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며듣는소설 대학 때 짝사랑했던 그녀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가능할까? | #책읽어주는남자 #책과함께하는하루단잠

책과 함께하는 하루 단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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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며듣는이야기 #잠자리소설
하루의 끝, 조용한 밤.
당신을 깊은 이야기 속으로 이끄는 오디오북 채널, 책과 함께하는 하루 '단잠'입니다.
🛏️ 잠들기 전,
🚶♀️ 혼자만의 감성 산책 시간,
🎧 눈은 쉬고 싶지만 마음은 이야기를 원할 때—
언제든 이곳에 들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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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
00:00:00 인트로
00:01:31 본문낭독
00:49:39 단잠의 아주 주관적인 감상평
00:55:04 클로징 음악 "You've done enough for today(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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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요약
AI 생성대학 시절 파격적인 설치 미술 사건으로 얽혔던 판길과 박가림이 10여 년 후 기자와 작가로 재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과거의 강렬한 기억을 간직한 판길은 그녀에게 다시 설렘을 느끼지만,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혼란에 빠집니다. 결국 판길은 현실적인 제약을 넘어 진정한 사랑과 용기를 선택하며 그녀에게 다가갑니다.
재밌는 하루 보내셨나요? 하루가 너무 밋밋하고 평범하게 지나가는 것도 재미적인 측면에서 좀 심심할 것 같아요.
가끔은 가슴 설레는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고, 어떤 땐 예상 못한 선물을 받고 놀라기도 하고,
또 어떤 땐 그동안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낯선 장소로 여행을 떠나보기도 하면서
내 삶에 자극을 줄 때 우리 인생이 좀 더 즐겁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의 삶이 구현된 허구의 세계에 들어가서 엿보는 것도 우리 삶의 자극제가 될 것 같은데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제가 읽어드리는 이 소설을 귀 기울여서 잘 들어주시면 좋겠네요.
오늘 읽어드릴 소설은 이금미 작가의 단편소설, 그녀를 만났다 입니다.
그녀를 만났다. 그래서 궁금하시죠?
만나서 어쨌길래? 궁금하시면 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자 이제 작품 읽기를 시작할게요.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
이금미. 저 여자 누구더라?
낯이 익은데 판길은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여자를 보면서 연신 갸우뚱 걸었다.
이리저리 되짚어 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자 판길은 담배값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담배 한 대 피우겠다고 밖에까지 나가는 게 구차스러웠지만 어쩌랴.
아무리 견디려 해도 숨이 가빠지면서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걸.
겨울이 다 갔다지만 얇은 점퍼 차림으로 나오니 바람이 제법 차다.
언제 나왔는지 강위원이 계단 아래서 어깨를 움츠린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심 불어오는 바람에 한 줌도 안 되는 강위원의 앞머리카락이 부스스 일어났다가 수세미처럼 엉켜버렸다.
어제 집에 안 들어갔는지 뒷단이 터져서 늘어진 콤비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판길은 강위원을 대할 때마다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짠했다.
담배 물고 인상 팍 쓰면서 기사 써야 특종이 나오지 사내놈들이 커피 홀짝이면서 손가락만 까딱이니 파워가 없잖아.
사무실에서 다시 담배 피울 수 있게 해야 돼. 아무리 강위원이 구시렁대봤자 사무실 금연 규정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판길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아 목구멍 깊이 넘길 때 먼저 나갔던 여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바람 때문에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자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길 때 설빛 보이는 얼굴이 몹시 창백해 보였다.
여자가 지나가자 강위원이 판길을 쿡 찔렀다.
왜 그렇게 봐? 마음에 드냐?
아니요. 그냥 나치고서.
아까 우리 사무실에 왔다 간 여자예요. 프리랜서겠지 뭐.
긴 머리 휘날리는 여자는 남자의 가슴을 흔들지.
대학 다닐 때 나도 긴 생머리 여자랑 가슴 설레는 연애를 했었는데 말이야.
강위원이 대학이라고 할 때 판길의 머리에서 뭔가 쨍하고 울리는 게 있었다.
박가림. 그래, 그녀였다.
가슴에 한 줄기 싱그러운 바람이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매달 마감에 맞춰 자질구려한 원고나 정리하면서 쭉쭉 뻗어나가는 후배 기자들에게
질투도 위협도 느끼지 않은지 오래된 판길은
자신에게 변화가 시작될 거라는 기대를 잠깐 가져보았다.
답답하던 시절, 비상이라는 공간이 자신을 숨쉬게 해 주었을 때처럼
학생운동으로 대학이 몸살을 앓던 1980년대 끝자락
학우들은 걸빗하면 스크럼을 짜고 진입로를 내려갔고
그때마다 최루탄이 펑펑 터졌다.
교정에는 소름끼치는 문구를 담은 만장이 시도 때도 없이 나붓겼고
건물 외벽은 팔을 쳐들고 투쟁하는 노골적인 그림들로 뒤덮였다.
판길은 어떤 이념서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무슨 대단한 신념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학생이 학교 수업을 외면한 채 끼리끼리 모여 사상서적의 코를 박고 학습하는 건
잘못되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연히 늑숙우려한 복학생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비상이라는 동아리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정치구호가 나붓기는 대학에서 이념과 선입견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표현하자는 모임이었다.
축제기간에 비상에서는 설치전을 기획했다.
판길은 곰곰이 생각하다.
예술대 입구에 있는 나무에 빨랫줄을 치고 여자 속옷을 널어놓는 다소 전의적인 작품을 출품했다.
