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며듣는소설 꿈은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어 #책읽어주는남자 #책과함께하는하루단잠

책과 함께하는 하루 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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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며듣는이야기 #잠자리소설
하루의 끝, 조용한 밤.
당신을 깊은 이야기 속으로 이끄는 오디오북 채널, 책과 함께하는 하루 '단잠'입니다.
🛏️ 잠들기 전,
🚶♀️ 혼자만의 감성 산책 시간,
🎧 눈은 쉬고 싶지만 마음은 이야기를 원할 때—
언제든 이곳에 들러주세요.
⏱️타임라인
00:00:00 인트로
00:01:17 본문낭독
00:47:49 단잠의 아주 주관적인 감상평
00:51:46 클로징 음악 “Despedida en un Día de Llu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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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읽어드릴 소설은 김미월 작가의 단편소설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입니다. 소설 제목을 들으시면 무슨 비밀 서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가 싶으실 텐데요.
그런건 아니고 지금은 꿈을 꾸지 않게 된 어떤 남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고 또 그것들을 얼마나 이루면서 살까요?
하고 싶었던 것을 다 하면서 살 수 있는 인생이 있다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 부럽고 욕심이 날 것 같습니다.
여러 개의 꿈 중에 하나라도 이룰 수 있다면 그래도 성공한 인생이겠지요?
오늘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꿈과 우리 꿈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보면서 감상하시는 것도 좋은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작품 낭독을 시작하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김미월
왕복 10차선 간선도로 위를 차들이 쉼없이 오가고 있었다.
퇴근 시간대라 인도에도 행인이 많았다. 진호는 인도 가장자리에 서서 누렇게 단풍이 들어가는 플라타노스 이파리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팀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오늘 팀장과 함께 시인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필명 H. 두건의 시집이 베스트셀러이자 스터디셀러가 되면서
텔레비전 광고에까지 출연하게 된 스타 시인. 믿을만한 정보에 의하면 시인은 세 번째 시집을 펴낼 출판사를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술 취하면 개가 된다더라. 편집자를 종 부리듯 한다더라.
맞춤법이 엉망이라더라. 시인이 외뚜처럼 걸치고 다니는 소문들이 모두 진실이라 해도
다수의 출판사가 그와 계약을 맺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진실이었다.
팀장이 늦는다. 지갑을 못 찾았나? 진호는 회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왜 하필 나를 지목했을까? 팀장이 H. 시인의 다음 시집 계약을 따내러 가는 자리에 자신이 동행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직률 높기로 소문난 직장에서 3년을 근속했지만 한 번도 윗사람 눈에 들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부모가 손님 앞에서 못난 자식 숨기듯 어느 상사도 대외적으로 중요한 일은 그에게 맡기지 않았다.
진호는 자신에게 편집자로서 내세울 만한 재능이나 근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단점은 장점이 없다는 것이요. 그의 장점은 자신에게 장점이 없음을 본인도 아는 것이라 할까?
그러니 말 그대로 그만두지 못해 다니는 꼴이었다. 그는 잠자리에 들 때는 아침이 올 것을 두려워했고
아침이 되면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금요일에는 월요일이 올이라는 것에 괴로워했고
월요일에는 어서 금요일이 되기만을 고대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31. 자신의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애인이든 직장이든 하나만 있으면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나이.
다행히 그는 둘 중 하나는 갖고 있었다. 아직은 젊다. 그것이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10년 후를 생각해 보았다.
41. 아, 40대라니. 시든 배춧잎 같은 나이가 아닌가.
자신이 머리 위로 드리워질 중년의 그늘을 상상하자 진호의 마음은 배추벌레처럼 오그라들었다.
그래도 그 즈음에는 뭔가 이루어져 있겠지.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겠지. 그는 10년 후에 자신에게 막연한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10여 년 전의 제가, 지금의 자신에게 기대했던 것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현재의 상황을 돌아보았다.
그랬다. 10대 소년 시절의 그가 바랐던 것은 적어도 지금의 자신 같은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다시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의 눈길을 주었다. 여전히 초록빛을 간직하고 있는 잎도 있고, 연갈색으로 물든 잎도 있으며, 두 색이 반반씩 섞인 잎도 있었다.
태어나서 단풍을 처음 본 사람처럼 진호는 신기하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그는 FM 라디오를 즐겨들였다.
요후에 엎드려 시집을 펴놓고 카펜터스가 부른 팝송 예스터데이 원스모어의 가사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마이마이 카세트에 귀 기울였다.
그는 밤 10시부터 자정까지 나오는 심야 음악 프로그램을 애청했다. 듣다가 졸기도 했다. 졸다가 깼을 때 우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고 있으면 생일 케이크라도 받은 듯 행복했다.
세상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 그 잠깐의 희열을 누리고자 그는 더욱 성실하게 라디오를 들었다.
