림을
보면 마태가 이렇게 쓰고 있고 천사가
위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해주고 있는 천사의 영감을 마태는
의식하고 쳐다보면서 그림을 글을 써요
마태복음서 쓰는
거겠죠 그러나 16세기 신교 화가인
브란트는 마태 면 아주 다르게
그립니다 버지는 수직 구도로 그리는데
마태는 수평 구도로 그립니다 마태가
이렇게 앉아 있고이
뒤에 천사가 있습니다 마태는 천사를
의식하지 못해요 깔아 그 거는 달리
골이
생각해요 그리고 그을 써요 이마가
반짝 빛나요 이게 바로크 시대에
키아로 스크라 하는데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빛을 주는 거거든요 골이
생각하고 있는데 빛을 줘요
공간 복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위해서는
카라바조처럼 하는 성소은 유지는 그게
힘듭니다 마태와 천사를 그린 램브란트
식의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마태는
자기의 모든 지적인 노력을
다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뒤에 하나님의 영감의 손길이 비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면
마태복음서 마가 범서가 다를
때 둘 다 완전히 문자 하나하나에
모두 하나님의 영감이 서려 있다면
서로 배치되면 안 될 거 아니에요 왜
마태는 두 마리고 마가 누가 요한은
한 마리냐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 영감 완전히 글자
하나도 어 글자 하나하나
모두에 그렇게 받아들 수도 있지만
모두의 과학적 역사적 사회적 사실이
전히 틀림 들어가 있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두 마리와 한 마리 사이에
그 좋아하기가 어렵습니다 있는 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됩니다 있는 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거는 내가 어떤 생각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 생각을 잠시 유해
놓으면 너무나 쉬워요 마태는 두
마리라 그러고 다른 복음 한 마리라
그러면 아 이거는 그글을 쓸 때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마태복음서 아가
누가 모두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고
믿고 이것이 우리의 과 신앙의 권위가
있다고 믿지만 동시에 이러한 부분들이
서로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그냥 마한 편히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이제 공감 복음 문제가 왜
생겼는지 잠깐 설명을 해 드렸고
그럼이 문제를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는지를 설명을 하겠습니다
그 사우디아라비아 학생들에게는
아쉽게도 길게 설명을 못 했습니다만
이렇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일단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 구전 전승이
있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말을 해야
되겠죠
오늘날은 완전히 뭐든지 다 기록할
수가 있죠 휴대전화로 영상도 찍을 수
있고 글로 기록할 수도 있죠 그러나
당시에 그것이 불가능했을 때는
구전으로
전합니다 바울은 복음서를 봤을까요
아니요 못
봤습니다 바울은 50년대 기록한 건데
바울 서시는 복음서는 70년대부터
그분들은 뭐 마태 50년 60년에
기록됐다 그렇게 주장하지만 오늘날
신약성서 학교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분들은
히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은 주 예수께서께 주에게서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배 당하던
날에 이렇게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11장 있죠 거기 보면 헬로 읽으면
거기 아주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은 주에게서
받은 것인데 요게 전문 용어입니다
어떨 때 전문용어 라비가 자기
제자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구전으로
정할 때 정형화된 말로 전하면서이
토시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우게 하는
거예요 그걸
전승이라는 구전 전승이라는 그걸
헬라어로는 파라디조 me 이렇게
하는데 바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다라고 할 때
파라디 me 동사를 사용합니다
요 내가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겁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주께서 떡을 떼시고 하는이
성만찬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있는
내용과 거의 유사합니다 이건 뭘 하냐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 구전 전승으로
전해지던 형태가 있었다라는
겁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기자
