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나치는 어떻게 독일에서 집권했을까? 히틀러의 일대기 2부

역사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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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K 비디오 조회수·2025. 1. 10.
안녕하세요.
역사독보기입니다.
역사독보기의 독재자 열전 히틀러 편 2부입니다.
독일에 대한 엄청난 섬망을 가지고 있던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으로 자원 입대를 하지만 독일의 패망과 독일제국의 와해
는 히틀러에게 굉장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독일제국이 와해된 후 새롭게 들어선 바이마르 공화국은 전쟁 후유증
과 전쟁 배상금 때문에 무한정 화폐 를 찍어내면서 독일 내에서는 극
심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찾아 왔습니다.
화폐가치는 종이쪼가리가 됐고 독일 경제는 마비됐다시피 했죠.
독일 사회가 매우 어수선하다 보니 여러 극단적 사상을 가진 여러 정당
들이 나타나 독일인들을 선동하곤 했습니다.
이때 히틀러는 정보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느 한 극단적 민족주의
정당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히틀러가 조사하러 간 정당 이 독일 노동자당으로 당명의 노동자
가 들어가긴 하지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반유대주의
와 범게르만주의를 주장하던 극 우 민족주의 정당이었습니다.
이 정당의 사상이 독일을 선망하던 히틀러에 관심을 끌었고 오히려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 해버렸습니다.
독일 노동자당 당원이 된 히틀러 는 예전에 그 소심한 성격은 다
어디가고 군 경험과 1차 세계대전 패배에 대한 충격을 겪은 후에 히틀러
는 공격적이고 강렬한 연설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히틀러는 금세 독일 노동자당의 간부가 되었고 히틀러는 당명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바꾸었습니다.
독일어로 하면 나치오널 조치 알리스티 쉣 노이치 아르바이트 파르차이
이고 줄여서 나치라고 불렀죠.
1921년 히틀러는 나치당의 당수가 되어 국제사회가 규정한 베르사유
조약의 철폐와 반유대주의 범게르만주의 독일제일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당시 독일 사회가 워낙 어수선하고 혼란스럽다보니 많은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연설과 나치당의 강령 에 쉽게 선동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치의 상징표시인 하켄 크루이츠 도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한 번은 히틀러가 당의 간부들에게 이 나치당의 상징표시를 만들게
아이디어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전부 다 마음에 안들었다고 합니다.
한때 미대 지망생을 꿈꾸었고 그림 엽서로 돈 꽤나 벌었던 히틀러
는 본인이 직접 상징표시를 만들었 는데 빨간색 배경으로 흰색 원을
그리고 그 안에 검은색 게르만의 고대 문자와 비슷한 문양을 그려
넣어 하켄 크루이츠를 완성했죠 .
히틀러의 나치당이 이 하켄 크루이츠 를 너무 앞세우다 보니까 이 문양
이 정말로 나치가 최초로 사용한 표시로 알고 계시지만 사실 이
문양은 전세계 거의 모든 문화권 에서 비슷하게나마 사용하던 그림
이었습니다.
원래는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죠.
히틀러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당의 당수가 되면서 이 교류
한 사람들이 훗날 나치 집권기에 주요 간부들이 됩니다.
먼저 훗날 아우슈비치의 악마로 군림하는 루돌프 회스가 있었습니다.
루돌프 회스는 1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이기는 했으나 전후 깡패가
되어 조폭을 이끌었는데 1922년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큰 충격
을 먹어 그대로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했습니다.
깡패 버릇 어디 안간다고 루돌프 회스는 당에 들어가서도 계속 조폭
을 이끌었는데 단 이제 당원이 되었 기에 루돌프 회스는 정치 깡패를
자처했고 히틀러의 해결사 노릇 으로 도맡았습니다.
다음은 훗날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목되고 독일군 전체를 이끄는
독일군 원수로 거듭났던 헤르만 괴링입니다.
괴링은 독일 육사를 졸업한 정석 군인이었고 아직은 독일군에 공군
이 없던 시절 육군 항공대 소속 의 에이스 파일럿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활약 성을 선보이며 훈장도 받았던 전투기
파일럿이었죠.
