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전 세계가 미쳐서 싸우던 첫 번째 전쟁, 1차세계대전 몰아보기 통합본

역사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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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비디오 조회수·2024. 12. 31.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당시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일종의 속국처럼 되어있었습니다.
이날은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군의 군사훈련 행사가 있었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퇴자였던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조피가 결혼 14주년 기념으로
이날 행사에 참석하러 사라예보를 방문할 예정이었죠.
황퇴자 부부와 그 수행원들은 오전 차 4대를 타고
기차역에 내려서 행사장으로 이동 중이었는데
총성이 들리더니 곧이어 차 한 대가 폭탄을 맞아 폭파되었습니다.
다행히 총성은 황퇴자 부부를 피해 갔고
폭파된 차는 황퇴자 부부 차량은 아니었죠.
우선 황퇴자 부부 일행은 사라예보의 시청으로 급히 도망갔고
지금 행사보다는 부상자들을 확인해야겠다며
황퇴자 부부는 병원으로 가기로 합니다.
황퇴자 부부가 병원으로 가기 위해 시청에서 나오는 순간
암살범이 나타나 총을 쐈고
황퇴자 페르디난트는 머리에 아내 조피는 복부에 총을 맞고 사망합니다.
일명 오스트리아 황퇴자 부부 암살 사건
혹은 사라예보 사건이라고 부르죠.
범인은 세르비아의 극단적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모여 결성한 비밀단체 검은손의 소행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오스트리아에선 이 사건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겠죠.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단순한 전쟁이
인류사 최악의 전쟁 중 하나였던 1차 세계대전으로 번질지
그렇다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단순할 뻔했던 전쟁이
어떻게 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던 걸까요?
1차 세계대전은 도대체 왜 일어난 걸까요?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사라예보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사라예보 사건은 그저 기폭제였을 뿐
1차 세계대전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원인은 다른데 있었고
당장이라도 1차 세계대전이 터질 것 같은 상황에서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고 말았던 거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진짜 이유
1차 세계대전 시리즈 1부로 다뤄보겠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단순하게 말한다면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가 되면 유럽 메인 국가들은 산업혁명을 거치고
해외로 나가서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릴 때였습니다.
영국이야 뭐 몇 세기 전부터 아시아 곳곳으로 진출하고 있었기에
이미 여러 식민지들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영국보단 다소 뒤늦게 산업혁명을 이룬 유럽의 국가들이
이제서야 아프리카 혹은 아시아로 가서
자신들만의 식민지를 개척하려고 했습니다.
19세기면 이미 이전부터 유럽 사회 곳곳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이 누적되다 보니
이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로 비대해집니다.
독점 자본주의란 한 개의 집단이 혹은 소수의 집단이
다른 경쟁 세력들을 다 물리치고 자본을 독점하려는
극단적 자본주의를 말합니다.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뒤처진다는 이론이 당연시 여겨졌고
이를 증명하는 게 이때 유행했던 사회진화론입니다.
사회진화론이란 인간 혹은 인간이 이루는 사회에
진화의 정도로 우열을 가리고
열등한 사람 혹은 열등한 사회 혹은 열등한 국가는
월등한 존재에게 지배를 받는 편이 서로 좋다는 이론이죠.
영국의 키플링이란 작가는 백인의 친구라는 저서에서
우월한 백인은 미개한 타 인종을 교화할 책임이 있다는
이따위 망언을 짓거리기도 했고
당시 유럽에서는 이런 망언이 망언이 아닌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였습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국가들의 침략적 이유로 진출해
그들을 식민지로 만드는 국가의 논리를 제국주의라고 하고
유럽의 열광들은 다들 제국주의 국가가 되려고 했죠.
우선 아프리카, 아시아의 식민지를 확보해 놓은 독보적인 국가는
역시 영국이었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영국의 팽창에 제동을 걸려고 했죠.
우선 아프리카의 경우를 보면
영국은 이집트, 수단, 우간다, 케냐 그리고 아프리카 남단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를 잇는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펼치려고 했습니다.
1899년에서 1902년까지 영국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차지하기 위해
이미 그곳에 나라를 수립하고 있던 네덜란드계 백인들의 국가와 싸운
보호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보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끝내 남아공까지 차지하죠.
