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비디오 조회수·2024. 1. 1. #고광스님 #역경 #불교용어의어원 고광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표현하는 언어의 기능에 주목해야 팔정도에서 정어의 개념도 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요즘 우리는 시청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보고 듣는다는 뜻이죠. 하지만 경전에는 시청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를 대신해 견문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둘다 보고 듣는다는 의미인데,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또 정어는 왜 정언이 아니고, 정어일까요? 같은 뜻처럼 보이지만 그속에는 다른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1천년전 인도말을 중국의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벌어진 역경사들의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살펴봅니다.
#고광스님 #역경 #불교용어의어원
00:00:52: 정견과 사유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
정견과 사유를 가지고 행동하는 방법에 대한 해설 / 언어, 몸, 생각의 조작과 소멸에 대한 이해 / 정어의 의미와 중요성
00:06:51: 번역과 인식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
견문과 시청 무엇이 같고 다를까? 인식과 대상에 대한 철학적 관점 / 대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가는 과정에 대한 해석
00:13:15: 언어와 사고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언어 사용 습관은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언어 사용은 사고를 지배하며, 언어 습관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서양과 동양 사람들은 대상을 보는 시각이 다르며, 이는 언어 사용 습관의 차이로 이어진다.
언어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게 되며, 이는 언어와 사고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00:20:43: 언어와 기억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
언어가 쌓여야 대상이 드러나고 기억이 조작되어 기억된다는 철학적인 주장
근본이 되는 장소는 입처로, 모든 것이 조작되어 기억됐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
지식이란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이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
00:27:14: 부처님의 법에 따라 언어의 사용과 상대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처님의 법에 따라 언어의 사용과 상대적인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언어의 사용과 상대적인 개념을 중요시했던 중국의 유명한 선사들에 대한 언급
늙음과 죽음, 생과 산이 서로 묶여있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고광스님, 팔정도의 정어는 왜 정언이 아니고, 정어일까? 언어와 인식의 관계 바로보기 [고광스님 1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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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공항입니다 아 오늘은
먼저
시간에이어서 그
팔정도의 세 번째 항목인 정어 어
빨리 오르는 쌈마 와자라 그러죠 아이
정어 대해서 공부할
것인데요 아 정어 얘기하기 전에 먼저
그
팔정도의 어
기본음
팔정도는
그 여덟 가지로 되어 항목으로 되어
있지만 얘가 단수를 그랬어요 그래서
단수로 표현되 있기 때문에 여덟
개이지만 하나로 진행된다고 생각하셔야
돼요 그래서 어 제일 먼저 어 첫
번째 항목이 정견이 있는데요 바른
견해를
가져야만 된다 그랬어요 그 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은
어 고집멸도의 사성제 바라보는 관점을
정견이 그러고 고집멸도 이외에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견이 되겠죠
그래서 내가이 고집멸도 바라보는 것이
정말로 맞는가에 대한 자기 확신이
생겼을 때 비로소 어 정견이 생기겠죠
그래서 그렇게 견이 생기고 난
이후에는 그 고집멸도 하는 생각을
사유를 진행해야 됩니다 그래서 정견이
있어야만 비로소 정 사유가 되죠
그렇게 정 사유를 하게 되면 바른
사유를 하게 되면 제일 먼저 그
사라지는게 무엇이 사라지냐 된 언어가
사라지기 시작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
