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정치는 어떻게 끝나고 남은 안동 김씨는 어떻게 됐을까? 최악의 암흑기 세도정치 6부 최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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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악의 암흑기 세도정치 6부. 세도정치는 어떻게 끝났을까?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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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돋보기입니다 조선
최악의 암흑기였던 세도 정치의 역사
마지막 부입니다 조선의 23대왕 순조
때에 외척이었지만 의해 안동김 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안동김
씨의 세도 정치에 반남박 씨도
참여하였고 순조는 카리스마를 갖춘
국왕은 아니었기에 김조순의 의한 세도
정치를 방관하다시피 했습니다 김조순의
세도 정치의 관례가 자리잡힌 건
맞지만 그래도 정조가 신임하던 인물
중 하나가 김조순이 있던만큼 막장의
테크를 받는 정도는 아니었죠
최소한에서는 지켰습니다 순조 말년
아들 효명세자가 풍양조 씨의 가문을
키우며 안동김 씨의 독주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효명세자는 요절하고 아들의
요절의 순조 몇 년 후 사망했죠 이후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24대 왕이
되었고이 젊은 청년 국왕은 풍양
조씨를 다시 육성하며 안동김 씨와
세력 균형을 이루었지만 그마저도
요절했기 생전 효명세자와 헌종은
안동김 씨의 독주를 막아보려 했던
것은 있지만 어찌됐든 그들이 키운
풍양 조씨도 외척 가문으로 세도
정치에 일주하는 형태인 매
한가지였습니다 헌종 4 후 방개
출신의 철종이 25대 왕이 되었고
그도 무언가 사회 개혁을 추진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조정은 철종을
옹립한 안동 김씨의 세상이었습니다
우선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순원
왕우가 안동 김씨 집안이었고 철종의
왕비 철인 왕 우도 안동김 씨였고
비로 나중에 순원 왕우가 사망했지만
이미 김조순의 아들 김지은이 반
안동김 씨 일파를 몰아내며 지끈
세력들로 조정을 꾸려 놓았기에 철종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안동김 씨와 친 안동김 씨 파들은
뇌물을 받으 며 관직을 분배하는 등
끝없는 부정 부패와 매관매직이
만연했습니다이를 비판하거나 문제시
삼으면 조정에서 퇴출되었고 관직을
뇌물로 사고하는 매관매직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뇌물로 인한 매관 매직은 주로 조정의
요직을 꿰차고 있는 권력자들이 뇌물을
바친 이에게 지방권의 관직 즉 사도의
자리를 나눠 주는 형태가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사회적 권력에 탐났던 걸까요 재산을
다 받쳐 가면서까지 뇌물을 바칠만큼
사회적 권력 그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그들에게 뇌물은 투자
였습니다 내가 이만큼의 뇌물을 바치면
그 이상의 재산을 다시 거두어 드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앙의 관직은
그게 다소 힘들겠지만 지방관은
가능해요 지방관은 자신이 관할하는
고을의 세금 징수권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중앙 관직이 있는 자들은
뇌물을 받고 그들에게 뇌물을 바친
지방 관직은 백성들을 상대로 고혈을
짜내면서 재산을 불려 나가는 패턴이
반복되었습니다 지방간의 권력 강화는
정조가 강하게 밀어붙이던
정책이었습니다 당시 지방은 향 촌
사회내 제지 사족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이들이 때로는 국왕의 정책에
반발하거나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죠
왕권 강화 차원에서 지방을 확실하게
장악하고자 정조는 지방관의 힘을
강화시켜 향촌 사회의 제질 사족의
영향력을 약화시켰고 단 세금 징수권
있는 지방관은 부패해진 가능성이 크죠
따라서 정조는 암행 어사대의
활성화시키며 지방관의 부패함 철저하게
관리했으나 정조 사후 문약한 순조가
왕위 되면서 지방관들이 대한 견제가
