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을 확인하고 싶다면 지금 내가 있는 위치를 봐라 | 마음공부 법문 이야기 불교 깨달음 제법실상 법화경 명상 수행 | 법상스님의 증도가 64회(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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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스승 석가 세존께서는 연등부를 친견하고 수많은 세월동안 인욕선인으로 지내셨다.
부처님께서 과거 전생담, 전생이야기들이 있어요. 전생에 연등부를 친견하고 인욕선인, 수행, 고행, 마음공부를 하면서 힘든고배를 겪어가면서 인욕했다는거죠.
그러면서 공부하는 수행자로 구도자로 있었다는거죠.
그래서 전생담 이야기들을 보면 부처님 전생담 이야기가 많이 나오죠.
연등부처님이 그 마을에 왔을때 석강부처님의 전신인 인욕선인이 질퍽질퍽한 곳으로 부처님이 걸어가야하는 일이 생겼는데
옛날 인욕선인이 머리가 길었나봐요. 머리 깎지도 않고 있었나봐요.
머리가 길어서 자신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거에요.
그냥 오로지 법, 오로지 스승, 오로지 부처님, 오로지 이 법에 대한 생각만이 간절했던거에요.
그러니까 저 스승님에게 내가 이 법을 공부하고 싶다. 그리고 저 법을 이미 증득한 스승님을 내가 어떻게든 공경하고 싶다.
나를 버리고 따라가는거에요. 자기라는 아상, 애고를 완전 내려놓고 그냥 스승이 죽으라면 죽을신용까지 할정도의 어떤 심정으로 공부를 하는 자세가 되어있었다는거죠.
그러니까 스승님이 질퍽한 곳을 지나갈 때가 되니까 자신의 머리를 이렇게 풀어치워가지고 머리를 이렇게 땅에 박아가지고는 그 머리카락을 밟고 지나가시도록 그렇게 했다고 그러죠.
그러면 우리가 봤을 때 상식적으로는 부처님이 야야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없어. 일어나 이렇게 할텐데 부처님이 그렇게 밟고 지나가시면서 기특하다.
그게 모양만 보면 부처님도 조금..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부처님이 뭘 봤겠어요? 이사람의 마음을 본거죠.
아 이사람이 이렇게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려고 하는. 저 마음이면 깨닫겠다 얘도.
그 마음의 발심을 본거겠죠. 그러니까 그런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너가 다음생에 부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름을 석감원이라고 하리라. 이렇게 숙의를 줬다고 해요.
그럼 온통 생각하면 머리카락을 갖다가 이렇게 해야 내가 숙의를 받는구나. 그렇게 해석하면 그건 모양이죠. 모양 따라가는 얘기에요.
또 옛날에 인역선으로 계신 어느 때는 이랬다고 해요. 겐지들 강에서 운막을 짓고 운막안에서 이렇게 참선하고 있었다고 해요.
몸은 초췌하지만 참선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성스러워 보이고 거룩해 보였다고 하죠.
그런데 마침 그 지역을 지나가던 임금이 왕이 왕 신하들 공료들 데리고 왔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서 여기저기 다니며 놀고 있을 때
그때 임금이 다른거 하다가 공료들이 없어졌길래 공료들을 찾으러 여기저기 다니다가
이래 보니까 그 젊고 예쁜 공료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나한텐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홀버스에 있는 인역선인이 참선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거룩했던지 그 주변에 모여들어서 그분 향해서 절을 하면서
공경한 모습을 거룩하게 공경하고 찬탄하고 예의를 갖추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질투가 하늘을 찌를듯한 질투가 일어나는 거에요.
저렇게 진심으로 공경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나에 너무 질투심이 쩔어가지고 그 인역선인을 끌어내면서
너가 진짜 훌륭한 수행자가 맞으면 니네 잘 봐 얘가 그렇게 훌륭한 수행자인가 하고 때리다가 손가락을 자르다가 팔팔을 자르고 사지를 자르면서 고통을 줬다고 하죠.
그러면 비참한 모습을 보면 니네가 존경하는 사람이 이정도야?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겠죠.
그런데 인역선인은 어쨌든 이렇게 고요하게 평화롭게 이렇게 있었다는 얘기들이 있죠. 우리가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이렇게 흘러가죠.
인역선인은 팔다리가 잘려도 그냥 여요하게 있죠. 왜 그럴까요?
그걸 바라는 사람이 만든 얘기죠. 그게 상징하는 바도 있지만. 이 법의 자리는 팔을 잘라도 선이고 안잘라도 선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모양에서는 언어로는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 표현한 거에요.
그런데 이런 낙처를 알아야죠. 손이 잘려도 부처고 안잘려도 부처다라는 얘기지. 깨달은 사람은 손이 잘려도 자르세요.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하는게 아니라는 낙처를 알아야죠.
그런데 그것을 만든 사람이 그런 낙처를 알고 얘기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그런데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라면 이 전생담이라는 이야기는 부처님 때부터 있었던 얘기가 아니고 부처님 경전이라는게 2,300년 쯤 지난 이후에 만들어졌잖아요.
부파불교에서 내려오던 산발적인 경전들이 나중에 결집을 하고 문자로 문자화된게 부처님 열반하신지 2,300년 지난 뒤란 말이에요.
그러면서 여기저기 부파에서 산발적으로 모이던 것을 모아서 만들고 결집 집결을 하면서 그때 막 겉가지로 껴들어간게 많아요.
