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8강) 자유를 위해 싸우다(2) - 교육과 언론으로 동포를 깨우다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의 시작) #이승만과자유민주주의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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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0. 16.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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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수용 올림 -
대한민국 년 대사를 성경적 세계관으로
알리고 전하는 대한역사 문화원의
한국근현대사 바로알기 특강입니다
자유를 위해 싸우다 두 번째 이야기
교육과 언론을 통해 동포들을 계몽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대한의 미래를 준비한
이승만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2월 3일 아침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습니다이 박사는 한인 동포들이
마련해 준 푸이 스트리트
253번 지에 바로이 집에서 교육자
언론인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의 하와이 30년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하와이에 오자마자
이박사는 가장 먼저 한국교회 핍박을
집필했습니다 약 두 달 동안 고인
사건에 관련하여 이박사 자신이 목격한
것 미국 각 신문에 보도된 자료들
미국 각 교회에서 대표들을 파송하여
직접 보고된 내용들 그리고 각
교회들의 월간 잡지들과 미국의
선교회에서 발간한 글들을 바탕으로
고인 사건 진실과 를 정리하여
1913년 4월 한국 교회 핍박을
출간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 핍박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제 1장 한국교회 핍박에
일본이 그토록 숨기려 했던 일본의
한국교회 핍박의 실상이 세계에 알려져
일본이 곤란을 겪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제 2장 외교상의 관계에서는 일본이
국 국교회를 핍박하는 이유가 한국
교회 때문에 일본이 외교적으로
난처해졌다
강조합니다 그리고 제 3장 치상
관계에서는 한국 교회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번번이 방해가 되기 때문에
한국 교회를 핍박한다 여덟 가지 예를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
4장 한국기독교 청년회 YMC 에서는
기독교 청년 활동이 민족의 희망이라고
강조합니다 제 5장 선천 학교와
재판의 전말 선천 지역의 학교와
교회가 일제로부터 당한 잔혹한 핍박
그리고 고인 사건의 실체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 허위 날조 사건이라는
것을 당시 국제 사회에 보도된 내용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박사의 한국교회 핍박은
백호인 사건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일본의
만행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을 성토하는
목적이
아닙니다이 박사는 체계 서론에
한국교회 핍박을 집필하는 목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박사는 일본이 한국교회를 핍박한
것은 교회와 민족과의 깊은 관계
때문이었다고 서문을 시작합니다 당연히
관계가 깊죠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는데
있어 한국 교회가 사사건건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무릇 무엇인가를 소망하는
사람은 그 소망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일을 하고자 할 것이다 또한 일을
하고자 하는 자는 그 일의 실상을
알고자 할
것이다이는 거꾸로 이야기하면 일을
알아야 올바로 행할 수 있으며 올바로
행해야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알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결과도 얻어지지 못할 것이다 무릇이
글을 쓰는 것은 일본의 잘못함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한 바를 알리고자 함이다이 뜻을
알고 행하기를 힘쓰기를 바라며이 글이
더 나아가 우리 민족 전체에게 유익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박사는
한국인들이 일본의 부당함을 알리고
싶고 또 일본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소망한다면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일의
원인과 실체 그리고이 절박한 상황을
벗어날 바른 방법을 알고 제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이 박사는 일본의
만행이 곱씹으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우리의 살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우리의 처신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한국교회 핍박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겠다는
것입니다이 박사는 한국교회 존재
자체가 외교와 내치 두 가지 차원에서
일본에게 위협이 된다고 했습니다
외교상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이
박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이나 서양
선교사들 외국교회 방문객들은 실상
정치적 간섭을 하려거나 배일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한국의
교회가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한국의 정치 상황을 외국에 있으면서도
알게 되는 것이며 세계의 정의를
한국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일본은
이렇게 외교적 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한국 교회를 싫어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시작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선교부에 한국 교회 사정과
형편을 보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스파이 같은 첩보 활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선교 활동을 보고하고 그에 따른 기도