그가 고교 3년간 라디오에서 들은 노래들은 당연히 앞의 몇 장만 풀고 내팽개친 문제집들보다, 조준하여 던졌으나 꼴대 밖으로 튕겨나간 농구공들보다,
짝사랑하는 여학생의 호출기번호를 누를까 말까 망설였던 순간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라디오를 껐을 때 정작 기억에 남는 것은 그런 노래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것은 매시 57분마다 흘러나오던 교통정보였다. 개켜놓은 새 교복같이 단정하던 아나운서의 목소리,
도로교통안전협회에서 제공하는 교통정보입니다. 그리고 낯선 서울의 지명 등 강남대류에서 태일안로 방향으로 강병북로로 진입하는데
이수교체로에서 반포인터체인지 쪽으로 마포대교 주변에서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생이 되도록 서울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미국이나 소련 혹은 달나라와 똑같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대한민국 수도의 도로와 인터체인지와 한강다리의 낯선 이름들은 그에게 많은 것을 상상하게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고유 명사는 태일안로였다. 그것은 먼 이국의 감수성 풍부한 소녀의 이름 같기도 하고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고대 현악기의 이름 같기도 했다. 세계사 성적도 나빴던 그는 태일안이 이란의 수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대한민국과 이란 양국의 수도가 결연한 결과로써 태일안에도 서울스트리트라는 거리가 있다는 건 역시 몰랐다.
어쨌거나 울림소리가 세 개나 들어간 태일안로의 부드러운 어감에 매료된 그는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 소재의 대학에 진학하기를 꿈꿨다. 그의 내신 성적은 15등급 중에서 10등급이었다.
수능 성적이라고 별다를 것 있겠는가. 그가 공부로 서울권 대학에 가는 것은 요원했다.
이진우, 넌 시를 잘 쓰잖니? 묘수를 내놓은 것은 그의 담임선생이었다.
아, 왜 미처 생각지 못했던가. 문학특기생으로 가는 방법이 있었다.
선생의 말 맞다나 그는 시를 잘 썼다. 읍내 백일장에 나갔다 하면 맡겨놓은 물건 찾듯 상을 타왔다.
또래 여학생들에게 팬레터도 가끔 받았다. 말하자면 그는 드물게 문학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장래가 촉망되는 문학소년이었던 것이다.
대학 면접을 하루 앞둔 날 밤에도 그는 라디오를 들었다. 듣다가 졸았다. 졸다가 깼는데 마침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곡 컴백홈이었다. 기란징조였다.
그는 머리마트를 터듬어 자신이 지원한 대학에서 배포한 응시 안내 책자를 집었다.
책자 뒷면에 인쇄된 학교 주소 어디에도 테헤란노 네 글자는 적혀있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면접이 끝나면 그곳을 찾아가버리라.
그는 베개를 고쳐뱌며 결심했다. 좋아하는 작가가 있나요?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그는 면접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옆구리 아래로 늘어뜨린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예, 저는 류시와 시인을 좋아합니다. 다른 면접관이 어떤 책을 주로 읽느냐고 물었다.
그는 베스트셀러들은 빼놓지 않고 거의 다 읽는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면접이 끝났다. 예감이 좋았다. 그는 입가에 웃음을 물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가 살짝 소란스러웠다. 문예창작과 재학생인 듯한 남녀 둘이 탁자를 끼고 앉아
면접 차례를 기다리는 수험생들에게 뜨거운 녹차와 커피를 권하고 있었다.
테헤란 노를 찾아가는 방법을 물어보기 위해 그는 탁자 쪽으로 갔다.
남자 대학생이 더벅머리 수험생에게 무언가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하여간 이 회수는 곤란합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니까.
여자 대학생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작가든 작품이든 베스트셀러랑 거리가 먼 게 좋아요.
더벅머리가 그럼 시인 중에서 꼽지 말아야 할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예를 들면 류시화가 있겠죠. 진호는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 대학생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안 팔리는 시인을 대세요. 이미 죽은 시인이면 더 좋고
김수영이나 백석이 딱 모범 다반입니다. 더벅머리가 자리를 뜨자
두 남녀는 이 회수의 소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류시화의 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는 걸었다. 탁자를 지나쳤다. 5층부터 1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내려갔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나는 실수한 것일까?
좋아하는 작가 취향에도 모범 다반이 있다니. 실기가 아니라 면접 때문에 불합격 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테헤란 로고 모고 곧장 고향마을로 컴백홈 하고 말았다.
지갑을 들어 보이며 팀장의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해요. 책상 위에 놓고 깜빡하는 바람에
지갑이나 휴대폰, 키홀더, 우산 따위 소지품들을 수시로 잃어버리는 그녀가 어떻게 회사 업무에 관해서는 그렇게 꼼꼼할 수 있는지
진호는 새삼 의아했다. 뭐하고 있었어요? 그는 플라타노스 이파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단풍이 드는 원리가 뭘까? 생각하면서 보고 있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말해놓고 아차했다.