아마 그 중에 하나가 전생담 같은 것들이지 않겠냐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어느게 온전한 초기 부처님의 언전한 말씀이고 어느게 좀 나중에 껴들어간 말이겠느냐 해가지고 연구하는 불교학학자들도 있죠.
부처님이 이 겐지지강 쪽에 계셔서 그쪽에서 깨달음을 얻었잖아요.
그런데 인도는 역사적으로 대대로 이쪽 겐지지강 유역이 아니라 저쪽 인덕스강 유역 쪽이 이란 쪽이나 그리스 로마 이쪽이랑 가깝잖아요.
이쪽은 인도 이렇게 있으면 겐지지강이 오른쪽 끝이고 왼쪽 끝이 인덕스강 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덕스강 유역이 지금 말로 하면 강남 파라권이었던 거예요 인도에.
여기에 인도에 있는 16개국에 있는 모든 왕자들이 어지간하면 다 이쪽으로 유학을 갔어요.
다 여기 유학가서 선진문물을 배워왔어요.
그때 이미 이란쪽 그때는 전세계 가장 큰 선진문물이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그쪽에 있었고 이집트 문명 온갖 문명 사이에 그쪽에 있었잖아요.
그쪽에서 우후죽순으로 막 선진문물이 들어왔던 곳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거기가 학문도 뛰어났던 곳이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다 배우고 하니까 이 마을 사람들은 강남 파라권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지역에 대한 자존심이 엄청 쎄듯이 여기 사람들은 대대로 자존심이 쎘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자존심에 스크래치 나는 일이 발생한게 석가온이 부처님이 우리마을에서 태어났어야 했는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강남 파라권에서 서울대 1등 한 사람이 나타나야 하는데.
서울대 1등 그 이상이죠. 부처님은 나타나야 하는데.
저기 겐지지강이면 낙동강 뉴욕 상주나 이런 곳에서 부처님이 나타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가 지금 메인인데 짜증이 안나겠어요?
그러니까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잖아요. 이게 역사적인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고안해낸게 부처님 열반 이후에 자존심을 회복을 해야되겠다.
그래서 너희들 몰랐지. 부처님이 겐지지강 뉴욕에서 탄생을 하셨지만.
겐지지강 뉴욕이 우리 여기보다 훨씬 못사는 동네니까.
그곳에 가서 복지하려고 그곳의 사람들 위에서 탄생을 해줬지만.
사실은 부처님을 만든 것은 전생에 인욕선으로 있으면서 엄청난 수행을 한 그 결과 부처가 된거야.
지금 부처된게 중요한게 아니고 전생에 오랫동안 전생담에서 펼쳐지는 무수한 이야기들.
전생담에서 있는 그 인욕선으로 있을때 고행 수행 그것 때문에 부처가 되신 분이야.
그러니까 부처를 만든 것은 겐지지강 뉴욕이야.
여기서 부처님의 전생이 다 있었어.
그래가지고 겐지지강 뉴욕에서 전생담이라는게 만들어졌고.
또 그걸 만들때 그 겐지지강 뉴욕에는 인도 전통 고전의 이야기들.
힌두기의 이야기들 뿐만 아니라 이란쪽에 있는 엄청난 이야기들 정보들.
그리스, 로마, 심지어 중국 사막지대.
그쪽 전체적인 모든 정보, 이야기, 문화, 전통 이런것들이 다 모이는 지역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온갖 이야기들을 모으고 모으고 각색하고 변형시키고 바꾸고 이래가지고 전생담을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부처님 전생담을 가만히 보면 이소무화에서도 한번쯤 볼 법한 이야기들도 있을 수 있고
전세계에 있는 옛날 이야기들을 보면 뭔가 비슷비슷한 결을 가진 이런 이야기들이 있어요.
성경에 관련된 이야기들도 보면 이란 메스포탐의 문명 그 이전에 있었던 곳에 다 있었던 이야기가 그대로 도용이 되고 있거든요.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대로 도용이 된단 말이에요.
그런게 서로 왔다갔다 갖다 쓰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우리가 100% 있는 그대로 전생이야기를 믿거나 그럴 필요까지 굳이 있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왜 불교는 전생이야기 하는 종교가 아니에요. 전생에 갈고 닦았어야 하고 이런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은 종교에요.
지금 와서 뭐라고 하는게 불교거든요. 부처님의 말씀은 지금 와서 지금 확인해.
너가 전생에 많이 닦았으면 지금 될거고 어쩌고 이런 이야기 안한단 말이에요.
바라문교 사람들이 전생에 닦은 사람만 바라문으로 태어나고 전생에 복없는 사람은 브라마크샤티라 바이사 수두라 저 밑에 불가족 천민이나 수두라로 태어난다 이렇게 전생이야기를 좋아한단 말이에요.
부처님은 그런거 아니라고 이야기를 했고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마음공부 하느냐에 따라서 지금 나의 행위에 따라서 내가 귀한지 귀하지 않은지가 정해지는거지.
전생에 귀한일을 했는지 안했는지 중요하지 않다고 부처님은 이야기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불교의 참뜻이 불교 역사가 이어오면서 이런식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좋게 말하면 풍성해지고 또 안좋게 말하면 방편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까 방편이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진짜 깨닫고자 하는 사람, 진짜 낙처를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방편이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나중에 진짜 법을 만나면 욕하는거에요. 미쳤네.