가지의 조작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첫 번째는 언어 의 조작 두
번째는 그 몸의 조작이 일어나고요 세
번째는 생각의 조작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행
아 신행 구행 의행 이렇게 말하죠
근데 시작은 아 이렇게 몸으로
일어나는 그 조작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구행이 일어나죠 언어에 대한
조작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실제적으로
마지막에 조작이 완성되는 것은 행 그
완성이 돼요 그러나 소멸은 제일 먼저
구이 소멸됩니다 그래서 그러면 어
여기서 이제 우리가 보통 어 어라고
말할 때 정어 아고 말할 때 그
어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쌈마 자에서 그
어는 그 짜를
그 그 말을 나타내는 말은라는 말도
있고요 어라는 말도 있어요 그렇죠
그래서 우리는 그 두 가지를 합해서
언어 이렇게 말하죠 그래서 언니라고
하는 말은 뭐냐면 나 혼자 그냥 막
떠드는게 언니에요 그다음에 어라고
하는 말은
어 앞에 대상이 있는 상태에서 말하고
있는 거 대화의 의미를 가져요 그래서
어 여기서 이제 정어 아고 말할 때는
어 나 혼자 말하는 거는 별 뭐 문제
없을 수 있죠 그렇지만 어 언어
활동이 어 똑바로 되어야 된다이 말
이런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 잘못하고 있길래 부처님은 이렇게
언어에 대한 바른 얘기를 했을까요
보통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말할 때
정어 말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어
망어구나 양설이 기여라고 하는네
가지를 하지 말아야 된다음 이런
것들을 이제
그 이런 것을 안 하는 것이 바른
언어 생활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이거는 기본이고요 이것보다
이제
더요요 생각이 왜 이렇게 진행되는지를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죠
어 여기 어떤 대상이 있어요 대상이
있으면 그 대상에 이름을 붙이죠
우리는 근데 우리는 하고 있는 언어와
실제 대상이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밥을 먹어요
그러면 말로 밥을 먹는 것하고 실제
밥하고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죠 근데
실제로
그런가요 사실은 내가 아무리 밥이라고
말해도 그게 실제 밥이 되진
않죠 그래서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는데 이름을 붙이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면이 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
중에 하나인데요 항상 무언가 아
직접적인 실체인 것처럼 자꾸 느껴지게
돼요 실제로 그렇지 않은데
그래서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어 보려면 그 사람이 어떤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지를 보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예를 들면
음 어떤 사람이 어 내가 보고 듣고
그다음에
느끼고 안다고 생각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죠 그래서 우리가
보고 듣는 걸 뭐라고 말해요 시청한다
그러죠 볼 시자의 어 그다음에들을
청자 이렇게 써요 근데 경전을 보면
시청이라는 말은 거의 안
나옵니다 어 어 견문이 말이
시청이라는 말 대신에 견문이 말이
많이 나와요 견문이
말은 보고 듣는다고 말할 때는 우리가
시청이라는 어떤 주관이 있어 가지고
그것이 어떤 대상을 보고 그것을
듣는다는 말이 그게 보고 듣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보고 듣는다고 말할
때 항상 뭐가 있을까요 자아가
있습니다 내가 보고 내가 듣는게
돼요 그러면 이렇게 보고 듣는다는
말이 있는데 굳이 한문에서 견문이
말을 따로 만들어서 써야 될 이유가
있었을까요 특히들을 문자 같은 경우는
원래 어 듣는다는 말이 청자로 있는데
굳이 따로이 글자를 만들어서 번역하기
위해서 그 만들었던
글자인데 그렇다면 견문과 시청의
차이는 과연
뭘까요 견문은 보고 듣는게 아니고
보이고 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견문 각지고
말을 해요 그거는 우리가 어 번역할
때 보고 듣고 느끼고 그다음에 아는
것 이렇게 번역하지만 그렇게 되면
뭐가 있어요 자아가 있죠 내가 있어
가지고 대상을 보고 그것을 듣고
그것을 느끼고 그래서 내가 그것을
안다 이런 생각을 갖는 거죠 그렇다면
뭐가 되겠어요 자아가 있어 가지고
어떤 대상을 보는게 되고 대상을
느끼는게 되고 대상을 듣는게 되죠
그래서 내가 대상을 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다면 항상 거기에는 자라는
생각이 끼어들게 돼요 근데 부처님은
견문 각지고 말해요 그러니까 보이고
그다음에 들리고 느껴지고 그래서
알아준 거죠
내가 무엇을 알려고 해서 아는게
아니죠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어떤 대상이
