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유. 엠. 부찐. 20편 | 제3장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의 초기 철기시대 | 제1절 초기 청동기시대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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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견해에 따르면 가장 먼저의 것은
아이고 그다음이
아로 아비는 연대상 두 개의 형
ib1 IB 2로
나뉘어진다 그는 극동에서 석관묘
출현을 시베리아의 유사한 묘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그는 그러한 묘들을 청동기
시대에 가장 중요한 유적들 중에
하나라고 간증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국의 청동기 문화는 중국
문화권과 대립되는 북방 시베리아
청동기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
발전했다 석관묘 통하여 그러한 일면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판석을 사용하여 관을 축조하는
방법 는 안드로 노포의 주민은
문화에서부터
비롯되지만 안드로 노포의 주민은
미누신스크 이동 지역으로 거의 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카라수 크기에 이르면
양상이 일변하여 안드로 노포의 주민을
우랄 서편으로 쫓아내고 카라스의
주민은 그 영향력을 오르도스 천산산맥
지방에까지 파급시차
연대를 추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한반도에서 이들의 확장 시기를
카라수크 시대로 정하고 그것에 의해서
다음의 사실 즉 한지역에서 속관 묘가
출연한 것은 기원전
1천년 2000년대의 경계였다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삼상 차남이 추정한
연대는 5세기에서
7세기의 가
있다
황기은 한반도 북서 쪽의 지석묘
석관묘 대해 신빙할 만한 연대 추정을
하고 있다 부장된 도구와 학을 근거로
해 그는 다음의 결론으로
이끌어간다 즉 그의 견해에 의하면
석관묘 촌의 남방식 성묘는 그 연대가
가 기원전 2천년대 말에서 기원전
1000년대 초로 추정되는 팽이
모양의 토기가 있는 주거지와 같은
시대에
나타났다 더욱더 이전 연대 기원전
2000년대의 석관 묘는 북한
고고학자의 공동 집필의 개설서 속에
나타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연대는 근거가 전혀
없다 북한의 연구자들은 청동기 시대에
다른 종족이 북쪽에서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것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하고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고유하게 발생했음을
주장한다 이와 같이 모든 연구자들은
성묘와
석관묘 청기 시대의 어느 한 기간에
속했으며 하지만 지성은 다소 일찍
출연했다는 사실에 모두
동의한다 거속 축조의 연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옴에 따라
낮아지나 이러한 축조의 변종이 많다는
사실은 그들이 오랫동안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연대 추정은 원칙적으로 분포권
내와 그 경계 밖의 유적들에 대한
학적 분석과 비교 대조로
이루어졌다 정확한 방법에 의한 절대
년대는 거의 이끌어낼 수
없다 최근 한국의 고고학자들이 얻은
방사선 탄소 연대는 삼남이 세운
연대의 본질적 수정을 초래하고 있으며
이것은 새로운 편년 기준을 만드는데
있어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경기도 파주군 옥성리 남방식
지석묘의 절대 년대는
2590 플러스 마이너스
105년이며 충청북도 제원군 황석리
있는 같은 모양을 한 지석묘의 절대
년대 는
260년 플러스 마이너스
370년 특히이 지성들의 연대는
기원전 7세기에서
5세기이다 그러나 한국의 고고학자
김정배가 정확하게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연대는 요동과 북부에서 더욱
고전적인 형태를 갖는 지석의 출현에
상응할 수
없다 잘 알려진 지석묘 속에 철기가
없다는 사실은 지석묘가 소멸하는
시기가 철기 시대의 돌의 전이라고
규정할 근거가
된다 만일 이러한 상황과
북방식 남방식 지석묘의 시대가
4세기에서
세기라 상남의 를 고려해본다면 요동
한반도 북부에서 지석묘 문화의
전성기는 기원전 7세기에서 5세기가
된다 김정배 이에 근거를 두면서 그의
견해로는 그 연대가 늦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기원전 8세기에
남만주 한반도에 거석 문화가
출연했다는 결론을 매우 타당성 있게
도출하고 있다 그는 거석문화 출연과