반면 프랑스의 경우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사하라 사막의 서부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 동쪽에 있는 섬 마다가스카르를 연결하는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펼치려고 했습니다.
종단정책을 펼치려는 영국과 횡단정책을 펼치려는 프랑스 사이에
충돌이 불가피하겠죠.
전쟁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전쟁까지 갈 뻔했던 파쇼다 사건이라고도
있었습니다.
아시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은 인도에서 벵골 지방을 거쳐 더 동쪽의 동남아로 진출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리상 육로로 인접한 미얀마 와 해로로 인접한 말레이반도를
먹었죠.
반면 프랑스는 동남아시아 동쪽 그러니까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를 먹고 서쪽으로 진출할 예정이었 죠.
그렇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태국 에서 충돌할 수 밖에 없겠죠.
하지만 1904년 영국과 프랑스는 영불협상이라고 아프리카에서든 아시아에서든
서로 식민지 쟁탈 경쟁을 중단하기로 극적 합의를 봅니다.
이 두 앙숙이 극적 합의를 본건 공공의 적이 나타났기 때문이죠.
바로 독일이었습니다.
독일은 1871년 제국으로 통일된 당시 로서는 신생국가였습니다.
신생국가이지만 독일 제국은 빠른 시간 내에 산업혁명을 이루고 국가
가 발전하고 있던 터라 영국과 프랑스 가 긴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일 제국은 그리스가 있는 발칸 반도와 중동의 바그다도로 진출
하려고 했거든요.
독일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뒤처지면 안된다고 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동맹을 맺습니다.
그럼 딱 유럽이 동소로 갈려서 신경전 을 벌일 수 있잖아요.
또 우리나라 거문도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러시아랑 영국이랑도
경쟁했어요.
그런데 러시아가 오스만트리코 와 전쟁에서 승리하고는 그리스가
있는 발칸 반도를 영토로 넓힙니다.
이건 사전에 협의가 안되어있어서 발칸 반도 바로 옆에 있는 오스트리아
는 러시아의 남진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이때 독일 제국이 1878년 같은 동맹 끼리 싸면 어떡하냐고 중재에 나서
주겠다고 했는데 독일 제국이 내린 판결이 오스트리아에게 더 유리
했던 거죠.
독일 제국이랑 오스트리아가 역사 적으로나 혈통적으로나 가까운
사이거든요.
이러면 러시아 입장에서 더이상 얘네 둘이랑 동맹 못하죠.
그래서 러시아는 1907년 영러협상 으로 독일 제국의 경쟁자인 영국
과 붙습니다.
영국은 이미 프랑스랑 영불협상 을 맺었으니 그럼 프랑스 영국
러시아 이 세 국가들끼리 3국 협상 을 맺게 됩니다.
한편 아프리카 튀니즈를 두고 이탈리아 가 눈독을 들여서 프랑스랑 싸우
거든요.
또 아프리카 모로코를 두고 프랑스 랑 독일도 싸웁니다.
이러면서 이탈리아가 독일에게 붙습니다.
따라서 독일은 기존의 오스트리아 와 이탈리아까지 3국 동맹을 맺
죠.
따라서 유럽의 판도는 세계 식민지 쟁탈을 두고 3국 협상과 3국 동맹
으로 나뉘죠.
한편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발칸반도를 가보겠습니다.
190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제국 이 발칸반도의 국가 중 하나였던
보스니아를 합병합니다.
보스니아의 수도가 사라에 보고요 .
그런데 러시아가 오스만 트리크 내쫓고 발칸반도까지 진출했잖아요
.
러시아 입장에서는 자기 영역에 오스트리아가 툭 튀어들어온거
에요.
러시아는 발칸반도 내 다른 국가 들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닉으로
그리스를 묶어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팽창에 그리고 이 지역 회복을
호시탐탐 원하는 오스만 트리크 에 저항하도록 지원해주었습니다.
너희끼리 뭉치라고 러시아가 이 발칸동맹을 맺어준건데 아니 그런데
얘네끼리 싸우는겁니다.
발칸동맹이 오스만 트리크를 물리 쳐 발칸반도를 사수한게 1차 발칸
전쟁이고 얘네끼리 싸운게 2차 발칸 전쟁이죠.