있으면 누구한테 처음 소개를 받아서
이름을 알았다고 생각해 봐요 그러면
어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이었을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인식이
되던가요 보이던가요 그냥 어떤
덩어리가 있었을 뿐이지 그가 그라고
인식되지 않아요 근 는 이미 그런
기억들이 내제되어 있어서 대상이
드러날 때 그것이라고 매칭되서
드러나는 거죠 그것을 우리는 보였다
들렸다
느껴졌다 그죠 그다음에 알아 거죠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보면 대상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그다음에
알아지는
것이죠 내가려고 것을 보거나 그것을
들으려고 해서 듣는게 아니에요 우리는
대상이 나타날 때 그 대상이 나타난과
동시에
자가 그 대상을 보는 거 같은
느낌으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내가 있어 가지고 그것을 보는게
아니고 그런 대상들이 나에게 드러날
때 그런 대상이 있는 것처럼
드러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른를 가지고 바르게
사유할 때 바른 언어 생활이 가능하다
이렇게 말했던 거죠 그러면 바른 언어
생활이 가능하다면 어 또 무슨 문제가
벌어질까요 우리가 언어가 가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특질 중에 하나가
어 서로 상대적인 양 극단의 생각을
가지고 언어를 표현하죠 그래서 항상
이런 생각을 해요 저기 있다라고
말하고 저건 없다고 말하죠
그러면 정말로 온 세상이 가득차
있다면 온 세상이 가득차 있다면 빈
곳이 전혀 없다면 정말로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겠죠 반드시 있다는 생각이
있으려면 없다는 생각 위해 그 있다는
생각이 매치가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순수하게
있다거나 순수하게 없다거나 이렇게
말할 수 없어요
우리에게 동쪽만 있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서쪽이 있어야 동쪽이 있습니다
우리가 높은 곳만 있을 수 있을까요
아니
불가능하죠 낮은 곳이 있어야 높다는
인식이 생겨요 그러면 실제로 우리가
크다 작다의 문제를 따져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커서 큰 걸까요
비교 대상 때문에 그것이 크다고
느껴지는 거죠 작은 비교 대상 때문에
크다고 느껴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이름에서 크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정말로 그 속에 그 대상 속에 정말로
있음이 존재하거나 없음이 존재하거나
아니면 크다거나 동쪽이라 그가
서쪽이라는 이런 특징이 그 대상
자체에는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어떤
언어로 대상을 규정하는 순간 그런
대상이 있는 것처럼 드러난다는 거죠
그래서 언어를 처음에는 우리가
편리하게 쓰기 위해서 언어를
구사했는데 이름도 붙이고 이런 일들을
했어요 만약에 언어가 없었다면
어 인간이 우리 사람이 이렇게 지식이
전달이
됐을까요
개와 우리가 또 그다음에 다른 동물과
우리가 확연하게 분되는 것은 이렇게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지식도 전달되고 생각도 공유할 수
있고 해요 하지만 단점도 있어요이
언어는 언어를 씀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대상화하고 그다음에 그것이 그런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어
특징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면
항상 우리는 무슨 생각에 빠지게
되냐면 있냐 없느냐를 계속 따지게
돼요 그래서 이런 질문을 많이 하죠
뭐라고 질문하면 스님 윤회가 있나요
없나요 이런 거 많이
물어봐요 바른 언어에 대한 정어 대한
바른 생각이 있다면 있나요 없나요라고
물었을 때 있다고 대답할 수도 없고
없다고 대답할 수도 없겠죠 그래서
그것은 아다다 무기다 이렇게 이렇게
말한
거죠
그래서 언어를 어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어 저 견이 생겨서 바른 견해가
생겨서 바르게
사유했다 바른 언어 생활도 구사하게
돼요 그러면 내가 있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그다음에 안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어떻게 말하겠어요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알게 된다고
말하겠죠 그래서 어 빨리나
산스크리트어를 보면 부처님의 말씀은
이상하게 다 피동으로 되어 있어요
거의
대부분이 만약에 피동이 아니고 능동의
형태로 말하게 되면 항상 무슨 생각이
벌어지면 자아가 있어서 그런 일을
버리고 있 생각하게
돼요 그래서 바른 언어 생활은 그
사람이 사고를 바꿔
놓죠 어 우리는
기본적으로 언어가 가지고 있는이 특징
중에 하나가 그 사람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가 결정이
되죠
어 를