아니나 다를까. 팀장의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이틀 밤을 샜다던가
그녀의 눈 흰자 위에 핏발이 촘촘히 서 있는 것이 마치 금이 간 도자기 같아 보였다.
우리 책 중에 대자연의 신비 있잖아요. 기억 안 나요? 단풍이 드는 건 나뭇잎 속의 염록소가 분해되고
안토시아닌 색소가 도드라지면서 생기는 현상인데 그는 고개를 주워버렸다. 듣고 보니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팀장은 스카우트 되어 온 지 한 달밖에 안 되었음에도 회사가 기존에 출간한 모든 책의 내용을 숙제하고 있었다.
그 남다른 집중력과 기억력을 그녀는 편집자로서의 프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대로라면 프로의식마저 없는 그는 쓸데없이 핀 잔의 빌미를 제공한 제 멍청함을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을 타기 전에 팀장은 들릴 곳이 있다고 했다.
미리 주문을 해놓았는지 꽃집 진열대에 두 팔로 끌어안기에도 벅찰 만큼 커다란 장미꽃다발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팀장이 앞장서고 그가 뒤를 따랐다. 빨간 장미꽃다발을 들고 그녀 뒤를 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여자에게 구해야 하는 남자로 보일 거라는 생각에
진호는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은 지하철을 탔다. 그녀는 열차 안에서도 HC인의 시집을 읽고 기획안을 살펴보았다.
진호와 팀장은 동갑이었다. 사석에서라도 말을 놓자고 제안한 것은 그녀였다.
진호는 그에 찬성했으나 사석에 가지 않았다. 자신의 직속 상사가 저의 동갑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는 쪽이 그에게는 더 편했다.
그녀뿐 아니라 회사 내의 선후배 동료 모두와 그는 말을 놓지 않았다.
3년 전 그가 입사하던 날 지금은 회사를 떠나고 없는 예전 팀장은 말했다.
다른 업종에서는 일을 1년 더 해보고 덜 해보고가 별 차이가 없는데 출판일은 달라. 종이밥 1년 더 먹고 덜 먹고에 따라 차이가 엄청나거든.
당시 대부분의 선배 편집자들이 진호보다 나이가 어렸다. 팀장의 말은 선배들 어리다고 무시하지 말고 그들에게 많이 배워라 이런 뜻이었다.
옳은 말이었다. 선배들은 나이는 어려도 일처리에 능숙하고 기획력이 우수했으며 예기치 않은 상황에도 발빠르게 대처했다.
아니다 그건 틀린 말이었다. 진호는 자신보다 한 해 늦게 입사한 후배 편집자에 비해 종이밥을 1년이나 더 먹었는데도 특별히 나은 점이 없었다.
있다면 회사 창립 이래 면접에서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지원자는 없으리라는 것 정도?
면접 때 진호는 베스트셀러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안목, 방대한 독서량, 베스트셀러를 출간하고자 하는 욕망과 향후 계획을 내세워 주목을 받았다.
입사했다. 지난 3년간 단 한 권의 베스트셀러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3년을 내리 한부서에 눌러 앉아서
그는 몸값을 올려 다른 회사로 떠나는 선배, 과감히 사직서를 제출하는 동기, 자신을 앞질러 승진하는 후배들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누구와도 말을 놓지 않기를 잘했다고 되뇌었다. 학창시절에 시 썼다면서요?
기획안에서 눈을 떼며 팀장이 물었다. 시라니. 뜬금없이 진호는 장미꽃다발을 품에 당겨 안았다.
꽃에서 비린내에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는 콧등을 찡그렸다. 하기에 시를 썼다. 쓰기는 했다.
그래서 같이 가자고 했어요. 만나보고 싶지 않았어요? 진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잘나가는 시인이잖아요. 진호씨도 관심 많을 것 같은데. 순간 지하철이 덜커덩거렸다.
진호는 뒤통수를 벽에 부딪혔다. 꽤 아팠으나 그는 문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팀장은 과거에 시를 썼던 부하 직원의 개인적인 관심사를 위해 업무상으로는 별 쓸모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명 시인과 계약을 맺어야 하는 중차대한 자리에 그를 데려왔다는 말인가? 지하철이 역에 정차했다.
진호는 오늘 계약권을 꼭 성사시키고 싶었다. 팀장의 일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나저나 자신이 시를 썼다는 이야기를 그녀는 누구에게서 들었을까? 회사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텐데.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열차가 출발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던 무렵의 시간들이 차창 너머에서
문예창작과 재학생 선배들의 조언과 배치되는 답변을 했음에도 진호는 대학에 합격했다.
역시 문학에는 정답이 없는 모양이라고 그는 혼자 감탄했다.