하지만 독일이 패전하자 스스로 제대를 했고 미넨에서 대학교를
다시 다니며 역사를 공부했는데 역시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합니다.
확실히 엘리트 출신이라 그런지 히틀러는 괴링을 굉장히 높게 평가
하면서 언제나 곁에 두었고 괴링 은 금세 히틀러의 오른팔이 되었
죠.
훗날 나치 집권기 때 독일의 군사적 업무를 총괄하게 된답니다.
다음은 선전운동의 대가 괴벨스 입니다.
역시 많이 들어보셨죠 괴링이 군사적 엘리트였다면 괴벨스
는 학문적 엘리트였습니다.
독일어 역사 문학 등의 특기의 두각 을 보였으며 학창시절 성적이 항상
상위권이었다죠.
대학교는 본대학교 프라이브르크 대학교 민현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등을 다녔는데 전부 전공 은 문학이었으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는 박사까지 했다죠 .
괴벨스의 나치당 입당은 다소 늦은 편이었습니다.
추후에 이야기하겠지만 히틀러 가 폭동을 일으킨 이후에 나치
다음 소개해드릴 히틀러의 사람은 히틀러의 개인 비서였던 마르틴
보험안입니다.
마르틴 보험안은 정말 가니고 쓸 기껏 다 내놓을 줄 아는 히틀러
의 충실한 개였으며 각종 히틀러 의 부정적 재산을 관리해주었죠
.
나중에는 히틀러에 이어 나치당 의 3대 당수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히틀러의 사람은 훗날 ss친이대의 리더가 되는 하인리
힙러입니다.
별명은 학살자.
하인리 힙러는 대학에서 농업을 공부하고 아버지와 함께 양계장을
운영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역시 극심한 독일의 사회상에서
독일 제1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고 나치당에 입당한 후 나치당이 운영
하던 돌격대의 대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인리 힙러는 훗날 2차 세계대전 에서 대규모 학살을 밥먹듯 하고
다니던 끔찍한 악마이기도 했죠 .
1922년 10월 이탈리아에서 나치당 과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던 파시스트
당의 무솔린이가 검은 셔츠단을 이끄고 로마루 진군의 정권을 잡
으면서 쿠데타에 성공합니다.
이는 히틀러에게 엄청난 영향과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도 쿠데타를 일으키 기로 합니다.
더군다나 1923년 1월에는 전쟁 배상금의 불만을 품은 프랑스가 독일 최대
공업지대인 루르 지방을 점령하면서 독일인들의 공분이 치솟을 때였
거든요.
나치당은 이미 괴링의 주도로 돌격대라는 무장단체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나치당 외에 다른 국우 정당들과 연합하여 1923년 11월 9일
민헨의 어느 한 맥주홀에서 민헨 과 바이에른주의 주요 관료들이
독일의 11월 혁명 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그때 히틀러가 나치당의 돌격대를 맥주홀로 투입시켜서 관료들을
납치하였고 히틀러는 민헨이 속해 있는 바이에른주 정부를 장악하기로
합니다.
이 사건을 민헨폭동 혹은 맥주홀 폭동이라고 부른답니다.
이 폭동엔 1차 세계대전 당시 명장 으로 이름을 날린 루덴도르프도
참여하였죠.
하지만 어떻게 빠져나온 바이에른 주의 관료 3인이 바이에른의 군부대
와 경찰병력을 데리고 와 민헨으로 돌아왔으며 그저 무장단체에 불과
했던 나치당의 돌격대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나치당 주요 간부진이 체포 되었고 히틀러도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민헨폭동은 대실패였죠.
체포된 히틀러는 란스베르크 감옥 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옥에서 히틀러는 자서전을 집필하니 바로 나의 투쟁이죠.
웃긴건 민헨폭동 자체는 실패했 지만 히틀러 개인에게 봤을 땐
그의 인생에서 분기점이 되는 사건 이었습니다.
히틀러나 나치당이 민헨에서나 유명했지 독일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수많은 극우 정당 중 하나에 불과했죠.