이게 불교지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가 있어?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이에요.
육조스님 때 일어났던 것처럼 육조스님은 모든걸 관심속으로 기존에 했던 모든 교리 전부다 마음 하나로 이야기를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관심속으로 이야기를 하면 불교의 그 풍성하고 그 많던 방편들이 너무 심플해져요.
마음으로 해석하면 너무 간단하고 너무 단순해지고 너무 심플해지거든요.
그런데 이걸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방대한 양의 방편이나 교리나 이런것들을 언어 따라가면서 말듯 따라가면서 이해를 해야되니까 어렵게 접근이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마음 하나 깨달으면 이게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거에요.
그러니까 나중에 가서 이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 이 낙처를 딱 가리켜보이니까 그 당시 육조스님의 탄생은 육조스님을 죽이려고 여기저기서 엄청나게 사람들을 보냈잖아요.
저런 안목을 가진 사람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기존에 이 안목을 드러내려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부처님이 하신 것처럼
부처님이 싸움 딱 같은 사람이라서 그 당시에 있는 그 수많은 사상가들, 육사외도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들의 견해를 다 깨뜨린게 아니에요.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그럴 수 있잖아요. 부처님은 왜 자기가 자기 깨달았으면 자기 깨달음을 이렇게 딱 드러내면 되지.
왜 하필이면 다른사람들 견해가 다 잘못됐다 니 틀렸다 니 틀렸다 니 틀렸다 이거 깨고 저거 깨고 왜 이렇게 부정적이세요 부처님은?
남들도 같이 사는거지 같이 살아야지. 자기만 잘났다고 하고 다 틀렸다고 하고 나만 맞다고 하는 겁니까?
왜 이렇게 자꾸 깨뜨리세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선도 마찬가지거든요. 기존의 모든 경전을 비롯한 경전을 가지고 만들어진 교파들, 종단들을 다 깨뜨렸단 말이에요.
그쪽에서 하고 있는 잘못된 것을 다 깨뜨렸단 말이에요.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을 깨뜨리고 어느 교리에 머물러있는 사람은 그것을 깨뜨리니까 다른 교단에서는 원수같이 기분 나빴겠죠.
그런데 그게 부처님이나 육조스님이 싸우기 좋아해서 논쟁하기 좋아해서 그런게 아니에요.
왜 그러냐면요. 깨달으면 내세울 법이 따로 없어요. 한법도 선할 바가 없어요.
불교에서는 주장할 교리가 없어요. 주의주장이 없어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가 뭐냐면 머무를 교리가 없어요.
교리에 절대 진실이 있으면 절대 진실을 가르쳐주고 여기 머무르면 돼 이러잖아요. 여기만 있으면 돼 이럴 거 아니에요.
그렇게 주장할 만한 딱 머무를 수 있을 만한 것을 주는 것이 없어요. 다 뺏는거지요.
그것을 파사현정이라고 해요. 삿된 것을 깨뜨리면 저절로 이미 있던 바른 것이 드러난다.
이미 있던 바른 것은 부처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본래에 갖추고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있는 본래 바른 진리는 드러낼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드러나는지 아세요?
잘못된 삿된 분별망상을 깨주기만 하면 본래에 있던 것이 저절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왜 그런 방식으로 육사외도를 깼느냐. 육사외도들이 자신이 주장하는 것에 자기 스스로 묶여있으니까
거기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 와서 물으니까 그 잘못된 견해 때문에 너가 거기에 묶여있다.
이건 잘못된 견해인 것을 가르쳐줘서 거기서 자기가 묶여있는 것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준단 말이에요.
아 이 견해가 실제가 아니구나 하고 묶여놓은 곳에서 풀려지게 만든단 말이에요.
그런데 자기 모든 묶인 곳에서 분별이 묶는 거란 말이에요.
분별과 교리와 자기가 묶어놓은 모든 관념의 벽에서 탁 풀려나니까 그게 해탈이에요. 묶인 곳에서 풀려나는 것.
그러니까 여기에 부처님이 이렇게 묶인 곳에서 풀려나도록 할 뿐이잖아요. 깨뜨려줄 뿐이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이 참나가 있어. 참나를 깨달아. 참나를 얻어야 돼. 이랬겠어요?
그런 말을 안했단 말이에요. 할 수가 없는 거에요. 이 공부는.
특히나 인도적, 브라만교적, 시대적 상황에서는 참나 이렇게 얘기해버리면 브라만교의 아테만이구나 이렇게 자동 동해시가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그런 말을 더욱 쓸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용어를 쓸 때 열반, 해탈 같은 용어를 썼어요. 같은 말인데.
열반은 탐진지 삼독의 불길을 훅 불어 끈다는 얘기거든요.
해탈은 자기분별에 자기가 묶여있는 묶인 곳에서 풀려난다는 것이 해탈이잖아요.
그러니까 해탈할 뿐이고 열반할 뿐이에요. 묶인 곳에서 풀려날 뿐이에요. 따로 얻어야 될 것은 없단 말이에요.
이게 진짜 법이죠. 왜 이런 법이 가능할까요?
법은 자기에게 있으니까. 우리 모두가 본래 구족하고 있으니까요.
신에게만 있는게 아니에요. 부처에게만 있는게 아니에요.