발칸동맹끼리 싸운 과정에서 세르비아가 굉장히 크게 확장했습니다.
그런데 보스니아를 합병해 발칸반도 진출을 노리는 오스트리아가 러시아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를 가만둘 수가 없었죠.
오스트리아가 나서서 세르비아의 확장을 막았고 이러니 세르비아
에서는 오스트리아라면 거품을 물 수밖에 없던겁니다.
이 사건이 바로 1913년의 일이고 이듬해 1914년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
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들에게 암살
당했던겁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 에 선전포고를 하는데 보스니아에
이어 세르비아까지 먹으려는 오스트리아 를 러시아가 가만두겠습니까
그럼 어디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랑 단독으로 싸우겠습니까
자기 3국 동맹국인 독일 제국과 이탈리아 데려오죠
아니 어디 오스트리아만 동맹 있나
이 러시아도 3국 협상국인 영국 프랑스 를 데려오는겁니다
이렇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거죠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의 더 근본적인 원인이 숨어져 있었으니
인류사 일어났던 모든 전쟁들이 왜 일어났냐고 물을 때
돈 때문이라고 대답하시면 열의 아홉은 맞습니다.
발칸반도를 두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싸울 때 독일이 오스트리아
를 돕고 영국이 러시아를 도운 게 그저 자기 동맹관계에 있는 친구
도와주자고 참전한게 아니었습니다.
사라에보 사건이 있고 한달 뒤 1914년 7월 말 영국에서 영국은행의
어음 할인률을 대폭 늘렸습니다.
어음이 할인되어 거래하기가 훨씬 편해지니깐 유럽의 자금 상당수가
영국으로 쏠리기 시작했죠.
독일에 있는 자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일 내에서는 대량인출 사태가 벌어졌고 그 돈의 흐름이 하필 경쟁국
워낙 많은 자금이 독일에서 빠져나가니까 독일 정부는 금 퇴완을 중단해버립니다.
이때까지 말해도 세계는 근본위제로 화폐가치의 기준이 금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자금이 인출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금과 자본 퇴완을 금지
시켜버린겁니다.
더불어 국채를 막 발행해서 자본 의 해외 유출을 막으려고 했죠
그런데 뭐 국채도 누가 사줘야 하는 거지 근본위제에서 금 퇴완 금지
시킨 바닥에 누가 국채를 사려고 하겠습니까 역효과만 내는거죠
독일은 영국으로 유출되는 자본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는 겁니다.
이때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랑 싸움이 터졌네 만약 독일이 전쟁에 참전
해서 이긴다면 전쟁 배상금을 받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속전속결로 전쟁의 우위에 점한 채 강화조약으로 전쟁
배상금을 얻어내서 자금 확보를 할 수가 있죠.
반면 영국 입장에서도 영국이 전쟁 의 승리에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금
을 뜯어낸다면 영국은 엄청난 양의 자본을 확보하고 독일을 경제적으로
완전히 붕괴시켜버릴 수도 있죠 바로 독점 자본주의의 논리입니다.
서로 자기가 이긴다는 전제를 두고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겁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이 이렇게도 끔찍하고도 멈출 수 없는 기나긴 전쟁이 될
이라곤
1914년 8월 2일 프랑스부터 족취를 하는 독일이 룩셈부르크를 점령
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독일 제국은 이 경제위기를 전쟁 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해 전쟁
배상금으로 전부 회복할 부품 꿈을 꾸고 있었죠.
하지만 독일의 위치를 본다면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즉 지리적 특성상 독일은 포위되어 양쪽으로 싸워야 한다는 불이익
이 있는데요.
이에 대해 독일의 작전은 이랬 습니다.
독일 제국은 동쪽에 있는 러시아 보다는 서쪽에 있는 프랑스부터
제압하는 것을 우선시 이겼습니다.
왜냐하면 러시아 같은 경우 병력 을 모아서 전선까지 오는데 거리
상 시간이 꽤 걸릴게 분명했으며 또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막아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러시아와 싸우게 될 동부 전선에는 당장은 소수의 병력만
주둔하고 나머지 독일 제국의 주력 은 프랑스를 빠르게 제압하는 것이
독일 제국의 작전이었습니다.