청동기 시대의 시작을 예매 쪽 그리고
기자 조선의 형성과 관련을
짓는다 이상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연구 대상 지역에서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가 발생한 것은 대략 기원전
2천년대 중엽이 된다는 것이다 북부에
기원전 1천년 후반에 지성 사회가
존재했으며 만주
동쪽에서는이 사회로부터 고구려인들의
국가가 발생했고 그 서쪽에서는 지성
사회에서부터 발전한 부족국가가
한무제에 복속되었다
삼상 찬남 견해는 거의 신성이 없다
청화의
시작된 결국 연구가 가능한 영역
내에서의 고조선의 역사는 초기 철기
시대와 관련이 있다 비교적 최근까지
고고학계에서
지배적이었던 철기 시대가 한국 사회에
선사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이로는 지금에 와서는 상상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금의 부건의 회현에서 발굴된
총은 그러한 추정을 낮게 하는 근거가
된다 이것을 발굴한 일본의 고고학자
매원 말치 빈전 경작은 총 속에서
석제 철제 용구도 발굴해
냈다 이러한 발굴에 대한 공개
보고에서 그들은 한국에서의 새로운
시대 석기와 철기 시대의 발견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사실상 여러 지역 가운데의 어떤
지역에서는이 유적의 층위가 파괴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층이 혼합돼
있다 기원전 1세기에 중국 화폐도
여기에
있었는데이 화폐는 모든 활동영역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근거가 된다 이러한
견해는 오랫동 게
사용됐으며
상남은 거의 40년 동안이나 석금
독기 혹은 금석 병용기 용어를 사용할
정도였다 이러한 견해가 한국의
고고학자들에게
지배적이었으나 한국의 고고학자들은
해방 후 우선 남만주 한반도의 고고학
연구에
참여했다 초기 논문들에서는 한반도에서
청동기 시대는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철기 시대가 신석기 시대를
즉시 대체하게 되며 비록 청동기
시대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북서
쪽에 한정될 뿐이라는 견해가
나왔다 즉 청동제 철제 용구의 출연
자체는 중국의 영향에 켰
그러나 한국에서
철기문화의 독자적인 발생에 대한
가설도
나타났다 주목할 것은 그러한 견해들이
1957년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2년 후에는 도호가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존재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그 시대의 설정을
기원전 7세기에서 3세기를
규정했다 그 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도유호 다시 한국에서의 철기의 출연
위원들을 기원전 7세라 그
주장했다 이렇게 급속한 견해의 변화는
도유호뿐만 아니라 다른 북한
고고학자에게 나타나고 있다
유명한 청동기 시대 전문가 중에 한
사람인 북한의 황 기덕
1961년 한국 청동기 시대의 범위는
기원전 2천년대 후반 1000년대
전반으로 추정된다는 견해를
내놨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에
환기덕트
현재 북한의 학자들은 한국의 청동기
문화 출연을 기원전 3천년
2000년대의 경계라고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청동기의 출연
위원들을 그보다 늦은 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조선의 소재가 요동에 있었다는
서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이
분포권이 고조선의 발생지로
간주된다 초기 청동기 시대의 중요한
유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쌍사자
다층 유적 화동의 지석묘 평안북도
용천군 신남리 유적 제 3 지점의 제
2
문화층 평안북도 영변군 세중리 유적
등이다 화 지성 속에서는 별 모양의
도끼가
발견됐는데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공리의 상층 문화층 용구에 귀속시킨다
이층의 발생의 연대는 기원전 2천년대
말에서 기원전 1천년
초이다 결국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화동 지석묘의 원대는 그와 똑같은
시기로 추정할
있
된다 사자의 유적은 요동 지역에
있어서 초기 청동기 시대에 중심되는
유적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이 유적은 목 성역에
있다 유적 속에서는 몇 개의 문화
층위가 나타나고 있다 가장 하층에서
무늬가 있는 토기가
발견되는데이 토기는 상 신남리 유적의
청등 말래 구역에서 발견되는 문이
있는 토기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것으로 이것은 장산 군도에 가장