모두가 늘 매순간 쓰고 있는게 진리니까 완벽하게 100%를 자제하게 활용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밖으로 구하지 말아야 된단 말이에요.
줄게 아무것도 없어요. 빼앗을 것만 있는 거예요.
부처님은 이 인류의 수많은 성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다른 성인이나 모든 사람은 주는 사람이잖아요.
너 내 제자가 되라. 지혜를 주겠다. 너를 깨닫게 주겠다. 뭘 주겠다. 뭘 주겠다. 다 주겠다고 약속한다.
행복을 주겠다. 평화를 주겠다. 아름다운 땅을 주겠다. 다 약속하잖아요.
너 극락세계 가게 해주겠다. 천당 가게 해주겠다. 줄 것을 약속하잖아요.
부처님만 준다고 하지 않고 빼앗길 사람만 와라. 빼앗길 용기있는 사람만 와라. 이러는 거예요.
저결에서는 얻을게 하나도 없어요. 내 삿된 분별망상을 빼앗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만 올 수 있어요.
이게 다른 공도에요. 선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육조스님이 그 전에 수많은 교학에서 얘기하던, 경전에서 얘기하던 수많은 언어, 교리, 언어는 전부 다 깨뜨릴 수 있어요.
제가 한 설법을 한시간 반 한 설법을 한 문단 틀어놓고 제가 요 목적 반박하고 그 다음 문단 틀어놓고 반박하고 다 할 수 있어요.
제가 한 말을 다 반박할 수 있어요. 명확하게. 전부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또 이렇게도 할 수 있어요.
불교, 경전, 한마디 한마디, 언어, 다 반박할 수 있어요. 왜 그럴까요? 부처님 무시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언어는 언어로 말할 수 없어요. 이 법은. 언어로 만해지는 순간 찜찜해요.
법사라는 사람들은 찜찜함을 안고 어쩔 수 없이 찜찜함을 뚫고 나오는 낙처를 확인하는 사람을 위해서 끊임없이 찜찜한 말을 해대고 있는거에요.
왜 찜찜할까요? 이렇게 말하면 그게 깔끔하지 않거든요. 명백하게 깔끔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깔끔하지 않은걸 보완하려고 또 다른 말을 하고 그럴 수 밖에 없어요.
자기가 법문을 한다는 것은 똥물을 끼얹는 일이다 이렇게 표현하는게 맞는 말이에요.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뭘까요? 말에 따라가면 안된다. 말이 가리키고자 하는 낙처를 확인하는게 중요하지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거에요.
이렇게 우리 스승 석종께서는 이게 옛날에 나오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경제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이런 표현을 썼어요.
수많은 세월 동안 인욕손님으로 지내셨다. 몇 번이나 태어났고 몇 번이나 죽었던가. 삶과 죽음에 아득히 떠도는 일이 멈추는 것이 없구나.
우리들에게 사람들에게 법문을 설할때 이렇게 설하면 이해하기가 아주 쉽죠.
아! 부처님도 수많은 전생에 오랜 세월 갈고 닦고 수행을 하시고 태어나고 죽고 반복하면서 오랜 세월 공부를 하셨겠구나.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런걸까요? 이게 지금 단숨에 끝낼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
저는 공부를 했는데도 왜 이렇게 안되죠? 뭔가 확 시원해지지가 않죠? 뭔가 원하는 만큼 되지가 않죠? 이렇게 엄청 많은 분들이 물어보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단편으로는 어찌 보면 좀 신기한 시대이구나.
다른 스님들은 50년 선빵을 50안거 100안거를 하고도 아직도 헤매고 계시는데도 계속 정진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얼마 공부하셨는데 1년 법문을 듣고 2년씩이나 들었어요. 3년씩이나 들었어요.
3년이나 들었는데도 왜 이대로죠?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한테는 이런 방편의 법문들이 유효할 수 있어요.
부처님도 이렇게 인욕선인으로 몇 생을 갈고 닦으며 참아가면서 이렇게 공부했다.
이게 그렇게까지 우리가 단시간에 빨리 끝내거나 이럴 수 있는 공부는 아닐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인욕하면서 오래오래 이 자리에 한번 확인했다 할지라도 오래오래 공부해 나가야 한다.
너무 빠르게 끝내야 되겠다는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해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어쨌든 부처님이 그렇게 공부를 했을건데 결국에 문득 깨달아서 무생법인, 이 진실을 무생법인이라고 해요.
이 진리를 다르게 말하면 무생, 생겨난 바가 없는 법, 법이 바로 이 진리거든요.
인이라는 것은 도장, 도장, 이건 명백한 도장이라고 찍듯이 이건 명명백백한 진리다. 이 말을 인자를 써요.
법의 확실한 진실, 법인, 그게 뭐가 확실한 진실이냐? 무생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법을 깨달았다면 뭘 깨닫는 거냐? 무생을 깨닫는 거냐? 이건 무생, 무멸, 법인이라는 말과 같아요.
불생, 불멸이라는 말과 같아요. 이 마음을 깨닫고 나면 태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죽는 것도 하나도 없구나. 나는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을 수도 없구나.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죽을 수도 없구나. 이 무생이라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문득 깨달아 무생 법인을 요달하고 나니 모든 영광과 오욕에 어찌 근심하거나 기뻐하겠느냐?
