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중국은 어떻게 싸웠을까? 전쟁, 전술의 중국전쟁 변천사 통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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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군사력은 어떻게 강해질 수 있었을까? 중국전쟁사의 변천사 통합본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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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돋보기입니다 인류
역사의 전개에서 언제나 가장 강력한
기점을 마련하는 것이 전쟁입니다
전쟁의 기점으로 인류의 사회 과학
기술 경제 정치 등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한데요 따라서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시대의 국가들이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기 발전을
도모합니다 동양 사에 있어서 중국사회
입지가 남다른 법인데 그렇다면 중국
전쟁사에서 어떤 역사적 맥락 하에
각종 전술과 기술들이 발달하면서
중국사 전개에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중국 전쟁사의 본격적인
시작은 춘추 전국 시대부터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은 춘추 전국 시대부터
철기 시대로 돌입하기 때문이죠 더
정확히는 춘추 전국 시대 중 기원전
43년에 기원전 221년에 해당하는
전국 시대 때 철기 시대가
시작하는데요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며
각 국가들의 경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당연히 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죠 그리고 성 안에 국인과 성
밖에 야인을 구분하기 시대의 풍습이
사라지고 이젠 성 밖의 사람들도
국가에서 노동력으로 동원합니다 이러니
전쟁의 규모가 춘추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스케일이 커지고
철제 무기들을 사용하면서 전투는 더
살벌해지고 춘추 시대 때는 그래도
명분 원리원칙 체면 등을 매우 중요시
여겼지만 전국 시대부터는 그저
약육강식 전하라 없애 버리겠다는
개념으로 변합니다 이른바 총력전이
시작하는 거죠 각 국가들 별로
영토라는 개념이 확고해지고 조왕
양이라는 명분을 가장 중요시 여겨
제후국이 있던 춘추 시대와는 달리
이젠 각 국가들도 제후를 자처하지
않고 왕을 칭하기도 합니다 180여개
제후들을 시작한 춘추 시대는 전국
시대에 돌입하면 일곱 개로 정리되는데
이들을 전국 치붕이 아고 부르죠 전국
시대의 칼은 양날검을 사용했지만 실제
보병들이 더 보편적으로 쓰던 무기는
창이었습니다 창의 경우 찌르는 용도의
모 베는 용도의과 두 개를 합친 급
크게 세 종류가 있었죠 활도 아주
자주 이용했는데 더 강력한 활을 위해
석궁과 쇠로 만든 석궁 쇠뇌가
만들어졌습니다 전국 시대 때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기존까지의 전투는 보병 위주였습니다
말을 사용하는 경우는 전차를 운영할
때였죠 전국 7 중 가장 북쪽에 있던
조나라에서 최초로 왕을 칭한 조
무령왕이 새로운 전수를 도입하는데
가장 북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뜻은
북방의 유몽 민족들 구체적으로는
흉노족과 접촉이 많았습니다 도저히
보병 위주의 중국 병사들은 기마문화
유몽 기병을 이겨낼 수가 없었죠 조
무령왕은 차라리 저들의 기병 전수를
카피하며 기원전 307년 유 족들의
복식과 기마수 도입합니다이를 호복
기사라고 하죠 기존의 보병과 전차
중심의 전투에서 기병들을 조직했고
기존의 중무장 전통에서 말을 차기
쉬운 복장과 경갑 옷을 채택하며 말
위에서 화를 쏘는 기마 궁수를
훈련시켰고 이덕에 조나라의 군사력이
갑자기 막강해졌다 전국 치형의
국가들도 다 기마 전수를 채택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 전쟁사에서 기병이
등장하고 발달합니다 이렇게 전쟁이
격화되고 승리하지 않으면 죽는 마당에
전쟁에 대한이 이론적 접근도 활발하게
이루어지죠 전쟁론의 관한 연구를 하는
학파를 병가 부릅니다 여기서 병가함은
병법 서을 남겨서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연구를 말하는데요 최초의 병법서
춘추시대 제나라의 사마양저 평생을
전쟁을 누비며 저술한 마법입니다 사마
양전은 총 55편의 마법을 작성했다고
하지만 현재는 다섯 편만이 나마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법에는 전쟁에
관한 그의 유명한 어록이 있는데요
천하가 비록 편안하더라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역시 춘추 전국
시대 때 가장 유명한 병법사 오나라의
손무가 작성한 손자 병법이 있죠 춘추
시대 말기 사람이었던 손무는 오나라
합류 밑에서 오나라의 군권을 담당했고
손무가 키워놓은 군사력으로 오나라의
국력이 폭발적으로 강해졌죠 소무의