6주 독일 제국의 목표는 6주 안에 프랑스를 무력화시키는 것.
왜 6주냐면 러시아에서 대군을 조직 해 동부 전선까지 오는데 6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죠 .
이 계획을 독일 제국의 육군참모 총장이었던 알프레트폰 슐리펜
이 세웠다고 해서 슐리펜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슐리펜 계획은 그저 러시아 군이 오는 동안 그 사이에 프랑스
를 제압한다가 끝이 아닙니다.
슐리펜 계획의 관건은 어떻게 6주 안에 프랑스를 제압하는 하죠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는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있습니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굳이 지나치지 않아도 되고 또 네덜란드는 중립
을 표방했기에 네덜란드는 1차 세계대전의 화를 피할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시르나조르나 독일이 지나쳐야
해요.
그런데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아르덴 숲이라고 있는데 이 숲이
워낙 울창한 숲이라 지나치기가 힘들죠.
그래서 독일 제국군은 아르덴 숲 을 피해서 프랑스로 진격하려고
했는데 아르덴 숲 양옆으로 룩셈 부르크와 벨기에가 있었던 거죠
.
우선 1914년 8월 2일 프랑스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룩셈부르크를
독일 제국군이 점령합니다.
룩셈부르크는 워낙 작은 나라고 곧바로 프랑스이기 때문에 당연히
룩셈부르크를 통한 프랑스 침공 이 메인인줄 알았으나 이건 독일
제국의 페이크였습니다.
독일 제국의 메인은 벨기에를 통해 크게 돌아 프랑스로 침공하는 루트
였죠.
우회하는 것이기에 이 기동이 마냥 쉽지만은 않지만 벨기에를 통해
크게 돌아 프랑스로 침입하면 룩셈부르크 쪽에 있는 독일 제국군과 함께 프랑스
를 포위해버릴 수가 있단 말이죠 .
그러니까 벨기에를 크게 우회하는 게 핵심입니다.
하지만 벨기에도 네덜란드처럼 중립을 표방했단 말이죠.
독일 제국은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8월 3일 벨기에를 침공합니다.
이에 영국은 독일 제국이 중립국 인 벨기에를 침공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다음 날 8월 4일 영국도 독일에 선종포고를 합니다.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했다는 건 명분이고 영국도 독일을 빨리
이겨서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금 가득 빼앗고 경기 호황을 누릴 생각
이었죠.
그런데 독일의 슐리펜 계획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약 10년 전에
이미 독일 제국에서 슐리펜 참모총장 이 만들어 놓았던 플랜이었습니다.
즉 사라이보 사건은 정말 핑계고 독일 제국은 언젠가 영국 프랑스
와 전면전을 치를 것이라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죠.
1차 세계대전 지음에는 슐리펜이 죽고 몰뜨케라는 사람이 육군 참모총장
이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의 핵심은 벨기에를 크게 우회해 파리를 포위하는 전략
이기에 당연하게도 룩셈부르크 방면보다는 벨기에의 방면에 더
많은 군사들을 모아야 하겠죠.
슐리펜이 생전 슐리펜 계획을 세울 땐 벨기에의 방면 군사의 수가
룩셈부르크 방면 군사의 수의 7배 가량 더 많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몰뜨케가 1차 세계대전 때 편성한 차이는 7배가 아니라 3배
정도만 많았습니다.
그리고 너무 먼 거리를 행군하느라 병사들이 꽤 지쳐있었고 철도 수송
능력도 독일 제국이 예상했던 것 만큼 뒷받침해 주질 못했죠.
또 벨기에 군이 꽤나 저항합니다.
여러모로 계획했던 것보다 벨기에 방면 독일 제국군의 기동력이 매우
떨어졌죠.
그리고 동부전선도 독일 제국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독일 제국은 러시아가 대군을 조직 해서 전선까지 오는 기간을 6주로
계산해서 그 6주간은 동부전선에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하고 그 사이에
프랑스를 제압하는 것이었잖아요 .
그런데 러시아군이 3-4주 만에 온 겁니다.