이 모양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영광스러운 일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좋은 일들, 화려한 일들, 나를 들뜨게 하는 일, 온갖 영광스러운 일들이 세상에 많이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이 무생 법인에서는 이 자리에 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일어나되 일어난 바가 없어요.
옛날 같으면 그런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났으면 막 흥분하고 좋고 들뜨고 이럴 수 있죠. 그런데 들뜨더라도 들뜨는 바가 없고
막 영광스러운 일이 있어서 좋은데 물론 좋은건 있어요. 좋은건 있는데 그래도 좋은 바가 없는 측면이 분명히 있단 말이에요. 좋은데 좋은게 없어요.
영광스러운데 영광스러운 일이 없고 그러니까 막 어디가서 자랑하고 나서서 칭찬받고 싶거나 이러고 싶은 마음이 없죠.
그게 분명히 있는데 그런 바가 없으니까요. 그게 생한 바가 없으니까요. 인연 따라 그냥 인연 가합으로 생기고 사라지는 것 뿐이니까요.
그러니까 영광스러운 일도 없고 반대로 오욕탐진치의 오욕락 온갖 욕락에 사로잡힐 것도 없단 말이에요.
오욕락이라는 것 자체가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거지 거기 실체가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욕락이 없애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고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뭔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거기에 집착해서 붙잡잖아요.
그 욕락에 막 사로잡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질 뿐이지 여기 근원에서는 생긴 바도 없고 사라진 바도 없고
그걸 붙잡는다고 해도 그게 텅 빈 공항 가운데 허상을 붙잡는 거거든요.
있지도 않은 걸 자기가 허공에 말독을 받는 일이에요. 어디 붙잡을 수 없는 걸 붙잡는 거예요. 허공을 붙잡는 거예요.
그게 너무나 명백하단 말이죠. 자기 안목으로. 그러니까 살아오던 어떤 삶의 업습이 있으니까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릴 수 있죠.
예를 들어 스님들도 먹고 싶은 거 있을 거 아니에요. 절에 있으면 맨날 심심한 것만 먹잖아요. 그러면 자동으로 맵고 짠 게 땡겨요.
제가 전라도 어느 절에 있을 때 어느 스님이 한번 절에 놀러오라고 오후 한 대여섯이 되어서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막 맵고 짠 오징어 볶음같은 걸 맵고 짠 이런 것을 해서 그 절이 나름 유명한 전통사찰이라고 해서 관광객들도 많고
절에서 유명한 전통사찰에서 이러면 됩니까? 저도 출간한지 얼마 안될 때라 이러면 됩니까? 이러면 안되지. 이러면 안되니까.
오후에 사람들 다 떠났을 때. 아무도 없을 때. 스님들이 그런 거 땡긴다고 식당가서 신도님들 보는 데 가서 먹는 건 신도님들의 예의도 아니고
이런게 불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욕먹이는 일이니까. 그런 일 하는 것 보다 그냥 우리 질이. 그냥 먹고서 이런다 그러면서. 옛날 어른 선생님들이 한 번씩 그러셨어요.
그게 지혜로운 일이에요. 어찌 보면. 왜냐하면 사람이 안 그럴 수 없어요. 맨날 심심한 것, 맵고 짜지 않은 것을 먹고 있잖아요.
저절로 떡볶이가 그렇게 땡긴다니까요. 그럴 수 있어요. 그리고 또 희한하게 내가 군대 간 것도 아닌데 단게 그렇게 땡겨요. 초코파이 같은게.
하여간 그랬어요. 제가 처음 출국했을 때. 아 진짜 답답하니까 그거 단거 하나 숨어서 먹으면서 달콤하고 이랬던데 기억이 나요.
그럴때 쯤 되면 은사쌤이 스님들 한 번 불러서 맛있게 뷔페도 한 번 데려가시고 맛있는 거 사주기도 하시고 이랬던 것 같아요.
이것도 고정관념이거든요. 스님은 그런걸 먹으면 안된다. 오신채 먹으면 안되고 고기 먹으면 안된다. 부처님 당시에 그런게 있었던게 아니에요.
부처님 당시에 있었다라는 전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부처님은 원칙이 뭐였느냐 하면 이것 먹고 이것 먹지 마라가 아니었고 분별하지 말고 주는대로 먹어라 이거였어요.
걸사라고 불렀잖아요. 걸식하는 사람. 얻어먹는 사람이었단 말이에요 스님들은.
얻어먹는 주제에 옛날에 인도사람들이 가난했었을 것이고 더운 나라라서 카레같은걸 하려니까 고기같은것도 오래가려면 카레같은거 짠거 이런거 해가지고 버무리고 이래야만 오래가잖아요 음식이.
카레에다가 고기 빼주시고 오신채 빼고 주세요 이러면 못먹어요. 스님들이 굶어죽어요. 부처님 당시는 그렇게 하는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하는 스님들한테 뭐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냥 아무집이나 한집 딱 고른 다음에 거기서부터 바로 옆집 바로 옆집 바로 옆집해서 8집만 가라. 차제거리. 분별하지 마라. 좋은집 나쁜집 분별하지 마라. 좋은음식 나쁜음식 분별하지 마라. 주는대로 받아먹어라. 분별없이 받아먹어라.
이게 원칙이었단 말이에요. 그게 맞죠. 공부를 해보면 명백하게 그게 맞아요. 물론 겨울도 엄격하게 겨울을 지켜야할 때가 있어야하는건 또 맞아요.