여자 학우들의 자취방을 찾아다니며 팬티, 브레지어, 거들, 스타킹을 모으느라 꽤나 힘들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판길은 작품의 주제를 묻는 이들에게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내심 해방이라는 답변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속옷까지 벗어던지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
나붓기는 속옷 옆에 장문의 데자부가 붙은 것이다.
작품이라는 미명 아래 여성을 모독하는 일이 자행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화를 열망하며 모두가 마음을 모으는 중차대한 시기에 이따위 허접쓰레기로 무얼 어쩌겠다는 것인가.
대강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지나치게 경직된 문구였다.
그 데자부를 본 동아리 친구들은 반박 데자부를 붙여야 한다며 흥분했다.
판길은 동아리 친구들의 얘기를 귀뚱으로 들으며 데자부 아래 당당히 박혀있는 박가림이라는 이름에 주목했다.
그날따라 날씨가 흐린데다가 다른 당과대에서 재미있는 공연이라도 벌이는지 설치전을 보러 오는 학생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박가림이 데자부를 붙이자마자 야외 설치전은 학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뭐야? 그러니까 팬츠, 브라자, 거들 같은 것도 작품이다 이거야?
작품은 무슨 완전 유치찬란이다.
남학생들은 옆에 있는 판길이 작가라는 사실도 모른 채 마구 떠들었다.
미친 거 아냐? 성도착증 아냐? 뉴스에 나왔잖아. 여자들 집에 돌아다니면서 팬티만 훔치는 변태.
혹시 그놈 아냐? 여학생들이 심한 말을 하는데도 판길은 자신이 소란을 야기하여 설치전을 북적이게 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판길이 자신의 작품 주변을 서성이며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동아리 친구들이 뭔가 잔뜩 쓴 데자부를 박가림의 데자부 옆에 붙였다.
누가 오브제를 논하는가? 제목부터가 거창했다. 판길은 갑자기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언제부터 예술을 했다고 오브제를 들먹이나 하는 생각에서 지난 학기에 들은 예술학 덕분에 예술적 소양이 높아졌다고 으스대던 창식이 지친 듯 싶었다.
예술의 오브제를 갖고 트집 잡는 발상이야말로 무엇에든 딴 직원은 군부독재를 닮은 것 아니냐. 예술의 오브제에 대해 그 누구든 시비 걸 자격이 없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봐야 한다. 제법 강경한 어조로 시비를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데자부를 읽으면서 판길은 킬킬 웃음을 흘렸다.
곧바로 박가림이 긴 머리를 날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2차 데자부를 붙였다. 예술을 빙자하여 여성을 희롱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예술이라는 이름이면 무엇이든 괜찮다고 생각하는 발상이야말로 북한을 들먹이며 안보를 우려먹는 군부독재와 뭐가 다른가.
계속 군부독재가 거론되는 게 못마땅하긴 했지만 어쨌든 예술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만은 대견했다.
다만 그녀가 여성희롱 쪽으로 얘기를 몰고 가는 게 깨림칙했다. 공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난데없이 총여학생회 지지 데자부가 붙더니 이어서 총학생회 홍보부장인 김현우가 와서 총학생회 입장이라는 데자부를 붙였다.
총여학생회 데자부는 박가림의 논리와 거의 유사했지만 김현우가 붙인 데자부는 축제기간에 흥미있는 논쟁이 벌어진 것을 의미있게 받아들인다는 내용이었다.
회화과에서 붙인 오부제에 관하여 라는 데자부가 그날 논쟁의 대미를 장식했다.
비상의 설치전은 신선한 발상이며 어떤 소재든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게 요지였다.
비상회원들은 순수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아마추어 동아리의 작품을 정식으로 인정했다며 박수로 환영했다.
이념으로 쑥밭이 된 캠퍼스를 남의 집 드나들듯 조심스럽게 오간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화제를 제공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펄럭이는 속옷 옆에서 때려잡자 처단하자는 문구가 담기지 않은 데자부를 읽는 학생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그득했다.
깜깜해져서 더 이상 글자를 읽을 수 없을 때까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배결등이라도 연결하여 밤새 자리를 지키고 싶은 판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얀색 데자부는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쿠션이 좋지 않은 기숙사 침대에서 늘 찌뿌두드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았던 판길은 그날따라 몸이 가벼웠다.
데자부를 붙이는 박가림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판길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기운이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판길은 대충 씻고 서둘러 자신의 작품이 전시된 예술대로 향했다.
아스팔트가 약간 젖어있는 걸 눈치채지 못한 판길은 곧 대할 실망감 따위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줄줄이 붙어있던 데자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밤새 비가 내린 걸 안 판길은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다음 순간 판길은 놀라서 주저앉고 말았다.
나무 사이에 빨랫줄을 설치해 걸어놓았던 작품, 아니 속옷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황급히 주변을 살펴봤지만 속옷은 보이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창식이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녀석도 데자부가 흐물흐물 바닥에 뻗어있는 걸 보더니 사색이 되었다.
이건 뭐야? 오랜만에 예술이 꽃피나 했는데 갑자기 왜 비는 와가지고?
판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빨랫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창식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눈을 불아렸다.
뭐야?
빤스, 아니 작품이 다 사라진 거야?
이건 테러지?
어제 분명히 회학과에서도 작품으로 인정했는데 어떤 놈이 작품을 유기한 거야?
반드시 찾아야 돼.
