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 문정창 22편 | 부록 | 제1장 도이 삼대와의 관계 : 문화사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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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대 중국 사학사 개관 5호
16국 남북조 시대의 300년간
중국을 뒤흔든 자는
백제국이었다 백제국 4세기 벽도 있
비류 연대에 북진하게 있어서는 오늘의
하북성 지구를
점령하고 남지나 있어서는 양자강
어구의 5월 지대를 점유해 여러 군과
국을 설치해 통치해 왔
또한
이연대 백제국 하북성 지구를 근거로
해 회수 이북의 까지를
점령했으며 그러한 사실을 송서
시리즈가 잘
전해준다 그 약 200년 후 성제가
산동반도 재남 회수 지방을 점령했으며
이제 고대 중국은 동쪽 해안으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내륙까지 백제인의
있 머지을 북은 선비족 탁발씨
지하고은 동 남송 남 양이 지했다
그러한 부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그
정치과 문화가
고려하다가 마침내 그 동쪽 지역을
고려왕족 고이 지해 제를
건설 강 남쪽의 입도 건국한 동진의
국조 마인은 사마천의 원으로 명백한
한 쪽이었나 그 국세가 미약해
100년간 지식이 엄엄 하다가 백재인
또는 백제인 시 되는 도의 유에게
찬탈
당했다 남성 55년 만에 도의
소도성이 이어받고 남재 22년이 끝난
후 역시 도위 소관이 차지해 5
4년간 통치했으며 오호 16국 남북조
300년간의 남진한 백제인의 제압
하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역사는 민족과 국가의
족보이다 자족과 자국의 역사를 빛내기
위해 정력적인 활동을 벌렸다 그들은
전장에서는 검극 정복 활동을 벌리고
조정에서는
필단 그러한 활동을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하게 기전 있고 가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국가
사회에 있어서 사귀는 필전이기도
했다 중국의 사필 춘추 시대부터
그러한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공자가 그의
춘추로 이미 망한 주의 통해 계승자를
노로 한 것은 중국적인 사필 그러한
투의 남상
그 260년 후 동이족 정이 천하를
통일하자 진시황 그러한 한족 위주의
사설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한이 집권하자 한무제 철지
유향 유흠 동중서 사마천 등과 더불어
한쪽 위주의 사기 130을 했다 이어
반고 범이 을 통적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백제 구수왕 7년 후한이
망하고 삼국대 서버들 위왕 조조가
패권을 잡게 되자 조위의 시중 저작인
왕은 동족 위주의 위서를
편찬했다 위당 정인보 왕이 편찬한
위서에 삼국유사 고조선 전기가 말하는
위서운 내왕 이천재
단군왕검 입도 아사달 개호 조선이
수록되 있었으리라고 추측한 것은
이러한
관계다 당태종 문황제 어찬이라는 방을
붙인 진서의 예찬자 이연수는 왕의
위를 듯 다위 시위 미약 진수기
실록이 했는데 이것은으로 풀이해야
한다 첫째 수가 말하는 다위 제는
왕이 편찬한 위서가 조선족 위주로 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말로 풀이된다
이리하여 왕의 위선은 전해질 수 없게
된 것이다
둘째 미약 진수기 실록 운는 왕과
같은 연대에 편찬된 진의 삼국지
위선은 동방 를 깎고 삐쳐 한인
위주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은어로
풀이된다 이리하여 진수의 위선은
오늘날까지 권위 있는 서로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백제사의 본원적인 해를 가한