그런데 그 겨울에 얽매이기 위해서 겨울을 지키는게 아니에요. 불교는. 그 겨울에서 졸업하려고 겨울을 지키는거에요. 임시에 처음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겨울을 지키면서 자신을 울타리에서 보호해야해요. 그게 필요해요.
그런데 나중에 큰스님들 보면 무애행을 하잖아요. 자제하게 살잖아요. 그런데 그게 결국엔 그러기 위해서 겨울도 필요한거에요. 그게 맞아요. 안목이 그게 너무나 맞아요.
그게 전혀 분별이 없단 말이에요. 그런 측면도 있다. 겨울이라고 해도 반드시 겨울은 절대 선이니까 절대적으로 목에 칼이 떨어져서 절대 지켜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어요.
제가 아는 스님중에 공부를 한참 하시다가 그분이 전혀 율사가 될 사람이 아닌 스타일의 스님이었는데 그 스님은 어디갔어요? 율사가 되었잖아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요. 그 형관이 어떻게 율사가 되었지?
그런 율사도 있어야 겨울에 얽매이지 않는다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기 위해서 율사가 되었나봐요. 겨울을 지키면서도 지키지마. 우스개로 그런 얘기를 한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불교는 치우치지 않아요.
반드시 이것만이 절대다. 이렇게 얽매어있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측면을 우리가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해요. 반드시 불교는 이래야한다. 불교는 저래야한다.
어떤 분처럼 스님은 나이키 신발은 신으면 안된다거나 스님은 노트북중에도 갤럭시나 LG노트북은 써도 되는데 애플 노트북은 쓰면 안된다던지 무슨 말이냔 말이에요.
저도 컴퓨터를 조립해서 사는데 컴퓨터를 옛날처럼 인제는 사지 못하겠더라구요. 인제는 그냥 일반PC를 사잖아요. 작업이 안되요.
일반PC를 사서 작업을 해봤는데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영상을 만들면 성능이 기본인 성능을 가지고는 동시에 3개 4개 5개 정도의 영상을 편집해서 이걸 시킨단 말이에요.
어떤 컴퓨터에서 하면 하루가 걸릴 때가 있더라구요. 노트북에서는 하루가 걸리더라구요. 두세개 영상 편집하는데만 더. 그리고 이거 편집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버벅거려서 나가고 이러는거에요.
그래서 이거 어떻게 해야되냐 했더니 조립하는 분이 그거를 동시에 몇개를 띄워서 편집하실거라고요? 그러면 이거는 뭐 이런정도의 사양을 내야 된다라고 그러는거에요.
그러면 이 시대가 지금 바뀌었단 말이에요. 유튜브 시대면 유튜브 편집할 수 있는 사양이 있어야 된단 말이죠. 말하자면 제가 이게 맞다 틀린다 이런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 그런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렇게 정해놓을 수 없단 말이에요.
컴퓨터를 이렇게 비싼 컴퓨터에 갖다가 작업을 하면 스님답지 않다던지. 스님은 저 산속에만 있어야지 어떻게 대도시 서울에 나와서 수도 승리. 왜 수도 승리겠어요? 수도에서 열심히. 수도 서울에서 포교하니까 수도 승리. 정할 수 없단 말이죠.
지금 저는 되게 보기 좋은 점이 지금 젊은 스님들 있잖아요. 지금 30대 40대 막 들어서고 하는 젊은 스님들이 지금 보면 되게 보기 좋은 점이 이 스님들은 우리때랑은 좀 달라요. 우리는 이런 얘기를 해도 조심스럽게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스님들은 뭐 할 말 다해요. 나는 이거 좋아하고 저거 좋아하고 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내 공부하면서 한다. 나름의 어긋나지 않는 나름의 틀도 가지고 있고 그러면서 공부 나름 열심히 하고 있고 그러면 상관없단 말이에요.
그 가운데도 안목이 있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을 보면 그냥 좀 자유롭게 살아요. 살면서도 어긋나지 않는 그런 부분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럴 수 있는 측면을 제가 이런 얘기를 굳이 하는 이유가 앞으로는 그런게 더 많아지는 시대가 될 거에요. 그래서 앞으로의 시대는 더 열려야지 우리가 그게 이해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올 수도 있어요.
힙합하는 스님도 나올 수 있어요. 얼마전에도 BTS에서 스님들 그룹도 만들고 했던데 다양한 방편을 쓸 수 있죠. 그런데 이제 근본 본질을 놓치지 않고 이 자리에서 방편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없이 자유롭게 무슨 방편도 쓸 수 있게 되겠죠.
그래서 그런 시대가 왔을 때 놀라지 마시라는 거죠. 그런 시대가 왔을 때 그런걸 보고 잘못된 스님이야. 이럴 필요는 굳이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머릿속에 법정 스님의 이미지가 스님이라는게 너무 고정관념이 과도하게 있으면 지금 젊은 스님들이 이해가 안될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만이 수행자로서 올바른 거다라는 그것도 과도하게 사로잡히면 그것도 무집착이 아니에요. 그 생각에 머물러 집착하는 거잖아요.
