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그리고 음악” 저자 이종구 한양대음대 명예교수 문화사 강좌 22강 | 국사찾기협의회의 국회 국사 청문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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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양대학교 학대학 명예교수
이종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1973년부터 국사 찾기 협의에 박시
교수님이 조교를
했었습니다 그때 가장 주된 일은 당시
추진 중이었던 국사 교과서 시정
권이었습니다 그때는 모두 국정
교과서나 문교부 민정 를 사용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국사 교과서도 역시
국가에서
발했습니다 문교부에 제출한이 권서은
자연 국사 천 위원회에게
넘어갔는데 국사편
위원회에서는 기존
통설과 많은 차이가 있다 해서 아주
일축해
버렸습니다 기존 통이란 다름 아닌
일제때 조선사 편수가 발행한 조선사에
입각한 국사를 라는
것이겠죠 이렇게
국사편찬위원회가 국사 교과서 시종
건의서를 한가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리자 국사 찾기의
회원들은이어서 문교부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습니다이 재판은 2년을 끌게
됐는데 그 사이에 교과서 위원들과
문교부 당국자들은 수시로 법원에 출도
하고 답변서도 제출하는 등 가지
이상하지 못했던 행정적인 일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당시 한 신문에 투고한
문교부 당국자의 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제목은 다양성 떠난 소수
조자의 독단 우려라는 그런
제목이었습니다 기왕 국민정 교과서에
틀린 내용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기왕의
국민정 교과서에 틀린 내용이 있었던
것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자가 책임질 일로 수정될 가능성과
융통성도
있었다 그러나 교과서에 있어서 오류의
책임과 수정의 의무가 국가에 귀속된다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나는 국사가
획일적으로 되는 것에
반대한다 적이란 역사에서 있을 수가
없다
역사연구는 중요성은 사건의 단순한
기술보다 올바른 이해와 해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이 기사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교과서의 오류를 인정한다는 것이며 그
책임은 집필진에 있지 문교부에 있지
않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을 발행한
부서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작가가 책임을 제한다면
작가의 이름으로 책을 냈어야지 왜
문교부의 이름으로 냈을 까는 문제부터
생깁니다 또 수정될 가능성과 융통성이
컸다고
했는데 이미 교과서는 인쇄돼 전국에서
가리키고 있는 상황에 어찌 그 내용이
수정 가능하단
말입니까 그리고 국가가 주도하는 학력
고사나 국가 고사 같은 시험의
문항에서
어찌러 종류의을 정한 예를 찾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죠 언제나 하나의
답을 요구하는 단답형
문제일뿐입니다 더 큰
문제는이 기사의 불평의 대상이 소수
저자 즉 집필진을 말하고 있는
것이였어요 그러니 교과서 편찬
위원들은 많이 불편했죠 문교부가
당연히 자기들 입장에 서서 보호해 줄
것으로 믿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국사 편의 사람들은
고대사를 기피하거나 심지어는 이직하는
사람들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이 사건으로 인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일도 있었어요
그간 관심이 없었던 우리 고대 세에
대해서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기회를
만들 만들었던
것입니다 학문적 시비를 법원에서 만
것은 옳지 않다라는 내용으로
고등법원은이 사건을
기각하면서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러자 국사 찾기
협회에는 1981년 이른바 국사
청문회라고 피치못할 사연으로이 청문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만 기록에 의하면 국사 찾기
협회는 회장 안우상 박사를 청자로
하고
권정달 당시 민정당 의원을 소개
위원으로 하는 청원서를 국회 문공
위원에
제출했습니다 여기에는 초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구체적으로 일곱 가지
사항을 시정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정책 문제가 아닌 학문적
내용을 전공자가 아닌 국회의원들이
일반 국민의 여론을 듣고 교과서에
등제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은 하나의
우승 거리다 하는 그런 의견도
있었습니다 국사 해배 대표로는 안우상
박사 임승국 선생 그리고 저희
스승에었던 서울대학교 박시 교수님 등
세
명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국정교과서
집필진은 최영희 김철준 이용범 전해종
이기백 이원순 안승주 등
분이었습니다 교과서 집필진은 처음
국사 찾기 협회 측의 인사가 사학자가
아니다 하는 수집을 잡아서 교계 맞지
않는다 하고 거부의사를 보였습니다
이분들이 주장한 사학자 일제 시대 때
역사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이다 하는 그런
뜻이겠죠 그러나 국회 청문 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토론한 내용
중에는 우선 고조선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국사 찾기 협의 측은
단군왕검이 신화가 아닌 역사로
교과서에 기재할 것을 요구했지 또한
그 강역이 지금의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 요동 요소 및 중국의 만리장성
부까지 포함 한다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조선사 편수가
고조선의 강역을 암록 두만강 이남으로
제안해서 만 들던 역사와는 전혀