그것도 무려 80만 반면 독일 제국 은 16만
사실 러시아군이 오는 기간 이 6주 는 정확한 계산이었습니다.
그런데 3-4주 만에 왔다는 건 그만큼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의 이세의
고집으로 러시아군이 강행군을 했다 는 건데
그래서 러시아군은 이미 지쳐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군의 암호체계가 워낙 허접해서 러시아군 작전이
독일 제국군에게 다 새어나가고 있었죠.
독일 제국군 내 작전참모였던 호프만 중령은 러시아군 암호를 해독하여
작전을 수립합니다.
러시아군 80만은 40만 40만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더 먼 거리를 와 더 지쳐있을 제2군부터 조지기로 합니다.
독일 제국군은 1개 기병사단으로 제1군의 실선을 끊은 사이
나머지 부대는 전부 러시아 제2군 을 향해 진격했고
타넴베르크에서 철통같은 포위망 을 구축해두었죠.
1914년 8월 28일 러시아 제2군은 독일 제국의 포위망에 제대로 걸려 버렸고
일방적으로 포위섬멸전이 벌어집니다.
러시아 제2군의 사령관 삼소노프 는 러시아 제1군의 사령관 렌넨
캄프에게 지원 요청을 합니다.
이 삼소노프와 렌넨 캄프는 러시아 군부 내에서 아주 유명한 앙숙이
었습니다.
과거 러일전쟁 때도 두 사람이 사령관 이었는데
렌넨 캄프의 부대가 일본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삼소노프에게 구원 요청을 했는데 삼소노프가 지원 부대를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인지 타넴베르크 전투에서도 삼소노프가 렌넨 캄프
에게 지원 요청을 하자 이번엔 렌넨 캄프가 지원 부대를 보내주지 않았
죠.
결국 러시아 제2군 40만 중에서 12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삼소노프는 자결합니다.
러시아 제2군을 박살낸 독일 제국 군은 전력을 다해 러시아 제1군
으로 향했고 러시아 제1군을 마수리안 호수까지
벌앗은 뒤 8월 31일 역시 포위 섬멸전을 통해
러시아 제1군도 12만 명이 전사했 죠.
이 전투가 타넴베르크 전투이며 러시아군 총 포로가 9만 명이 넘었
다고 합니다.
타넴베르크 전투는 러시아군이 뻘짓을 한 것도 있지만
독일 제국군의 사령관이었던 힌든 부르크의 지휘 능력도 높은 평가
를 받고 있습니다.
타넴브르크 전투는 독일 제국의 대승리인지라
동부전선 측이 뭐 해결이 됐겠지 싶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독일 제국의 몰트케 참모총장은 러시아군 80만이 온다는 사실에
기겁해
슐리펜 계획을 수행하고 있던 서부전선의 병력
1개 군단을 동부전선으로 보냅니다.
벨기에를 크게 우회하려면 병력이 많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이 병력을 빼버린거죠.
갑자기 날 벨기에 방면 독일 제국 군의 병력도 빠지고
철도가 많이 파괴되어 있었고 지쳐있고
또 벨기에군이 선전을 하니까 빠르게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로
들어가야 하는 루트가 이미 벨기에 에서 막혀버린겁니다.
이대로라면 6주안에 프랑스 제압 은 이미 불가능했습니다.
당장 프랑스 진입도 못하고 있잖아요 초장부터 슐리펜 계획이 망해버린
거죠.
또 오스트리아도 예상치 못한 빌런 이었습니다.
독일 제국이 슐리펜 계획을 성공 하려면
오스트리아도 러시아군을 어느정도 막아줘야 했습니다.
문제는 오스트리아군이 예상외로 군사력이 약했고
또 오스트리아는 슐리펜 계획을 몰랐죠.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긴밀한 연락이 안되었던 겁니다.
이 오스트리아는 발칸반도에서 세르비아와 다른 발칸반도 지역에서
계속 공격을 받으며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지구 곳곳에서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를 보자면 아프리카 국가 들이 거의 대부분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잖아요.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영국군 프랑스군 벨기에군 독일군이 주둔하고 있었
기 때문에 각자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의 편에서
아프리카 국가들끼리도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또 아시아 전선으로 가보면 일본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일본이 영국과 영일 동맹을 맺고 있었고
실제로는 일본은 이 기회에 중국으로 진출할 명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죠.
