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강) 자유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 2(이승만을 위해 준비된 훈련소, 도서관, 학교 한성감옥)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의 시작), #이승만과자유민주주의의시작,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
161 팔로워
2023. 9. 3.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최수용,#글로벌디펜스뉴스,#성상훈의국내외정세분석,
1)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월정기 후원 바로가기 (https://me2.kr/exHVc)
2)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역사전쟁' 후원계좌 (우리은행 : 1005 -204-476779 : 예금주 :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본 채널에 영상이 한 동안 올라오지 않으면 구글코리아에 의해서 방송이 차단된 것으로 생각하시고 아래의 채널로 오세요.
1. http://www.k-cia.kr/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홈페이지 개설)
2. https://url.kr/of12r8 (글로벌디펜스뉴스)
3. https://url.kr/4ib1wo (성상훈의 국내외정세분석)
구글코리아가 본 채널의 영상에 대해서 '광고 적합' 메일을 보낸 뒤, 하루 뒤 '증오심 표현'으로 경고를 하고 임의로 영상을 삭제한 사례가 실제로 발생하였습니다. 언제든지 본 채널이 차단될 수 있으나,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홈페이지( http://www.k-cia.kr/ )로 오시면 중단없이 방송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 구글코리아가 광고적합 메일을 보낸 뒤, 임의로 삭제한 영상 바로가기 (https://url.kr/qklhnr )
(2편)북한, 보수유투버 파괴 지령 종북주사파에게 하달, 한국인터넷진흥원편
2. 구글코리아의 블랙리스트 언론탄압 '광고 붙여 놓고 임의 삭제' (https://vo.la/j1fsE)
- 최수용 올림 -
대한민국 근년 대사를 성경적
세계관으로 알리고 전하는 대한역사
문화원의 한국 군현 대사 바로기
특강입니다
[음악]
자유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 두 번째
이야기 이번 시간에는 조선 백성을
자유케 할 인도자로 지명된 이승만을
위한
신병훈련소이자 도서관이며 대학이 된
한성 감옥으로 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그의 나이 20 4시 되던
해 고종 폐위 모의와 공화제 실시
음모 가담이라는 제목으로
투옥되었습니다 고종 폐이 모이라는
것은 역모에 해당하는 중제
있습니다 이승만과 함께 투옥된
동지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민공동회 해산된 마당에
자신들을 구명할 대책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식과 서상대 이승만에게
탈옥을 권유했고 주시경은 이들의
탈옥을 위해 권총까지 준비해
주었습니다
1899년 1월 30일 이승만은
투옥된지 21일 만에 서상대 식과
함께 탈옥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병사에게 잡혀 이승만의
탈옥은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서상대 man 무사히
탈옥에 성공했고 최정식 중국으로
도망치려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탈옥도 중재인에 간수에게
총을 쌓 상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은 총을 소지하기 했지만 총을
쏘지 않은 덕분에 태 1대를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참
운도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승만의 투옥과 탈옥 실패는 이승만의
인생에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서울에는 이승만이 곧 사형당할
소이
다했습니다
1899년 3월 19일자 황성 신문은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풍서 들은즉 이씨가 인류를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기왕의 조칙
중에 미결수는 판결할 때에 감 1등하
하셨으니 법관들이 조대로 시행할
지경이면 이씨 명을 보존할 듯
하다더라 이승만이 사형을 당할 것
같은데 판결이 나지 않은 죄수에게
조금이라도 감영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조항이 있으니 판결하는
사람들이 너그럽게 봐준다면 사형을
면할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승만의 아버지는 아들의
사형 소문이 들릴 때마다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려 한성감옥 왔고 마음을
쓸어내리며 돌아가곤
했습니다 한성 감옥은 너무나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생
지옥이었고 위생 상태는 엉망이어서
더럽고 악취가
풍겼습니다 감방은 너무 좁아서 편히
눕는 것은 고사하고 다리를 펴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허용되는
공간 는 고작 가로 새로 70cm
정도밖에 안
되었으니까요 192년 6월 한성
감옥에 수감되어 약 2년 동안
이승만과 함께 수감 생활을 한 김형섭
의하면 한성 과목이 얼마나
비위생적이고 비조 받는지 알 수
있습니다 김영섭이 처음 한성 감옥에
투옥되다 밤 김영섭이 마주한 감방은
악취가 진동하여 문틈을 통해 숨을
쉬어야만 버틸 수
있었습니다 또 아침이 되어 간방 안을
둘러보니 간방 한 칸에 50여명의
사람들이 진흙속 뱀장어 럼 벌거벗은
채로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뿐만 아니라 한성 감옥은 날마다
무서운 고문이 이어졌습니다
특별히
정치범들의 너무나 가혹한
곳이었습니다 정치범들을 대부분 긴
칼을 모개 매고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논리도 없이 막말을
뱉어내는 일반 잡범 사이에서 느끼는
모욕감은 이승만과 같은 정치범들을 더
고통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에디 선교사의 그을 보면
