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그리고 음악” 저자 이종구 한양대음대 명예교수 문화사 강좌 | 20강 | 역사를 잃으면, 내 이름은 개자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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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양대학교 학대학 명예교수
이종구
있니다 오늘은 우리 국사에 대한
선인들의 뜨거운 고심과 이와는 다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 역사의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른바
강단 사학과 민족 사학이 아는
우리나라 역사의 양대 산맥이 갈라지는
과정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민족 사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만이 용어에는 자칫 내로
남불 식의 국수주 냄새가 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의 용어로
아와 비하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민족
사학이 된다면이 용어를 굳이 피해야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제야 사악이란 용어는
주류 사학에 대비되는 말이기에 문헌과
하지 않은 구전 정도의 사료로서
역사를 바라본다 하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이 두 용어 모두
일제 강정기 거친 우리나라의 독특한
환경에서는 의미하는 바가 전혀
다릅니다 즉 주류 사학이 일제 식민
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민족 사학은 일제 강정기
이전에 역사를 바탕으로
두고 그 위에 과학적 근거를 더한
사과입니다
그러니까 의미하는 바가 전혀
다르죠 말하자면은 역사의 진실을 놓고
주객이 전도된 형편입니다
지금부터 그간 일제 상황에서 이런
과정이 만들어진 는 그 사연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인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하루
아침에 나라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한 달 후인 10월
1일에는 조선의 번 군인이 와서
총독으로 군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11월에는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교과서를 모두
불법화하고 일본의 식민정책에 맞는
내용의 교과서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다음해인 1911년 8월
24일 조선 교육령
선포였습니다이
법령은이 법령의 목적은 조선인을
교육해서 일본의 충성을 다하는 순한
식민지로 만들자 하는
것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어가 조선의 국어가
되고 일본사를 국사 하면서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인은 나라를
빼앗긴 다다가 나란 말과 역사까지
모두 빼앗기게 된
것이죠 1919년 삼일운동이 있었던
다음부터는 조선에 대해서 문화 정책을
쓰겠다 하는 명목으로 조선의 정신을
일본화
하려했습니다 그래서 1920년부터
조선의 초등학교
과목에 일본사를 국사는 이름으로
가르키면서 옛날부터 조선의 남부에
인나가 있었고 임나 일본 부라는 것을
두어서 일본의 식민지로 삼았다는
교육을
시작했어요 그러나 이설은
1995년에 임나일본 부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하는 사실을 일본인
스스로 밝혀서 그것이 거짓 말이었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동경에서
출판된 박승미 아는 역사학자가 쓴
임나일본 분은
없었다 바로이
책입니다이 책이 발간되고 합니다이
박승미 아는 작가는 어떤 우리나라
성씨의 박씨처럼 알기 쉬우나 머무를
박자를 쓰는 그니까 박이라고 쓸때
쓰는 그 박자를 쓰는 일본
학자로서 고대 구주의
신라문화 고대 구주와 조선 등의 책을
쓴 한일 관계사를 주로 다르는
학자였습니다 다시
1922년 이야기를
바꾸겠습니다 이해에 총독부 산하의
조선사 편수 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하고 식민정책에 맞는 조선사를
엮어내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위원장에는 덕부 정무 총이었고
위원으로는 동경대 경도대 경성대 등
제국대학의 일본 사학과
교수들이 실무진은
총독부의 조선 조선사람 매국노들이
단체였던 중원이
중심이었고 약간의 조선인도
구성되었습니다
고문으로는이 박영 국의원
드렸었죠 이들이 모은 자료로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사로 꾸몄으며 모두
34 권으로 이루어져서 출판을
했습니다 그 분량은 총
24409 쪽에 이르는 아주 방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모두 한문으로
된 옛
그렸는데 그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따질 것도 없이 씨 조선의 식민정책을
수행하는데 이용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만 따라서 수집한 글
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내용을
일본으로 간추려 알게 쉬운 조선사
해서 널리
보급했습니다 바로이
책이에요 조선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작은
반도이므로 독립하기 어려운 지리적
조건을
가졌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조선 반도의
북부는 중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일부
남부의
임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서 일본은
그곳에 일본 불라는 기관을 두고
통치했다 단군에 관한 기록은 신화에
지나지 않고 기자는 조선 반도에
오지도 않았다 그러니 조선의 역사는
중국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왕검성을
빼앗고 조선 왕의 된 데서부터
시작했다 검성은 평양에 있었다 때는
기원전 194년 일이었다 그러므로
천조 대신의 후손이 기원전 660년에
세운 일본의 역사보다 조선의 역사는
수백년 늦
시작되었다
위만조선은 기원전
10년에
중국의 한무제에
정복 진번 임둔 낭랑 현도 등의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남고는 지금의 평양에
있었는데 기원전 37년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중국의 삼국시대 때 지금의
한강 2부까지 중국인에게 복서
대군이라
하였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북에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가 침입해