자는 삼국지 위서의 편찬 자다 진수는
위서 동의 전에서 부여
고구려음 외에 관하는 그토록 소상하게
으면서 제전을 쓰지
아니했다 진수는 처음 촉한의을 하다가
지인이 촉한을 멸하 연에 걸려 곤경에
빠져 고생하다가 장의 구로서 진국에
용하게 됐으며 이때가 백제의왕
35년이 진수가 승진의 저장이 돼
삼국지를 쓰기까지
상당한 시이 걸렸을
것이다 의 삼국지 위서 동의 전의
저술이 끝난 것은 대체로 백제 고이왕
말년이라서 활동이 왕성해 중국 본토와
일본 열도의 점령지를 갖고
있었다 과연 진수의이 고의가 사학
사상에 크게 향하여 이보다 약
170년 후 쓴 후한서 제전을 쓰지
아니하고 만전 만들어 놨으며 보다
200년 후에 쓴 당태종의 진서도
제전을 쓰지
아니했다 진수 범 당태종 이들 1년의
자들이 백제사를 쓰지 아니한 그
화해가 다시 그
1600여 후 군국주의 일본인들이 역
이용하는 바 돼 오늘날 이나라 사
백제국의 성립을 실제보다 400년
끄집어내려 4세기 후반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서진이 50년에 망하고
사마예가 강남에서 동진을 건설했다
동진의 성립과 거의 동시에 백제국의
남진의 요거요 관문인 해안지대 5월의
땅을 점령했으며 동진 102년 간의
역사는 보잘것 없는 것이
되었다 진서의 자들은 그들이 버린
동진 102년 간의 사옥을 꾸며
내기에 무척 고심한 것
같다 그러한 사실들이 먼 훗날에
반영돼 오늘날 자유 중국이 발간한
사서 편 창고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동진이 보잘 것 없는
존재였음을 더 한층 뚜렷하게 나타낸
것은 동진 자체가 그 사직 102년
간의 제국의 역사를 를 한 번도 수한
일이 없다는
자입니다 동진이 성립된지 68년 만인
백제 진사왕 2년 닭발 씨의 북위가
성립됐다 북위는 건국 53년 만에
최호 고유에 명해 국사를 편찬하게
하고 또한 그로부터 49년 만에 다시
비서랑 표에게 명하여 그 국사를
수하게
했다 오늘날 전해져 있는 위선은 북백
이제인 위수가 북제 문선재의 명을
받아 편찬한
것인데 자유 중국이 편찬한 사서
편찬은 그 위서가 송대에 29편이
깎여 없어지고 유서 등이 다른
사례로서 그것을
보충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위서
백제전 백제 개로왕이 그 18년 북경
지방에 자리한 대방태수 장와 관북
장군 불사후 장사 여풍 등을 보내
제위의 군사동맹으로 고구려를 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원병을 청한 그
국제가 모욕적으로 작 기재되 있을
뿐으로 제국에 관한 그외의 것은 일체
기록 있지
아니하다 후 뛰어난 문필가 심약 진서
110과 송서 100권을 편찬하고
또한 심은 양대 이르러 남서 권을
편찬했다 양선은 심을 오흥 사람이라
했는데 흥은
수이다 그의 주인 남송의 시조
유유가였으며 심약 또한 종족적 지역적
정치적 그든 측면에서 백제와 가까운
사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남자는 그 사직
22년간에 동족간의 정권 쟁탈전을
삼능 등 사기를 수하 하지
아니했다 양이 성립된 후 양 무제는
자신이 통사를 썼다 하나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양이 망한 62년 만인
백제 19년 당이
성립된다 당의 제 2대 태종 이세미는
사상 보기 드은 총명한 인물이며 대경
약가로 그는 특히 오호 16국 남북조
시대에 한족이 당한 수모를 씻고
동족의 역사를 깎아내려 한족의 그것에
용키 위해 뛰어난 문필가를 총동원에
일대 역사 수찬 작업을
버렸다 여기에 동원된 인물이 그의
아들 위왕 태 위징 이악
안사고 고덕이 고덕
이연수 현달 방현영
등이었다 당태종의 명을 받은 이들은
역사 수 작업으로 먼저 진량 주진 수
5대 역사를 새로 편했는데 그중 가장
역점을 둔 것이 서였다
누수란 바와 같이 5호 16국시대
가장
미약하며 또한 동족 특히 제국으로부터
권역을 많이 당한 자는 진이었다
한족의 역사를 제고하고 과시하려는
입장의 당태종은 이보다 천년 전
공자가 이미 망한 주나라의 통을 노해
이어주기 위해 춘추를 쓴 것과
마찬가지로 남북조 시대에 남조의 통을
