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피터슨] 전도서를 읽을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

기록문화연구소
3 팔로워
**기록문화연구소 [멤버십]에 가입하여 힘을 더해주시고, 다양한 혜택도 누려보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jbLLe1sLRIqzh5YPqnOFiA/join
**멤버십 가입이 힘든 경우의 직접 후원
[IBK기업은행(기록문화연구소)] 621-036310-04-018
(가능하면 월 정기 후원 부탁드립니다)
------------------------------------------------------------------------------------------------------------------------------------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전도서는 어떤 책인가?"
전도자는 맥락에서 따로 떼어 낸 종교는 헛되다고 성경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주장하는 목소리입니다.
그런 종교는 기쁨도 소유도 경건도 없다고 말합니다.
#유진피터슨 #전도서 #종교 #헛됨 #설교 #기록문화연구소
전도서는 세례 요한유의 책입니다. 식사가 아닌 목욕과 관계된 책이라는 뜻입니다.
영양분을 주는 게 아니라 씻어줍니다. 회개이고 정화입니다. 전도서의 원제를 영어로 번역하면 그냥 설교자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이 설교자를 우리 삶에 초대해 우리의 영혼에서 환상과 감상,
우상순배적인 생각, 넌덜이 나는 감정들을 박박 닦아냅니다. 전도서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스스로를 게시하심으로서 선포하신
실제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허세를 드러냅니다.
신약성경과 시편을 같이 묶은 성경책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금은 반응을 필요로 하기에
기도로 반응해야 하는 것이기에 아주 적절한 대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위세 기도부터 시작하게 해주는 것이지요. 보금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반응이 필요합니다.
보금은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저는 또 다른 조합의 성경책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신약성경 앞에 전도서를 넣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금에 대해 너무도 많은 잘못된 기대를 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터나 놀이터에서 배운 어리석은 감상과 까다로운 요구를 들이댑니다.
그렇게 되면 영양가 있고 안전한 음식을 먹는데 방해가 됩니다.
현도서는 이러한 우리를 씻어주는 비누와 물입니다. 우리가 믿음이라고 착각한 어수선한 경건의 먼지와 때,
정교라고 착각한 고함과 모독을 씻어 하숙으로 흘려보냅니다. 전도서는 그런 게 아니야 라는 말로 보금의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잠식시키는 방해와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책입니다. 그것 자체가 메시지는 아닙니다.
전도서에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그가 전해야 하는 메시지라는 게 없습니다.
그가 할 일이라고는 환상을 경고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도서를 자녀를 저녁 식탁으로 부르는 부모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놀다가 들어와서 손이 더럽고 그래서 부모는 가서 씻고 와 그렇게 더러워서는 여기서 앉아 먹을 수가 없어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더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신나게 놀다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게
주님의 식탁 문화에서는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결국 배우게 됩니다.
믿음이라고 종종 오해되는 것을 치워야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전부 허무하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고 우리 문화에서 아무리 세련되고 존경받는 것이라 하더라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단절된 것은 다 헛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전도자가 자기 할 일을 하는 동안에는 다소 공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빈자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 흐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그 풍성함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하나님 혹은 선함으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사실 하나님도 선함도 아닙니다.
우리가 좋게 본다고 해서 모든 일이 좋은 결과를 낳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정교회는 쓸데없는 쓰레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악한 도덕과 게으른 사고가 있습니다.
속임수와 욕이 있습니다.
화사하게 웃고 진지하게 말한다고 보금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들은 전도자의 말과 매우 비슷합니다.
누가 너희에게 크리스토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그분이 있다 해도 믿지 마라.
거짓 크리스토와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기적과 표적을 보여서 할 수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을 미혹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잘 들어라.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미리 말했다.
설교자의 책임은 우리가 쉽게 속지 않으면서도 긍정적일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존재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모든 징조에 기꺼이 예라고 할 수 있게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준비시키는 동시에 여기저기 쉽게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 쓰레기나 다 받아들이는 수동적 저장소가 되지 않으면서 건강하게 수용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교회가 시행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전도서를 정기적으로 묵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첫 단어는 우리의 주의를 끕니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문맥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들이 이 단어에서 나옵니다. 가시적이지만 실질적이지 않은 헛된, 거짓의, 환상의, 사기의와 같은 의미 말입니다.
이 주제가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전도서는 몇 페이지 안 되는 지면에 헛되다 라는 말을 거의 40번 가까이 사용합니다.
구역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 말은 33번밖에 사용되지 않습니다. 전도서가 전체적으로는 매우 긍정적이라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사실 좀 놀랍습니다.
그토록 많은 예와 아멘을 남발하는 교회가 이 책을 그렇게 잘 받아들이는 것도 신기합니다.
저는 먼지를 잘못 놓인 것이라고 정의한 말을 늘 좋아했습니다.
햇살을 잔뜩 받아 우리의 눈과 피부로 따뜻한 기온을 반사시키는 멀리 뻗은 백사정보다 더 아름다우게 어디 있습니까?
덤불에 기적처럼 매달려 있는 거미줄에 이슬이 맺혀 빛나며 아침 햇살에 장식처럼 드리워진 것을 보는 기쁨이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카펫 위에 쏟아진 모래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옷장 어두운 구석에 쳐져 있는 거미줄은 당장 빗자루를 찾게 만듭니다.
잘못 놓인 모래와 거미줄은 반드시 제거됩니다. 종교가 그렇습니다. 제자리의 창조 질서에 따라 기능하면 아름답고 유용하며 매력적입니다.
잘못 놓이거나 잘못 비추면 매력이 없고 건강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게 됩니다.