손자 병법은 13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병법서 비하면 그나마
가장 그대로 전체가 다 전해지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은 중국사를 통틀어
전술 가라면 누구에게든
필독서였다 자신이 웬만한 병법서 모두
읽어
손자 병법이 가장 심하다며 아주 긴
주석 글을 쓰기도 했고 아직까지도
중국에선 사관 학교나 군사 학교에서
손자 병법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우리
이순신장군님 또한 손자 병법 덕
후였죠 특히 이순신장군은 손자 병법
속 지피지기 백전 불타라기를 가장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손자 병법만큼이나
그 가치를 인정받은게 오자
병법입문서
병법서 있니다 오기는 진나라와 76번
싸워 60 네번을 이기고 12번은
무승부였다 하는 유명한 전설과 5만의
병력으로 50만 진나라군 막아내기도
한 전적이 있습니다 오기의 오자
병법은 48 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는 여섯 편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자 병법의 내용은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법 군사들의지를 높이는
법 등 군사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조직이 와해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주된 내용입니다 이순신장군이
명량대첩을 앞두고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명연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 것이다
오자 병법에서 인용한 것이죠 이외에도
전국 시대 중기 제나라 손빈이 저술한
손빈 병법 그리고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 울료자 저술한 울료자 아는
병법서 있답니다 중국의 두 번째
군사적 변화는 한나라 때였습니다 특히
한 무제 때였는데 한 나라는 내내
북방의 유목 제국 흉노 제국에게
시달렸습니다 아무리 중국이 춘추 전국
시대 때부터 기병을 도입해서 보편화
되었다고 해도 유목민족을 상대로는
맥을 못 줄였죠 하지만 한나라의 7대
황제 한 무제는 일곱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흉노 제국 원정에 나서며
한나라의 군사도 이전의 중국사와
다르게 변합니다 우선 검의 경우
중국은 이전까지 양날검을 사용했지만
김하민 족인 흉노족과 효율적으로
싸우기 위해 양날검다는 외날검이 더
효과적이었고 그래서 탄생한게 환두대도
있니다 환두 대도는 이후 한중일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검이 되었죠 우리
말론 고리자루 큰 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궁병들은 대거 양성했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기병 전술이
굉장히 강화되서 한나라의 기병은적인
흉노제국 가 싸우면서 그들의 기병
전수를 받아들 있는데요 특히 기원전
119년 마지막 7차 흉노 원장이었던
막북 전투에서 한나라 측 지휘관
곽거병이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무려
2천 리를 행군 고비 사막을 뚫고
러시아 바이카 로스까스이 사이에 셀
수 없을 정도의 흉노 부족장들이
투항했다 무려 흉노족 7만 명을
참소합니다 곽거병의 막북 전투에선
그렇게 북진하는 동안 현지 흉노족을
약탈해 보급을 조달했던이는 전형적인
흉노족의 전술이 또 한무제는 흉노
원정에 앞서 서역에 존재하던 명마
한혈마 3천 피를 가져온 적이
있었습니다 피 같은 땀을 흘린다라는
뜻의 한혈마 품종은 투르크메니스탄
아할테케 아는 품종인데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명마로 불리는
품종이죠이 한 혈마가 흉조의 타던
말보다 훨씬 수준급의 말이었고 또
창도 유목 민족들의 기아 전술의
영향을 받아 한나라 기병대대 마사기
창을 만들고 사용했답니다 이렇게
한나라 때 중국의 기병이 강해졌기에
한나라 에서 이어진 우리가 익숙한
삼국지 세계관에서 공손찬의 백마의종
조조의 호표기 마초의 저족 기병대
같은 막강한 기병대가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삼국지 시대 때는
둔전제 활성화되었습니다 삼국지
시대에서 지배층의 무능 황건적의 난
군벌들의 각축전 등으로 백성들의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국가와 각 지역 호족 및
군벌들의 재정 상태를 빈약하게
했습니다 초정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
입장에서 백성들의 기급 및 간난
문제를 하루 빨리 해결해야 다른
제후들과 전쟁을 할 군량미를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6년
신하 한호가 둔전제를 거위 있는데요
둔전제를 쉽게 말해서 군인들이 농사를
짓는 토지 제도입니다 국가는
군인들에게 주인없는 땅을 경작 시켜서
일정 부분만 국가에게 바치면 남은
수익은 군인 월급 외로 받아갈 수
있도록 했죠 이러면 군량미 확보가
가능하며 후방에서 전선까지 보급을
조달해야 하는 그 비효율성을 최소화할
수도 있죠 둔 전재는 한나라 때 역시