제목과 자신의 삶을 나누는 가운데
선교사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이
한반도의 실상도 함께 전달된 것이죠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서구 유럽의
나라들은 선교사들이 보내준 선교
보고에서 천왕을 신으로 숭배하는
일본에 대해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일본과 자신들이
신앙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일본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일본과 의 관계에도 영향이
미치겠죠 때문에 일본이 한국 교회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외교적
관계뿐만 아니라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
는데도 한국 교회가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라며 그 이유를 여덟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첫째 교회는 한인들이
자유로 집하는 곳이며 대체로 사람들이
함께 집하면 자연히 공론이 생기며
단되는 세력이 생긴다 당시 일본은
강압적인 통치 방법으로 한반도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4 5인 이상 모이는 단체를
결성할 때 반드시 조선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집회
자유를 억압받는 상황 속에서 주로
서양 선교사들이 연관된 교 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교회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공론이 일어나고 그 공로는 곧 모두를
결속시켜 큰 힘이 되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 교회를 핍박한 것입니다 둘째이
교회 안에는 활동력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조선은 스스로
서지 못하고 누군가의 의지해 왔다고
이박사는 말합니다 선은 명나라의
기대다가 명이 망하자 청나라에 그리고
러시아의 기대고 일본의 기대다가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이쯤되면 절망감에 빠져 있어야 하는데
한국 교회는 절망감에 빠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에게 기대려는
지난 날의 습관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일어서기 시작하고 소망을 품고 뭔가를
하려고 자꾸만 꿈틀거리며 일본을 긴장
그런 이로 일본은 한국교회를 핍박한
것입니다 셋째 교회는 합심하는 능력이
있다
이박사는 조선은 이제껏 하나되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이 전해지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이전에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고 남을
해치면서까지 자신이 살고자했던
든것을 회개하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섬기며 하나가
되는 놀라운 변화를 맞이했고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교회는 일본의 내치의
최대 걸림돌이 것이
분명합니다 넷째 교회를 통해 국민의
원기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 박사는이
항목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신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일반 백성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주색 잡기에
빠져 나아야 어찌되든 말든 하는
이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높은 도덕적 가르침은 사사건건
일본의 이익과 대치되었다
네 맞습니다 기독교는 나라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을 확고히 해 주기
때문에 거룩한 기독교인이 많아지면
책임감 있는 거룩한 국민이 많아지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
교회가 몹이 싫었을
것입니다 다섯째 교회는 청년 교육에
힘쓰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고 모든 학교가 일본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
주일학교와 교회가 세운 학교들은 한국
젊은이들을 깨울 교육을 멈추지
않았습니다이 박사는 만약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 아들딸들의 미래는
사라졌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런
교회의 역할 때문에 한국 교회가
일본에 대한 핍박 대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섯째 교회는 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 천왕을
따르지 않는다 일본의 속마음이 온
세상의 천왕 숭배했다는 것을
기억하시죠 때문에 한국 교회는 도저히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일본은 더 깊이 한국 교회를
증언했습니다 일곱째 선교사들의 도의적
영향력이 조선에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조선을 위해 헌신했고 자신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조선해 주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경천 애인
사상과 발달된 문명을 우리에게
가르치며 우리와 함께 살고 모든
환난과 질고를 우리와 함께하는 우리의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끊임없이
선교사들을
중상모략하고 조선에서 쫓아내려고 했던
것이죠 고인 사건 당시 음모 격려자
지목된 서북 지방 선교사들 일본에
의해 수도 없이 추방당한 선교사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혁명 사상의 풍조가 동양에
전파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의 모든 나라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대동화 공영을 내세우며
아시아 전체를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던
일본은 당연히 한국교회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박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앞으로 조선을 살릴 길은 지식과