가까운 지역에 있는 몇 개 유적에
학에 의해
확증된다 상자의 두 번째 층에서는
많치 않은 몇 개의 토기가 발견되는데
이들은 특히 세개의 발을 가진 기와
그릇에 상이 크
조금은 굽은 점토 단지 물이 그리고
물
대접 이러한 용기들은 광택이 나는
붉은 토기에 속하는데 붉은 토기는
극동 지역의 다른 유적 가운데서
나타나는 청동으로 만든 초기 유물과
더불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쌍사자
두 번째 층에서는 청동기가 나타나지
않는다
유적의 세 번째 층에서는 훨씬 많은
연구들이
발견되는데 여기에서 비스듬한 경사의
언덕에 일렬로 늘어선 14개의
주거지가
발견됐다 구조물에 대부분은 불에
타버렸다이 지역의 층위는 복잡하며
구조물은 때때로 7층으로 서로서로
포개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약간의 시차가
있기는 해도 분명히 한 시대의
주거지이다 주거지 전체를 볼 때 그
모양은 사각형이며 규모는 크지 않다
즉 그 면적은 7에서 23 평방미터
정도다 들어간 깊이는
0.3에서
1.0m 평균
0.5m 올린 것이었으나 벽의 윗부분
진흙으로 되 있다 벽의 밑부분이 도를
쌓 이루어진 비슷한 주거지는 길림성
지역의 사산 유적과 영길현 기둔
마을에서 발견되고 있다이 거지들의 두
번째 특징은 돌로 쌓아만든 벽이 있는
때로는 돌계단이 있는 낭하 또는 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주거지의 방향은 서
남북 중에 어떤 일정 방향을 갖지
않는다 주거 내부와 이들 주거와 같은
시기의 문화에서는 대단히 많은 갈색의
무문 토기가
발견되는데 이들의 모양은 다양하여
대접 굽이 달린 접시 샴페인 잔의
형태 등을 하고 있다 다리가 달린
용구가 대단히 많으며 다리의
숫자는 에서 다섯 개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목이 있는 점토
단지가 제일 많이
나타나는데이 단지들 표면에 조그만
부분들은 무늬가 있다 그러한 용기들에
있어서 무늬는 사실상 한 그릇 한
부분 그릇의 몸통이나 목 위에
가장자리 이각 부분 등에 있다
쌍사자 유적의 세 번째 층에서 출토된
토기의 특징은 용기의 동체나 목의
수평으로 된 선이 눌러져
있으며 한편 이것과 나란이 하여 작은
구멍으로 되는 띠가 나아 있다는
것이다이 층에서 청동 유물은 보이지
않으나이 층이 청동기가 발굴되는
신남리 유적 제 3지점 제 2문화 과
동일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상사자 유적 세 번째 층의
주거가 청동기 시대의 것이라고 하지
못할 근거는
없다이
주거지들이 상정하는 것은 즉 기원전
2천년대 전반으로 삼는 것은 석치
않은 감이
있다 북도 용천군 신남리 유적도 또한
다층으로 되어
있다 즉 거기에서는 신석기부터 고구려
시대까지의 여러 시대의 성들이
발견되며이 지역에서 따로 구별되는
유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몇 개의
지역이
발굴됐다 즉이 유적의 제 3지 제 2
문화층은 그러한 유적으로
할 수
있 그 지역에 개의 지점에서 바닥이
깊거나
중간지이거나 낮은 그리고 동체가 크지
않으며 목이
길고뿐만 아니라 구멍이 넓거나 좁은
여러 형태의 갈색 토기가
발견된다 사실상이 토기들 전체는
무늬가 없으나 각각의
그릇에는 동체와 만나는 바깥 윗단에
선과 점모양의 무늬 띠가 그려져 있다
석제 용구 또한 다양하다 마제
석부 손도끼 끌 원추형의
방추차 각이
삼각형이고 기선이요 형태의 마제 석촉
반월형석도
등이다 여기서는 청동 유물도
발견되는데 의 귀가 있는 반구형의
감찰 손잡이에는 고리가 있고 날
허리에는 돌출부가 있는 형태에 있어서
자강도 위원군 연니 유적에서 나온
철제 칼과 흡사한 칼이
그것이다이 분포에서 청천 강가의
세중리 유적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이 유적은 대단히 독특해서
최근에 와서야 북의 고고학자들이
유적의 일부 주거를 고조선의 문화
총체에 귀속시킬
정도였다 단지 최근에야 유적의 층위를
면밀하게 연구한 고고학자들이 고조선
시대의 주거지들이 그 기원이 다양하며
축조물 일부분은 더욱 먼저 시대에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는데 이로 인해서 10 10 13
16 18 27 28호 죽어지는 초기
청동기 시대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10호 27호 그리고
28호 죽어지는 그 나머지의 것들과
구조와 유물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데
즉 이들에 있어서는 공귀리 토기가
근간이 되 한편 나머지 주거지에서는고
시의
지배적이었던 미송의 초기 기형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결국 첫 번째 군의 주거는 더욱
먼저 시대의 것이 되고 두 번째 군의
주거는 미송리형 토기 시대에
앞서는시기 즉 기원전 2천년대 말
1천년 초의 시기로 연대를 매길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시기의 주거지
가운데서 보전돼 있는 것은 단지