곧이어 비상회원들이 몰려들었고 뿔뿔이 흩어져서 작품인지 속옷인지를 찾으러 나섰다.
오전 내내 학교 쓰레기통을 다 뒤지고 다녔지만 속옷은 어디에도 없었다.
허탈한 기분으로 동아리 방에 모였을 때 모두가 같은 의견을 냈다.
박가림, 그녀가 속옷을 치워버렸을 거라는.
판길은 냉철해 보이는 그녀가 그런 짓을 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잠잡고 있었다.
모주들 자신을 위해 애쓰는데 찬물 끼얹기가 미안했던 것이다.
속옷의 행방은 알 수 없었고 예술론쟁은 백일몽이 되어버렸다.
즐거운 소란은 하루 만에 가라앉고 캠퍼스는 또다시 정치구호로 뒤덮였다.
식욕은 없었지만 저녁을 때우기 위해 기숙사 앞에 있는 학생식당으로 갈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박가림이 판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잘 됐네요.
내일 비상 동아리 방으로 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마주치다니.
후배들을 시켜서 저를 찾았다고요?
작품을 찾으러 다닌다더니 후배들이 박가림을 수소문한 모양이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만 분명히 말해두겠는데요.
저는 당신의 그 대단한 작품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공감할 수 없는 작품은 공회라는 것도 말하고 싶네요.
판길은 어제부터 그녀가 쏟아낸 공격적인 단어야말로 공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은 모든 사람을 공감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예술?
박가림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묘한 웃음을 웃더니 몸을 휙 돌려 가버렸다.
박가림의 긴 머리카락이 자신이 얼굴에 스치기라도 하듯
몽롱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판길은
긴 편이 어깨를 툭 치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기자들은 긴 편집장을 줄여서 간단하게 김편이라고 불렀다.
이 판길 오늘 넘기기로 한 거 왜 아직 전송 안 하는 거야?
오늘 왜 넋이 빠져서 그래?
가벼운 원고들을 빨리빨리 처리해야 마감대 안 몰리지.
김편이 다시 재촉할 때 마침 후배 기자가 들어왔다.
판길은 후배 앞에서 야단 맞은 것만큼은 피하고 싶어
편집장 자리로 가서 내일 반드시 넘기겠다는 약속을 했다.
판길은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소리로 질문했다.
아까 사무실에 왔다간 박가림 씨 왜 온 거예요?
김편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박가림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아는 건 아니고 우리 학교 출신이거든요.
그래?
여성지 김부장에게 추천받은 자유기고가야
이번 달에 남성 다이어트에 관한 기사를 실어볼까 해서
앞으로 좀 소프트한 정보기사를 정기적으로 넣을까 해.
아직 기사를 맡긴 건 아니고 어떤 걸 하면 좋겠는지 의논만 했지.
사실 속옷 설치전 이후 박가림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가질 만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날 대학식당 앞에서 획 돌아간 박가림을 졸업할 때까지 몇 번 보긴 했지만
언제나 그녀 옆에는 남자가 있었다.
박가림과 함께 걷던 이들 중에 판길이 아는 남자는 총학생 후의 홍보부장 김현우 정도 했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박가림은 판길을 봤는지 못 봤는지 대개 외면했고
판길은 멀리서라도 그녀를 보면 툭 떨어지는 가슴을 추스리며 황급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속옷은 끝내 찾지 못했다.
협찬을 해 준 여학생들이 속옷을 돌려받지 않겠다고 하여
설치전 해프닝은 그쯤에서 마무리되었다.
온통 회색인 대학시절의 기억 속에 채색된 하루를 선물한 그녀.
그것만 해도 판길은 박가림이 고마웠다.
10년도 훨씬 지나 거의 있다시피 한 그녀를 다시 만났다.
판길은 이것을 좋은 신호탄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종일 대학시절의 해프닝에 빠져있던 판길은 정신을 차리고 명사들에게서 받은 원고를 점검했다.
메일박스를 열어봤지만 오후까지 보내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한 두 사람의 원고는 보이지 않았다.
명사들의 원고를 묶은 옴니버스 형태의 꼭지는 힘만 들고 빛이 나지 않는다.
주요 기사를 읽게 하기 위한 일종의 미끼인 셈이다.
입지를 기다리며 종일 낚싯대를 들고 있어봤자 박수는 대어를 낚은 특종 기자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이 자리까지 오기도 얼마나 힘들었던가.
제대로 훈련받은 적이 없는 판길은 강위원의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날선 지적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지금은 늑다리 뒷방신세가 된 강위원이지만 본지 편집국 사회부 시절 날리던 민환 기자였다.
편집국에서 출판국으로 밀려나 눈치밥을 먹고 있던 강위원은 월간시사가 분사할 때 합류한 인물이다.
강위원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자 교육을 담당했다.
분사할 때 무작정 기자가 되고 싶어 업무직에서 지원한 3명이 그 대상이었다.
사보를 진행했던 판길도 그 중 하나였다.
뭔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인지 강위원은 일부러 소리지르고 원고를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다른 기자들은 그럭저럭 적응을 했지만 판길은 기자 부적응자라는 판정을 받았다.
야 인마 넌 삼박자가 다 안 맞아.
기자는 기사 찾는 감각에다 섭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안 되지.
일단 섭외가 되면 취재력이 있어야 하는데 맨송맨송한 얘기만 끌어대지.
문장력은 기본인데 글이 안 되지.
그러니까 너는 진행이나 하고 설문조사 같은 거나 해라.