실력을 쌓는 것이고
기독교다 이박사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라
를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확신의 찬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핍박은
한인 동포들에게 나라와 동포들이 처한
상황과 그 원인 그리고 대안을
알려주는 교본 같습니다 한국교회
핍박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그리고 일본에게 왜 우리가 독립을
해야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하는지 아주 똑똑히 가르쳐
줍니다 아마도 그 당시 동포들은이
책을 읽고 이승만 박사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곳에서
한국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지라고 외쳤을 것만
같습니다이 박사는 이렇게 한국교회
핍박을 시작으로 동포들을 깨우며
하와이 30년의 삶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19년 4월 한국교회 핍박
출판을 친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 여러
섬에 흩어져 사는 한인 동포들을
만나기 위해
1913년 5월부터 7월까지 약 두
달간 하와이 군도의 마우이섬 및
카우아이 섬을 대한인 국민의 하와이
지방 총회장 박상하와 대한인 국민의
총무 안경과 함께 방문하여 한인
동포들을 만나 한인 동포들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다음 해인
1914년에는 하와이 섬들을 여행하며
만난 동포들의 이야기를 하와이 섬
여행기라기 연재하기도 했죠 이승만
박사는이 여행에서 기독교인 동포들에
대한 현지인들의 평판을 들으며 자신이
한성 감옥에서 이야기한 거룩한 성도가
거룩한 국민이 된 그 예를 직접
목격하고
1914년 태평양 잡지 6월호에
하와이 한인들의 종교상 형편이라는
제목의 글에 다음과 같은 그 일라를
실었습니다이 박사가 한 사탕수수
농장의 주인과 나눈
대화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농장
주인에게 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은 다 기독교인이라
성실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농장주인은 그들이 기독교인인 줄은
몰랐는데 한국인들이 일하는 그 농장은
다른 어떤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일하는 농장보다 생산량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죠이 박사는
곧이어 좋은 교인은 좋은 일꾼이 되는
법이죠라고 말했고 농장 주인 역시 그
말에 동의
그러더니 농장주인은 그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한인
동포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예배
장소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길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아도 그 농장에서
일하던 한국인들의 성실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하입니다이 박사가 한성 감옥에서 말한
거룩한 성도가 거룩한 국민이 된다는
그 말이 바로 이런 것이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완전히 달라지죠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이 박사는 그래의
말미에 당시 한인들이 흩어져 살던
여러 지역을 거론하며 그들이 기독교를
근본 삼아서 모든 일의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성과를 내
말하며 한인들이 기독교를 근본으로
삼는다면 우리 민족의 미래에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복을 누릴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박사의이
고백은 실제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근연 대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와 조선 백성을 거룩한
성도로 만들었고 그들과 그 손은
거룩한 국민이 되어 의 대한민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와이 동포들의 삶을
구석구석 살핀 이박사는 언론 및 출판
교육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동포들을
깨워야 한다는 결론에 내리게 되었고
출판과 언론을 통해 동포들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하와이 한인 사회의
언론과 출판은 두 가지 매체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는 대한인
국민의 하와이 지방 총회가 발행하는
기간지 신한 국보 있고 다른 하나는
하와이 감리교회가 발행하는 포와 한인
교보 있습니다 그러나 1913년 여름
포화 한인 교보가 패관 있었고 그
소식을들은이 박사는 1913년 9월
태평양 잡지를 창간해 포화 한인
교보의 역할을 이어가며 하와이에 사는
한국 동포들을 비롯해 미주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을 깨우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태평양
잡지는 중간에 가끔 겨로가 있기는
했지만 꾸준히
발행되었습니다 그러다
1930년 12월 13일자로 20쪽
안팎의 주간지 태평양 주보로 그
형태를
바꾸었습니다 태평양 잡지 때나 태평
보일 때도 마찬가지로이 소식지는
하와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 흩어진
한인 동포들을 일깨우고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격려자 역할을 감당하며 대한의
독립에 기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승만 박사는 한성 감옥에서
썼던 독립정신과 청일 정기를
하와이에서
출간했습니다 독립 정신은 1910년
2월 로스엔젤레스에서 최초로
출간되었던 것을 1917년 3월
재판을 출간하였고 청일 정기는
1900년 한성 감옥에서 쓴 원고를
정리하여
1917년 7월 초판으로 출간하게 된
것입니다이 박사는 언론과 출판이라는
매체를 통해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고민하고 자신의
사명을 깨닫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이 대안의 독립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진
거룩한 국민이 되길 바라면서 글로
동포들을 깨운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언론 출판과 더불어 교육에 아주 많은
공을 들렸습니다 교육을 통해 인재를
길러내고 그 인재들이 나라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