7대 황제 한 무제가 흉노 원정 중에
비슷한 개념으로 다른 이름의 제도를
시행했는데 조조가 한호의 둔전제를
받아들이며 보편화 되었죠 둔전제
대단히 효율적인 토지 제도였습니다
놀고 있는 인력을 투입하면서도이 놀고
있는 토지를 개관하는 생산량이 두
배로 늘어나고 불량및 보음 문제도
사라지고요 조조는 실제로이 둔전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둔 전재의 시행으로
징병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고 백성들의
기근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죠 조조가
관도 대전을 비롯한 크고 작은 여러
전투에서 이겨 후한 북방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이 둔
전제가 크게 한몫을 했습니다 튼튼한
군량미가 조조의 부대를 뒷받침해 준
거였죠 이후 둔 전제는 손권의
오나라와 촉에서 제갈량이 자주
썼답니다 한나라 멸망 후 삼국지에서
터 중국은 오랜 시간 분열의 시기를
겪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북방과 남방의
전술도 상의했고 삼국지에서 조조가
호표기 기병대로 중국의 북방을
제패했고 진출하려고 했을 때 거듭
막힌 건 아무래도 남방은 기병대가
활약할 수 있는 조건이 북방 만큼은
부족했던 배경도 있습니다 남방에서
기병대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북방다는
기병이 약화되어 있었고 보병이나
수근이 발달해 있었죠 삼국지 나라의
유명한 맹장 감령 그리고 주태 장금도
해적 출신이잖아요 하지만 북방의
기병대가 남방에서 활약하기 어려운
것처럼 남방의 군사들도 방언은 잘할
지언정 북방으로 가서는 활약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중국 남방의 국가들은
수비만 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국 남북 방의 군사적 차이는
남북조 때 더 극명해 있니다 북방에는
다섯 개의 유목민족들이 16개의
나라들을 세웠고 전통 한족들은
남방으로 내려가니 말이죠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 중국 남북 방의
군사적 차이는 결국 중국 중세 시대를
통일한 당나라에 이르러 또 한번 중국
군사 사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건 수나라 있지만
수나라는 30년 만에 멸망하고이를
당나라가 이어받으면서 수백년간
분열되어 있었던 중국의 지역적 차이는
당나라 때 여러 정책들의 개편으로
통일되고 일원화 되었습니다 당나라
전에 북이라는 중국의 남북조 가운데
화북 지방에 해당하는 북조 통일했던
국가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북위는 개국이래 북방의 유목민족 유연
족의 침을 받기 위해 북방 국경지대의
주요 요충지에 육진을 설치해 두고
있었습니다 진이란 회사진 무천진
무명진천 오가진 황진의 가리키는데요
육진의 지휘부는 전부 선비족 귀족
집안들이 있죠 이들은 북위의 조정에
반발하며 군벌로 자리게 맺는 는데이
중 무천진 파생된 군벌 집단을 관롱
집단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근거지가
관중 지역과 농서 지역이었기 앞글자를
따온 거죠 북위를 북제 북 주로
해체하고 남북 조를 통일한 수나라
그리고 당나라의 황실 가문들이 전부
무천진 관룡 집단 출신들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무천진 군벌들이
흥기 아여 국가를 세웠다고 보시면
되죠 수나라 멸망 후 당나라가 중국의
패권을 차지할 때 당나라의 건국자
당고조 이연의 아들 이세민이 크게
활약했는데 이 이씨 가문도 무천진
관롱집단 출신입니다 이세민은 아버지
이연을 황제로 추대하며 당나라를
건국했고 당나라의 이시 가문에
대항하던 다른 군벌들 이일 설거
유무주 두건덕 왕세충 세력들을 모조리
진압하자 이대 황제로 오른 당태종
이세민은 기병대를 특히 강화하여
630명 동 돌궐을 멸망시켰고 초원의
모든 유목민족들이 당태종 이세민의
복속을 자처하며 이세민을 카간
보셨습니다 중국 역사상 정말 찾아보기
힘든 유목 세계와 농경 세계에 통일된
최고 지배자를 하는 칭호를 얻었던
거죠 우리가 당나라 군대 하면은
군기빠진 오합지졸 군대라는 뜻이라고
하지만 이때 당나라 군의 군사력은
매우 막강 했으며 그 중심에는
기병대가 핵심이었고 보시듯 당나라의
기병대는 중국인만 있던게 아니라
당나라 영향권 하에 있던 다른 부족
내지 다른 민족들이 동참하고 있었기에
당나라 군은 다국적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이초록 이민족들이 당나라에 협조한
시스템적인 배경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미 정책입니다 기미 정책이란 말을
조련할 때 고비를 느슨하게 잡대 끈은
절대 놓지 않는다는 뜻의 정책입니다
유목 민족들에 대해서 겉으로는
회유책을 쓰면서 그렇다고 경계를
완전히 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정복한 유목 지역에 대해선
중국 기존의 군현제를 적용하지
않습니다 즉 황제가 직접 통치하지
않고 그저 도호부로 설치해서 그들의
자치권을 보장해 주도록 하죠 유묵
부족 장들의 독자성을 허용하는 대신
도호부 아는 군사 기지를 설치해
유목민들의 군사적 행동만 강력하게
통지하는 간접 통치를 하는 겁니다 예
컨데 630년 동돌궐 멸망 후 돌궐