그래서 설문조사나 대담기사 옴니버스 기사 같은 걸 맡게 되었다.
한마디로 잡동산이 담당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사가 잡지의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해 판길은 나름대로 자리를 구축하고 있긴 했다.
김 편집장 밥 먹으러 안 가?
강위원의 재촉에 김 편이 일어날 때 판길은 비로소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달았다.
딱히 저녁에 만날 사람도 없고 일찍 가봐야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
판길은 저녁 식사도 거의 회사에서 해결하는 편이었다.
김 편이 판길에게 함께 가자는 손짓을 했다.
김 편은 사내식당 대신 회사 근처 중국집으로 앞장섰다.
함께 식사하러 가면 요리조리 빼면서 절대 밥값을 계산하지 않는 강위원이 싱글벙글하는 모습을 보니 판길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김 편은 오늘 저녁 이를 작파하려는지 게살 수프와 깐풍기에다 때갈까지 시켰다.
김 편이 판길에게 술을 가득 따라주더니 씩 웃었다.
박가림 씨 싱글이란다.
여성직 김부장한테 물어봤지.
판길이 니가 오랜만에 관심을 보인 여자에서 내가 일부러 전화했다.
순간 판길은 대학 시절 데자벌을 붙이던 박가림의 싱그러운 모습을 떠올렸고
아직도 그녀가 싱글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 일륜지대사 한번 만들어 봐.
너 내년이면 마흔이다.
불옥이 무슨 뜻인지 알아?
가슴이 얼어 안 움직인다는 의미야.
올해 활활 불살라봐라.
마흔이라는 소리에 판길은 술이 목에 턱 걸리는 기분이었다.
박가림이 누구냐던 강의원은 낮에 잠시 스쳤던 그녀를 용쾌도 기억해내고 갑자기 흥분했다.
아, 생머리 찰랑이던 그 여자?
분위기 있던데.
나도 요즘 가슴 떨리게 하는 여자 어디 없나 그 생각뿐이야.
마누라는 가족이지 여자가 아니거든.
이마가 허언해 도리없이 노인 품새가 나는 강의원이 떨리는 가슴 운운하자
김 편이 푹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판길은 어쩐지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그 여자다 싶으면 꽉 잡아.
대충 맞춰가는 거 그건 절대 반대야.
좋아하는 사람 찾아야지.
내가 확실히 밀어주마.
너를 그 여자에게 꼬린 시켜줄게.
요즘 기사도 안 쓰고 더 이상 족칠 후배도 없어서
매일 탱자탱자하는 강의원은 할 일을 찾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이번 이사회 때 사장이 경질되고 새 사장이 올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렇게 되면 인사태풍이 불 거고 강의원은 보나마나 명토의 1순위에 오를 것이다.
그런데도 강의원은 회사 일과 전혀 상관없는 판길의 개인사에 열을 올렸다.
판길은 괜히 불안한 마음에서 강의원을 바라봤다.
배가를 두 병이나 비우고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사무실에 온 강의원은
편집위원실 소파에 그대로 꼬꾸라졌다.
혹시나 하고 따라 들어갔던 판길이 강의원장을 흔들어 깨웠지만
드르렁거리며 코만 골았다.
판길은 강의원에게 우덧을 덮어주고 편집위원실 문을 조금 열어놓은 뒤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강의원만 그냥 두고 갔다가 행여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습관처럼 인터넷을 열었지만 판길도 몇 잔 마신 백알에 함락되어
책상에 푹 엎어지고 말았다.
야, 인마! 너 안 가고 여기서 잤냐?
강의원이 책상에 엎드려서 자는 판길을 흔들어 깨웠다.
온몸이 찌뿌두두한 게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내리 쏘는 형광등을 그대로 맞아서인지 온몸이 화끈거리기까지 했다.
나 걱정돼서 집에 안 간 거야?
짜식! 사우나나 가자!
판길은 그대로 엎어져 더 자고 싶었지만
완전히 얽혀버린 강의원의 수세미 같은 머리를 보자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판길은 강의원이 다정하게 대해주는 게 영 어색했지만
어릴 적에 아버지 따라 목욕탕 가던 생각이 나서 가슴이 따뜻해졌다.
망 문을 연 사우나에 손님이라고는 둘 뿐이었다.
뜨거운 물에 움츠리며 들어가는 강의원의 잔등이 왜소하기 그지없었다.
탕 안에서도 웅크리고 있던 강의원이 도통 운동을 하지 않아
뱃살이 도톰이 오른 판길에게 훈계를 늘어놓았다.
강의원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판길의 등짝을 괜히 짝짝 치면서 때를 밀어주었다.
판길은 움찔거리면서도 낄 낄 웃음을 흘렸다.
훈훈한 기류는 그날 오후에 드디어 꽃을 피울 모양이었다.
김편이 판길을 부르더니 회의실로 앞장섰다.
강의원이 술김에 한 얘기가 아닌 모양이네.
너랑 박가림씨 엮어주라며 아이디어를 던졌어.
명사들의 건강관리법 어때?
이번 달에 박가림씨와 같이 진행해봐.
술버릇은 어떤지, 어떤 운동을 하는지, 어떤 건강식을 먹는지
함께 의논해서 재미있게 구성해봐.
판길은 어하니 벙벙했다.
너무 급하고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아서.
박가림씨에게 유능한 기자로 보이도록 노력해.
기획단계부터 박가림씨와 논의하는 거 잊지 말고.
이거 박가림씨 전화번호니까 오늘 연락해서 대충의 계열을 설명해.