서울의 한 귀퉁이의 방을 얻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놀라웠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그가 제일 먼저 놀랐던 것은 쓰레기를 버릴 때 아무 비닐봉지에나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시판되는 쓰레기 봉투를 돈 주고 사야 한다고 그가 자취하는 집의 주인 사내는 말했다.
쓰레기를 버리는데도 돈이 든다니. 일찍이 전국적으로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되고 있었음을 몰랐던 그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 상골에서 쓰레기는 퇴비로 쓰거나 소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과연 서울 사람들은 깍쟁이라고 그는 노여워했다.
두 번째로 놀랐던 것은 서울 사람들이라고 서울의 지리를 다 꿰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길을 물어보면 사람들은 모른다고 대꾸하기 일수였다.
그들은 지하철 안에서도 지하철 노선도를 들여다보고 버스 안에서도 기사에게 노선을 확인해보고는 했다.
자신이 사는 동네, 자신과 연고가 있는 동네 외에는 지리의 영 어두운 게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이었다.
그의 고향 마을에서는 아무나 붙잡고 아무데나 물어보아도 대답이 척척 나왔는데 그는 과 선배에게 물었다.
서울 사람들은 왜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 지리를 잘 모르나요?
넌 학생이면 교과서 내용을 다 아냐?
선배의 논리는 어딘가 적절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것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지 잘못된 유추의 오류인지 아니면 또 다른 오류인지 헤아려 보느라 그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놀라운 일들과 더불어 또한 어이없는 일은 테헤란노에 가보고 싶어 서울에 올라왔으면서도 막상 서울에 살게 되니 그곳에 가보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이유로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대학 졸업반이 되도록 갈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언제든 갈 수 있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그는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수업시간에 최초로 배운 것은 그가 이전까지 시임내하고 써왔던 것들이 실은 제대로 된 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배운 것은 시는 타고난 재능 없이 노력만으로 잘 쓸 수 있는 장르가 아니라는 점.
세 번째로 배운 것은 결정적으로 자신에게는 타고난 시적 재능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울러 배우는 것에 비해 등록금이 지나치게 비싸다는 것도 이상의 것들을 깨달았다면 학교를 더 다닐 이유가 없다고 느낄 법도 한데 그는 열심히 다녔다.
성실한 만이 자신의 존재의 이유라는 듯 시도 부지런히 썼다.
백일장에서 상을 받거나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거나 여학생에게 팬레터를 받는 일은 더 이상 없었지만 그는 시를 썼다.
동기들이 공모전의 작품을 내는 것을 보니 왠지 자신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해마다 신춘문예에 시를 투구했다. 해마다 떨어졌다.
마신네 졸업을 앞둔 해의 1월 1일 아침 그는 자신의 이름이 일간지 신춘문예 특집지면의 최종심 심사평에 올라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 언급된 낙선의 이유는 이랬다. 이진호의 시들은 딱히 꼬집을 만한 흠이 없다.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도리어 맥이 빠지는 형국이라 하겠다.
그는 머리를 극적였다. 완성도가 너무 높다는 것이 말이 되나? 완벽하다는 것도 결점이 될 수 있나?
그러나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심사평에 거론된 시의 제목을 본 순간 그는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가 자신과 동명이인이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팀장은 H 시인을 만나자마자 그에게 꽃다발을 안겼다. 선생님 시에 장미꽃이 유독 자주 나오잖아요.
그제야 진호는 그녀가 많고 많은 꽃 중에 왜 장미를 골랐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다운 세심함이었다.
시인은 쑥스러워하느라 고맙다는 인사도 잘 못했다. 예상외로 소탈하고 겸손한 사람인 것 같았다.
세 사람은 근처의 고급 중식당으로 향했다. 시인의 용모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준수했다.
눈썹이 짙고 눈 위가 쑥 들어간 데다 웃을 때 눈매가 서글서글한 것이 서양 배우처럼 보이기도 했다.
옷차림도 4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젊고 감각적이었다. 특이한 것은 식탁 위에 올려놓은 시인의 두 주먹 중
오른쪽 주먹이 왼쪽 주먹보다 눈에 띄게 크다는 것이었다. 크기가 다르니 주먹의 색이도 다를까 진호는 궁금했다.
통 말이 없는 시인을 보며 그는 이 자리의 목적을 상기했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다.
우선 가벼운 화제로써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그동안 회사에서 자신이 나서서 했던 일은
항상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으려나?
그는 애꿎은 꽃다발만 노려보았다. 팀장이 꽃다발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장미꽃이 백송이밖에 안 되는데 이렇게 풍성해요? 그러니 백만송이 장미꽃은 대체 어땠을까요?
시인은 수줍게 웃기만 했다. 팀장이 따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심수봉의 노래 백만송이 장미 말이에요.