족과 초원의 유목 민족들을 관리하는
안북 도호부 640년 서역의 고창국
멸망 후 사막의 유목 민족들을
관리하는 안서 도호부 668년 고구라
멸망 후 만주 및 고구라 민족을
관리하는 안동도호부를 679 KN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의 민족들을
관리하는 안남 도호부로 설치하였고
이외에도 선우 도호부 북정 도호부
아지 총 여섯 개의 도호부로
운영하였습니다 또 당 라는 빈공과
아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
시험이 있는 등이 외국인들에게
개방적이었던 그래서 백제 유민 출신의
흑지 상지라인의 유민 출신의 고선지
던가 거란족 출신의 이해고 등등
다국적 인재들이 굉장히 많았던
겁니다이 중 고선지는 비록 결과적으로
탈라스 전투의 패전으로 중앙아시아가
이슬람화 되지만 그 전까지는 서역
원정에 나서며 무려 72개의 크고
작은 서역의 국가들을 복속시켰다
여기까지만 봐도 당나라 군사의 핵심은
기병 위주임 알 수가 있고 따라서
중국인들이 역사적으로 사용했던 직도
완전한 곡도 아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씩
휘기 시작합니다 기병대 일부는 맥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창 이라기보다는
장도에 가까운 형태인데 당나라의이
사업이라는 장소가 애용했다고 하네요
기록에 따르면 이사업 장고는 신장이
7척 인에 되는 거구에 매우 용감
무쌍했더니 장군을 도왔다고 하는데이
맥도라지 사실은 고구려의 전통
무기였으며 당나라가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도호부로 운영하는
당나라의 기미 정책은 분명 당나라가
외지인 을 관리하고 당나라 자체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호 부들을 통해
관리해야 하는 민족들의 수화 영역이
비대해지다 보니 도호부의 제대로
관리하기가 힘들었고이 민족들도 계속
돌아가면서 반란을 일으키니 점처
도호부가 유명 무실 화됩니다 그래서
당나라는 도호부 제도를 폐지하고
절도사 제도로 전환합니다 각
국경지대의 군사적 요충지에 수많은
진을 설치했는데이 규모가 큰 진을
번진이라고 불렀고 번진의 책임자가
바로 절도사 아는 관직이 무언가
떠오르시지 나요 영상 초반 소개해
드렸던 부위 시절의 육진 비슷하죠
이들은 결국 군벌이 되어 부위를
무너뜨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당나라 후기
절도사 제도로 전환되면서 각 번진의
절도사은 군벌이 되었죠 절도사 비록
중앙에서 파견한 관직이 절도사의 관할
구역에서 만큼은 절도사 이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절도사 각자의
번진 그래는 황제보다 더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했으며 번진 소속의
군민들도 황제보다 절도사 이게 더
충성하는 경향이 컸죠 당나라 멸망의
신호탄은 알린 안사이 난의 주동자
안녹산 do 하동 절도사 있습니다
그리고이 안사이 난을 진입시킨 부대도
각 지역 절도사었습니다 절도사의 힘이
비대해지며 안 사이난 이후에도
7세기에서 8세기 내내 절도사의
반란을 일으켰죠 당나라의 11대 황제
당 헌종이 두 차례에 걸친 번진
개혁을 통해 절도사의 힘을 축소시키다
성공했지만 당 헌종 이후 무능한
황제들이 연이어 나타나면서 절도사의
다시 흥기 결국 당나라는이 절도사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당나라 멸망 후
절도사의 각자의 세력지지 나라를
건국한 5대 19국 시대가 도래하는
결과적으로 10세기경 송나라에 의해
통일됩니다 송나라를 건국한 송태조
조광윤 절도사 출신입니다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을 해도이 절도사가 있는
한 언제 국가가 또 찢어질 몰랐죠
그래서 송태조 조광윤은 절도사 제도를
폐지해 버립니다 또한 군벌로 성장할
수 있는 군부를 극도로 경계하며
차라리 관료들을 키우기 위해 과거제를
강화합니다 송태조 조항우는 외부
이민족의 위협보다 내부 군부 세력의
위협을 더 크게 여기고 군대의 대부
분을 수도 방어와 황제의 직속부대
근의 부대인 금군의 몰빵을 하고
지방군으로 축소시켰습니다 송나라는
문치주의 국가였으며 국방력은 참담한
수준이었죠 이러니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탕구트 족의 서하에게
탈탈 털리기만 했던 겁니다 군사
방면에서는 송나라 때 중국사가 완전히
정체되어 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범중엄 왕한석 등 신법이 군사력을
강화하자는 개혁을 제한하기도 했으나
보수파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고
그런데 이러한 약한 군사력과의 의
모습으로 여러 무기들이 송나라 때
새로 생기기도 했는데요 우선 우리가
잘알고 있는 언월도 이때 처음
만들어졌고 극도 발전하여 방천 화극이
만들어졌습니다 방천 화극을 양옆으로
초승달 모양의 날를 장착한 극을
말합니다 방천 화극 비슷하게 월급이라
무기가 있었습니다 혹은 대부라고 해서
창 대신 도끼 나를 장착한 무기였던
또 송나라 때는 창 언월도를 개량한
박도아 나왔고이 이후로 중국은 박도
럼 큰 대도를 애용했습니다 그리고
송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화약을
군사적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지 화약이 있었다는 기록이