김편은 눈을 찡긋하더니 판길의 등을 두드리고 나갔다.
박가림의 전화번호를 받자 갑자기 가슴이 술렁였다.
판길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가슴이 제 마음대로 작동한다는 걸 신기하게 여기며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박가림의 차가운 음성에 한껏 부풀었던 심장에서 쉭쉭 김이 빠져나갔다.
다만 미리 김편의 전화를 받아서인지 협조적으로 나왔다.
기획회의도 할 겸 내일 회사로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판길의 말에 박가림은 선선히 그러겠다고 했다.
판길은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땀을 닦았다.
범죄에 연루된 사람의 심정이 자신과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 모르게 세 남자가 모의를 했으니 범죄라면 범죄였다.
그녀 앞에서 과연 퇴원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판길이 박가림을 만나러 회의실로 갈 때 강유현은 마치 감독이 교체하여 들어가는 축구선수에게 하듯 등을 두드리며 겨련한 표정을 지었다.
판길이 고마운 마음을 피하려고 뒤를 돌아보는데 강유현이 그 표정 그대로 사장실 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강유현이 자발적으로 사장실을 찾다니 무슨 일일까?
그 생각을 하느라 판길은 무심한 표정으로 박가림 앞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드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박가림의 얼굴에서 세월이 쉬고 있는지 대학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소 생기가 없어져 도도함 대신 피곤함이 묻어있는 게 변화라면 변화했다.
데자보를 붙이던 긴 생머리의 박가림이 자신 앞에 기적처럼 앉아 있다니.
판길은 행여 얼굴이 상기될까 걱정하면서 심경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했다.
박가림은 프린트된 용지를 판길에게 내밀었다.
작은 박스를 여러 개 만들어 다양한 정보를 주자는 그야말로 여성지 스타일의 아기자기한 기획서였다.
우리 잡지는 중년 남자들이 주타기시기 때문에 그냥 담백하게 가야 합니다.
판길의 얘기에 박가림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판길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좋은 꼭지도 많네요.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도 있고요.
계속 의논하면 좋은 기획이 나오겠죠.
스무 페이지나 할애하는 특집이니까 상당히 비중이 큰 겁니다.
그제야 박가림의 표정이 밝아졌다.
판길은 그녀의 표정에서 현재 그다지 넉넉한 형편은 아닐 거라는 짐작을 했다.
박가림은 판길을 전혀 못 알아보는 눈치였다.
판길은 섭섭한 마음을 감추고 자신도 철저히 모르는 척했다.
그래야 완전 범죄를 할 수 있을 테니.
판길은 전화할 때면 바로 일 얘기를 하는 게 어색해서 어디 사는지 뭐 하는지 물어보곤 했다.
공교롭게도 박가림의 집이 판길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자신이 종종 가는 대형마트를 박가림도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응원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퇴근하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대형마트에 들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와 함께 카트를 밀고 가는 남편을 부러워했던 판길은 괜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판길은 박가림과 서너 차례의 전화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기획안을 대충 완성했다.
박가림이 다음 주 월요일부터 회사에 나와서 본격적으로 일하기로 했을 때 판길은 설레면서도 잠옷 긴장되었다.
곧 시작될 마감 시즌을 앞둔 금요일 저녁.
웬일인지 강위원이 회사 근처 중국집으로 앞장섰고 호기롭게 빼갈과 팔보채를 시켰다.
강위원의 질문에 판길은 속마음을 숨기고 심드렁하게 답했다.
부스럭거리며 주머니를 뒤지던 강위원이 판길에게 쪽지를 툭 던졌다.
주소 적어야 되잖아. 내일이라도 당장 꽃다발 들고 찾아가. 일 좀 잘해보자. 뭐 이래도 되고, 그냥 네 속을 확 까놔도 되고, 언제 밀고 당기고 하냐?
강위원의 말에 김편이 반박하고 나섰다.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저덜적으로 나가면 될 일도 안 돼요.
다음 주부터 박가림씨가 출근한다니 제가 점심 저녁으로 밥 사주면서 분위기 조성해보죠 뭐.
김편의 얘기에도 강위원은 요지부동이었다.
백날 남이 밥 사줘봐야 말짱 도루묵이야. 사랑은 이벤트로 완성된다는 거 명심해.
나이 먹은 애들 길게 가면 한없이 간다고. 한쪽에서 확 밀어붙여야 끝나.
일단 내가 시간이 없어. 나 박사장한테 사편했어.
이달 말에 수리하는 걸로 했으니 한 2주 밖에 안 남았네.
내 마지막 프로젝트가 판길이 장가 보내기야. 그러니까 서둘자고.
갑작스런 선언에 김편과 판길은 어안이 벙벙해서 대꾸를 하지 못했다.
박사장은 새 사장이 와도 1년 정도 지나 인사를 할 거니까 그냥 있으라더군.
1년 더 있어봐야 구질구질하기만 하지 뭐.
기획사 운영하는 친구가 날 필자로 모시겠대. 사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거든.
젊은 필자들이 돈만 밝히고 일은 제대로 못한다면서 글빨은 나 따라갈 사람 없다나.
기사 쓰기 싫어서 일이 빼고 절이 빼고 했는데.
이제 종일 자료와 씨름하면서 막 두들겨야지 뭐.
강휘원은 마치 신입사원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런 강휘원을 보는 판길도 갑자기 용기가 솟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이 빼가를 주거니 박거니 하는 동안 판길은 내내 박가림을 생각했다.