잘못 놓인 것을 우리는 먼지라고 부릅니다. 종교가 잘못 놓이면 우리는 그것을 위선 혹은 미신 혹은 자기의 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는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가까이 다가가 말씀을 듣는 것이 어린 세곤자의 희생 제사보다 더 낫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을 행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입을 섣불리 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성급하게 말을 뱉으려 하지 마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희는 땅에 있으니 말을 적게 하여라. 전도자는 우리에게 교회에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근처에 갈 때는 조심하여라. 내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새 갈라져 예고도 없이 물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운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차의 행렬로 들어가는 순간 많은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렇다고 운전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상황을 이해해야 위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바로잡으시고 자비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존재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은 영원의 공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저물이고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매우 진지하게 대하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아십니다. 우리의 짐을 지십니다.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위험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놓고 도둑에 대해서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 서로 수다만 떨면서 하나님의 음성은 잠식시키는 것입니다.
종교 제도를 운영하느라 너무 바빠서 기도할 에너지나 주의력을 하나도 남지 않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종교를 우리가 주도하는 것으로 우리가 이끌고 완성시키는 것으로 대할 위험이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것을 어리석은 자의 희생제사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것을 잘못 놓인 종교라고 부릅니다.
전도자의 시대에는 종교가 밋밋하고 진부해졌습니다. 위대한 게이시에 산 신혜가 침식되어 흙 무더기가 되었습니다.
천둥 같던 하나님의 명령이 잦아들고 부드러운 배경음악으로 편곡되었습니다.
죄와 인간과 거룩의 하나님이 만나는 지진 같은 순간들이 감상적 멜로드라마가 되었습니다.
노숙자들이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기적으로 인도를 받고 공급을 받았던 검사악이 이를 때 없는 사막이 일괄적 단위로 측량되고 구획되어 모든 중산층 가족이 구매할 수 있는 가격에 판매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폐부를 찌르고 기초를 흔드는 욕과 같은 사람의 지혜 대신에 긍정의 힘을 파는 노먼 빈센트필의 브로마이드가 있습니다.
이사회와 같은 예언자의 기교에 있는 천둥 대신에 테레비전 설교자들의 번들번들한 쇼맨십이 있습니다.
종교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놓인 종교였습니다. 하나님의 게시를 원래의 엄청난 배경에서
이것저것 떼어내어 문화 속에 장신구처럼 걸어놓았습니다.
그런 장신구로 환경은 어질러졌고 모든 진정한 필요는 묵살되었습니다.
그것은 소울벨로의 소설에 나오는 오지 마치가 자기 어머니에게 하는 말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 건 어머니들이 미신처럼 잡다하게 지키는 것들이지 물을 거꾸로 돌리시고 고모라를 폭파시키신 거대한 창조의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죠.
그래도 무슨 종교 전통처럼 지키긴 했어요.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실 때 잘못 놓인 종교, 전도자가 어리석은 자의 희생제사라고 풍자한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실제, 창조의 능력, 용서의 기적, 자비의 드라마, 일상의 제자도로 살아내는 지혜의 요동치는 맥박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 예수님의 말을 듣고 열정적으로 그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지루해하고 감동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파리세인으로 알려진 종교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윈도우 쇼핑을 하는 사람들과 같은 태도를 보였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한가하게 길을 다니는, 딱히 필요한 것도 없지만 마침 싸고 좋은 물건을 만나면 살 수도 있는 그런 자세 말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이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신 장면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여섯 번이나 경고하십니다.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 위선자들아.
오늘 집에 가시거든 성경을 꺼내서 마태복음 23장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이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비판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파리세인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실천하고 지키되 그들이 행동하는 것은 따르지 말라.
그들은 설교는 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에 해당하는 그들의 종교는 틀리지 않았지만 몸에 해당하는 것은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고 많이 가르치고 훈수를 많이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를 경험하지 않았고 자비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전능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잘못 놓인 종교라고 부르는 것을 종교라고 지칭하고
제자리에 놓인 종교는 기독교의 새 용어인 보금이라고 부르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 용어가 마음에 들지만 그것을 일관된 용례로 사용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은 유용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져다가 미신처럼 쓰거나 조작하거나 교만하고 이기적으로 쓰면 그것은 종교입니다.
그 반대는 보금입니다.
보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원래의 의미와 힘 그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듣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신실한 제자도로 거기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보금을 종교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돌아오라고 탁 트인 보금의 들판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그곳은 전도자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희는 땅에 있으니 많은 말을 하지 말라는 곳입니다.
놀랍게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된 장소에서만 마주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라는 단어를 들으면 답답하고 자기의 위로 가득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예배를 생각하면 곰팡내 나는 찬성과와 우물한 곡조를 떠올립니다.
전도라는 말을 들으면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을 파는 종교 행상인의 무례함을 떠올립니다.
전도자는 성경에서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데 아주 효과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입니다.
전도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거기에 얼마나 많은 반종교가 있는지에 놀랄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종교적이기 때문에 좋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나쁘다고 격렬하게 말합니다.
경건하게 청렴한 행세를 하는 속임수를 성경이 얼마나 참을 수 없어 하는지는 성경을 조금 읽다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기적처럼 혹은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 하나로 거의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놀라운 수용의 자세를 성경은 가차없이 거절합니다.
우상 숭배의 속임, 마술의 환상, 미신의 어리석음을 성경은 지칠 줄 모르고 폭로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종교를 만들고 믿음 없이 온전함을 얻으려 할 때마다 전도자의 일은 반복됩니다.
그는 맥락에서 따로 떼어낸 종교는 헛되다고 성경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주장하는 목소리입니다.
그런 종교는 기쁨도 소유도 경건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우리의 종교를 벗깁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