공부했었던 심리학자들이 이런 사람들이
그 아주 재밌는 실험을 했는데요
어 닭하고
소하고 그다음에 어 풀을 연결했을
때 세 가지를 놓고 동양 사람들하고
중국 한국 일본 사람들하고 서양
사람들을 놓고 서로 그 대상을 연결
해보라고 그랬을 때 서양
사람들은 소하고 닭을
연결해요 근데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은 대부분의 많은
경우에에 풀과 소를
연결합니다 그러면 서양 사람들이
생각했었던 것은 뭐냐면 소하고 닭은
같은 동물계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당연스럽게
연결돼요 그런데 위해서 조향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대상을 파악하니 독립적인
대상이 아니고 관계 속에서 그 대상을
파악하니 소하고 풀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거예요 소화하면 제일 먼저
떨 떠오르는게 그가 무엇을 먹는지가
떠오른다는
거죠 그래서 언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죠 그래서 우리가
어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하고
서양 사람들이 대상을 보면서
생각하는게 다르죠 그 이유는 언어를
사용하는 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기들한테도 자기 소개를 시켜
보라 그러면 어 서양 애들은 그렇게
말해요 나는 이름이 뭐고 그다음에
무엇을 좋아하고요 어떤 색깔을
좋아하고요 나는 이런 사람이고요
자기를 규정해
자꾸 근데 우리 애들한테 얘기하면
어떻게해요
어느 국민학교 아 초등학교라고 그랬죠
요즘에 어느 초등학교 몇 학년 몇 반
몇 번 누구입니다 이렇게
말해요 여러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죠 그러니까 내가 이런 존재가
있어 가지고 살아가는게 아니라 이런
관계 속에서 나는 어 내가 자신이
드러나고 있는 거죠 그런 것을 어
언어적인 언어가 달라지면 어 생각이
달라져요 근데 우리는 는 어 요런
문제에 대해서 약간 그 조금 뭐
벗어나 있는 이유 중에 뭐냐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면 우리 언어는 그 동사와
그다음에 형용사 위주의
언어예제 비해서 서양 언어들은 명사
위주의 언어죠 그래서이 부처님 당시에
어 이사라 부처님 당시의 그 언어도
역시 인도 유럽어 쪽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있죠 그게 바로 어 명사화
되어 있는 그 언어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상 대상에 대해서
어떤 규정하는 기본이 있는 거죠
그래서 예를 들면 동사 영어의 동사를
보면 동사가 기본이죠 해부 동사와
동사가 기본입니다 그러면 해부 동사와
비동사 해라는
말은 소유한다는 말이죠 내가 어떤
존재가 있어서 내가 대상을 소유한다는
의미가 기본 해보 동사에 가지고 있고
그다음에 동사는 그것이 그런 것으로
있다는 존재한다는 의미를 갖는 거죠이
두 가지 동사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거죠 그렇게 존재하고 어떤
무엇이 누구에게 소 소유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항상 자를
자가
등장해요
그런데 비해서 우리는 그 굳이 자아를
등장하지 않고도 그 언어를 사용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어 서양 사람들 같은
경우는 어 내가 간다고 표현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거와 같은
거죠 그래서 바른 언어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어 바른 견해가 생기고 그다 바른
견해가 생기고 그것을 통해서 바르게
유할 때 바른 언어 생활이 가능한
것이지 독단적으로 바르게 언어 생활을
하세요 이렇게 하면 무엇이 바른
것인지 무엇이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금강경에 보면 이런 말
나오죠 그것은 커서 큰게 아니고
이름하여 큰 것이라고 말한다고
그죠 실제로 그렇게 커서 큰게 아니고
우리는 크다고 규정짓고 그렇게
바라보니까 거기에 크다는 이름이 가서
붙은 것일 뿐인
거죠 그래서 바른 언어 생활을 하는
것은 참
중요하다 아 그래서 이제 이것을
경전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한번 본다면 어 운하 정어 어떤 것이
바른 언어인가 어 위성 제자 염
고시에 고시 그랬어요 염 고시고시
그랬어요 그러면 이건냐 무슨 말이냐면
이른바 성스러운 제자가 괴로움을
생각할 때 이것이 괴 괴롭다고
생각하니까 그걸 이제
기억하니까 그러니까 습 시습 이것을
어 익혔으니 익혔다고 말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이제 익혔다는 말이 고집
멸도이이 번역자는 집 대신에 습이라고
말로 썼어요 집이라는 말은 어
고집멸도 말할 때 사성제를 얘기할 때
얘기했던 것처럼 어떤 것들이 모인다는
말이죠 근데 우리가 어떤 대상이
드러나려면 반드시 어떻게 해요 언어가
쌓여야 쌓여야 그 대상이 드러나겠죠
그래서 이렇게 익혀진 것은 익혀졌다
말하고 그다음에 멸 시혈 멸하 멸하다
말한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 안 하죠 그래서
염도 시도시 그러니까 또 어 기억하는