모두 구전 전승을 접했을 겁니다
이른바 전향을 하게 되죠 원래는
그리스도교 핍박자 예수 신앙 핍박자
예수님의 사도가 되는 과정 중에 왜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핍박 예수님의 제자들을 아니까 핍박한
거예요 우리가 모르는 사람을 핍박할
수 없어요 저기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합니까 누군줄 알고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데 저
사람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를 알면 그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고 잘해줄 수도
있잖아요 바울은 구전 전승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과 그분의
기적에 대해서 들어서 알았어요 구전
전승을
통해서 예수의 제자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안
거예요 구전 전승이 있었고 예수님의
생에 대한 지식이 이미 있었어요
고린도전서 아까 제가 11장
얘기했지만 다른 곳을더라도 뭐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도 이것은 내가 주께
주에게서 받은 것이다라는 말이 제차
등장합니다이 구전 전승에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런 구전
전승이 있는 세계 속에 살았을 겁니다
마가 누가 요한도 마찬가지예요
학자들의 오랜 연구 끝에 아마도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됐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이네 복음서는
크게 두 가지 그룹으로니다 하나는
마태 마가 누가의 한 그룹 이것을
복음이라고 부 수 있 나는 요한복음이
사이에는 큰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길게 길게 말씀하셔요
아주 긴 연설이 많이 담겨 있어요
그러나 마태복음을 제외하고 그런 긴
연설이 있는 마가 누가 그렇게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몇번이고 갈릴리와 렘을
십니다 에 가신 건 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에 가서야 방문하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이미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이른바
성전 정화 사건을 일으키데이 공간
보에 보면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날에 있고 거의 마지막
시기에 있고이 성전 정화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격분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이렇게 크게
차이가나요 왜 그럴까
구전 전승을 통해서 이해하면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구전 전승이 아 공간
복음의 구전 전승과 사뭇 달랐던 거
같긴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내 복음서를 모았던 초기
그리스도의 교인들이 그 내 본소가
서로 달랐다는 걸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알지만 내 복음서를 모은
거예요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복음서가 있어서 그 한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해서 똑같이 말해
줘야만 괜찮다고 느껴요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은 그 내 복음서가
서로 달랐다는 거 그니까 한 그룹과
한 그룹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서로
굉장히 다른다는 걸 알지만 모아서
우리
신앙의에 캐논 표준을 삼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이 주목했던 건 뭐죠
이분들 오늘날 우리 혹은 제가
물어봤던 그 무슬림 학생들처럼
여기랑 여기랑
똑같아야 내 신앙과 삶에 구속력을
갖는 권 있는 하나님의 진실된
말씀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거예요 요한복음이 전해주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그분의 가르침과 복음의
성격 그 고갱이를 본
거예요 마타 마가 누가 연도
마찬가지고요이 시선을 좀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경을 모았던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이 어떻게 그 서로
다른 줄 알고 있었던 거를 모아서
우리 신앙의 표준으로 삼을 수
있었는가 바로 그들의 시선에서
복음서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큰일 났어 우리 어떤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어떤 거냐 여기 두
마리고 여기 한 마리야 이건 좋아가
안 돼요 그냥 뭐 예를 들면 이런저런
얘기가 마태 아고 마가에 있으면 예를
들면 마가에 어떤 젊은이가
와서 선한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 얻습니까 그랬더니 예수께서