약해지고 또 그러면서 탐관 우리들의
가음 주구가 점 점 심해지기 시작했죠
따라서 순주 때 소규모 밀란이 꽤
많이 있었고 홍경 레인 난도 그런
민심의 반발심에 붙어져 시간의 세력이
커질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 지방관의
부패함이었더라
시기였습니다 왜냐 안동김 씨의
부패함과 독주가 절정을 찍었을 때가
철종 식이었기 때문이었죠 어린 시절을
사실상 평민처럼 보냈던 철종이 이에
철종은 특히나 세금 문제에 관심을
보였으나 세금 문제 개혁에 나서려고
할 때마다 안동김 씨파 방해에 제지
되었죠 부패한 지방관들이 의해 망가져
버린 조선의 세금 제도를 삼정의
문란이 합니다 정이란 세 가지 세금
제도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전정이
가장 일반적인 일종의
소득세인하 지은 수확량에 대한
세금이었다이 전정을 보통 각 거울별도
3과 그 아래의 아전들이 받칩니다
그럼 지방권 아전들이 고울 운영비로
일부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부
중앙정부에 보내야 하는게 원칙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서 지방간과 아전들이
빼돌리는 비율이 30에서 40% 아지
갑니다 중앙정부에서 세금이 안
거친다고 판단하여 더 뜯어 내라 하고
지방간과 아전들은 오히려 좋다며
벼랑과 무슨 명목이든 갖다 붙여서
백성들을 탈탈 털었습니다 세금의
과중함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면 그
도망친 비율만큼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물렸습니다 삼정 중 두 번째
세금은 군정이 15세에서 60세
남성들은 군복무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남성들이 군복무를 해버리면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서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포라고 당시
화폐 중 하나였던 옷감을 고에
제출하면 군역을 면제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이 포를 지방관들이 강제
차출했다 그렇다면이 군정은 오로지
15세에서 60세 남성들에게만 해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이 포를 15세
이하의 어린 아이들 6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지 포를 물렸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까지 세금을 물렸고 만약
이웃이나 먼 친척 중에 도망가는
사람이 생기면 그 도망간 사람의
세금까지 백성들이 부담해야 했죠 세
번째는 환정이라고 보통 한곡이라도
부르는데 한곡은 공식 세금은 아니고
국가에서 저의 자로 해주는 대출
시스템이었습니다 저이자 대출은 무슨
어마어마한 이자와 함께 지방광고
아전들의 비리를 충당해 주는 고리
대금으로 전락한지 오래였고 전정 군정
환정 세 가지의 세금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하여
삼정의 물론이라고 하는데 삼정의
문란은 이전부터 계속 누적되어 오다가
철종 때 그 정점을 찍었던 것이었고
당장 언제 밀란이 터져도 이상할게
없는
[음악]
시대였습니다 철종 제위 13년 째였다
1862년 결국 터졌습니다 1862년
2월 진주에서 밀란이 터졌는데요 당시
조선에서 진주는 꽤 큰 도시였습니다
그만큼 탐과 노래들이 더 판을 칠
수가 있었죠 지금의 진주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진주 목사 홍병원 진주의
주둔하고 있던 경상도 육군 사령
부였다 경상 우병현 사령관 백낙신의
합작하여 아주 못된 짓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당시 진주에서
한양으로 보내야 하는 세금이 연살
4만석이었는데 홍병원 백낙신의 진주
백성 돌론 떼먹은 세금이 연살
6만석이었다고 합니다 해도해도 너무한
거죠 결국 농민인 본기를 일으켰던
진주 농민들은 홍병원 백락 since
인질로 삼았습니다 중앙 정부에선 넥사
파견합니다 아넥스는 밀란이 터졌을 시
백성들의 요구 상항을 들어주고 중간에
타협과 중재를 해주는 역할을 하는
직책인데 이때
넥스로지텍
이제의 친구였고 나중에는 모든
개화파의 스승이 됩니다 박규수는
안핵사 진주 백성들의 호소를 전부
들어주었으며 철종에게 아뢰어 홍병원
백락 신의 게 가장 강도 높은 단계에
유배형에 처하게 만들며 진주에서 농민
본기는 어느 정도 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 사회에서 또 특기할