그 노래가 원래 러시아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러시아 가요라는 거 아시죠? 아 모르신다고요?
저희 출판사에서 나온 책 중에 세계의 국민 가요라는 게 있거든요. 거기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다 싶어 귀가 솔깃했는데
책 제목이 등장하기에 진호는 기겁을 했다. 다행히도 팀장은 그에게 책 내용이 기억나느냐고 묻지 않았다.
러시아의 어느 마을에 무명 화가가 살았대요. 그는 젊고 아름다운 여가수를 사랑했어요.
물론 여가수는 가난뱅이 화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죠. 그러나 자신의 생일날 그녀는 창문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어요.
드넓은 정원 전체가 온통 붉은 장미로 뒤덮여 있었거든요. 그것은 바로 화가가 그녀를 위해 자신의 집과 그림,
전재산을 팔아 산 백만송이 장미꽃들이었지요. 진호는 장미를 백만송이 사려면 돈이 얼마쯤 들까 계산해 보았다.
한 송이에 보통 천오백원이지만 대량 구입이니까 천원씩에 샀다고 치자. 그래도 백만송이면 세상에 무려 십억원이었다.
십억원이나 가진 화가가 무슨 가난뱅이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그는 잠자코 팀장의 말에 귀기울였다.
시인은 상품 냉채와 금가루가 들었다는 게살 스프와 해삼 관자며 깐쇼 새우며 고추 잡채들을 말없이 먹어치웠다.
약자는 말이 많고 강자는 먹는 게 많구나 하고 진호는 생각했다.
2차 장소로 시인은 자신의 단골바를 추천했다. 술이 들어가자 말문이 열린 모양이었다.
시인은 백일간 친무 고문이라도 받다가 풀려난 사람인 양 중식당에서와 생판 다른 모습으로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화재는 대부분 자신의 시세계, 독자 및 평단의 찬사, 자신의 막대한 수입에 대한 것들이었다.
진호는 조금 전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약자가 말이 많은 게 아니었다. 강자가 말이 많았다.
정확히는 강자에게 선택권이 있었다. 강자가 말을 하면 약자는 듣고 강자가 침묵하면 약자는 눈치를 살피며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시인은 표정도 풍부하고 손짓도 다채로웠다. 그의 언행에는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받는데 익숙한 사람 특유의 여유와 자만과 약간의 쇼맨십이 깔려 있었다.
아까 그 러시아 화가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지 시인이 자신의 독무대에 팀장을 끌어들였다.
백만송이 장미에 감동해서 여가수는 화가를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장미는 시드는 법이잖아요.
여가수의 사랑도 식었고 그녀는 떠났죠. 화가는 혼자서 쓸쓸히 남은 생을 보냈대요.
시인이 대꾸했다. 시적이네요. 팀장이 본격적으로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녀는 H 시인의 시가 얼마나 훌륭한지 그의 두 시집들이 디자인과 편집과 마케팅 면에서 왜 아쉬웠는지
그리고 자신이라면 세 번째 시집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정말 최고의 시집을 만들어 보고 싶거든요.
실은 저도 한때 시인이 꿈이었어요. 예전에는 신춘문예에 투고도 했었죠. 최종심에도 못 올라 봤지만
해도 해도 안 되니까 딱 서른까지만 하자 그랬었는데 작년에 서른이 됐어요. 그래서 포기했죠.
저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진우는 입 속에 안주를 소리 내지 않게 씹었다. 팀장이 시를 쓰고 싶어 했었다니
그녀의 다음 대사는 더욱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아참 몇 해 전이던가 신춘문예의 최종심 심사병을 읽는데
막판에 아깝게 떨어진 시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극찬을 했더라고요. 그래서 그 시를 쓴 사람 이름을 귀엽게 두었었죠.
알고 보니 그 주인공이 바로 여기 이진우 씨였어요. 오 그래요? 시인이 과장된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지르며 박수를 쳤다.
진우는 손사래를 쳤다. 그 이진우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해명을 해야 했다.
진우가 말을 고르는데 시인이 잔을 높이 들었다. 시인이 되고 싶었고 될 뻔도 했으나 끝내되지 못한 두 남녀의 사연이
진짜 시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다음 시집 근사하게 한번 만들어 주십시오.
바 안에 조명이 갑자기 밝아진 듯했다. 세 사람은 건배를 했다. 술 마시는 속도가 빨라졌으나 세 중 누구도 취하지 않았다.
진우는 업무상 목적을 이루었다는데 안도하면서도 그렇게 되기까지 제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부끄러워
좀처럼 술이 넘어가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를 읽는 척하면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1시가 넘었다. 조금 있으면 지하철 막차가 끊길 것이다. 팀장은 이틀 밤을 샌 뒤라 더욱 피곤할 테니 이쯤에서 일어나야 했다.