동진이 차지하게 하는 방도를 취했다
그러한 계획 하에서 이수에게 명해 진
수록했으며 그는 사실이 아닌 위작을
많이
가했으며 그러므로 태중 문황
어찬이라는 방을 붙여 세상에 강요한
진서는 작인 부분이 심히
많다 그리하여 오늘날 자유 중국에서
발간한 사서 찬구가 문다 사
사체라
한것이다 풍이 많은 거짓을 렸으며 그
가장 뚜렷한 것이 제전을 쓰지
아니하고 이미 아득한 옛날의 자취를
춘 마한을 들고 나와 마한이 조공하다
마한이 부하를 연발해 놓은
일이다 서에 또 하나 놀랄만큼 교활한
점이 있으며 그것은 동간 문제
기
다음절 일조를 린 것이다 즉 그
하나는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아오
제국을 그것을 계기로 인정해 동진의
폭으로 만들자는 것이요 다른 하
당태종의 아들 위태 꾸며낸 지지에
고구려도 평 한지를 현실화시켜
평도 평을 한대의 군으로 들자는
것이다
라들이
은이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해 원을 하고
려로 하여금 멀리 북만주 집안으로
이하게 하고 평양성을 한 사실이 그
기이 다 즉
이수은이 사실을 착해이를 하여
근을
태수 를 거느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은 위서에 소급해
이미 편찬되어 있는 모든 사서들을
그들이 꾸며낸 노선에 맞춰 수많이
깎고 고치고 삐뚤 그 괴를 동일하게
해
놓았다 또한 그들은 그 꾸미고 삐쳐
놓은 8대 4 위 진 송
제량 진주 북제
그들의 노선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체계 세우기 위해 남사
북사 편찬에 덧붙여 놓은
것이다 당태종이 편찬한 진서는 우리
민족사를 오욕 격하시키는 획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중국의 사선은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의
순으로 체계가서 있는데
후까지는 족과 한족과의 교섭을
대등적으로 취급하 내공 아다
침노하다 일관돼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당태종이 엮어낸
진서은 동진이 백제왕을 봉착했다
임명했다 등 전대 미문의 소리를 처음
만들어 내
놓았다 당태종은 또한 요사에
명해 양서와 진서를 편찬하게 하고
고독에게 명해 주을 편찬하게 하고
이에게 명해 수서를 편찬하게 하고 령
등에게 명해 성서와 남제서 개찬 아게
했다 이들이 당태종의 의도에 따라
백제왕을
책봉하고 임명하다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따위의 소리를 수없이
기재해
놨다 진대 이후 중국 사서에 모순
상충되는 이종의 기록이 있는데 그
하나는 백제왕을 영동 장군으로 봉하다
따위 다른 하나는 백제국의 진대의
요서 진평 이군의지를 점해 그 군국
두다 백제국기 진 송 남재 양대
이르기까지 양자 간구의 좌우 양안을
점령하다 호위 때에 중원을 점거하다
등이다이 이종의 기록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제나라의 땅을
점령한 외적에 영동 장군이라는 관명
줄 수도 없는 일이요 그와 반대로
남의 나라 땅을 점령할 정도의 강자가
그 약자의 정동 장군이 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이 이종의 기록은 어느
한쪽이 거짓이다
일부 식자들은 양 무죄가 백제
무령왕을 영동 장군으로 봉하다 한
것을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노예 사과에 눈까지 멀어 있는 몇몇
인사는 백제 자진 송
재양 거강 좌우를 보고 중국에는 위가
많다고
반발한다 중국인들은 자족의 사권을
위해 숱한 위작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이 백제사를 위해 그와 같이
엄청난 거짓을 꾸며냈다 생각되지
않는다 우당 그러한 거짓을 그들의
사회와 국가가 용납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본선은 백제사의 방어를 위해
이러한 저급의 소리에 많은 지면을