때입니다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에 오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한인
기숙 학교의 교장직을 제한 받았기
때문이었죠이 학교의 공식 명칭은 한인
남학생 기숙 학교로 1906년부터 미
감리교회가 운영해 온
학교였습니다이 박사가 하와이에 온지
약 6개월이 지난 8월 26일
이박사는 한인 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한인동포 교육에
돌입합니다
이승만 박사는 한인 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학교 이름을 한인
중앙 학교로 바꾸고 학교의 체제도
남녀 공학으로
개편했습니다이 남녀 공학이 한국인이
다닌 학교 중 국내와 국외를 통틀어
최초의 남녀 공학이 있다는 사실
1년 후인
1914년에는 여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도
마련했죠 그러나 학교를 후원해 온
미감리회 여학생 기숙사 문제로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고 여학생을 가르칠 수
없다며 항의했습니다 애초에 학교
이름이 남학생 기숙 학교라는
이유였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1915년
6월
인중 교장을 사임하고 1915년
10월 교민들이 후원한 기금으로
외부의 지원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학교
한인 여원을 설립했고 초대 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박사는 꼼꼼히
영수증을 발행하며 교민들의 성금이
낭비되지 않게 했고 교민들 역시
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모든 과정에을
모 의 한인 여학원에 점점 더
학생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하와이의 신문들 한인
여원을 홍보해
주었죠이 박사는 학교의 로고까지 직접
제작하였고 하와이에서 열리는 국제
퍼레이드에도 참석하는 등 활동의
범위도 넓혀 나가며 점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한인 중앙 학원에 다니던
남학생들의 부모님들은 앞다 자신의
아들도 한인 여학원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죠 결국
1918년 1월이 되면서 한인
중앙학교 남학생들도 대거 전학을 와서
학교는 여학교에서 남녀 공학으로
개편되었고 남녀 공학이 된 한인
여학교는 1918년 9월 학교 이름을
한인 기독 학원으로 바꾸고 발 을
거듭하게 됩니다 불한 학생과 남학생들
기숙사까지 마련하자 당시의 학교
부지로는 너무 좁았습니다 그래서 마침
폐교된 하와이 현지 학교인 알리
올라니 학교를 빌려 한인 기독 학원에
새 교사로 사용되게
되었죠이 사진이 바로 알리 올라니
교사를 옮긴 한인기독학원
창기
모습입니다 사진 중앙에 아직 알리
온란이라는 하와이 학교 현판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보이시죠 현재 이곳은 현지 초등학교로
사용되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자신들의
역사에 한인 기독 학원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에 일부로 기념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버리고고 기억하지 않아 오늘 이렇게
역사가
엉망진창으로 왜곡되어 버렸는데
자신들의 역사도 아닌 한인 학교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그들의
모습에 부끄러움이 몰려옵니다
알리 올라니 학교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요 1919년
3월 1일 3일 운동 후 약 한 달
보름이 지난 4월 12일에 이곳 에서
대한의 독립운동을 경축하는 기념행사가
진행되기도
했죠 한인 기독 학원은 점점 성장했고
하와이 내에 한인 기독 학원에 대한
인지도와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한인 기독 학원은 후일
고국 방문단을 만들어 고국을 방문하고
하와이의 이민자를 파송한 인천 내릭
교회를 방문하기도 하죠 하와이 이민을
가 이런 날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학교는 더 성장했고 학생은
많아졌고 많아진 학생들을 감당하기에
학교는 너무
좁았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현재 하와이
칼리 초등학교가 위치한 바로 그
자리에 새 교사와 기숙사를 짓고
학교를 확장
이전했습니다 하와이에서는 이미 없어진
한인기독학원
기억하고 학교가 있던 그곳의 도로명을
쿨라 코레아 한국학교 길로 부르고
있습니다 한인 기독 학원은 이박사의
바람대로 대한의 독립가 대한민국
건국의 헌신한 인재들 그리고 미주
사회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인
인재들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하와이 정착 과정에서
감리교회와 갈등을 을 겪은 이박사는
독립된 한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들었고
1918년 12월 23일 한인 기독
교회라는 이름에 독립된 한인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1922년에는 한인 기독교회는 단독
건물로 건축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와이
한인 기독교회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이박사는 하와이에서
한국 교회가 독립할 수 있음을 실제로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또한 이승만 박사는
1913년 호놀룰루 YMCA 명예
이사가
되었습니다 하와이 한인 동포는 하와이
소수 민족 가운데 2% 넘지 못하는
상태였기에이 박사는 우리 동포들이
하와이 사회에서 동등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더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또 한인 YMC 지부도
만들어 한인 기독 청년의 활동도
활발하게
이어갔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은 더 먼 곳에
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육과 언론을
통해 먼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형편과 사정을 살펴 단체를
결성하고 교육과 출판에 힘써 지식과
실력을 배향하는 한편 영문을 배워
미국인과 소통하고 교회와 사회에 좋은
친구를 많이 얻어 세력을 넓히며
의로운 일을 힘써 행함으로 미국
정부와 여론의 동정을 얻은 다음 미일
개전의 기회를 기다려 을 도모하자
이박사의이 고백은 그의 교육과 언론
출판에 대한 열심의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음악]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