한성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들의 고통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들의 감옥이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자백을 받아내거나 남을
연루시키는 가하고 그곳엔 제수들
인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 정치범들을 흉악범 무레
안들 속에서 간수들과 동료 범들 의해
잔인 게
취급받습니다 즉 정치범들이 겪는
고문은 죽음의
고통이었습니다 비위생적인 한성 과목은
벌레가
득실거렸다
많았죠 김형섭 증언에 의하면 나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칼의 무게가
아니라
발끝에서 목까지 온 몸에 기어오른
빈대의 물이었다 빈대는 몸이 온통
빨갛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피를
빨아먹었다
그러나 칼과 형틀에 묶여 있던 나는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가끔 나를
불쌍히 여긴 간수들이 빈대 무리를 내
몸에서 쓸어내 주었지만 빈대는 사라질
리
없었다 무관학교 출신인 내가 빈대들은
공격에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다만 죽기를 바 고
합니다 한마디로 이승만이 마주한 한성
감옥은 차라리 죽음을 바라게 되는
곳이었습니다 17개월 동안 나는
10kg 정도의 무게에 나무로 만든
형틀 칼을 목에 걸고 있었고 두 발은
족쇄에 묶이고 양손에는 수갑을 찬
상태로 앉아 있어야 했다 다른
죄수들은 여러 차례 몰래 들여 아침
신문에서 내가 밤 사이에 처형되었고
내 부친이 내 시신을 찾아가 묻기
위해 감옥 소로 왔다는 기사를 눈물로
읽어 주곤
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한 살인자가
나와 같은 나무칼 묶여 있었다 어느
날 아침 형무소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더니 간수와 사형집행인 그리고
순검이 간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모두들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사형
행인에게 인도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나무칼을 풀었을 때
그들은 살인자를 데려가고 나를 다시
묶어두었다 내가 다음 차례일 거야라고
내 자신에게 말했고 내가 빨리 죽어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고
바랬다 이승만의 마음은 가난할 때로
가해졌습니다 과 만민공동회를 통해
조정을 신랄히 비난하던 이승만은 이제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한성 감옥의 극한의 환경과
고통 속에서 언제일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이승만을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로
만들었습니다 어두운 감옥 속에
가두었을 때 나는 두려워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이 세상 있는 것이
아 조금만 있으면 다른 세상의 터인데
저 외국 사람들이 나에게 말해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상의
감옥에가 있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이 말하던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말 인 그 말이 나의
마음에 떠오르자마자 나는 나의 목에
걸려 있던 나무에 머리를 숙이고 오
하나님 나의 나라와 나의 영혼을
구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기도했다
이승만은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선교사들의 설교가 떠올랐고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며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런 기도를
한 이승만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졌습니다 이승만은 에비슨
선교사에게 영어 성경을
부탁했습니다 에비슨 선교사는 에디
선교사를 통해 신약 성경을 반입해
주었습니다
이승만은 성경을 받고 너무나 기뻤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성 감옥에서는 어떤
종교 서적이나 신조차도 허용되지 고
더구나 형틀에 묶긴 상태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죄수 중 하나가
간수가 오는지 망을 봐주고 한 사람은
책장을 넘겨주어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이승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여전히 그는 더럽고
벌레가 득실거리는 한성 감옥에
있었지만 이제 그의 마음은 더 이상
갇힌 자가 아닌
자유인이 아 예수님이 진짜 나의
구원자이며 내가 오늘 죽는다 해도
구원받을 수 있구나라는 확신과 함께
감옥 안으로 빛이 가득해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 를해 이승은이
나라의 구원자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첫 기도가
자신의 의지로 한 기도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고 나의 라를
구하여서
이도는 구원에서 끝나지 않고 구원의
목적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즉 자신의 구원은 조선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일은 자신의 의지와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백한 기도였다
것입니다 이승만이 한성 감옥을
출소하고 미국의 유학 중일 때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린 선교 대회에서의
연설은 그의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훌륭한 부처와 공자의
지혜를 추앙하던 이승만의 입에서 조선
사람들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자나 부처는 그것을 하지
못합니다 조선의 참다운 구원은 오직이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는 고백이 나오다니 정말
놀라운 변화죠 이런 것을 세계간의
변화라고 합니다 바로 기독교 세계간의
사람이 된