심심치않게 나타나는데 어 주로
폭죽으로 사용이 됐고 송나라 서기
천년 장수 당복이 최초로 화약으로
폭발하는 무기들을 만들었죠 이때까지만
해도 포탄을 투척하는 정도였고 시간이
좀 더 지난 12세기 경에 드디어
화포를 만들어냅니다 이후 중국은 절대
화약과 화포 제작법을 타 국가에
공유하지 않았으나 한국에서 고려의
최무선이 화약 개발에 성공해 우리도
화포를 보유할 수 있었죠 명나라로
넘어가 보자면 명나라의 군사력은
초창기 때만 해도 굉장히 강력했습니다
딱 명태조 홍의재 명성조명 bil
때까지요 명나라를 건국한 명태조
홍의재 때는 명나라 군부 원 2였던
서달 was 상우춘이 25만의 군대를
이끌고 원나라에서 베이징을 함락했다
was 상우춘은 만리장성 넘어
진격하기 해 1369년 상호 추는
원나라 대한들이 여름 별장인 상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원나라 최후의
명장이었던 코케테무르 마지막 항전을
하지만 치마요 대전에서 10만이
전사하고 팔만이 포로로 잡히며대
패배를 해버립니다 명나라의 서달은
원나라의 완전한 멸망을 위해 몽골
초원까지 북진을 떠납니다 야마천
토라에서 승리를 거둔 서달의 명나라
군은 수도 카라코룸 목전까지
도착했지만 확실히 몽골 초아는 원나라
군에게 유리했고 원나라 군이 영북
대전에서 15만 명의 서다래 명나라
군을대 격파합니다 비록 몽골 초원까지
원정이 나서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천하의 몽골족을 상대로 이까지 공을
기록한 것도 대단한 거죠 명나라의
3대 황제 성조 영락제는 15년
사이에 총 다섯 체에 걸쳐 몽골로
북부를 떠났습니다 원나라 멸망 후
몽골 초원의 신흥 강자로 떨던
오이라트 개박살내고
복속시켰다 오느 나 흑룡강성에 흑룡강
진출하여 여진족을 정벌하고 만주를
경영하는기구 누르가 도사를
설치하였습니다 누르가 도사의 관할이
살린 섬까지 미쳤다고 하죠 영락제는
환관 정화에게 막대한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나가 보라며 원정 사업을
바겠습니다 환관 정 는 총 일곱
처리에 걸쳐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는데 이것을 정화의 남해
원정이라 합니다 정화는 아프리카까지
진출하였으며 일곱차례 원정한 거래를
다 합치면 무려 18만 5,000km
있죠이 덕에 명나라 수분도 굉장히
강화됩니다 명나라의 무기들은 송나라
이후 대도에 대한 애정이 이어져
검으로는 장도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산
혹은 선장이라고 도끼도 창도 아닌
것이 긴 장대에 마치 삽과 비슷한
모양의 날를 장착한 무기로 주로 사차
의 승려들이 사용했다고 하죠 이렇게
나쁘지 않은 명나라 군이었다 이후
환관들이 조정을 장악해 국정을
농단하고 명나라에 연이은 무능한
황제들이 나타나면서 북쪽으로는 몽골
오이라트 침공을 남쪽으로는 외고의
노략질에 시달립니다이를 북로 남의의
화라고 부르죠 동아시아의 해저왕 왕직
죽인 뒤 외구 더 날뛰기 시작했고
명나라 군은 전혀 외구 제압하지
못합니다 명나라는 정화의 남해 원정
중단 후 지속적인 해금 정책으로
해안가의 국방력 수준도 저하됐고
심지어는 외국 이른 두 명이 단 한
명의 사상자 없이 명나라군 900명을
사살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때 명나라를
구원하러 영웅이 한명 나타나니 바로
척계광이 있습니다 척계광이 외구의
피해가 극심했던 절강성의 담당자로
발령됐는데요 3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군을 조직합니다 정규군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농부 광부 등
현지인들로 구성을 했습니다 그러면
병사들은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명분이
생기겠죠 그리고 척기 3이 개발해낸
진법이 있으니 그 유명한 원진 있니다
병사들의 진영이 마치 조류 원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원왕의 핵심은 역할 구분 있데요
12명이 한개의 대를 자고이 12명은
각각 여섯 개의 역할로 구분 있습니다
우선 분대장 역할의 지휘자 대장 한
명 방패와 표창을 가지고 있는 등패
두 명 긴 막대에 여러 개의 날카로운
가지들을 붙여서 공격하는 무기 낭선
두 명 장창 네명 삼지창 두 명
맨뒤에서 곤봉으로 후미를 지원하는
화병 한 명 이렇게 한 개의 대를
구성합니다 이 진법에 원이란 이름이
붙은게 물론 진형의 모양도 원처럼
생겨서이지만 원은 암수가 금슬이 좋아
한 마리가 죽으면 다른 한 마리도
따라 죽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원진이
부릅니다 한개의 대를 이루는 12명은
마치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반드시
믿어야 하며 서로를 믿어 주고 자기
역할만 잘한다면 절대 끼지지 않는
진법이 겁니다 만약 12명 중 대장이
죽었는데 다른 병사들이 도주한다 그
병사들은 전원 사형당하는게 원
식입니다 고된 훈련도 수반되었습니다
원항는 현지인 이웃 주민들로
구성했기에 그나마 서로를 믿게 하는게
수월했습니다이 정도 조직력과 군율과
체결로 갖추니 첫 가군이 한 순간에
정예병의 되었죠 1561년 1만 명의
외구의 쳐들어왔을 때 척계광의 원항
진 첫 가구는 아홉번을 싸워 아홉번을
모두 이겼으며 1963년에 평 해위
전투에서 외구 2만을
격퇴시켰다 연전 연승을 거두면서
외구의 기세가 확 꺾이게 되죠 계왕이