허비했는데 참으로 기막히는
일이다 4 문화사적 관계 1 도위
3대 문화의 원류와 남진하
백재화 중국의 황하 양자 양강 중류
2동의 땅에는 BC 3천년기에 이미
서양인들이 말하는 선 퉁구 수족 즉
알타이 어족이 살고 있었다 그 후
서방 서장 족이 황하 양자 양강의
유역을 타고 이동했습니다 마침내
동방중 은과 서방 주의 대결로 발전해
동족이 하여 몰리게 됐으며 이러한
역사 현상을 러시아의 민속학자 제노코
그노 등 서양인들은 선구 수족의
동북방 제 2주라
한다 그러나 이미 뿌리가 박힌
조선족의 활동은 산동 만도와 회수
지방을 중심으로 해 지속적으로
계속됐다 북위와 남가 많이싸 종 서주
지방은 일찍이 단군 조선계 왕이
36개국을 거느리고 주 모과
대결하다가 패한 곳이다 제국이 양자강
어구의 5월 지대를 점령한 것은
서언왕 간 천여년 후의 일이며 양자
간구는 남진의
관문이며거다 양구에 자리하면 내륙의
침투가 용이하며 도이 백제인 는
우수한 항해술의
소유자들이다 회수 양자 양강 유역은
역사 일래 알타이족 조선족의
문화권이며 이시점 양나라 때는 제국이
5월 지방을 점령한지 이미 근
200년이 산동반도 회수 지방을
점령한지
80년이 그 바탕이 조선족의 문화권
이에이 장구한 세월에 걸친 백제국의
통치와 그 영향력은 자연 남지를 백제
문화권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주석 수석 북사 구당서 등은
백제국 남진 나의 생활 양식이
대동소이하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풍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하게 여기고 고소와 사설을 사랑
하며 그 우수한 자는 글짓기를 잘하고
음양과 오행을 잘 알며 송원 가력
사용하되 인어를 정을러 한다 장가가고
시집 보내는 예절이 중국과 대략 같다
시집 보내고 장가가는 얘가 중국의
풍속과 거의 같다
오곡과
잡가와 채소와 술과 단과
안주와 반찬과 약품 등에 관한 풍속이
중국과 많이
같다 매년 복날과 나비이 중국과 같다
그 서적에 오경과 노자 순자 장자에
관한 것과 사기 한서 등이 있다 또한
법과 법문이 중국의 법의 의지에
있다 양은 도의 3대 막라
송남재 양 3대의 총연장 수명
1336년 제국이 양자 간구를
양말까지 점령해 온 연조
250년 11년이
짧다 한인 사가들은 백제국의 인문과
생활양식이 중국의 그것과 같다 했으나
그것은
거꾸로다 자고로 지배층은 의 문화를
피지에 치게 강요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덕화 또는 화피 만방이 했 남진의
요거를 250년간 통치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도의 3대의 국가들을
그 세력권 하에 두고 있었던
백제인들이
송남재 양의 덕화를
받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도 3대 연대에 있어서의 중국의
문화의 연원은 한반도 서남 해안에
자리한 백제국의 문화와 당세 일에
그곳에 깊이 뿌리박힌 동이족의
문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양떼에
이어서는 백제국 남진하 문화 관계는
그 생활 양식과 생활 습성이
같았을뿐만 아니라 언어도 대동
소유했던 것 같다 백제 동성제 그
21년 과거 10여년간 10만에서
20만 규모의 병력 서 대결해 오던
북의 문제를 결정해 회수 유역과 산동
반도를 점령한 후부터는 남진하는
완전히 백제인의 천지가 됐다 그
전투에서 백제 세력을 등에 없게 된
도이 소관이 남재 화로부터 찬해 양을
하였음은 위에서 밝혔다 양 때는
제국이 남진에 진출한지 200여년이
또한 진가 백제인의 천지로 된는지
60년이 그간 백제 문화와 백제인의
생활 양식이 남진 아의 작용하고
침투해 남진 아의 생산품 음식 일상
생활 홀래 그리고 심지어는 언어까지
이토록 제화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2 찬란한 도의
문화 1 사성보박물관
[음악]
북은 백제국 선비족 탁발 씨가
차지하고 남은 제국과 도의 3대 즉
남송 남재 양이
점거했다 남송의 유유 남재 국조
소도성 양해 국조 소관 등이 모두