만한 사회적 현상이 전국적으로 큰
도시에는 큰 시장이 열렸는데 이런 큰
시장에는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다
모인다 말이죠 진주에서 벌어진
일들이이 시장을 매개로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1862년 3월에서 5월까지
충천 경상 전라 3남 지방에서 농민
봉기가 폭발적으로 그리고 연쇄적으로
일어납니다 경상도에서 는 함양 거창
성주 울산 김천의 개령 군위에서
일어났고 전라도에서는 익산 한평 부안
장응 순천 강진 남원 영광 고창 화순
등에서 충청도에서는 청주 공주 논산
진천 부여 옥천 등지에서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경기도 광주와 제주도까지
본기가 발생했죠 조직적인 단체가
주도하는게 아니라 지방별로 개별적으로
본기가 연쇄적으로 일어난 건 그만큼
조선 사회 경제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는 겁니다 1862년 임술년
일어났었던이 1년의 농 농민 보기들을
통틀어 임술농민 보기라고 합니다 이때
박교수는이 모든 봉기의 원인들이
삼정의 문란 때문이라며 철종에게
간곡히 뢰어 삼정의 문란을 해결해 줄
것을 촉구했고 철종은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겠다며 삼정 이정청이란 기관을
신설합니다 철종은 삼정 이정청 삼정의
문란을 해결할 수 있는 개혁안을
내놓으라 했으나 삼정 이정청 구성하는
대신들은 대부분이 안동 김씨이거나
마찬가지로 부패한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아니 삼정 이정청 총책임자는이 모든
부패한 먹이 사슬의 맨 위에 있는
김정은이 있죠 이들이 내놓은 개혁
관들은 개혁이라고 참마 부르기 어려운
사실상 현상 유지나 다름 없는 그냥
쇼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삼정 이정청
흐지부지 해산되어 버렸고요 어느
순간부터 철종은 개혁의 의지를 모두
상실하고 술과 음란한 생활에 젖어
살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철종의 건강도
악화되었고 재위 말년 몇 년은 술과
여자에 빠져 놀거나 병으로 골골대고
임술 놈인 본기가 철종이 죽기 1년
전이었어요 그렇게 철종이 비실비실
되던 사이에 왕실과 신하들은 또 한번
멘붕이 빠집니다 철종에게 아들이
없었거든요 아들들이 낳긴 낳았지만
전부 요절한 지라 또다시 방계 중 한
사람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이때 왕실
최고 어른은 풍양 주씨의 조대비
있습니다 왕이 후사 없이 죽는다면
최고 결정권자는 대왕대비가 됩니다
아무리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대왕 대비의 결정을
뒤엎을 순 없죠 그렇게 조대비가
결정한 사람이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정이었음 since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고 안동 김씨를 숙청했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끝까지 존중해 주었습니다
김 주근과 김주근 아들이 흥선대원군
아들의 지위를 다소 못마땅해 했다지만
그렇게 강하게 반발했던 건 아니었던
걸로 보입니다 흥선군 시절에 흥선
대원군과 김좌근 사이가 나름
좋았거든요 안동김 씨의 당수였던
김자근 경우 워낙 노년이란 애당초
조정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흥선대원군은 김정은에게 명예직을
주었으며 김정은의 양아들이자 안동김
씨의 새로운 세대였던 김병기 처음엔
지방 관직을 전전하는 했으나 곧바로
다시 중앙 전기로 진출했습니다 안동김
시의 또 다른 실권자 있던 김병은 흥
대군 시절 영정이었습니다 만약
흥선대원군이 피유 숙청을 감행했다
아면 그가 안동김 씨의 권세가
있었기에 어마어마한 저항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조선을 망친 안동김 씨
집안은 끝까지 권세를 누렸습니다 다만
오해하시면 안 되는게 안동김씨 전체가
다 그렇던 건 아닙니다 세도 정치를
만들었던 김조순 김정은 김병학이
라인은 서울에 살던 안동김 씨 개파이
국한되어 있으며 그래서 이들을 신
안동김씨 혹은 장동 김 씨라고 불러
안동김 씨 전체와 구분하기 하죠
여러분은 잃어버린 60년 최도 정치의
역사를 통해 무엇을 느끼셨나요 그럼
역사 돋보기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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