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이 아닌 히틀러는 나치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히틀러의 일대기 1부

역사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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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역사 돋보기입니다 인류
역사에는 여러 독재자들이 군림하여
자국의 국민들을 고통에 빠뜨렸던 혹은
타 민족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쳤던
악명높은 인물들이 있죠 독재자들은
어떻게 독재자가 되었는지 어떻게
그들이 폭군이 되었는지 독재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독재자 열전을
덜어보고자 합니다 지난 중국의 독재자
마오쩌둥에 이어 이번에는 독재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히틀러의
일대기를
[음악]
다뤄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놀라는
사실 하나 히틀러는 독일인이 아닙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지금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일인이
오스트라 이이나 같은 게르만 족이라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칼같이 구분
without 수는 없지만 아무튼
히틀러는 독일인이 아니었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도
오스트리아의 공무원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아버지와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증에 폭력도 행사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건강이 좋지
못했던 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아돌프
히틀러가 10대인 나이였을 때 죽죠
다만 히틀러는 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았습니다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는
자식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며 돌보는
것으로 유명했다죠 하지만 클라라
히틀러 역시 히틀러가 20살이 되기
전 10대였던 시절에 병사 합니다
여담으로 히틀러 가족에게 가족 전체를
돌보는 가족 주치의가 있었는데이
주치의가 유대인이었다 두 부모를 일찍
여인 히틀러 있지만 아버지가
공무원이었던 덕에 연금이 나와서
생계가 마냥 어렵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인지 의외로 말수가 좋고 소심한
아이였습니다 그리고 유난히 집중력이
다른 또래보다 떨어져서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습니다 다만 책이란 책은
다 읽는 독서광이었다 하죠 청년
시절의 히틀러는 빈 시절의 히틀러와
뮌헨 시절의 히틀러로 구분 히틀러는
16살 때 오스트리아의 수도였던
빈으로 유학을 왔는데 당시 비는 유럽
내에서도 알아주는 예술과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예술과 철학의 도시에 큰
감화를 받은 히틀러는 그림에 빠져
미대 진학을 희망했습니다 히틀러가
그림 그리던 미대생 출신이라는 건
유명하죠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미대생은 아니고 미대
지망생이었다 진학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떨어졌고 끝내 미대에 들어가지 못했죠
미대에 들어가기 위해 히틀러가 비에
있으면서 그린 그림이 여점이 넘었다고
히틀러는 회고합니다 히틀러는 수채와
유화를 가리지 않았지만 주로 그가
그린 그림은 풍경화 있습니다 인물을
그린 그림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미대의 교장도 히틀러가 떨어진 이유를
두고 그림 같지 않고 건축 같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많은 미술 평론가들이
히틀러의 행은 제쳐두고 오로지 작품만
두고 다고 해도 히틀러의 그림 실력은
딱 미대 지망생을 꿈꾸는 10대 학상
평범한 수준으로 평가하고 높이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누구보다
그림을 좋아했지만 실력은 뒷받침해
주질 않았죠 더군다나 히틀러의 그림
취향은 그가 살고 있던 20세기
기준에서는 다소 유행이 지난
그림이었습니다 20세기 예술과 철학이
중심 지던 빈에서는 예술에 대한
미학적 접근과 도전을 중요시 어기는
모더니즘이 크게 유행을 했지만
히틀러의 그림 취향은 풍경 화만 그린
것에서 알 수 있듯 19세기의
유행했던 낭만주의에 쏠려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아름다운 것 멋있는 것
낭만적인 것을 추구했고 그러한 것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조각상들을 또
유난히 좋아했다죠 이런 젊은 시절
기억 때문인지 히틀러는 평생 모더니즘
예수를 혐오하며 나중 일이지만 나치
집권 기에는 모더니즘을 퇴폐 미술이라
파마하면 미대 지나기에는 실패하긴
했지만 그래도 히틀러가 생기를 위하여
엽서 그림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이건
정말 잘 팔렸다고 합니다 1913년
그의 나이 24 살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나와 독일 제국의
린넨으로 갑니다 이유는 군의 입대
해야해 병역을 피하고자 독일로 탈출한
겁니다 당연하게도 오스트리아 당국은
미행까지 와서 병역을 기피하려 했던
히틀러를 잡아가려고 했지만 히틀러는
자신은 병약하다 고집 고집을 부리면서
면제 판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히틀러가 정말로 군입대를 싫어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히틀러는
오스트리아군의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빈에 있던 시절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예수를 접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는 너무 작은 나라
고 독일이야 말로 대제국이 느껴
스스로를 오스트리아인이 아닌
독일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죠
민현의 오고 바로 다음 해였던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합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곧바로 독일군의 군인이
되겠다며 자원입대를
했죠 1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는
기나긴 참호전이 전개되었던 서부전선에
배치된 통신병이 있습니다 히틀러는
참호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1차
이프르 전투에 투입되 었는데 전투 후
통신병으로 2급 훈장까지 퍼딜 정도로
활약합니다 전쟁 말기에는 1급
훈장까지 봤죠 한 번은 히틀러가
전투도중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영국군을 만났는데이 영국군은 죽어가는