하지만 민헨폭동을 기점으로 히틀러의 이름이 독일 전역에 퍼졌고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독일인들의 불신이 강했고 또 독일 경제의 마비
로 인해 극우 민족주의 사상이 팽 배해 있던 독일 여론은 히틀러
가 잘했고 정부가 묻어난건 맞다 는 분위기가 막 퍼집니다.
1924년 2월부터 히틀러에 대한 재판 에 시작됐는데 심지어 재판부에서도
극우 인사들이 많아서 히틀러는 쿠네타를 일으켰음에도 징역 6개월
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습니다.
다만 민헨폭동이 실패로 나치당 자체는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습니다.
출소 후 히틀러는 다시금 나치당 사람들이 모으기 시작했지만 예전만
같지 않았죠.
더군다나 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 스럽었던 독일의 상황은 1924년
정도가 되면서부터 많이 안정화 되어 갔습니다.
우선 1923년 말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렌텐마르크라는 화폐를 새로 반영해 화폐개혁을 단행했는데
개혁에 성공하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 을 잡는데 성공한 겁니다.
그리고 1924년에는 미국 재무장관 찰스 도스의 도스안을 국제적으로
통과시키면서 세계의 강국들이 독일 경제를 회복시키는데 합의
미국과 영국이 독일에게 경제를 회복하라며 차관을 빌려주었고
프랑스도 채권을 발행해주기로 합니다.
이렇게 빠르게 독일의 경제는 안정화 되고 회복되었습니다.
5년 후에는 미국의 금융과 ON 영예의 주도로 영안이 통과되며 독일이
갚아야하는 전쟁 배상금도 줄게 되고 말이죠.
물가가 잡히고 실업이 크게 해결 이 되면서 독일은 20년대에 점점
경제가 성장하니 독일의 산업이 부응하고 이러니 해외 투자금이
독일로 들어오고 독일의 기업들이 각종 기술들을 혁신해가면서 회복
수준이 아니라 고공 성장을 하고 있었죠.
이에 따라 독일 전체적으로 팽배 해있었던 극단적 사상을 가진 정당
들도 세력이 예전같지 않았고요 .
자 그런데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 이 벌어지면서 미국의 경제가 붕
개되고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거의 모든 강대국들이 미국 경제
에 묶여있는 상태에서 미국이 무너 지자 도미노처럼 유럽의 국가들
도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세계대공황이 발발한거죠.
그간 독일이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건 1924년 이후 독일로 들어오던
미국의 차관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차관이 뚝 끊기자 독일의 경제는 다시 휘청거리게
되죠.
기업들이 다시 도산하기 시작했고 도산하지 않더라도 구조조정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실업률은 갈수록 상승해 1932년에는 35-40% 실업률
을 찍습니다.
경제회복을 한지 채 10년도 안된 시점에서 독일인들은 1차 세계대전
직후 그때 그 경제마비에 엄청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다시금
극단적 사상들이 팽배해지기 시작합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도 뭘 어쩌지 못하고 있었고 그간 바이마르 공화국
을 주로 이끌고 오던게 중도조합 화에 해당하는 사회민주당이었기
에 독일 사회가 다시 혼란스러워 지자 독일인들은 극우적 성향을
띄기 시작하고 히틀러는 이 기회를 잡기로 하였죠.
더군다나 히틀러와 나치당은 이제 미넨폭동으로 이미 그 이름들이
독일 전역에 알려져 있었고 히틀러와 나치당의 지지도가 급상승합니다.
히틀러는 가는 곳마다 공격적인 연설을 하며 극단적 민족주의로
독일인들의 환심을 썼는데 성공 했죠.
이때 나치당의 선전국장이었던 괴벨수도 신델린 선전으로 나치당
을 홍보했고 어느덧 나치당의 당원 이 20만명을 훌쩍 넘기게 됩니다.
1932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대통령선거가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이 어마어마한 인기에 힘입어 대통령선거에 나가기로
하죠.
이 대선의 결과 어떻게 됐을까요 3부에서 이어집니다.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