물론 그것을 결정하는 이는 진우가 아니라 팀장이었다. 술을 마셔서인지 그녀의 눈이 더욱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3차까지 가지는 않을 게 확실했다. 그들은 3차까지 갔다.
시인이 안내한 것은 뜻밖에도 바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그의 오피스텔이었다.
유명 시인의 집 필시를 방문한다는 것은 흥미로웠으나 한편으로 진우는 폐점 시간도 없는 그곳에서 어떻게 빠져나올까 걱정이 되었다.
오피스텔 안은 훈훈했다. 모든 집기가 고급스러운 데다 정리 정돈이 지나치게 잘 되어 있어
흡사 모델 하우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진우는 시인 대신 제가 들고 온 장미꽃다발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세 사람은 양산자가 깔린 바닥에 둘러앉아 시인이 장식장에서 꺼내온 21년산 발렌타인 위스키를 마셨다.
시인이 진우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도 시를 씁니까? 진우는 지은 죄도 없이 죄 지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요. 시인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진우의 시를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작품만 좋으면 문예지에서 신인 추천을 받도록 자신이 힘을 써보겠다고도 했다.
진우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침대가 놓인 벽면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이 책장이었다.
빽빽하게 꽂힌 시집들을 보아도 아무런 가뭄이 일지 않았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시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따지고 보면 그의 꿈의 변천사는 되고 싶다와 될 수 없다 사이의 지난한 투쟁의 역사였다.
되고 싶다가 번번이 패배했다. 기권패였다. 그의 최초의 꿈은 농구선수였다.
진우는 농구를 좋아했고 운동신경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키는 165cm에서 성장을 멈추었다.
작은 귀의 결점을 보완할 만큼 절대적으로 뛰어난 기량이 없었으므로 그는 첫 번째 꿈을 접었다.
두 번째 꿈은 변호사였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유능한 변호사들처럼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는 원래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한 사람이 똑똑하고 말 잘하기 위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성적마저 형편없었으므로 그는 곧 두 번째 꿈을 버렸다.
세 번째 꿈은 가수였다. 그러나 그는 노래를 좋아했지만 노래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가수가 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친구들이 저보다 노래를 훨씬 더 잘 부른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는 세 번째 꿈을 잊었다. 네 번째 꿈은 테헤란노에 가보는 것이었다.
그 거리의 사람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고 자신의 직업에 자긍심을 가지며
실제로도 능력을 인정받는 멋진 어른이 되어 그 밖에도 많은 꿈들이 있었으나 더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상 서랍 속의 딱지들처럼 벽에 붙여놓았던 연예인 브로마이드처럼
7월 27일 수요일 말금이라고 썼던 일기장처럼 어느 틈엔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진호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았다. 어렸을 때 그는 자신의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다.
꿈꾸는 것은 모두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꿈을 꾸는 동안에만 아름다웠다.
그는 세상의 주변이었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진열대 뒤 구석에 꽂힌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었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아무도 입어주지 않는 옷이고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노래였다.
그것을 알아버린 순간부터 그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꿈이 꾸어지지 않았다.
침대에서 잠깐 눈 좀 붙여요. 시인의 말을 듣고서야 진호는 옆자리의 팀장이 앉아서 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수그렸던 고개를 화들짝 쳐들며 괜찮다고 말하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이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진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팀장님, 이제 가셔야죠. 택시 타고.
진호의 말을 자른 것은 시인이었다. 잠깐 누웠다 일어나면 한결 낫다면서 시인은 친절하게도 이불을 끌어다가 팀장의 몸을 덮어주었다.
이불 밑으로 그녀의 왼발이 빠져나와 있었다. 맨정신이라면 업무 때문에 만난 작가의 집에서 절대로 눕지 않을텐데.
진호는 그녀의 발 뒤꿈치 부분 스타킹의 올이 나간 것을 보면서 자리에 도로 앉았다.
어쩌면 할증이 풀리는 늦은 시간에 택시를 타게 될지도 몰랐다. 시인은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주 접시의 육포를 젓가락으로 집었다가 떨어뜨렸다. 세 번을 연거푸 그랬다. 취한 것이 분명했다.
팀장도 시인도 멀쩡하기만 하더니 언제 취중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일까.
시인은 손으로 육포를 집어 입에 넣었다. 탁자로 가서 꽃다발의 장미 한 송이를 빼왔다.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꽃 모가지를 분질렀다. 입도 떼어냈다. 꽃송이도 없고 이파리도 없이 줄기만 남은 장미는 꽃이 아니라 회초리 같았다.
시인은 컵에 물을 담아 거기에 회초리를 꽂았다. 그 게이한 행동을 보면서 진우는 천천히 시들어 갔을 러시아 화가의 백만송이 장미꽃들을 떠올렸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그에 따라 생명이 시들고 말라 비틀어지고 마침내 소멸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영원히 싱싱하게 활짝 핀 상태 그대로 남아있는 꽃들이라니 너무 뻔뻔스럽지 않은가 말이다.