오고 남쪽에서는 일본의 외국가
상륙해서 그치지 않고 전란에
시달렸다 조선인은 자립 자취할 능력이
없다 양반 계급은 대대로 당쟁을
계속하였고 매관 매직해서 사리를
탐내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한임 매친
세월을 살며 연속 반란을
일으켰다 조선 말기는 서양 열강들이
동시에 내침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는데 양반 계급의 관리들은 백성의
고열만 빨아먹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홍경 내란과 동학란
등을 일으켰다 그러자 조선의 조정은
사대주의로 섬겨 오던 청나라의 군대를
불러왔고 일본군이 와서 청나라를
찌르고 조선백성을
구해줬다 나라를 지켜갈 힘이 없었던
조선왕은 일본의 합방해 주기를 청함
일본 천왕은 합방해 주는 은혜를
베풀었다 그래서 조선은 천왕의
신으로
이런
내용입니다 이것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에서 태어난 것을 수치로 생각하고
일본인 행세를 하고 싶어 하도록
계획된
거짓이었습니다 1937년 10월
1일에는 황국 신민의
맹서는 구호를
발표해서 조선의 모든 학교 직장
집회에서 날마다 그것을
했고 천왕의 은혜에 보답하겠다 다짐도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
일본 천왕의 신화적 선조라는 천조
대신을 모신 신군과 신사를
짓고 그것에
시키고 아침마다 바다건너 일본 천왕의
사는 궁성을 향해서 요배 하게
했습니다
1939년 10월 1일은 이른바 국민
용제를
선포해서 조선인을 강제로 끌어다가
혹사시켰던
징용에 끌려간 우리 동포의 수는 다른
지역을 제외하고 일본에 끌려간 사람만
해도 모두 112만 8천 여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또 1940년 2월 일제는
모든 조선인에게 창시 개명하라 하고
강제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조상까지 팔아야 할
아주 급박하고 위험한 처지에 있을 때
내가 성을 겠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제 조선인들은 모두 성을
갈 때가 된
것입니다 여기이 사진은 그때의 낙서로
내 이름은 있니다고
썼습니다 이런
정책에 반발할 수도 없고 안하기는
분했던 조선인들은 역으로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었다
것입니다이 정책이 나오자 조선
사람들은 어쩔 수가 없어서 개자식이
된 단군의 손자라는 뜻으로 견자
웅선이라 하기도
했고 개 같은 놈 똥이나 먹자 하는
식으로 견분 식이라는 이름도 지어서
은근히 반발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어로 천왕
폐하라는 말과 비슷한 발음을 가진
전농 병화 즉 덴노 카라 하기도
됐죠 그리고 1941년부터 초등학교
학생 이상의 모든 조선 사람에게
일본어만을 쓰게 하고 감했습니다
1943년 8월에는 징병제를 실해서
일본을 위해서 전쟁 나가게 하고 에
지난 사람은 징용으로
끌어갔다 앞서 1931년 만주 철도를
수비하고 있었던 원군은 그 철도를
폭파하고 중국군의 소양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을 일으켜 만주를
공략하고 다음에 3월에 만주 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중화민국 혁명으로
퇴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만주
주국의 괴의 황제로 앉혀 식민지화
하였습니다 조선을 공략했던과 거의
똑같은 수단을 사용한
것이죠 그리고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켜서 중국인을 대장 학살하고
1941년 12월에는 중국을 원조하는
미국의 진주만을 급습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드디어
1945년 8월에 원자탄이 일본에
투하되고 그달 15일 일본 천왕은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라디오 방송을
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모든 지역과께 조선은 해방이
되어서 35년간에 일제시대는
종말을지었습니다 조선의
백성들은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
삼천리 이강산에 먼동이 튼다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러나 일로는 조선인에게 완전한
광복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전쟁에 진
것이 분명한데도 조선의 독립을
선포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했기 때문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주어요
주둔군은 조선군의 자유의사에 따라서
남북의 단일 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을
돕겠다 하는 국제적 약속이 있었으나이
약속은 소련의 반대로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1948년 8월 15일에 이남에는
유근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월 9일에는 평양의 공산 정권이
들어서게
됐죠 다음에 10월 1일
북경에는 중국 정부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엔 196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서
우리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 교와 대한민국을 도와
압록강까지 점령했으나
10월 25일 중공군이 개입해서
오늘날의 휴전선이 성립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또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중공이 만주 지역을
역사상 처음 점령한
사실입니다 이로써 유사의 처음으로 우
우리 민족의 땅을었던 만주 전역을
중국이 점령해
버립니다 당 우리 민족의
머릿속에는 만주는 우리 땅이다 하는
기억을 사실상 이때부터 서서히 지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국당을
그리자면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전 왕조였던
조선이라는 국가의 영토였지만
그때의 우리 민족이라는 개념은
달랐습니다 53년 이전에 우리
민족이라 개념에는 분명히 만주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군들이 만주에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도 오늘에이어서
해방 이후 민족의 변천사와 우리나라의
국경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이종구 있습니다
[음악]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