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유목민족의 전투, 명장 vs 명장 자오모도 전투 중국전쟁사 1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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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수 도포입니다 중국
전쟁사 대표적인 전투를 소개드리는
중국 전쟁사 시리즈 12부 있니다
여태 다른 중국 전투들을 보면 한쪽이
꼭 뻘짓을 하는 바람에 상대편이
대승을 거두는 양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명장대 명장 유능한 리더대 유능할
리더의 충돌은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이번엔 시대적 배경을 청나라로
가보겠습니다 12부 다룰 전투는
청나라 역대 황제들 중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강희제와 징기스칸
이후 몽골 최 대의 강적이었던 갈단
칸의 대결 바로 자오 모드 전투입니다
선수 소개부터 해보죠 먼저 청나라의
강희재 있니다 청나라는 3대 황제 때
만리장성으로 입건하여 기존 명나라의
수도였던 베이징을 청나라가 장악했지만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한 건 4대
황제 강희재 때였습니다 여덟살의
황제에 등극한 강희제는 16 살이란
어린 나이부터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청나라는 베이징으로부터 먼 중국
대륙의 남부 지방은 옛 명나라의 군
벌렸던 세 사람 삼개 상가이 경중명
번 왕에 임명한 후 그들에게 간접
통치를 맡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희제는 직접 지배를 원한다며 번왕
철폐하라 하다가 번왕들은 반발하여
3번의 난이 벌어집니다 강희제는
20대 후반에 젊은 나이에 3번의
난을 완전하게 진압합니다 강희제는
번을 완전히 해체하였다 6의 남부
지방까지 직접 지배하였고 청나라가
3번의 난을 진압하여 중국 남부
지방까지 진출한 뒤 1683년
대만까지 정벌 있습니다 대만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국 본토 왕조의 직할
영토로 편입된 것인데요 이제 청나라는
중국 전역을 지배할 뿐만이 아니라
이제껏 중국인들이 지배하지 못한
곳들까지 지배를 하는 겁니다 또이시기
17세기는 러시아가 시베리아 대륙을
개척하고 극동 아시아로 진출할
때였습니다 러시아는 최종 목표로
만주까지 나아가고 싶어했죠 강희제는
1683년 터
1687년지 흑룡강에서 그리고 더
북쪽으로 넘어 러시아 네르친스크 ES
러시아와 러시아에게 붙은 현지
부족들과 가 지난한 전투를
이어나갔습니다 강희재 때 청나라 군의
군사력과 무기 수준을 실로
막강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청나라가 러시아군은 격퇴했는데 그러나
러시아는 멈출 줄을 모르고 지원병과
추가 병력이 증원되었다라 입장에서는
의미없고 성과없는 승리만 이어나가는
느낌이었고
1686년 러시아 측의 제안으로
전투를 중단한 채 외교적으로 합의를
보기로 협성 1687년 청나라 군이
본국으로 철수하였고 그렇게 1689년
청나라와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지역을
체결하여 대응관련 산맥과 아르군 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짓고 양국이 서로의
국경 지대를 침범하지 아니하기로
합니다 네르친스크 조약 때 지은
국경선이 오늘날 흥룡 광선과 러시아
국경 지대이기 합니다 청나라가 가급적
러시아와의 싸움을 빠르게 중단하고
조약을 통해 상황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청나라가
견제했던 하나의 외부 세력이 더
있었는데이 세력과 러시아가 혹시
동맹을 맺지 않을까 우려했던 강희제가
러시아와 조약 체결을 강행했던 이유도
있었거든요이 외부 세력이 바로 이번
영상 강희재의 적수가 되는 갈단
[음악]
칸이었다 카은 몽골의 부족장이
있습니다 아 몽골족은 이미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 때 청나라에게
복귀되지 않았느냐고 맞습니다 하지만
워낙 많은 부족들로 구성되어 아시아
초원 지대에 넓게 분포하던 몽골 족들
부족 나름이었다 아이지 때 청나라에
복속된 몽골족은 동몽골 계열이었던
서몽골 계열은 여전히 청나라의
적대적이었던 서몽골 계열의 몽골족을
오이라트 아고 하는데 오이라트네 개의
부족 두르트 초르수 호쇼트 톨고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중 드루벨트
파생한 준가르 나머지 부족들을
정복하며 오이라트 통일했습니다이
중가르 이겼던 부족장이 바로 갈단
이었죠 중가리 예전에 평범한
유목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중가도길 소는 유목민족이 아니라 총을
다를 줄 알고 대포도 사용하는 화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유목민족들이 있죠
중가의 가다는 비 오이라트 통일할뿐
아니라 카자스탄 신장 위그로 제치고
티베트가 영향력을 팽창하였다 칼 때는
유목 제국을 건설하여 갈단 칸이
되었습니다이 중가르 제국은 인류사
최후의 유목 제국이었던 갈단 칸은
티베트 달라이라마 5세의 제자이기도
하여 티베트로 터 종교적 후원도 받고
있었고 갈단 카는 더욱 중가의 세로를
팽창하면서 청나라에 편입되어 있던 동
몽골의 몽골 족들을 압박하고 통합시켜
나갔습니다 이러다가 몽골 초원 전체를
뺏기게 생긴 강의자는 는 중가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전쟁을 선포합니다
1690년 울랑 부통 전투라고 오늘날
내몽골의 츠펑 신 울랑 부통 초원에서
청나라와 중가르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는데 승패는 무승부라고 해야
할만큼 양측 모두 피해가 극심했다고