강휘원의 말대로 꽃을 들고 무작정 찾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담당 기자가 프리랜서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호기까지 생겼다.
술을 더 시키는 걸 보니 자리가 길어질 모양이었다.
판길은 화장실 가는 척하고 일어섰다.
판길은 지하철역에서 내려 대형마트 쪽 출구로 나왔다.
마트 입구에 걸린 시계가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카트를 밀며 느릿느릿 쇼핑하는 부부 사이를 뚫고
바구니에 몇 가지 물건을 후딱 골라 담는 게 판길의 쇼핑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 구석 저 구석 꼼꼼히 살펴보리라 작정했다.
혹시라도 쇼핑하러 온 박가림과 마주친다면
세상에나 여기서 만났다니 어쩌고 하면서 아줌마처럼 호들갑을 떨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판길은 따뜻한 온기가 온몸에 퍼지는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에 냉장고를 채워 넣어 딱히 필요한 것도 없었지만
바구니를 들고 괜히 매대 사이를 오락가락 했다.
긴 머리만 보면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
요즘 판길은 가슴이 제멋대로 작동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소중하기도 했다.
추억이 있고 젊은 시절을 서로 기억해 줄 수 있는 상대라는 게 무엇보다도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아무 추억도 없이 세월의 때가 적당히 묻은 모습으로 시작하는 건 너무 건조하고 억울할 테니까.
판길은 와인 코너로 가서 시음을 했다.
집에 도착해 와인 한 잔 하면서 좋은 기분을 쭉 유지할 요령이었다.
그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두 시집 코너 앞에 긴 머리의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만두를 집어서 얼굴을 돌리는데 바로 박가림이었다.
판길은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슬쩍 다시 보니 박가림이 초등학교 4학년쯤 되는 여자아이에게 만두를 먹여주고 있었다.
순간 판길은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판길은 시음 잔을 놓고 황급히 와인 코너 안쪽으로 갔다.
거기 잠시 서 있다가 다른 매대의 통로로 들어섰다.
바구니에 담은 물건이라고는 우유 한 팩밖에 없었지만 더 고를 기분이 아니었다.
양쪽으로 세제를 진열해 놓은 매대를 빠져나와 중앙 통로로 나서는데
박가림이 아이와 함께 웃으며 카트를 밀고 왔다.
박가림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본 판길은 피할 생각도 않고 잠시 모녀를 쳐다봤다.
문득 박가림이 자신을 보는 것 같아 판길은 황급히 계산대 쪽으로 향했다.
판길은 편의점에 들러 소주 한 병과 쥐포를 샀다.
박가림에게 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긴 친구 중에 두 번 이혼한 녀석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박가림에게 아이가 있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판길은 집에 도착해 거의 들이붓다시피 하면서 소주 한 병을 다 마신 뒤 푹 고꾸라졌다.
판길은 아침에 일어나 깨질 듯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결심했다.
괜히 이런저런 짐작하지 말고 바로 쳐들어가 보자고.
그 아이가 조카일 수도 있는데 쓸데없는 의심 속에서 박가림을 어색하게 대하고
그로 인해 일까지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마침 쉬는 토요일이라 판길은 집을 대충 청소한 뒤 동네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좀 열 없었지만 강위원의 지시대로 꽃다발도 준비했다.
박가림의 아파트가 보이자 판길은 흠칫 놀랐다.
언제 자신이 이렇게 저돌적이었던가 하는 생각에.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 복잡한 심정, 의심가는 상황을 덮어두고 박가림과 태연하게 일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판길이 심호흡을 하고 벨을 눌렀을 때 문을 연 사람은 박가림의 딸이거나 조카임이 분명한 초등학생이었다.
아이는 판길을 보더니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어? 어제 본 아저씨네? 엄마 지금 PC방에 갔는데.
판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을 안다는 것과 엄마라는 말에 판길은 엉겁결에 거실로 들어섰다.
20평 남짓한 아담한 아파트였다.
나를 어떻게 아는 거야?
어제 마트에서 봤어요.
울 엄마가 아저씨랑 같이 일한다던데요.
우리 앞에 앞에서 우유 딱 하나 계산하고 가셨잖아요.
판길은 황급히 나오느라 박가림이 뒤에 서 있는 줄도 몰랐다.
TV에서는 토론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너 어른들 토론 프로그램도 보니? 수준이 높네.
아니요. 울 아빠 나올 때만 봐요.
토론은 밤늦게 하니까 졸려서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말에 케이블에서 재방송할 때 보는 거예요.
판길은 그제야 박가림의 남편이 누군지 깨달았다.
사실 자막이 없었다면 김현우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평론을 하면서 시민운동을 하는 글을 TV나 신문지상에서 가끔 본 적이 있지만
살이 너무 쪄서 대학 때 총학생의 홍보부장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판길은 갑자기 불에 댄 듯 놀라서 일어섰다.
부부가 함께 들이닥쳐 그날의 속옷 설치전 주인공이 온 줄 알면 얼마나 웃을 것인가.
박가림이 기혼여인 줄도 모르고 그때 그 마음을 여태껏 품고 있는 순정남쯤으로 생각할 것 아닌가.
판길이 꽃다발을 챙기려고 할 때 아이가 말했다.
아저씨는 회사에 다니니까 월급 받겠네요?
그럼 합격이에요.
우리 외할머니가 아무리 잘난 일을 해도 처자식 몸목에 살리면 자격이 없댔어요.