전술한 병법서 기호 신서인이는 훗날
임진한 때 명나라 원군을 통해 조선에
전래되면서 조선 후기 군사 개혁에
가장 기본적인 레퍼런스가 되었죠
그리고이 시기가 군사사 중요한게
냉병기 화기가 공존하던 시기였는데요
중국은 당나라 때까지 기병이 군대의
가장 핵심이자 메인이었는데 송나라
터는 보병이 강화되는데 그 배경에
바로 화기의 탄생이 있었습니다 송나라
이전에도 화약이 있었지만 송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화약을 군사적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송나라
서기 천년 장수 당복이 최초로
화약으로 폭발하는 무기들을 만들었죠
이때까지만 해도 포탄을 투척하는
정도였고 시간이 좀 더 지난 12세기
경에 드디어 화포를 만들어냅니다 다만
송나라의 군사력이 워낙 약체다 보니
화포 사용 영향이 현격하게 떨어졌고
명나라 때부터 화포를 적극 활용하죠
명나라의 대표적인 화포는 불랑기포
호준포 백자호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청도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먼저
도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한중일
중에서 가장 먼저 조총을 입한 건
중국 명나라 있습니다 일본이 조총을
만들어낸 건 서양의 아쿠 버스라는
화승총이 전래된 것인데이 화승총이
일본에 건너간 건 16세기 동아시아
바다를 주름잡던 명나라 대해적 왕직
배에서 표류하며 전래된 것이랍니다
화약으로 무기를 만들어낸 건 중국
송나라이지만 그 화약이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했던 원나라 때 서양으로
넘어갔고 서양에선 화약 무기를 개인
소지할 수 있는 총으로 만들어 냈던
거죠 포르투갈인들이 아시아로 진출하며
마카오까지 진출했는데 그때 포르투갈
군이 소지하고 있던 화승총이 명나라에
처음 소개되었고 조총이 이름을 붙인
것도 명나라 있습니다 외구 토벌하기
위해 난방에 있던 척계광 역시 원항과
다불러 조총 부대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보병이 총을 소지하면서
보병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고 척계광의
원항 since 역시 보병의
전술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병이 약화된
건 아니었습니다 명나라는 북방의 몽골
오이라트 부족과 또 만주 지역의 여진
족들을 제압하려면 그들을 상대로는
기병대의 필요성이 절대적이었던
명나라의 경우 북방은 기병 위주 남방
방은 보병 위주였다 볼 수 있죠 임진
네라 때 조선으로 들어온 명나라
원구는 처음엔 이어송 끄는 요동
병력이었다 빼앗긴 평양성을 파란하
했다지만 이호성의 부대는 기병 위주에
여진족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보병 위주였던 일본 군과는
맞질 않았습니다 정유재란 때 재
투입된 명나라 원군은 유정 양호 진린
등 중국 남방의 보병 위주 대였습니다
이들의 주령 무기가 화포 있고 그래서
임진란 양상을 보면 정유재란때 투입된
명나 군이 훨씬 큰 활약을 했던
겁니다 물론 이어백 마귀 등 기병
위주의 부대도 투입됐고 정유재란 때
투입된 명나라 군은 기병 보병이 잘
균정 잡힌 부대였던 거죠 인지대란
이후에는 명나라가 노밀 총이라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더 개량되고
강화된 조총을 도입했으며 또
네덜란드로부터 홍이 포라는 포신
길이가 무려 2m 넘는 서양식
커버링을 수입해이를 자체 생산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렇다면 명나라의 이민족
대응 방식은 어땠을까요 당나라는
도호부로 통한 기미 정책 말기에는
절도 제도를 시행했지만 절도사가
군벌로 성장해 버리니 송나라 때는
별다른 대안이 없이 절도사 제도를
폐지하여 군벌의 성장을 강력하게
억제하다 국방력이 지나치기 약해져
이민족들의 침입에 끝없이 시달렸습니다
명나라의 경우 지방군은 위소제
운영했습니다 군사 112명을 모아
호라고 합니다 그 100호가 열개가
모이면 호고 그 천호가 다섯 개가
모이면 1위입니다 따라서 1위는 약
5,600 M이 하나의 위인데
명나라는 전국적으로 주요 요충지의
위를 설치하죠 고려 그런 말 우왕 때
명나라가 용토를 요구한 것도 천령
위지아 그리고 각 지역의 이민족들의
위를 맡겨서 그 이민족들을 명나라가
관리할 수 있도록 했죠 명나라
정부에서 내린 위의 관직을 받으면
명나라와 교육할 수 있는 증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생계의 명나라와의
교육이 필수적이었던 이민족들의
부족장들 그 관직을 받았던 거죠
대표적인 예로 암록 kan 이북의
여진족들이 이끌던 만주가 건주 위를
담당했고 두만강 이북의 여진 족들을
이끌던 먼터무 건주 좌 위를 담당했죠
그리고 명나라는 각 위에서 둔전제를
시행하게 하여 자체적으로 군량 및
보급을 자급 자족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문제가 생길까요
이렇게 군사적 병영의 자치권을 주면은
중국은 항상 군벌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명나라는 옛 당나라 말기나 5대
19의 절도사처럼 그 정도까지 군벌로
확대되지는 않았단 말이죠이는 군벌로
성장할 기미가 보이면 바로 명나라
정부에서 아무 죄나 때려서 소환한 후
죽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명나라