것을 도를 기억하니까 이것이 어
도라고 할 때 그렇게 말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혹은 근본에서 이것들이
만들어졌는지를 관찰했는데 여기서 이제
어 호관 본소 작할 때 그 본소가
뭐냐는 거예요 본소가 근본이 되는
장소죠 여기서 근본이 되는 장소는
입처 말합니다 여섯 의 입처 되어
있는 곳 곳에서 만들어지죠 소작도
그런 것에서 만 지어지고 만들어지죠
그래서 혹 학염 재행 어 혹은
어 우리가 기억되는 것이 재행 이죠
모든 것이 조작되어 기억됐다 하는
사실을 배웠는가 이거를 생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호견 어재
재환
혹은 모든 것이 조작되었고 때문에
재난과 환난이라는 사실을 보고 있는가
또 호견 열반 지식 어 혹은
열반이 열반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지식이라고 하는 사실을 지식이라는
말은 멈추어서 어 완전히 그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이거를 이제 어 사 그 삼법 인에서는
열반 적정할 때 적정을 말하는 거예요
고요해진 것을 보고 있는가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만약에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외부에 있는 것이라 그러면 말이
안 되겠죠 그거는 부처님이 말한
열반과 그 외도이동이
다르니까 어 그런 것이라고 할 것이고
그다음에 혹 무창 염관 어 혹은
어 여기서 이제 관선 할 때이 선은
훌륭함을 말하는 거예요 어 훌륭함을
생각해서 훌륭함을 생각해 가지고 어
애착이 없는지를 보냐는 거예 기억하고
있는지 그다음에 심 해탈시 마음이
해탈했다 그다음에 우리가 이런 잘못된
생각들이 벗어났을 때 는 어 어중
제구의 사 여행이라
그랬어요 그 그 가운데에서 입으로
일으키는네 가지가 제거되는 거죠 어네
가지가 제거돼요 그거는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이 앞서 나왔던 것처럼 뭐냐면
망어 망어 거짓말하는 거죠 구는
악담하는 말이고 그다음에 양설
여기서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하는
거고 그다음에 그다음에 기어는 꾸며서
하는 말이죠 아주 미사역
어 이쁘지도 않은데 겁나 이쁜데 뭐
이런 거 어 이런 것들이 어 진행되는
거죠 아 이런네 가지 일을 하고
있는지 예
그다음에
아 제여 어 제여 구 악행 어 입의
그 나쁜 조작이지 잘못된
그 조작으로 인한
그것들을 원리 제단 원 완전히 끊어
버렸는지
그다음에에 하지 말아야 될 것은 어
불행 불행 부작고 불라 부해서
그러니까 이것을 이제 그 정화다
이렇게 말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지
말아야 될 것은 그 짓지 않고
그다음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그것은
그 마주하지 않는 불라는 말은 서로
이렇게 마주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알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불의라는 말은 어 모른다라는
말로도 되고 그것을 그렇게 합당하지
않은 것은 내 스스로 어 마주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정화라는
거죠 그러니까 어 부처님이 말한이
정원은 정견이 이루어지고 정 사유를
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어 바른 언어
생활을 하게 돼요 그러니까 어
부처님은 이제 나중에 다시 한번요
구차 제정을 말할 때 설명하겠지만
초선 그 구행이 소멸됩니다 구행이
소멸되니 초선을 뭐라 그러냐면 어 악
불선 떠나서 생겨나는 언어가 정멸
것을 초선이 말해 그러니까 어 저
견이 생겨나서 바른 사유를 했을 때
제일 먼저 언어의 잘못된 조작으로부터
벗어나게 돼요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윤회를 해요 안 해요 이런
거 안
물어봐요 천당이 있어요 없어요 지옥이
있어요 없어요 이런 얘기를 안
한다고 왜냐면 그 질문은 질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로 사유하기
때문에 있느냐 없느냐 동쪽에 있느냐
서쪽에 있느냐 이런 식에 질문하는
거죠 그것은 우리가 대상을 언어를
규정했을 때 얘기하는 것이 실제로
그런 속성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죠
그러니까 어떤 대상에 대해서 아
정말로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묻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인 거예요 그러면
자아가 있어요 없어요 이렇게 물으면
정상일까요 그는 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죠 그래서 선사들도 기본적으로
언어 도단이 말을 가장 강조를
해요 언어가 가지고 있는이 잘못된 어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면 절대로 어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부처님의 법으로부터
어 법에 진행되지 않는 거죠
깨달음으로 나갈 수가 없게 돼요
그러니까
어이 점을 알았기 때문에 어 중국의
유명했던 선사들도 대부분 언어도단이다