우리 엄마 재원상대는 무조건 월급 받는 사람이어야 한대요.
여자는 남자가 벌어온 돈으로 살아야 행복하다면서요.
박가림이 이혼했다는 사실에 판길은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는 잠시 텔레비전을 보더니 판길의 동의를 구하는 어투로 말했다.
우리 아빠 답답하죠?
저 아저씨는 마구 공격하는데 받아치지 않잖아요.
아빠는 그냥 자기 의견만 말해요.
그래도 나는 그게 좋아요.
괜히 남의 말꼬리 잡고 공격하는 아저씨들은 싸움꾼 같아요.
아이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판길을 바라보며 체념하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우리 엄마가 결혼하면 저는 아무리 아빠가 나오는 프로그램이어도 안 볼 거예요.
외할머니가 그래야 된댔어요.
새아빠랑 빨리 친해져야 집안의 평화가 온다면서요.
나는 엄마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집 컴퓨터 속도가 느려서 엄마가 자료 찾을 일이 있을 때면 PC방에 가요.
저 학원비 때문에 컴퓨터도 못 바꾸고.
매일 미안해요.
우리 엄마랑 일할 때 잘해주세요.
판길은 속이 꽉 찬 아이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판길은 좀 망설이다가 꽃다발을 그대로 두고 돌아왔다.
판길은 아무래도 강휘원과 의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박가림과 관계된 사안이라고 하자 강휘원은 토요일 저녁인데도 흔쾌히 나타났다.
판길은 급하게 소주를 따른 다음 어제 마트에서 있었던 일과 박가림의 딸 만난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래서 문제가 뭔데?
딸이 있어서 걸린다는 거야?
강휘원이 그렇게 나오자 판길은 말문이 턱 막혔다.
당연히 걸리죠.
생각지도 못한 일인데.
야, 인마.
내일모레 마흔인 녀석이 장가 못 간 게 비정상이지 마흔 다 된 여자가 애 하나 있는 게 비정상이냐?
판길은 강휘원이 이상한 논리에 말문이 막혔다.
결혼이 좀 늦어졌다고 비정상으로 몰아붙이고
나이가 좀 많다고 애 딸린 여자라도 고마워하라는 투로 말하는 게 영 마뜩찮았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고 자신이 별 볼일 없어도 이렇게 도매금으로 넘어갈 순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비정상이면 비정상과 만나야 정상이 되겠네요?
괜히 정상적인 사람 만나면 피곤할 테니 깨끗이 포기할게요.
그러자 강휘원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소리질렀다.
야 인마, 내가 오늘날까지 너처럼 살아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
남이 눈치 보고 대충 맞춰가고 시비 붙을 만한 기사는 안 쓰고 그래서 나한테 남은 게 뭔데?
네가 지금 걱정하는 거 솔직히 남의 이목이잖아.
그 여자 보면 가슴 떨린다며?
그 여자를 사랑하려면 그 여자의 모든 걸 사랑해야 진짜지.
너한테 딱 하나만 경고할게.
비정상 찾아서 끼리끼리 끼워 맞추는 건 좋은데 가슴 떨리는 거 그건 잘 안 될 게다?
바보 같은 놈.
강휘원은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더니 일어서서 판결에게 못을 박듯 말했다.
내가 지금 가장 후회하는 게 뭔 줄 아냐?
진짜 가슴 떨리는 사람을 못 해본 거다.
하긴, 맨날 머리로만 사랑 게임하느라 결혼도 못 해본 놈이 뭘 알겠냐?
판결은 강휘원이 휭 나가버린 뒤에도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는 건 없을지 모르지만 가슴 떨림에 모든 걸 맡길 만큼 무모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모함.
박가림과 아이를 사랑하는 일이 무모한 걸까?
하지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판결은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뜻밖에도 박가림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실은 전혀 뜻밖이 아니었다.
담당 기자가 느닷없이 꽃다발을 놓고 갔으니 전화를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지금 만나고 싶다는 말에 판결은 술집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녀가 온다니 조금 전에 갖가지 생각은 다 날아가버리고 가슴 떨리는 사랑 운운하던 강휘원의 목소리만 귀전에 맴돌았다.
박가림이 술집 문을 밀고 들어오면서 긴 생머리를 넘길 때 판결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랬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청춘의 냄새가 났다.
짧았지만 강렬한 추억이 담긴 그 시절.
박가림은 판결 앞에 앉더니 아무 말 없이 소주를 마셨다.
비상 속옷 설치 전 그때가 기억나네요.
그때만 해도 우리 참 풋풋하고 꿈도 많고 저덜족이고 할 말도 하고 그랬는데
그 속옷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판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바본가요?
프리랜서 하려면 정보 수집도 빨라야 하고 눈치도 빨라야 해요.
월간시사 웹사이트에 기자들 양역이 다 나와 있잖아요.
게다가 대그 이름이 워낙 특이해서 쉽게 읽기는 힘들죠.
그리고 당신 대학 때랑 별로 안 변한 거 알아요?
뭔가 순수해 보이면서 미안하지만 약간 어벙한 거.
박가림이 어금니가 드러날 정도로 크게 웃을 때 판결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 아름이 아빠, 지금은 아무 감정도 없어진 김현우가 그날 밤에 속옷을 다 수거해서 버렸어요.
나도 나중에 알았죠.
냉철하면서도 중립적인 데자벌을 써서 붙여놓고 뒤로는 작품을 버린 걸 알고 실망했지요.
그 사람은 언제나 근사한 명분을 앞세우지만 생활은 그렇지 못했어요.