반대해
었죠 그들의 원전이 된 조선 반도사
제
1편에 조선이란 허무맹랑한
신화일뿐 조선의 기원은 후이
안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이만은 중국의 한나라 통치 아래
있었던 것으로 왜곡했던
것입니다 고조선의 영토도 한반도
안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만주 요동
요소 내몽골 지방은 의도적으로
제외했습니다 과거 일제는 이렇게
조선의 역사를 축소시켜야 통치하기
편하다고 생각했으며 무엇보다도
조선인의 희망과 기백을 좌절하게 하는
좋은 소재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식민 사건의 이론을 국정 교과서
필지는 해방 후에도 여전히 고집했고
이런 분위기는 1980년대까지
이어져서 고조선은 역사가 아닌 원시
시대이며 믿을 수 없는 신화라는 식의
논리가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있었는데 국사 찾기 협회는 이런
내용을 시정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국사 찾기 협의의
주장에 국정 교과서 필지는 역사는
주의라고 말하면서 우가 손이냐 하고
따져 물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국사 찾기 협의에서
나온 박시인 교수님은 역사에서
상징성을 우선 말하고 곰의 토템과
호의 토템이 흔적이 아주 완연한
지금이를 역사로 보는 것이야말로
실증주의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이런 상징성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까지도
온세계가 전부 다 초기 의 역사에는
신화로 시작한다는 답도 또한
말씀드렸습니다이 국사
청문회에서 국사 찾기 협회가 주장한
두 번째
요구는 일제가 조작한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서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삭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 사기에도 한 사건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과의 전쟁에서 한 나라가
패했다는 기록만
있을뿐입니다 또 있습니다 중국의 한
나라는 기원전 8년에
망했죠 그런데 식민지라는 한사군이
기원전
313년지 421 간이나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것은 너무나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종주국이 망해서
없어졌는데
식민지만행 역사 활동을 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이런 것이었어요
당연히이를 교과서에서 삭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세계
지도에는 이런 한 나라 지도가 버젓이
버티고
있습니다 저 보세요 여기
한국이
충청도
경상도이 부분만 약간 남아 있지
전부다 다 한나라 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이렇게 의 역사를
왜곡하면서 평양 1대에서 나온 낭랑
국의 유물과 일제가 조작한 유물을
놓고 실증주의 역사다 주장을 했습니다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요 한국은 역사적으로 대륙과
일본의 사이에 어서 언제나 식민지
었다는 식민사관의 대원칙에 맞추기
위한 억지
있습니다 이런 요구의 국사
편찬위원회는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건
상식이며 그 예로 북한의 낙락 유무를
말하면서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국사 찾기 협의의
측은 많은 문헌을 제시해 가면서 낭랑
군과 낙랑국의 차이를 설명해
가면서 과거 낙남 2은 그 어원이
나라라는 것으로
출발한 우리 민족에 독립된
국가었다 한사군이 말하는 낭랑 군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라는 것을
강변했습니다 셋째로 국사 찾기
협회는 백제의 대륙 지배를 교과서에
재하자
요구였습니다 초기
백제는 요하 서쪽에서 개국을 해서
말갈족 쫓 쫓겨 가지고 온조왕
14년에 지금의 한반도 한남 위성으로
천
나라였습니다 그러기에 백과 제라는
말이 생겼고이를 줄여서 제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제기에 그 옛날
자신들이 조상이 가지고 있었던 그
땅에 대한 미련이
많아서 여러 차례 초기에요 지방을
공격했지만 여의치 타가 고이왕
이들어서 그 땅을
찾습니다 백제는 여기에다가 요소
진평을고 군이라 하며
다스렸습니다 또 490년 경 백제가
북의 기병을 격파한 뒤 광향 성향 등
일곱개의 군을 지배한 사실도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는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식민지 활동을 벌려서 4세기 이후
양자강 양쪽 지방을 다스린 바도
있었어요이 국기 협의
주장에
필지는 중국 역사에 이런 그 자리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국사 찾기 협의 측은
중국의
동서진입도로 면 백제의 대륙이
타당하고이는 중국 사서에 분명히
기재되는 사람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국사 기업의 측은 많은
사례와 함께 당시의 중국사를 설명하고
중화사상으로 일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하면서 그들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어쨌든이 청문회는 2박 3일간 난상
토론으로 끝났지만 결국 민족 나
강단사학계 어느쪽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이 청문의 이후 국사
교과에서 단군을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했고 한사군의 위치도 평양 1
때서 사라지게
됐으며 국사
교재에서 백제의 대륙 진출이라는
사실을 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한때 세상을 떠들
었던 국사 찾기 협의의 국사 청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이 청문회
이후의 영향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한양대학교 학대학
명예교수 이정구 있습니다
[음악]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