마가복음에는 너 어떻게 나보고 선하다
그러냐 선한 사람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없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마태는 왜 나를 선하다 그러냐 선하신
분은 한 분이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달라졌잖아
어 선하신 분은 마가에서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시다 그러면
예수님도 자기가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되잖아요 마태는 그걸 견딜 수
없었던가 봐요 왜냐면 마태가
마가복음을 봤다는게 대략 주요한
이론이든 거기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거 참마 못 쓰는 거예요
마태는 우리가 추측해 보면 선한 분은
하나님 한번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고 믿는데 그거 쓰기
어려우니까 슬쩍 노력한 거
같아요 아니 다른 거 다 어떠한
선입관 빼고 그냥 읽으면
그렇잖아요 이게 공간 복음 문제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차이가
있는 건 줄을
알면서도 정경을 만들었던 정경을
모으고 그 많은 문서 중에 복음서
하나만 고르면 되잖아 요한을 걸든
아니면 다른 것 중에 가장 인기
있었던 마태복음을
고르든 그렇게 하지 않고네 개를
모았어요 그리고 각각 지역에서 인기
있었고 널리 켰고 권위를 썼던 그
공동체의 신앙의 양태를 지지해 줬던
복음서들이 다 여기 있다고 승인해 준
거예요 인정해 준 거예요 저는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는 고백 속에 그
단일한 고백 속
많은 다양성을 포할 수 있는 신앙이라
너무
감사해요 저는 그렇게 정말 생각하고
그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요한 아
특징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삼일치 하나님을
고백해요 한
분이면서 성자 성령 성자 성령 성부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귄
가운데
존재하시고 다양성과 조화가 아 우리의
신앙에 근본에 있다고 하는 그 신앙이
굉장히 중요한 거 같습니다 여하튼
공간 문제를 조금 더 얘기를 해
보면요 그래서이 복음서 사이에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수많은 학술적 일론이
있는데 표준적인 거 하나만 말씀드리고
오늘 그 질문에 대해서 마감을 하려고
하는데요 신약 학자들의 대부분
표준적인 이론은 뭐냐면 복음서 중에
아마도 마가 복음서가 제일 먼저
쓰였고 마태와 누가가 그 골격을
따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를 보니까 마가는 없는데
마태와 누구와의 공통된 이야기들이
있고이 공통된 이야기들이 주로
예수님의 말이에요 말
아이 자 예수님의 말의 자는
뭘까 아이 말로 어떤 자료가 있었던
거 아니야 문서 자료가 그 자료라는
말이 독일 코레데 그걸 흔히 줄여서
그냥라고 부르는데요 그래 마가가
있고라고 하는 자료가 있고 마태와
누가가이 두 자료를 보고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자료설 혹은네 자료 설이라고 부르는데
근데 마태는 누가는 없고 마가에도
없는 독특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을
마 특수 자료 누가는 누가 마이고
있는 누가 특수 자료 이렇게
설명합니다이 이론이 가장 표준적인
공감 복음 문제를 해결하는 모델인데
여기 약점이 없냐 완벽하나 아니요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가는 이렇게
말하는데 마태 아고 누가가
서로 한 목소리로 마가를
수정하거나 C 이유입니다 거기 보면
마가와 달리 둘이 마태와 누가가 어떤
사람이 그것을 심고 그것이 나무가 된
것이다 이렇게 쓰는데 그 문구를
마가는 그렇게 쓰지 않아요 근데
어떻게 마가 마가 큐 특수 자료를 본
마태와 누가가 서로 몰랐다면 어떻게
이렇게 동일하게 마가를 바꿀 수 있지
의을 갖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누가가
마가를 보지 않았을까 이런 주장도
하고 복잡합니다
그런 어 관계 속에 있었다 제가 한
얘기를 조금 복잡하지만 살짝 정리해
보면 신앙적 차원에서도 정리해 보면
우리가 어떤 복음서 어떤 복음서를 볼
때 과연이 복음서가 어디에 우리 삶과
신앙의 권위를 갖고 있는가 어느
부분이 우리는 상대방이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이 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권위가 있어야 다
진실해야 빈틈이 없어야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그러나 그 사람이 나한테 완벽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참부
끝까지가 다 완벽 다 완전
이상적이어서 그렇게 얘기할 이유는
없는 거예요 이게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는데 어떤 남자 어떤 남편이
어떤여 자기 부인을 향해서 당신은
나한테 정말
완벽해 이렇게 고백한다고 할 때 그
부인되는 분이 다른 사람이 다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완벽해서 그 남편이 그분을 향해서