아,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지?
박가림은 또다시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어제 마트에서 좀 놀라시는 거 봤어요.
나 아름이 키우면서 혼자 사는 거 쉽지 않아요.
숨기려고 한 건 아닌데 내가 딸 키우며 혼자 산다는 거 아는 사람 많지 않아요.
그냥 일로만 평가받고 싶어요.
선입견 없이 깔끔하게 시작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박가림이 눈을 내리깔고 말하는 동안 판길의 가슴으로 싸한 기운이 차올랐다.
그녀의 절박함이 절절히 전해져왔던 것이다.
카트를 밀면서 해맑게 웃던 모녀의 모습이 눈에 아름거렸다.
박가림은 소주를 가득 따라 마시더니 마진표를 찍듯 술잔을 탁 소리나게 놓고는 일어섰다.
청춘은 가고 생활만 남은 셈인가요?
부탁드릴게요.
순간 판길의 가슴이 맹렬히 울렸다.
그녀가 일어서 나갈 때 판길은 재빨리 그녀를 가로막았다.
대학 시절 식당 앞에서 박가림이 판길을 가로막았던 것처럼
진부한 표현 같지만 청춘이라고 할 때가 바로 청춘 아닌가요?
박가림은 물끄러미 판길을 바라보더니 그냥 나가려고 했다.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예술? 이라고 반문하던 대학 때와 달리 청춘? 이라고 되묻지 않았다.
박가림을 속수무책 떠나보내고 그날 이후 그녀를 훔쳐보기만 했던 판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녀를 가로막았다.
회색 교정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우리의 환상 콤비 이제 확실히 발진해야죠.
판길의 말에 박가림은 알뜻말뜻한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출입문 쪽을 향했다. 그녀를 결국 만났어요.
대학교 다닐 때 처음 본 후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던 그녀를 드디어 만났습니다.
이 판길이 일하는 직장에 프리랜서 작가로서 박가림이 찾아왔습니다.
하늘이 주신 기회일까요? 아니면 지나가는 바람일까요?
여하튼 판길은 이제 마흔이 될까 말까 한 사람으로서 직장에선 주요 직책을 맡을 만큼 눈에 띄는 인재는 아니지만
나름 자신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남자죠. 아참 한 가지 중요한 걸 빠트린 게 있는데요.
판길씨는 아직도 미혼입니다.
마흔이 되도록 여직 뭐 하셨나요? 라고 묻고 싶지만 요즘 세대의 눈으로 보면 결혼 안한 그 아이가 그리 타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도 아직 결혼을 안한 친구들이 여러 있거든요.
제 생각에 나이와 상관없이 인생을 즐기면서 자기가 편하게 살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결혼이라는 게 인생 최대의 이벤트가 아니에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개인의 행복이라고 젊은이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게 불과 얼마 전부터 입니다.
자신만 행복하면 결혼을 하던 안하던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인 겁니다.
아무튼 판길씨는 나이 마흔에 아직 결혼 안한 평범한 직장인인데요.
반면에 박가림은 딸을 하나 둔 이혼녀구요. 그녀의 전남편은 판길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 총학생의 홍보부장이었던 김현우였습니다.
판길은 대학 시절 비상 동아리에서 했었던 속옷 설치전 때 박가림을 만난 후
박가림이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었는데 그가 그러는 동안에 박가림과 김현우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혼을 한 거예요.
누구에겐 아무런 변화 없었던 10년이 누군가에겐 변화무쌍한 10년이었습니다.
판길과 박가림이 예전에 알던 사이였고 지금도 판길이 박가림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직장 선배들이 적극적으로 밀어주는데도 불구하고
판길은 박가림과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에 좀 주저를 하는데요. 그가 주저한 이유는 바로 박가림이 이혼녀이고 아이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좀 현실적으로는 주저할 것 같긴 해요. 예전에 좋아했던 건 맞지만 특별히 사귀어 본 것도 아니고
또 지금까지 가끔씩이라도 안부를 주고받으면서 관계를 이어온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러니 판길 입장에선 좀 이게 진짜 감정인가 아닌가 하면서 헷갈릴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한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었죠. 그게 뭐냐면 판길이 박가림을 다시 만났을 때 판길의 심장이 그때 대학생 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뛴다는 것입니다.
이거 하나만 보면 이미 결론이 났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심장이 뛰면 끝난 거 아닌가요?
세상에 심장이 뛰지 않고 설레지 않고도 결혼하는 사람들이 쎄고 쎘는데 심장이 뛰는 상대를 만났다면 앞뒤 생각할 거 없지 않을까요?
그녀가 이혼녀라는 거? 아이가 있다는 거? 조금 고민은 되겠지만 결국엔 판길이 뛰어넘을 수밖에 없는 장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혼은 현실이야 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는데요. 반대로 전 결혼은 용기라고도 말해주고 싶습니다.
강의원의 말이 콕 가슴에 닿았습니다. 박가림의 현재 상황을 보고 주저하는 판길에게 이렇게 말했죠.
그 여자 보면 가슴 떨린다며? 그 여자를 사랑하려면 그 여자의 모든 걸 사랑해야 진짜지.
여러분은 어떠세요? 가슴 떨리는 사랑을 지금도 하고 계신가요? 만약 그런 사랑을 하고 계신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행운하라는 거 아시죠? 이금미 작가의 그녀를 만났다를 읽어드렸습니다.
다음에도 재미있는 작품으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드리면서 그때까지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