백제인 또는
백제인이 누수란 바
있다 따라서 도이 3대 이후의 남방
문화는 백제국의 문화권에 속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기국의
문헌이 없음을
탓했는데이 경우 백제국의 사기 없음이
한이
된다 중국은 한대까지 북방을 중심으로
한 문화가 발전되며 문자 사상 가장
정수인 것이 후한의 허신이 편찬한
설문 회사 36권이라 한다 설문
해사는 환자에 대하여 그 성립 과정과
원뜻을 설명하고 또한 한대에
사용되었던 육서의 대여도 자세히
설명했다 허신은 후한 안재 연대
인물로 그가 간 얼마 후부터 한
게로가 요란하기
시작했다 백수 7년 후한이 망하고
동란의 삼국 시대가
찾아오고 이어 서진을 거쳐 5호
16국 시대로
들어갔으며이 기간 중에는 문화 발전이
활발하지
못했다 서진발 5호 시대는 백제국의
황금기였다 한 3국 중 가장 먼저
강성을 이룩한
백제국 양이 성립되기
2117년 전에 오경박사
왕인가 사가 아직기 응신 외국에 보냈
선세 일의 동족의 주어지요 동의의
요소가 짙은
진하에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백제인들이 회수 지방과 5월 지방을
점령해 왕성한 정치활동을 벌림과
동시에 양자강을 타고 내륙지방 깊숙히
들어가 물의 교환을 성하고 있는
것이다 허신 이간 300여년 후
양자에 리 한 도이의 나라 송에서
청사에 빛나는 문필가 심야의 성보가
출연했다 후한 허신의 설문회 양나라
심양의 사속 중국 문학의 쌍벽이라
한다 시약은 회수 지방 5월 사람으로
그의 부 박은 성조의 벼슬에 회남
태수를 지내다가 백제 비류왕 27년
참을 당했
어린 시약이 떠돌아 다니면서 독서의
정진해 대성 일가 하게 됐다 송영주
자사 채흥이 그 제주를 사랑해 안서은
참군 겸 서기로
기용했다 시약이 약진해 상소 도지한이
됐다 송이 망하고 제가
입했다 됐다
이때 남자가 심히 요란 했으면 백제
동성제 22년 시야이 소관에 천하를
구하라 진언했다
이에 소관이 양을 건립하고 심에게
광록 대령 태자 천사 등 많은 영직
줬다 천재가 영명한 그는 당세의
관절하는 사인이 됐으며 또한 진서
110권 송서
100권 서기
20권 양 고조기
14권 동원
10권 시해 10권 송문 장기 30권
문집 100권 등을 지었다 심양은
과거 수천 년간 전인이 깨닫지 못했던
성음의 묘지를 터득해 성부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양 무지에
바쳤으나
소관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주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채용하지
아니했다 희미하게 성보는 허신의 설문
회사와 함께 한문자를 완성한 것이다
즉 표의 한자는 그 뜻도 소중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직분을 담당하는
음성과 음감 또한 기
중요하다 부가의 소에 있어서는
이때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인바
이제 제국이 200여년간 영유
통치하고 있는 땅에서 당비 시약이
발견한
것이다 시약의 성부는 동양 삼국인
성조가 돼 영원히 빛나며 상영될
것이다이 오진의 발달
한자에는 오음 한음 음이 있는데
한국과 일본이음을 사용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네의
한자음 북방이 아니고 화남의 소위
오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문화간 관계를 증명할뿐만 아니라
오이 백제국의 300여 년간 점령에
통치한 강좌 즉 5월 지대에서 생성
발달한 것이매 한국과 일본이 오을
사용하는 것은 자연 질이다
하겠다 음은 백제 본국과 남지나 5월
지방을 중심으로 생성 발달에 광범한
남방 문화권에서 사용됐던 것인데
일본이 오을 사용하게 된다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즉 일본은 고이왕
19년부터 백제국의 분국 또는 본국이
되고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후
백제국의 양자강 좌우 양안을 점령하