당신 정말 나한테 완벽한 아내야
이렇게 얘기 할 이유가 없고 해서도
할 필요 할 필요도
없고 복음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저에
이제네 가지 복음서는 기독교
신앙인에게 너무나 완벽한 거 같아요
그래서
이 내 복음서의
정경을 어 무라토리 정경이 하는 그
목록 안에 들어간 이후로이 내복의
정경의 지위를 의심한 어떤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없어요 이단
사이비
외에는이 내 복음서가 아 부족하다라고
하든지이 내 복음서를 어떻게 식으로
보충해야 한다라는 식의 논의가 뭐
진지하게 전개된 적은 없습니다 뭐
다른 예를 들면 도마 복음서가 참
배울게 많아서 도마 복음서를 연구해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풍요롭게 하자
그런 말은 할 수 있어도 도마
복음서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마가복음서 그것과 반대되는 얘기를
하니 마가복음서 권위를 낮추십시오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요
그래서이 우리가 마태 마가
누가이 사이에 일치와
차이점을
강박적인 완벽함 으로 인정할 때만
비로서
완벽하다 그렇게 하는 데에서 성경을
좀 놔 놔아 주면 안 될까요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은 신앙인들은 그게
서로 다 어느 정도 다른 줄 알고
요한복음 그게 다른 줄 알면서도 목록
안에 넣고 신앙생활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오늘날 왜 우리는 우리의
자를
가지고 공간 복음이 서로 다르면
하나라도 다르면 안 되는 것처럼
그 기준을 갖다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것이 신인가요
아니면 강인가 그렇게 물어봐야 될 것
같아요 저는
마태가 두 마리 타고 들어갔다는 걸
읽으면서 참 재밌게 웃습니다 예수님이
새끼 어미나 그 큰 나귀에 앉아서
발을 새끼나 등에 얹나 아니면 양발을
나까지 생각을 하면서 그 본문을
즐깁니다 그게 잘못가 그게 다르다고
해서 막 고민에 빠져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됐으니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본문을
보고 서로 다른 걸
즐기죠 마가 예수님이 너 왜 나
선하다고 하니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야 이렇게 마가가 쓴 것을
마태가 선한 부분은 한 분이시다
이렇게 고친 것을
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수
있다니 마태 이상한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고 마태가 그렇게 그걸 이제
신약으로는 편집했다 그렇게 하거든요
그 편집한 그 고뇌와 그 고민과
예수님을 향한 마태의 사랑 종경
예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태의 신앙을
느끼죠
누가가 마가 마태는 십에 달려 돌아간
그 가실 때 그 옆에 있는
강도들이 욕을 하잖아요
예수님이 아 그런 강도들 사이에
있는데
누가는 한 강도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니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대는 오늘 나와 같이 파라다이스에
있을 겁니다 나군에 있으리라
파라다이스 그든 파라다이스 겁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서
회개하는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님을 그리고자 했다는 그걸
보고 누가가 그리고 싶었던 누가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요 마태 마가 누가 모두 비명을
지르고 돌아가시는데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하고
돌아가거든요 요한복음서 예수님을 보면
그분의 죽음 앞에서도 정말 의연하고
그 대단하셔요 겟세마네의 고민이 없는
예수님을 요한이 그리거든요 그리고 그
고통 중에서도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푸유 말을 하고
뱉으시는 말을 쓰지
않고 공간 복음에 예수님을 보면
아 그 고통
중에 우리와 같이 고통의 신음 비명을
지르시는 예수님을 목도 하지만
요한복음에 보면 죽음의 위협과 고통을
넘어서는 예수님 그래서 그 복음서를는
신자들이 요한의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
앞에 있는 순교의
상황을
의연하게
넘어서면서 죽음의 순간 예수님 저도
예수님의 고백처럼 예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저에게 주신 삶의 의를 다
이룬 것 같습니다 주님고맙습니다
그렇게 교 문학의 마지막을 찍을 수
있도록 요한복음서 읽는 독자들이
그렇게 했을 거 한 거 같아요 그렇게
이해하는게 뭐가 그렇게
문제입니까 뭐가
그렇게에 우리의 신앙과 삶에서 그렇게
해하는게 뭐가 그렇게 큰
일입니까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네개의
복음서를 목록안에 다 둔 것이다
그러니 신앙 신앙을 는다는 것이
신앙을 단위로 한다는게 아니라는 거
그걸 기억하고 네개의 복음서를
각기다른 시각에서 모아놓은 그 내개
본서가 복되다 우리 신앙은 전체주의가
아니구나
그 깨닫고 감사했으며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