황제들은 환관들게 자지우지 되는
경우가 있 었는데 부패한 환관들은
혹시나 저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 툭하면 불러서
죽여버리기 일수였습니다 이러면 분명
군벌로 인한 내라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지만 이민족과의 전쟁에서는 절대
이길 수가 없게 되죠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명나라 말기 요동의 패권을
두고 여진족 후금과의 전투였던 사로우
전투에서 명나라 주력군을 모두 격파해
만주를 제패한 무페의 전설 여진족의
누루 아치가 이제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관내로 진출하려고 할 때
유일하게 막힌 곳이 만리장성 입구였다
영원성이 있습니다 영원성을 담당하는
원숭환은 홍이포를 대량으로 성에
설치하고 천재적인 용병수 발휘했으며
조선 북방에서 가도에서 수군을 키우던
모문룡의 수군 병력도 흡수했습니다
누루 아치는 영원 대첩에서 패배 후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으며 누루하치
사후 뒤를 이은 그의 아들 홍타이지
영원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죠 그런
구국의 영웅이었던 원숭환은 처형한 건
다름 아닌 명나라 본국이 있습니다
거기에 명나라는 정치도 부패에 있어서
결국 내부 반란으로 명나라는 멸망하고
았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주인은
만주족의 청나라가 되죠 청나라 군은
한족의 군대가 아닌 만주족의
군대였던만큼 당연하게도 기병대가
위주였습니다 청나라의 행정 조직 및
군사 조직을 팔기군이라고 합니다
팔기군 누르하치가 처음 조직했는데
누르하치가 지휘하는 팔기군 기병대는
확실히 지형적 이해도만 높으면
최강이었던 패권을 둔 전투 사루
전투에서 화기로 무장한 명나라 군대를
8기 군의 기병대가 이리저리 휘져으며
명나라군 9만 명 중에서 4만 5천
이상이 전사했습니다 사실상 전멸 이죠
사르 전투의 패전은 명나라 측 실수도
있었는데 사르후 전투 때 투입된 요동
병력은 대부분 임진열 때 원군으로
투입되었던 부대였습니다 임진의 때
투입된 명나라 원군은 전통적으로
북방이 여진족을 막던 기병 일부와
화기로 무장한 보병 중심의 남방군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고 했잖아요 이들이
보병 위주의 일본군을 상대로는 잘
싸워도 북방의 만주족을 상대로는
활약하기 힘들었던 겁니다 양호 유정
등 전통적인 요동 병력 출신이 아닌
남방 출신의 지휘관들도 만주 조과는
싸운 경험이 별로 없었던 거고요 누루
아치의 뒤를 리은 홍타이지는 몽골족
병합후 몽골인들로 구성된 팔기 몽골을
조직하고 청나라에 기방 있는 세계
최강이었던 입권 후 중국 전체를
차지한 청나라는 한죽 돌로 구성된
부대 노경의 별도로 조직했습니다
노경은 보병 위주에 조총과 화포로
부장한 화기 중심이었습니다 청나라가
영리했던게 중국 남방의 명나라 부흥
세력을 진압하는데 팔기군 보다는 노경
더 앞세웠습니다 물론 한족들을 한족들
제압하게 한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중국의 군사사 살펴보면
북방의 병력이 남방을 공격하거나
남방의 병력이 북방을 공격하면 서로
다른 전술 차이로 인해 실패하는
경우가 있죠 그러나 청나라가 명나라
부흥 세력에 진압할 때는 같은 전술로
쓰는 노경으로 투입해 효과적으로
진압했고 더불어 그동안 기병 위주의
청나라도 한쪽들로부터 화기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화기에 대한
이해도와 능률을 높입니다 청나라의
국내가 얼마나 강했는지 청나라의 정복
전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청나라의 4대 왕제 강희재 때는
대만을 정벌하고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을 저지시키고 최후의 유목
제국이라고 하는 서몽골 중가르 제국의
건설자 갈단 칸을 물리쳐 중가르
복속시켰다 육대 왕제 관제는 10전
무공이라 하여 중가로 완전히 멸망시켜
놓 위구르의 편입시켰고 티베트에서
종족이 반란을 일으키자이를 진압한 뒤
네팔까지 진출했으며 미안마 원정에
나서기도 또 베트남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수구는 확실히 약했습니다
명 나라나 청나라는 강력한 해금
정책으로 방어를 위한 수군이 있을뿐
정복전쟁을 위한 수군은 아니었습니다
대만 정벌도 수군으로 이루어진게
아니라 그저 육군을 대만에 수송하는게
전부였죠 항저우 지인의 청나라 수군
기지를 배치하였으며 대부분 한족들
일부 팔기군 있었지만 정말 최소한의
병력이었다 걸제 말기부터 청나라
황실이 부패해 있고 청나라 정보은
사치스러워이고 태만해면서 8기의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게 전성기
시절에 그 청나라 병력에 만나 싶을
정도로 그 군사력이 하락합니다
유럽에서 근대식 무기가 만들어지고
있을 때도 청나라는 무심했지 그
결과는 아편 전 태 뼈 아픈 치욕으로
돌아왔는데 청나라 함대 29 척이
영국 배두 척 그것도 정식 군함이
아니라 동인도 회사 소속의 호위선
정도였는데 청나라 29척 중에서
2척이 괴멸된 영국의 배는 근대식
철갑선이고 청나라 배는 목선인데 뭐
당연한 결과였죠 태평천국 운동 때는
반란군을 진압하러 간 팔기군 기병대로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태평 천국 군을