자 외는 그 종국 백제 수부에
일찍부터 남진에 머물러 제국을 통해
도의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이 가장 간명하게 또한 단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다음
문헌이 북사이 구절은 제국이 강좌
강우를 통치하는 동안에 외가 그
지역에 거점을 얻어 일본열도
한반도 남지를 자주 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외가 그러한 활동을
버렸던 사실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것은 다음의 새
기록이다 사문의
성행 네자와 여섯 자를 기본으로 대를
많이 쓰고 음조를 추며 고를 많이
인용하고 또한 보다
시하는 미문의
사병은 특히 조 시대에 성다 한다
조란
오동진 송
제양 진의 대를 말한 것으로 6조 중
문화가 가장 발달한 연대가 도이
3대다 그러므로 본선은 병을 발달시킨
주된 세력을 백제인 또는 시되는 도의
3대로 보는 것이다 4 협의
등장 분은 본래는 동일한 우에 속하지
아니하는 글자를 동일한 운으로
사용하는 글자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음화 청각의 효과를 거두려는 노역의
운법이 일찍부터 사용돼 특히 한대에
크게
발달됐다 오호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중국은 인종적 자고로 말미암아 언어
의문에 일대 변동이 생기고 따라서
문자에도 혼란이 일어났다 그러한
중에서 문화를 크게 일으켜 세워 권자
차지한 자는 도의 3대 있으며 특히
심야의 성보는 전인 미지의
대발명이었다 성보는 성음을
평상 거 입에 성으로 나눠 그것을
성조의 기반으로 하는 것인데 잡다한
의문을
성만 처리할 수 없어 일정한 글자의
한해 본래의 운이 아닌 다른 운에도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협문이 총
270 아흔 자가 있는데이 또한 도이
남송의 시약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한다
5 고고 문화의
제양
관계 300년에 걸친 백제인의 남진의
역사 활동은 응당 그들의 족적이
그곳에 수많이 남아 있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는
남진하 내의 백제 유적으로 확실한
것은 오직 강소성 두 곳으로 4세기의
진교에서 출토된 동제 고대가 공주
성산리 제 1호 고분에서 출토된 동제
고대와 동일하다는 정도라
한다 파리로 해방 후 그 지방에서
백제인의 유적이 얼마나 출토되는
알아낼 길이
없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당대에
있어서도 백제국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토록 했었고 오늘날에도 당대
사과들이 깎고 깎고 또 깎다가
남겨놓은 백제 거유 요석 진평 이군
차디 백제군을 부인하기 위해 이른바
양직 공도라이딩
있 없든 백제인들이 수세기 남지에서
버렸던 역사 활동을 전하는 그 많은
문헌들은 그러한 역사 사실을 명백하고
소상하게 말해주는 박진의 사료인
것이다 김 박사는 우리는 불행하게도
백제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고
탓했다
그러나리는 백인들이
남지에서 여년간 버렸던 역사 활동을
똑똑하고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충분하고도 광범한 사료를 갖고 있으며
첫째는 위에서 언급한 동제 고대가
그것이며 둘째는 하남성 장사 시에서
발견된 백제식 전과 고분이
그것이다 장사의 전과 고분은 그 축이
공주에서 발견된 이은방 무령왕릉의
그것과 동일하며
거기에는 영원 원년의 명이 새겨져
있다 한다 남재 영원 원년은 백제
동성제 21년 이무렵 동성제 북위의
20만 대구를 격파하고 산동 반도와
회수 지방을 점령했을 위에서 상술한
바 있다 장사 고분 외에도 남진하
발견된 고부는 백제군과 동일의 것이
많다는데 고부는 지배층의 덤이요
백제식 고분 횡혈식 전실이 그