시인, 시인, 시인 하다 보면 신이 돼. 시인은 곧 신이다 이거지.
시인은 이제 반말을 하고 있었다. 신은 아무나 쓰는 줄 알아.
시인은 입가에 흐르는 침을 소매로 닦았다. 최고는 나뿐이야. 나머진 전부 들러리지.
진우는 집에 가고 싶었다. 침대 쪽을 흐긋거렸다. 곤히 잠든 팀장을 보니 비가 올 거라던 예보가 틀린 날 아침부터 챙겨온 우산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시인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이런저런 욕들을 퍼붓기 시작했다. 방안의 공기는 시인의 입에서 나온 언어의 분비물로 질퍼내졌다.
난 좀 자야겠어. 시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로 향했다.
진우는 당혹스러웠다. 팀장이 침대에서 자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저기 선생님, 저희 팀장이...
시인은 벌써 침대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난 내 침대가 아니면 못 자. 아 그러면 잠시만요.
진우는 팀장을 깨우려 했다. 시인이 그의 팔을 낚아챘다. 술 취한 사람답지 않게 손하기 힘이 억셌다.
너 지금 날 뭘로 보는 거야? 진우는 머뭇거렸다. 내가 과민하게 구는 것일까?
시인은 평소대로 자신의 침대에서 자려 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마침 손님이 먼저 잠들어 있었던 것이고
손님의 성별이 시인과 다를 뿐이다. 게다가 침대는 킹 사이즈다. 팀장이 한쪽에서 자고 시인이 반대편 쪽에서 잔다 해도
그 사이 공간이 꽤 넓다. 세 사람이 누워도 넉넉한 크기가 아닌가. 옳지. 이렇게 하면 어떨까?
진우는 말도 안 되는 의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의견을 말했다. 그럼 제가 두 분 사이에서 자겠습니다.
시인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그가 주먹을 치켜들였다. 이 새끼가 진짜?
진우는 주먹을 피해 상체를 옆으로 빼며 팀장을 흔들었다. 팀장님! 팀장님!
시인이 휘청거리다가 한 손으로 침대 모서리를 짚었다. 팀장이 눈을 떴다. 눈이 시뻘겼다.
부상병을 부축하여 전장을 빠져나오는 병사처럼 비장한 얼굴로 진우는 팀장을 데리고 오피스텔 건물을 나왔다.
한기 탓일까? 둘 다 몸이 떨리고 있음을 서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까지 맞부딪혀가며 떨었다. 새벽 3시였다. 그래도 할증 시간대에 택시를 타게 되었으니 이를 다행이라 해야 할까?
택시의 뒷문을 열어주는 그에게 잠 덜 깬 얼굴로 팀장이 물었다.
우리 계약 제대로 한 거 맞죠? 취하지도 않은 술이 확 깼다.
진우는 침을 삼켰다. 오늘 그들의 목적은 H 시인과의 계약 성사였다.
그는 주저하다가 그렇다고 했다. 시인이 설마 술자리에서의 사소한 시비로 공적인 약속을 저버리려 싶었던 것이다.
팀장이 뒷좌석에 타고 그가 앞좌석에 탔다. 택시기사가 목적지를 물었다.
뒷좌석에서 팀장이 물었다. 핸드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제 이마를 때리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핸드폰을 놓고 왔어요.
시인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진우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방안을 훑어보았다.
탁자의 장미꽃다발 옆에 팀장의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제키 주머니에 넣었다.
사방에서 꽃향기에 뒤섞여 술냄새가 진동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어느샌가 시인이 그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내가 누구야? 응? 내가 누구야?
시인이 그의 왼밤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인은 두 눈에 초점이 풀려 있는 상태였다.
우리 계약 제대로 한 거 맞죠? 네, 팀장님. 시인이 진우의 오른뺨을 후려 갈겼다.
왼손 오른손을 번갈아 써가며 그의 양뺨을 난타했다. 우리 계약 제대로 한 거 맞죠?
네, 팀장님. 진우는 때리는 대로 맞았다. 시인의 손은 크기는 오른손이 더 크지만 세기는 왼손이 더 셌다.
네가 날 무시해? 넌 끝이야. 내가 잘못한 것일까? 진우는 눈을 뜬 채로 맞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시인의 등 뒤로 물컵에 꽂힌 장미 회초리가 보였다.
우리 계약 제대로 한 거 맞죠? 맞을 때는 아프지 않다. 아픔이 느껴지는 건 맞고 난 후다.
차라리 계속 맞았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휴대폰을 챙겨 건물 밖으로 나왔다.
팀장이 보이지 않았다. 진우는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주변을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헛일이었다.