진압했던 건 각 지방별로 일종의
자경단이 할 수 있는 향용이라는
부대였고 훈한 성에서 중국본이 조직한
상군 혹은 안후이 성에서 이홍장이
조직한 회군 등이 있었습니다 이후
청나라가 정식 개항하면서 중국본
이용장 좌종당 등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했던 한족들을 등용해 일명 양무
운동이라고 군대 근대화에 착수합니다
수저 후에 중국 최초로 서양식 무기
공장 양파국 만들고이를 상하이로
옮기면서 강남 기기 제조 총국은
만들었습니다 난중에는 금릉 기기국
만들어 역시 서양식 무기들을
제작했고요 좌종당계 주도하에 푸저우
선정 국에서 윤선이 증기선에
만들어졌고 텐진의 천진 기기 국과
군화 기기 총국이 문을 열었죠 강남
기기 제조 총국 금릉 기기 제조국
천진 기기국 군화 기기 청국을
양무운동의 4대 군수 공장으로
꼽습니다이 외에도 전국적으로 총
24개의 중소 군수 공장들이 있었죠
또 텐진의 무비 학당이 일종의
사관학교를 만들어서 근대식 교육으로
젊은 장교들을 육성했습니다 양무운동의
노력들이 누적되어 북양 함대 남양
함대 복권 함대 총 세 개의 함대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중 남양 함대
와 복권 함대는 1884년부터
1885년 청프 전쟁의 패배로
사라졌고 이후로 청나라 정부는
이홍장의 북양 함대의 지원을 몰빵한다
이홍장의 북양 함대 중 독일제 정원함
그 진화함 Once 배수량 7,000
톤의 막대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죠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함대였다 영국이나 독일의 해군과도
만먹는 규모에 25 척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태후가 부양
함대에 대한 지원을 끊어 버리고
이홍장 자신의 권력 기반 일까봐
전쟁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다가이
강한 남대가 1894년에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그 영광을 잃습니다
청일 전쟁 패전의 책임으로 이홍장은
물러나고 이홍장의 후임이었던
위안스카이가 다시금 북양 군대 재건을
꾀했고 북양 군대는 어느 정도 회복을
했지만 청나라의 정식 군대라 보다는
위안스카이 개인 병력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북양 군벌이 부르죠
1901년부터 서태후도 근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정이라는 대대적인
근대화 개혁에 들어 들어가고 무비
학당을 전국적으로 확대했으며 각
지방별로 신군이 아는 근대식 부대를
창설합니다 다만 이미 중국 전역에
만주족 청나라 정부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기에 각 지방별 신구는 옛날에
그 향용 럼 청나라 조정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뭐 자기네 지방만 지키자
않은 자치적인 성격이 훨씬 강했습니다
더불어 각 지방별 신군은 청나라를
타도하고 한 종 만에 공화 정보를
수립하 자는 공화파 젊은 사람들이
포진에 있었고 결국 1911년 신해
혁명이 터졌죠 청나라의 중앙군이 할
수 있는 정규군은 사실상 위안스카이
개인 병력이나 다름 없던 북양 군벌이
위안스카이는 도리어 청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자기 군벌의 지지에
힘입어 베이징 정부를 수집합니다
위안스카이 사 후에는 부경 군벌이
환기 군벌 직계 군벌 봉천 군벌로
쪼개졌습니다 각 지방별 신군은 베이징
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며 지방
군벌로 되었죠 따라서 청나라 멸망
직후에는 위안스카이 부하들에 수립한
베이징 정부의 군벌들 각 지방의
군벌들 분류되었고 순원 그리고
수원에서 이어지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남방의 지방 군번들은 이장이나
예시장 같은 지방 군번들은 북벌에
나서 베이징 정부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세웠던 겁니다 이후
장제스는 지방 군벌들을 통합시키는
과정의 연속이었죠 다만 1949년
국공 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군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에게
패배하는데 마오쩌둥의 공산군 이른바
오늘 날의 중공군은 중국 공산당
초기에 1차 국공 결렬 후 조직한
홍군의 시작해 1937년 중일 전쟁에
투입되기 위해 2차 국공 합적으로
홍군은 팔로군과 신사군 발전하고
마지막 국공 내전 된 중공군이 된
겁니다 국공 내전 시작 때까지
중공군이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국민당군의 상당수가 중공군을 이탈해
버리죠 그리고 625 때 투입된
건데이 중공군은 홍군 때의 항쟁 중일
전쟁 국공내전을 연이어 겪었기에
625 때까지만 해도 야전 경험이
상당했던 베테랑들이 있죠 그러나 이후
1년에 공산주의 특유의 그 비효율적인
부대 운영으로 군사 매우 약화되었다가
덩 쇼핑 이후 현대와 개혁을 거쳐
오늘 날의 중공군에 이어지는 거랍니다
그럼 역사 도박이었다이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