특징이다 남지나 여러 곳에서 백재인
지배층에 무덤이 발견됐으며 이만하면
백제인들이 남지에서 버린 역사 활동에
자취를 충분히 알 수 있다 하물며
중국의 여러 문헌이 백제 자진
송제 거강 좌라 하고 또한 후위 중
이라 하고 있지
않는가 6 낭설에
무령왕릉과 위작의
지석 도의 3대 운이 다해 백제
위덕왕 4년 양이 망하고 진패선 진이
성립됐다 진 24년 만인 백제왕
28년 진이 망하고 수가 성립되니
중국은 이로서 통일 시대로
들어갔다 수가 37년에 망하고 백제
무왕 19년 당이 성립되는데 이때
3한 3국의 쟁패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거기에 당이 끼어들어 재려
동맹과 라당 연합의 양대진 영으로
발전해 10여년간 천하를 건 사투가
벌어지고 마침내 백제의자왕 20년
백제국이 라당 연합군에게 토멸
당했다 백제국 토멸 당군이 10여년간
부여 옹진 지방에 주둔하게
됐으며 이제 백제사 백제 문화는 그
본국에서 대환을 만나게 된 것이다
백제 고지에 주둔하는 당장 중에는
일찍이 그 본국에서 백제국의 역사를
말살하려고 애쓴 자들이 많았으며 그
주요 인물은
유인했다 유인은 귀국해 곧 옛과 같이
감수 국사가 된
자다 당선은 당고조 2연 농서지방
인의 후라
했는데 서의 인은 몽고에서 이주한
알타이족이며 이연의 출신지인 당군
선비의
본바닥이다적인 선비족은 묘를 잘
뒤진다 오한 선비적인 등이 그들
상대방의 묘를 뒤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부터 일이며 그 수가 하도 많아
열거할 수 없으나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을
된다 1 흉노 모돈에게 패한 오한이
흉노에게 크게 곤란을 당해 오다가
BC 121년 한무제가 흉노의 하성을
파하고
오하늘 상곡 어양 우북평 등지에
이주시켜 그 북방 열하성 지방 흉노의
동정을 살피라 했다
한무제는 또한 오한의 추장에게 오한
교라는 벼슬과 함께 록 이천석 줘 그
지방을 감독하라 했다 그럼으로써
득세한 오한이 과거 수백년간 흉노가
남긴 선유의 묘를 모조리 파헤쳐
모돈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는 것이다
2 백제 초고왕 25년 발해만 양평
리사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즉
별안간 척이 넘는 큰 바위가 솟아
올랐는데 그 바위 밑에 세 개의 작은
바위가 큰 바위에 발과 같이 돼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많은 설이
떠돌았는데 요동태수 공도의 부하 유의
양이 등이 공도에 후한이 멀지 않나
망할 것입니다 여러 조들이 천하를
도모하고 있는데 만일 공이 하면
궁이도 것입니다
했다 공도가 기뻐해 일을 도모함에
한내 대수 이민이 그것을 알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과 함께
한반도로 도망쳐
갔다 공도가 크게 노해 이민의 아비의
묘를 파헤쳐 관중의 시체를 끄집어내
그 시체를 불사르고 이민의 일족을
했다는
것이다
3 백제 초구 왕 26년에 사상
최대의 도적이 생겨났으며 그 자는
후한의 권신
동탁이 동탁은 중국의 천년 고도인
요양을 점령하자 여포로 하여금 요양에
묻힌 모든 제왕들의 능과 그 지배층의
묘를 모조리 파헤쳐 거기에 매장돼
있는 금은 보화를 취했다는 것이다 4
북연의 국조 모용 는 고구려를
도모하다가 여러 차례
실패했다 분통이 찬 모가 백제 책계왕
11년 고구려 천왕의 묘를 파기
시작했다 그러한 바 묘를 파던 인부가
폭사하고 묘 안에서 음악 소리가 나니
모가 겁내 달아났다는
것이다 오 묘를 잘 뒤지는 북쪽에 또
기한 일이 생겨났으며 그것은 묘의
발굴을 정상에 크게 이용한
일이다 백제 비류왕 16년 후조의
성이 하북성 지구의 일부를
점령했다 그러한 바 하남성 초에 거한
동진의 정북 장군 조적이 선해 백성이
편안하게 되니 성이 감히 도모하지
못했다 성이 기기를 발해 하북성
지방에 있는 소시의 묘를 수리해 묘
극히 하니
조이고 사신을 보내 물을 치고
하였다는
것이다 고구려 고국원왕 12년 화성을
락한 모가 미천왕의 묘를 파헤쳐 그
시체를고
갔다 묘를 뒤지는 이러한 종족들이