합니다 이대로 안 되겠다 싶었던
강희제는 직접 전쟁에
[음악]
나섭니다 1696년 강희제는 작정을
하고 중가로 친정을 떠났습니다 두
싸움은 막상 마카나 중가로 갈단
그래의 조카가 갈단 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이 쯤을 타 강희재의 맹공에
갈단 그래이 패배를 해버렸습니다
청나라 군이 돌아간데 갈단 칸은 내부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청나라를 공격해
옵니다 1차 친정이 있던 같은 해
강희제는 다시 2차 친정에 나섰습니다
당시 갈탄 칸의 근거지는 오늘날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 있습니다
강희제는 부대를 세 개로 나누어
자신이 직접 이끄는 3만 명의 본대는
울란바트로 집공 있고 약 5만에
이르는 나머지 두 부대는 9,000
명은 울란바트르 동쪽에 4만 명은
울란바토르 서쪽에 대기하여 울란바토르
포위과 동시에 테로를 차단했습니다
강희제는 이번 전쟁에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에게 승부수를 던질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으니 바로
신식 화포 있습니다 물론 준가르 측도
화기를 보유하고 화기로 싸우긴 했지만
양적인 측면에서나 질적인 측면에서
청나라의 화기가 훨씬 앞섰습니다
청나라의 화포는 오스만과 인도를 통해
들여온 서양식 화포 있기 때문이죠
중간의 화포 러시아로부터 수용한 화포
있지만 질적 차이에서 청나라의 서양
식 신식 화보에는 상대도 안 됐습니다
하지만 무기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갈단
칸의 중간에는 계속 전하였고 결국
강희재의 청나라군 보급 부족에
시달립니다 청나라 군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여력조차 안 될 정도로
보급에 딸리기 시작할 때 먼저 피가
말린 쪽은 중가의 갈단 kh이었습니다
갈단 그은 울란바토르를 어떻게든 나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회복한 뒤 다시
청나라와 싸울 생각이었죠 그렇게 갈가
중가의 병사들을 데리고 울란바트로
나와 서쪽으로 도주하던 찰라 강희제는
두 의 부대를 울란바트로 서쪽과
동쪽에서 포위하고 테러를 차단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렸죠 갈단 칸이
도주한다 men 서쪽으로 도주할 것이
당연하기에 강희제는 울란바트로 서쪽에
더 많은 병력을 대기 시어 놓고
있었고 서쪽에 기다리고 있던 청나라
군은 기명 2기로 중가르 군을 자오
모도로 유인했습니다 자오 모도는 분지
지역이라 매복 포위의 최적화된
지역이었습니다 청나라
서로군정서 화포를 퍼붓는 전술로 중
중가르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중가르
고는 속수 무직을 당해 전력을
대부분을 상실하고 살아남을 병사들은
그대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고는 소 2만 마리 양 4만 마리를
노력했죠 청나라 군의 대승리 있습니다
다만 갈탄가격 joh 아는데 성공
알타이 산맥 쪽으로 도주합니다 청나라
군도 보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더라
강해지는 일단은 전쟁을 중단하고
철수합니다 그 사이 도주한 갈단 그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갈단 카는
좌절감에 은독 좌선을 합니다 갈단 는
사망 소식을 몰랐던 강의자는 3차
친정을 떠났으나 갈단 사망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회군하여 그래에 이어
준 가래를 이끌게 된 갈단 칸의
조카는 청나라와 싸울 생각이 없었고
강희제가 갈단 칸의 시체를 보내라던
요구에 갈단 조카는 갈단 칸의 시체를
베이징에 보냈고 강희제는 갈단 칸의
유고를 빠은 뒤 여기저기 흩뿌려
버렸습니다 자오 모도 전투는 전통적인
중국 왕자들과 유목민족의 싸움 양상이
아니었습니다 전통적인 싸움에서는 항상
중국 왕조들이 유목 민족들을 상대하지
못했죠 설령 한 쪽의 중국 왕조가
아닌 유목민족들이 건국한 정복
왕조라고 해도 한화대 순간 초원지대의
유목 민족들을 상대로 항상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기병대가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냉병기 시대였기
때문이었죠 냉병기 시대는 기병 위주의
유목민족이 농경 민족들에게 공포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젠 인류사가
화기를 주역으로 하는 전쟁으로 바뀌면
기병 위주의 유목민족들의 전술이 더
이상 먹히지 않고 화기에 의존하는
농경민족의 전투력이 유목민족의
전투력을 능가하게 되고 유목 민족들은
시대에 도태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죠
자원모드 전투는 대규모 활약
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중국사에서
자원모드 전투는 본격적으로 화기가
냉병기를 압도하는 정주 생활을 하는
농경 민족이 유목민족을 압도하는
계기가 되는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만주족은 유목민족이 아아
중가로 원정 후 강희제는 화기가
만주족의 정체성이 아니라며 만주족의
정체성은 기병이 아고 화기 개발을
중단합니다 끝내 강의 제사 후 서서히
청나라의 활약은 약해졌고 약 100년
후 앞편 전쟁을 통해 그 비극적
결말을 맞이해야만 했죠 그럼 역서
돋보기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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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리겠습니다 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