10호와 27호
뿐이다 이것은 크지 않은 반 혈거 첫
번째 것은 팽이 형이며 두 번째 것은
사각형으로 구멍의 깊이는
0.7m이다 첫 번째 반 혈거 면적은
11.56 제미 두 번째 것의 면적은
19.96
미이다 바닥이 되는 것은
사토다 복사 상의 띠를 형성하는 불에
그은 기둥의 잔재가 27호 주거지
바닥에 남아 있다 주거지의 북쪽
벽에는 돌이 세 곳에서 바치고 있는
크지 않은 직각형 구덩 형태의 로지가
있다이 주거지들이 발견되고 있는 용구
일체는
돌도끼 낫 방추차
무문 토기편과 소단지
등이다 세중리 유적의 후기 주어
지들은 장방형 사각형 둥근형 또는
팽이형 가까운 형태에 크지 않은 반혈
그들이다 모든 축조물 위도의 방향을
향하고 있으나 그 규모는 99에서
45.5mm 다양하다
구덩이 깊이는
0.3m 이하로 크지 않으며 로지는
돌들이 새 방향에서 받치고 있는
직각형 요형 되어
있다 받침 기둥을 위해 파인 조금한
구성에서는 불명료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 흔적의 소재를 파악하기는
어렵다이 주거지들이 발견되는 유물
가운데서 가장 많은 것 것은 석제
용구 즉 반원형 칼 낮 창 단검
등이다 갈색 토기의 파편도 발견되고
있다 청동 유물은 보이지
않는다 북한의 서안 즉 현재의
황해도와 평한 남도 지역은 고조선
문화의 가장 중요한
발생이다 신흥동 침촌
석교리 무진 금탄 등의
유적들은이 분포권 초기 청동기 시대에
속한다
이외에도이 지역에서는 지석묘가 가장
많이 집중되 있는데 그러므로 인해서
여기서는 극동 거성 문화의 모든
형태가 실질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모든 지석묘가 초기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석관에 관해서 언급한다면
이들의 연대는 사실상 더 후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금단의 다층 유적은 분포권
중에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간주된다 평양시 사동 지역 강가의
토사 퇴적 속에서 유적들이
발견되는데 유적에 거 거의 전 지역은
표면이 10에서 20cm 정도 패어
있다 그러나 주거지 내부에서는
유적들이 풍부히 발견되고
있다 모든 문화 성층 두 개의 지대
즉
황사가 흑사 나눌 수 있다 팽이형
토기가 발견되는 주거지가 있는 층은
초기 청동기 시대에 속한
안타까운 것은이 지역의 유구가
수년간의 경작으로 헝클어져 있으며
유적들이 전 지역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거지의 체계적인
연대는 추정할 수 있다 가장 미은
주거 번호 칠리다 그 속에서는 마제
석기와 다양한
빗살무늬토기 즉 시어 소위 전나무인
모양과 배합된 손톱 무늬로 장식한
그릇 파편이
발견된다 위쪽에는 석기가 풍부하게
들어 있는 죽어이 있다 여기서는
다양한 형태 다양한 무위로 장식된
손잡이가 있는 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1 2 3 8호 죽어지는 가장
즉 제 3층에 있다 위뿐만
아니라 팽이형 토기가 이들의 공통점을
이루고 있다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은 단 두 개의 구조물이다 이것은
직각의 반 혈서 규모는 대단히 차이가
나서 각각 21과
60m 이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 또한
달라서 첫 번째 것은 북서쪽에서 쪽
두 번째 것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거지들의 로지는 단순히 형으로 된
것으로 바깥에 테두리를 세움이 없이
진흙을깐 바닥에 놓여져 있다 받침
기둥을 위한 구은 팔호 주거지에
나타난다 용구 가운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많은 양의
마창 화살 돌 있는 다양한 형의 도끼
피가 흐르도록 구멍을 판 단검
들인데이 맛세 단검은 마치 고조선의
동과의 특이한 형태를 모방한
듯하다 8호 주거지에 팽이형 토기와
더불어 꺾여진 곡괭이가 부착된 청동제
끌이
있다이 유물의 고스란이 남아 있는
부분의 길이는
5.6cm 폭은
1cm 두께는
4mm이다 고래 몸통은 날 쪽으로
가면서
좁아진다 비록 날 끝은 파손되 있지만
한쪽은 잘 갈아져 있다 그래 측면에는
주조하여 접합한 흔적이
보인다이 유적의 중요성을 과대
평가하기는 곤란하다이 유적은 팽이형
토기 그리고 그 후 시기의 물건으로
간주되며 청동제 단검을 본뜬 흠이
있는 석재 단검이 초기 청동기 시대의
것임을
증명한다 분명한 것은 석재 단검에
있는 흠은 청동제 아니라 골재 단검을
모방한 것인데 골재 단검 그래는 연마
후에도 홈들이 남아 있으며 그것은 이
골재
단검이 동물의 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이 층에서는 온전한 토기는
보이고 있지 않으나 많은 수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파편들로 토기의 완전한 형태의 특징을
충분히 알아볼 수
[음악]
있다 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