이 시간에 어디로 갔을까? 팀장의 휴대폰을 제가 갖고 있으니 전화를 걸어 볼 수도 없었다.
춥고 피곤하고 뺨이 쓰리고 속이 거북했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말라비틀어져 결국은 소멸될까?
먼 훗날에는 그저 웃으며 떠올릴 한 줄 과거가 될까? 그땐 참 난처했었지. 끔찍한 하루였어.
기억하기도 싫은 날이야. 이렇게 지나가던 택시가 그의 앞에 왔었다.
언제까지나 그곳을 헤맬 수는 없었다. 그는 일단 회사로 가보기로 했다.
하루 종일 차들이 왕래가 많은 왕복 10차선 간선도로는 새벽시간이라 한산했다.
택시에서 내리자 바로 맞은편 대로에 회사가 입주해 있는 빌딩이 보였다. 3층에 위치한 회사의 창문들은 플라타노스 국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진호는 행인이 없는 길을 걸었다. 하늘은 영영 동이 트지 않을 것처럼 검었고 대기는 영영 봄이 오지 않을 것처럼 차가웠다.
재킷 주머니에서 두 개의 휴대폰을 꺼냈다. 그의 휴대폰도 팀장의 휴대폰도 영영 전화가 걸려오지 않을 것처럼 잠잠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도로 양쪽으로 솟아오른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았다.
포스코, 동구금융센터, 유니온스틸, 르네상스호텔, 강남파이낸스센터, 한솔빌딩, 지에스타워, 저 끝까지 어떤 빌딩들이 늘어서 있는지 그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테헤란노는 그가 3년간 아침저녁으로 매일 다녔던 길이니까, 10대 소년이었을 때부터 꿈꿔왔던 곳이니까.
그런데 말이다. 늘 이곳을 지나다니는데도, 지금 이렇듯 이곳에 서 있는데도 왜 자신은 아직 한 번도 테헤란노에 가본 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어디선가 경적이 울렸다. 테헤란노의 끝에서 빈 택시 한 대가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진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빌딩들 너머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실제로 그는 기다리는 중이었다. 무엇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택시는 진호를 지나쳤다. 금세 그의 시야 밖으로 멀어져 갔다.
시간은 새벽 3시 57분. 테헤란노에서 강남대로 방향으로 소통이 원활했다.
이 소설은 한때 꿈을 꾸었으나 지금은 꿈을 꾸지 않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였습니다.
주인공 진호라는 인물은 어릴 때부터 꾸준하게 자신이 무언가 되기를 꿈꾸었죠.
처음엔 농구선수로, 다음엔 변호사로, 그 다음엔 가수로, 그 다음엔 좀 이상하긴 하지만 테헤란노에 가보는 것이 그의 꿈들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세 번째까지의 꿈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겐 그 꿈을 이루기엔 부족한 재능 때문에 포기를 하게 됐죠.
그리고 나머지 네 번째 꿈은 여지껏 이루지 못한 꿈이구요. 테헤란노에 가보는 것이 꿈이라고 하기엔 좀 허술하고 한심해 보이긴 하는데
어릴 적 시골에 살았던 어린 진호에겐 그것도 꿈이 될 수 있었던가 봅니다.
그것이 상징하는 것이 주인공의 성공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시인으로서의 성공을 간절하게 꿈꾸었지만 꿈을 이룰 만한 재능이 자신에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진호는 출판사에 입사를 하지요.
그런데 거기서도 재능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회사 업무마저 재능이 없음을 알게 된 그는 늘 다른 사람들과 말을 트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워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자기 후배나 동료지만 언젠가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자기보다 먼저 오를 때
어색해질 수 있는 그 관계를 미리 대비하는 것입니다. 좀 불쌍하고 무릉하고 연민이 느껴지는 사람인데요.
그는 자신을 서점의 책꼬지 구석에 위치해 있는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책이 아니라 펼쳐보지 않는 책. 약간 어감이 다르죠?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구석진 책꼬지에서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 누군가는 펼쳐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 말엔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발견이 되어서 읽혀질 책이라는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기다리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는데요. 왜냐하면 지금으로선 기다리는 방법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문장에서 보면 새벽 3시 57분이 의미하는 바가 있는데요.
그건 3분만 기다리면 택시의 할증 시간이 끝나는 새벽이 찾아오고 테헤란로엔 자동차들이 활기찬 엔진 소음이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가 새롭게 꿈꾸고 있는 것 또한 지금 자신이 언제 이루었는지도 모르게 테헤란로에 서 있는 꿈을 이룬 것처럼
그의 꿈이 이루어질 시간이 이제 3분 남은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행운이 오는 법이죠. 그때가 되면 그는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 아니라 누구나 읽고 싶어하는 책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우리의 책은 지금 누군가 읽고 있나요? 지금까지 김미월 작가의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을 읽어드렸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구요.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