히틀러가 불쌍해서 그냥 살려 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이 영국군의 이름은
헬리 댄디하고 별명이 히틀러를 쏘지
않은 남자죠 전쟁 말기에는 히틀러가
독가스 소량을 마시면서 후방으로
배치되었고 그 사이에 독일 제국은
내부 봉기로 무너지고 1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습니다 독일 제국 와해 후
독일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죠
전쟁 종료후 히틀러는 뮌헨으로
돌아옵니다 히틀러는 그토록 자신이
동경하고 선망했던 독일이었다만큼이
독일의 패전은 히틀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역사학자들은 타 민족에
대한 히틀러의이 배척 주의나 증오심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증폭되었다 보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히틀러가
정치인으로서 행보를 걷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 전에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즉 바이마르
공화국의 극심한 혼란상을 먼저 하기
드리겠습니다 패전국인 독일에 대한
처우는 1919년 6월 반포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이 져야
할 책임이 굉장히 많았는데 주요
골자만 보면 이렇습니다 일단 전번
800명 재판 20년 안에 전쟁
배상금 1320억 마르크를 금으로
갚을 것 군대 규모 제한 영토 상실
경제 제한 및 무역권 제한 등이
있었습니다 독일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생각하면 당해도 싸다고 생각하지만
하나같이 정말 빡세기 빡센
조항이었다 군대규모 제한이
당연하다지만 1320억 마르크는 당시
독일로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당대 내노라하는 영국의
최대 경제학자들이 영국 의회에서
제한한 배상금은 그러니까 독일이
배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영국의
손해를 보지 않는 배상금의 총액은
100억이 있는데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는 독일에게 무려 1320억
요구한 겁니다 특히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스는 협상 국들의 강도 높은
독일 배상금에 분노를 했습니다 독일이
불쌍해서가 아니라이 말도 안 되는
배상금을 지불하게 하는 거는 유럽
전체의 이익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때 미국이
나섭니다 미국은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대시
뭐 현물로 많이 가져가긴 했는데
미국은 독일이 완전 망하는 것만은
막으려고 했습니다 독일이 망하는게
미국의 절대 이익이 아니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빌려왔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
차관을 미국에 갚아야 하는데
독일로부터 받은 전쟁 배상금으로
갚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막대한
전쟁 배상금으로 인해 독일이 갚지
못할 상황이 오자 영국과 프랑스도
미국에게 빌린 차관을 갚을 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독일이
전쟁 배상금을 갚을 수 있도록 하는게
우선이었습니다 일단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화폐를 무한정 찍어서 전쟁
배상금을 갚아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화폐를 무한정 찍어내는 건 최악의
결과만 초래하죠 독일에선 엄청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찾아와 화폐 가치가
말 그대로 종이 쪼가리가 되었고 독일
경제가 마비되는 상황에 더더욱 전쟁
배상금을 갚을 수 없는 지경이 되죠
독일의 경제 마비가 결코 영국에게
이득이 아니라 1922년 영국도 전쟁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만 프랑스는 달랐습니다 전쟁으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많이 본게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배상금을 못
받는다면 영토라 빼앗겠다 1923년
독일의 최대 공업 지대였던 루르
지방을 강제 점령하기도 합니다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를 강력하게 규탄하지
프랑스는 아무런 소득 없이 루르
점령을 풀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배상
위원회가 다시 열렸습니다이 배상
위원회는 미국이 주도했는데 미국
대표로 참석한 재무장 관 찰스 도스가
본인의 계획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1924년 미국 도스 재무 장관의
계획안 이명 도스 안이 발표됩니다
내용은 독일이 프랑스에게 무조건 전쟁
배상금을 갚아야 한다는 겁니다 단
지금 독일은 그럴 능력이 안 되니
독일이 전쟁 배상금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되도록 독일의 경제를 살려
준다는게
도안이었지만 독일에게 경제를
회복하려면 차관을 빌려 주었고
프랑스도 채권을 발행해 주기로 합니다
1929년 다시 한번 배상 위원회가
열렸고 미국의 금융과 0의 주도로
0의 계획 아닌 이른바 영안이
선고되었습니다 영안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은 1120억 마르크를 59년간
할부로 갚기로 하였죠 도스가 영안으로
독일의 숨통이 틀기 전까지 독일은
정말 아수라 장이었습니다 엄청난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경제와 사회가
마비되었고 치한도 엉망이었고 이제 갓
수립된 공화국 정권도 어리숙했던
이러니 독일의 사회주의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안했어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 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인이
됩니다 독일 노동자 당은 1919년
안튼 드렉슬러가 창당한 정당으로
당명의 노동자가 들어가긴 하지만
마르크스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반유대주의와 범게르만 주의를 주장하던
극구 민족주의
정당이었다 사상이 독일을 우상하
히틀러의 관심을 끌었고 히틀러가 독일
노동자당의 들어간 거죠 독일 노동자당
방원이 된 히틀러는 예전에 그 소심한
성격은 다 어디 가고 군 경험과 1차
세계대전 패배에 대한 충격을 겪은
후에 히틀러는 어 공격적이고 강렬한
연설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히틀러는 금세 독일 노동자당의 간부가
되었고 히틀러는 당명을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당으로 바꾸었습니다
독일어로 하면 나치오날 주치 알레스트
도이츠 아르바이트 파르타 이이고
줄여서 나이라고 했죠 2부에서
계속됩니다 그럼 역서 돋보이 있습니다
저희 역서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