제가 아는 스님들을 보면 정말 조선시대 고려시대 때 스님들이 많으세요. 지금도 저기 산속 한가운데에서 정말 바깥에 나오지 않으면서 산속에서 옛날 방식으로 농사 짓고 기도하고 정진하고
거기서 스님들이 모여 사시면서 자급자급 하시고 늘 김장하면서 반찬을 해 드시고 반찬 하나 하는 거 맛있는 거 가지고 되게 행복해 하시면서 신도님들이 오시면 행복해 하고
그러면서 진짜 소박하게 절집안의 정신 문화 이런 것들을 늘 유지하면서 이렇게 사는 아주 훌륭한 스님들이 많이 계세요.
그러니까 그런 양변에 있는 모든 스님들의 역할이 저마다 다 필요한 거죠.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죠.
그러면 이런 분들은 이런 근기에서 맞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고 이런 분들은 또 여기서 맞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고 그런 어떤 다양성이 인정되는 유연하게 허용되는 그런 공부가 필요해요.
왜 그러냐면 이제 앞으로의 시대는 놀랍게 열리는 시대가 된단 말이에요. 깨어나는 시대가 된단 말이에요.
이제는 출제가의 구분도 사라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 공부에서는 제일 중요한 게 출제가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법을 깨달았냐 깨달지 못했느냐 법이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옛날에도 보면 스님들이 죄가자 분들이 깨달았다 한다면 혹은 그분들의 어떤 공부에 대한 안보가 있던지 공부를 많이 했던지 하면 그분들 밑에 가서 공부하는 게 허물이 아니에요.
옛날에도 그랬었어요. 제가 어릴 때도 보면 어떤 훌륭한 어떤 거사님이 본문을 하시는데 스님들이 많이 와서 듣기도 하고 옛날 유명했던 우리 유마거사같이 유명했던 분들이 몇몇 분들 계시거든요.
그런 분들 밑에서 공부해서 깨치는 스님들도 많이 계시고요. 황벽스님도 어떤 보사님 한테 공부를 해서 깨치기도 했었고 그런게 전혀 허물이 아닌 거예요.
그게 오히려 공부인의 자질일 수 있죠. 왜냐하면 상의 없으니까 그런 상의 영매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더욱더 모양이 중요하지 않는 시대가 되요. 열리는 시대가 되고.
겉모양으로 봤을 때 스님이냐 스님 아니냐 이게 중요하지 않는 거죠. 또 겉모습으로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이게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산속에 사느냐 도심에 사느냐 이게 중요하지 않단 말이에요.
모양이 중요하지 않고 모양이면 세상 비상인 상의 아닌 이 자리에서 나오는 삶의 향기랄까요. 이 마음에서 일어난다면 모든게 허용되요. 이 공부는요.
불교에서는 여기서 말하듯이 보세요. 걸어다녀도 앉아있어도 말을 해도 침묵해도 움직여도 멈춰도 본체는 항상 편안하다 했듯이 여러분이 경찰을 해도 공무원을 해도 군인을 해도 직장생활을 해도 장터에서 나무를 팔아도 아이 뒷바라지 하는 사람이어도 구멍가게를 해도 알바를 하더라도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더라도
아무 상관없단 말이에요. 어떤 일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아무 상관없단 말이에요. 무엇을 하더라도 선이냐 이게 중요한 거죠. 무엇을 하더라도 하는 그 모양에 뭐가 달려있는게 아니고 그 모양이면 이 자리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모양의 세계는 전부 다 이 하나에서 나왔으니까요. 삼나만상 모든 모양이 전부 다 이 마음 하나에서 나왔단 말이에요. 명백하게 모든 모양이 전부 다 이거라니까요.
이거 하는게 없다니까요. 뜰앞에 잔나무가 이거고 마삼근이 이것 뿐이 아니라 자동차, 하늘, 구름, 바람, 자연, 똥막대기, 부처만 부처가 아니고 거룩한 성전만 도량만이 사찰이 아니고 직장 일터가 사찰이에요.
내 몸이 도량이고 거친일을 하는 곳이 도량이고 청정한 일과 거친일이 따로 없단 말이에요. 내가 이 마음 이 자리에서 한다면 모든 일이 다 법의일이 되는 거예요. 이게 진정한 불교고 진정한 개요리죠.
이 하나의 자리에서 모든 것이 평등하게 회통된단 말이에요. 무슨 나뉠게 있어요? 잘나고 못난게 어디있고 바쁘고 바쁘지 않은게 어디있고 고요하고 번잡한게 어디있고 높고 낮은게 어디있고 출재가가 어디있고 남녀가 어디있고 나이 많고 적은게 어디있겠습니까?
모양의 차별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이면에 모든 것이 전부 다 이 자리에서 나왔다는 이 진실 하나. 여기에 다 뿌려내리고 있느냐? 이 안목을 늘 확인하며 살고 있느냐? 이거 하나가 귀할 뿐이에요.
내가 수행자인데 수행자다운 직업을 가지야지. 수행자다운 직업이 정해져 있습니까? 모르긴 해도 어떻게 생각하면 장담할 수 있을 것 같은게 뭐냐면요.
무교는 당연하구요. 앞으로 시대에는 목사님 신부님이 이거에요 이거 이런 시대가 나온다니까요. 이게 하나님이고 이게 성자와 성부와 제가 성신이라고 했더니 이게 성신이 아니고 성령이래요. 바뀐지 오래됐다고 천주교 신자분이 오셔가지고.