이런 말들을 했던 거죠 그러니까
언어도 단이라는 말은 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되 바르게
사용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있어 가지고 세상을 보거나 듣거나
느끼거나 아는게 아니고 이렇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알려 알아지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나라고 부르는
죠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을 무하다
이렇게 말했던
거죠 아트만이
없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내가 반복해서 여러번
얘기하지만 있다
없다를 강조하거나 서로 상대적인
양극단의 개념을 가지고 어떤 문제를
질문하고 그것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그것 자체 가 서로 하나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에요 두 가지가
하나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본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 질문 하지
않겠죠
당연히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죠 우리는 늙어 죽을 거라고
그렇죠 우리 늙어 죽을 거예요
분명히
늙어 죽음이 따로
있을까요 늙어 죽을 수
있을까요 늙음과 죽음이 따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늙는다 죽는다는 말을 한다면
태어났다는 말을 가져야만 비로소
늙는다 죽는다는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늙고 죽는 것은 무하고 묶여
있어요 태어남과 여 있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 생연
노사 그런 거예요 생은 생과 산은
이렇게 실로 묶여 있는 것처럼
연기하고 있다는
거죠 우리가 늙는다 죽는다는 생각은
자기 자신이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늙는다 죽는다 말하는 거죠
실제로 늙고 죽어서가 늙고 죽어서 어
늙는다 죽는다 말하는게
아니고 정말로 우리에게는 어 늙고
죽음도 결국에는 익혀진 생각인
거예요 여기서 지금 얘기한 것처럼
고슴 멸도 할 때어 습인 것처럼 또
집이라고 말할 때는 모인 것 모인
거죠 무엇이 모였을까요 그런 단어들이
있단 모였어요
우리에게는 그런 생각 그런 생각들이
모여서 이런 세상이 아 이렇게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게 된
것뿐이죠 그래서 어 부처님은 언어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바른 언어
생활을 해야 된다고 하는게 삼마
아자의 정어
거죠
어 정어 대한 그 어느 정도 이해가
됐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어 첫 번째로 우리는
생각해야 될게 뭐냐면 바른 언어
생활에 대한 그 아 내가 지금이 쓰고
있는 언어가 정당한지 아닌지를 잘
관찰해야 됩니다 이것을 관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바른 언어를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항상 어떻게
말해요 내가 밥 먹고 내가 똥 넣고
내가 뭐 한다고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나는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근데 자기 자신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내 가 알아서 아는
것인가 누군가의 얘기를 받아들여서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죠
그래서 임재 스님은 이런 얘기
했어요 마치 어 다른 사람이 똥을
씹어 가지고 어 나한테 주면 그 똥을
내가 받아서 씹어서 나도 똑같이 씹고
그거를 뱉는 거 같다고 언어를 쓴다고
하는
것이
표현만 다르지 부처님과 선사 스님들이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세요 우리는이 관문을 벗어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나갈 수가
없어요 언어에 대한 심도 있는 사유를
해야만
가능하죠 그래서 언어를 쓸 때 이런
방식으로 쓰는게 중요해요 피동의
형태로 자꾸 생각하도록
하세요 예를
들면 내가 학교에 간다 내가 밥
먹는다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학교에 가고 있는게
나고요 밥 먹고 있는게 나라고 불리는
거예요 이렇게 언어를 오랫동안 써야만
그것을 계속해서
연습해야만 자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언어를 바르게 쓰는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중요한
관문이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은 어 요것으로 정어 대한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