국의
옛을 휘두르고
있으며 모든 고분이 성해 물리
만무하다 여지없이 독을 당한 백제
지에서
1971년 기적적으로 유물이 들어
있는 한기의 고분이
발견됐다이 과부는 너이
2.7m 길이 4.2m 되는 하나의
현실과 갱도를 가진 소규모의 것으로
그 묘 안에 다음 문구가 새겨져 있는
석판이 들어 있었다 이상의 문구를
순서대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영동
대장군 백제 삼마
왕이 나이 62세로 계묘년 5월 7일
붕 하시다 을사년 8월 12일 편안히
모시고 분을 쌓아 올리니 큰 묘가
이룩되다 묘지를 세우니 다음 문과 과
같다 병오년 12월 백제왕 대비 수가
다
하셨다 유지에 거상하다 기유년 12월
12일 가장을 고쳐 대여에
화장하다 다음과 같이 묘지를
샌다 전 1만분 위에 한 건을 4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위에 일만 문으로 도왕
토백 토부 상하 중에게 공헌한다
이천석 신지를 샀으므로
계약서를 만들어 명백히 한다 법령에
따르지
아니한다 여기서 이른바 왕의 지석의
이면에 문이 없는 이유를 알게 된다
즉이 두 석판은 후세의 장자들이
동시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왕의 지에
새겨져 있어야 할 난 왕비의 지에
겨져 있는 것은 조각가가 왕의 지석의
후면에 새겨야 할 것을 잘못해 비의
지에 생겨놓고 어떤 목적의 자가 그
그릇된 것을 살지 아니하고 그대로
묘광 집어넣음 인해 그 실수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무령왕릉 조사보고서는 토지부터
묘지를 한다는
것은 입각한 것이다 했다 그러나
제국에는 도교가
없었다 도교를 부인하는 백제국의
무령왕이 무슨 도교 사상에 입각한
토지 신과의 묘지 거래란 말인가 고대
군주 절대
권자 진천 지하 율토리 솔토 지민
모비 왕민 모비 왕토 그들의 정치
철학이 그들 왕권의 연인 것이다 이런
바 지석이 모두 위임이 판명됐으며 그
소위 무령왕릉은 근거없는 낭설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이 전과 고분을 무령왕의
능이라고 탕으로 응신 외국의 압력을
가해 정약 결혼을 강요 자신의 딸
수백향 공주를 개체에게 시집보내
그나라 중흥의 왕인 명왕을 낳게하고
외국으로부터 남해상에 위치한 상다리
하다리 모루 사타 등 많은 땅에
이양을 받는 등 동양 삼국을 제압하는
대제국을
이룩했다 파리로 후 황해도 안
지방에서 세계 고분이 발굴
그중 제 3호 고분을 북한의
당국자들은 고구려 제 15대 미천왕의
능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바이
분에도 호세 사람들의 장난이 가해져
그 전실 서쪽 벽에 선비족 동수의
묘라는 묵서가 있다 삼호 고부는 정실
전실 동실 서실 선실 회랑 등을 가진
거대한 것이다 이른바 무령왕의 무덤에
대한 또 하나의 의무는 왕관이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석을 만들어
넣을 정도의 분이라면 응당 왕관도
들어 있어야 할 일이 아닌가 제국은
그 사직
678년간에 30인의 왕이 하고 또한
백제인들은 고려인과 마찬가지로
[음악]
금은제 진어 장하는
장이며 많은 식민지 경과 교역으로
크게 부를 이게 호사를
자랑했다 그 많은 왕 비자 왕손
귀족들의 무덤에는 응당 금은 제보도
많이 매장 있었을
것이다 양의 역대 제왕과 그 신하들의
무덤을 후한의
상동이 공공연하게 독해 크게 부한 그
지에 있어서 장들에의 저히 해졌을
것이다 이들이 백제를 뒤지는 다음
세가지 목적이 수반을
것이다 첫 번째 제보의 득 두번째
거대한 능을 모 해 백제국의 위대성을
식는 것
자들이 끝으로 들어
장군을
침하는 것 이소위 무령왕릉은 이미 친
도구 또는 그 층에 무덤 속에 두개의
석을 만들어
했든지 혹은 그들이 대유 중에 죽은
왕자와 그 비를 후위 장사하고 두개의
석판을 만들어 었던지이 중 하나의
장난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본다 y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