성자와 성부와 성령이 다 이거라니까요. 지금 그러고 있는 신부님도 계시고 목사님도 계세요. 있다니까요 지금도. 아직 주먹을 안 받아 그렇지. 지금도 있어요. 그런데 이게 시작이라니까요.
왜냐하면 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너무 명백하거든요. 종교인분들이요 목사님 신부님도 마찬가지에요. 그분들이 왜 목사님 되고 왜 신부님이 됐겠어요? 성직자가 된 사람들은 왜 그게 됐겠어요?
뭔가 내가 간절히 원하는게 있단 말이에요. 진실을 원한단 말이에요. 그 진실이 신이 됐든 뭐가 됐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그 진실을 신에서 찾은거죠.
그럼 진짜 신이 뭐냐? 진짜 신을 만나고 싶다. 이거 하나에 자기 전 인생을 바친 사람 아니에요. 그럼 처음에 모양이 중요하죠. 이게 천주교는 안돼. 유대교는 안돼. 오로지 이것만 돼. 이런식으로 처음에는 그 모양이 중요하겠죠.
그런데 내가 이 모양이 중요한 줄 알았는데 나는 예를 들어 개신교인데 저 사람은 천주교지만 너무 훌륭해 보여요. 딱 봐도 저 사람은 다른데? 뭐가 다른데? 뭐지? 뭐가 다른거지?
대화를 하는데 뭔가 내가 모르는걸 저사람은 알고있고 내가 확인 못한걸 저사람은 알고있는게 뭔지는 알수는 없는데 뭔가 분명한걸 알거든요. 감이 오거든요.
그러면은 자기가 진짜 이 공부에 관심이 있으면 종교니 이런거 자존심이니 다 버리고 묻는단 말이에요. 당신은 도대체 뭡니까?
뭐를 당신을 이렇게 지혜있는 사람으로 만든거에요? 당신이 알고있는 하나님은 누구기 때문에 이럽니까? 하고 물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진짜 성식자에요. 그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수 밖에 없어요.
저도 걸러서 들었는데 어디 큰 성당에 있는 신부님이 진리를 찾고 찾고 찾다가 여기서 발견을 못해서 로마 가톨릭 교황청에 가면 있겠지 해서 거기 유학가서 거기서 공부를 하다가도 거기서도 발견을 못했대요.
그런데 너무 간절해서 인터넷으로 찾다가 이 조사선을 발견하고는 이 조사선에 확 꽂혀서 교황청에서 이 조사선 법문을 듣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당신 신자들 중에 대화가 통한다는 사람들한테 이런 얘기를 하면서 이 공부를 해보라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런 분들이 점점 늘어나지 않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 스님들 중에도 목사님 중에도 신부님들 중에도 그 누구든 또 제과자분들 중에도 누구나 그 모양이 중요한게 아니고 진짜 진실 하나가 너무 중요한 사람들이 있거든요.
진실 하나가 중요하지 그게 겉모양이 뭐가 중요하냐 그런 분들이 있죠. 그러면 나이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권위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지금의 시대는 권위가 깨지는 시대잖아요.
그래서 옛날 같으면 무슨 조사니 종정이니 하는 이런 권위 그게 중요했잖아요.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앞으로의 시대는 옆집 아줌마가 오히려 더 권위있는 사람들보다 더 권위를 가질 수도 있어요.
옆집 아줌마에게 오히려 더 큰 깨달음이 있을 수도 있어요. 오히려 권위있는 사람들한테 찾지 못하는 것이 우리 주변의 도반들에게 거다하게 널려있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단 말이죠.
이렇게 바른 법, 이것 하나 깨달아 요달하면 이 모양의 세계에서 영광스러운 일이 있든 오용락이 있든 거기에 끌려갈 일이 없죠.
겉모양이야 왔다갔다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것이 오용락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일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살면서 성공을 바랬다? 성공을 바랄게 없어요. 그런데 성공이 저절로 주어지면 저절로 주어지는 대로 그냥 거기서 가지고 노는건데 그게 안주어진다고 해서 간절히 바랄것도 없단 말이에요.
큰일을 했어도 큰일을 한게 좋을게 없어요. 여러분이 나는 빌게이츠처럼 아니면 위대한 사람처럼 훌륭한 사람처럼 유명한 사람이 될거야.
그렇게 간절히 바라다가 자연스럽게 인연 따라 되는걸로 굳이 막지는 않겠지만 굳이 그걸 추구하지도 않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거죠.
그런데 열심히 살아요. 그게 더 무서운거에요. 바라지 않는데 순수한 열정으로 열심히 사니까 오히려 더 빠르게 노력도 안했는데 자연스럽게 당도할수도 있어요.
그러면 또 그런 역할을 주어지면 하는거고 주어지지 않으면 안하는거고 주어지면 갖는거고 주어지지 않으면 안갖는거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내 인생에 제일 중요한 일은 영광스러운 일, 어떤 오역락을 성취하는 일, 그것보다 더 중요한건 이거 하나 확실하게 이 자리에 뿌려내는 일.
이게 내 인생에 가장 중차대한 일대사인연이 된단 말이에요. 일생일대 가장 중차대한 인연. 이게 일대사인연이에요. 이 공부가.
이게 진짜 제일 중요한 인연이구나라는걸 알고는 여기에 이 공부에 난 발심하겠다.
이 마음 내는게 그게 초반심시 번전각에 가장 중요한 우리들의 발심이죠.
오늘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