것이죠 한성 과목은 분명 비참한
곳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한성 감옥을
대한민국 건국의 인도자로 이승만을
훈련하기 위한 신병 훈련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이승만이 한성 감옥에 있는 동안 많은
선교사가 이승만의 추록 위해 노력하며
이승만을 보살펴 주었고 이승만은
선교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위로를
공급받았습니다 또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책들과 정보들을 통해 차근차근 지도자
양성 과정에 매진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한성 감옥에
투옥된 상황에서도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아마도
1899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비록 투옥된 상태이지만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학자의
마음으로 책을 읽었고 또 아직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에는 고통과
두려움을 덜어 보려고 책에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로 회심한 후
기독교 신앙서적 역사 법률 외교 시사
관련 신문과 잡지 문학 등의 순으로
비중을 두고 책을 읽어
나갔습니다 선교사들이 넣어준 기독교
교리서 책들은 물론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종교 서적들도 읽었다고
하네요 역사는 물론이고 국제정치와
외교의 관심이 깊었던 이승만은 국제법
책들까지 탐독했다 했는데 더 아울
6이라는 잡지는 이승만에게 당시
세계정세와 서양의 정치 경제 문학을
두루 섭렵하는 통로가 되었고 이승만이
국제적 안목을 높이고 세계 정세를
파악하는 통찰력의 사람이 되는데
일조했습니다 동시에 이승만은 중요한
책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번역한
책들은 청일전기 만국 사약 만국
공법과 기독교 교리서 주복 문답
감리교 역사 등입니다 또 영문법
번역하여 옥중 학당의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물론이 번역서
모두 순 한글로 번역되었고
이승만의 번역서에는 만국의 길로
걸어가는 조선의 개혁과 독립 국가로의
성장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또 직접 책을 집필하기도
했는데 한실을 지어 모아놓은 체집
한성 감옥 생활에 여러 일들을 기록한
감옥 잡기 한문 산수 산술 적주 체벽
그리고 그 유명한 독립 정신이지
이승만은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한성 감옥에서
지은 한시 중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제목
빈대 따뜻하면 기운 펴고 차면 오므려
천정으로 바닥으로 오르 내리네 하얀
벽을 돌고 돌아 롱을 찢고
마루틈새 몰리어 있네 모기와는 연이
멀어 혼인 안 되고 벼룩이나 이쯤은
곁방 살릴 세 내 집은 어쩌다 복
많이 받아 백 아들 천 손자 대를
있느냐 왜 그가 빈대는 실을 지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이승만은 사소한 상황들을 기록하고
고통을 유머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국 신문과 신학 월보에
꾸준히 기고하며 망해가는 조선을
깨우려
했습니다 특히 신학 월보에 기고한 두
가지 편벽된 교회 경력의 핵심 주제인
기독교 입국로 후일 대한민국 건국의
기본 정신이
되었죠 또한 이승만은 우리나라 최초로
영안 사전 편찬 을시작합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넣어 준 웹스터
영어 사전과 령 사전을 보며 단어
하나하나를 정리해야 하니 일본어
공부도 저절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전은 항에서
시작해서 항 중반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정신을
집필해야 했기
때문이죠 신흥우 이승만을 위해 빨간
물감을 몰래 반입시 주며 이승만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1900년 2월 한성감옥에 새
서장으로 부임한 김 영선은 이승만이
많은 책을 읽고 그을 집필하고
보호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오랜 벗
신흥 위의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감옥은 곡식 창고를
개조한 것이었는데 흙바닥에 돗자리를
깔았고 겨울엔 난로를 주지 않아 죄수
각자가 이불을 가져다
썼다 글을 쓸 수 있는 그 무엇이나
책은 일체 못 들여오게 되어 있었지만
간수들은 우리 일을 묵인해
주었다 우남은 이사전 가지고 있었고
아펜젤러와 벙커 씨는 잡지 뉴욕
아웃룩과 독립신문을 들여보내 주었다
죄수들은 일척 직경 되는 항아리를
가질 수 있었는데 이승만은 그
항아리를 눕혀 놓고 그 속에 몰래
들려온 양초를 켜놓고 공부를
하곤했다 간수들이 올 때는 항아리를
벽쪽으로려 놓으면 불이 보이지 않았다
이승만은 그러면서 영어를
공부했다 미국 잡지들이 그의 교과서
있다 그는 붉은 물감을 몰래 들여와
잉크를 만들어 낡은 잡지에 붓 글쓰기
연습도
하였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잡지에서
읽은 문장들을
외웠다 그는 사전에 있는 영어 단어를
모두 외우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절망의 상황에서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난 후 그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이 깨달은 바를 글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승만을 위해 곳곳에서 그를 도울
사람들을 보내셨고 그들은 이승만의
성장을 돕고
[박수]
했 조선의 개혁을 위해 투사처럼
달려가던
이승만 그가 한성 감옥에 투옥되는
매서운 그의 눈빛과 전투적 말들은
사라졌고 이제 그에게는 두려움과
절망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의 일생에
놀라운 변화를 맞이합니다 바로
기독교로
종입 한성 감옥은 절망의 장소가
아니라 이승만을 위한 신병 훈련소
대학 그리고
도서관이었고 이처럼 보이는 한성
감옥에 이승만을 몰아넣고 대한민국
건국의 인도자로 철저히 훈련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음악]
j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