당시 중국의 산둥반도는 독일 지배에 있었는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니까 산둥반도를 사수하는 독일 병력 태반을 빼내어
유럽으로 오라는 지시가 떨어집니다.
산둥반도에는 최소한의 독일 병력이 있었고
일본은 이때를 틈타 1914년 11월 산둥성의 칭따오 전투 승리 후
칭따오의 독일 제국군 기지를 장악 산둥반도에 일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중국에서는 중화민국의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가
일본의 자본과 군사력으로 중국 내 혁명파 세력을 진압하고자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전부 수용해 주어 산둥성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일본에게 넘겨주죠.
한편 원래 산둥반도를 사수하고 있던 독일 병력 중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독일은 sms 엠덴의 산둥반도에서 나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 보냅니다.
인도양에서 영국의 무역선 병참선 등을 파괴하라고 했죠.
1914년 9월에서 10월 sms 엠덴은 인도양의 영국 선바들을 격침시키거나 털어먹었고
심지어는 유류창고를 박살내버려 인도양에 있던 영국 선박들을 마비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sms 엠덴은 단독적으로 동남아시아로 가서
말레이시아 패낭 부근에서 러시아군 장갑순양함과 프랑스군 구축함을 격침시키기도 했죠.
하지만 1914년 11월 남태평양 코코스 제도에서 호주의 경순양함 hmas 시드니의 습격을 받아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또 태평양 곳곳에도 독일 함대가 있었는데
맥시밀리안폰 슈페 제독이 독일의 태평양 전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귀국 중에
1914년 11월 남미의 칠레 서부 코로넬 해전에서 영국의 순양함 두 척을 침몰시키는 성과를 냈지만
그 다음 달인 1914년 12월 아르헨티나 남동부 바다 포클랜드 제도에서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아 순양함 5척 중에서 4척이 침몰하면서 독일의 태평양 전대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즉 독일의 해군도 1차 세계대전 초기부터 무력화 되어버렸다는 거죠.
이렇게 처음부터 망해버린 독일의 슐리핀 계획 그렇다면 이에 대한 독일 제국의 다음 계획은 무엇이었을까요?
흔히 1차 세계대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참혹한 진창의 참호전일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은 서부전선에서 전개되었는데 그렇다면 서부전선은 어쩌다 참호전으로 번졌던 것일까요?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의 참호전은 망해버린 슐리핀 계획에서 시작합니다.
지난 1차 세계대전 2부 영상에서 소개해드렸듯 독일은 슐리핀 계획에 따라 룩셈부르크에서 프랑스의 시선을 끌면
그 사이 독일 제국군의 주력은 벨기에를 우회해 크게 돌아 프랑스의 파리를 포위할 계획이었죠.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철도 수송 능력이 생각보다 원활하지 못했고
너무 먼 거리를 건너라 병사들이 지쳐있었으며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이 너무 빠르게 들어오자 독일 제국의 몰드케 참호총장을 서부전선에서 1개의 군단을 빼내 동부전선으로 보내면서
충분한 병력 확보가 관건인 슐리핀 계획에서 군사수가 부족해집니다.
그리고 벨기에 군도 예상외로 선전을 하고 있었죠.
이렇듯 6주 안에 프랑스 파리를 포위한다는 슐리핀 계획은 초전부터 무너졌고
그 슐리핀 계획이 망해버렸다고 선고를 내려버린 전투가 마른 전투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어느정도 영국 프랑스 도 독일의 슐리핀 계획을 눈치채자
영국군과 프랑스 군도 벨기에 전선으로 병력을 증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제국군은 조금씩 조금씩 각 지역에서 영국 프랑스 협상군을 상대로 소규모 승종고를 울리고 있었고
이렇게 영국 프랑스 협상군이 밀리고 후퇴하고 이에 독일 제국군이 더 진격하는 패턴이 반복되면서
어느새 독일 제국군이 프랑스로 진입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미 6주는 지났지만 그래도 프랑스로 들어오는 데는 성공한 거죠.
하지만 독일 제국의 몰트케 참모총장은 파리로 진격해 파리를 포위하기보다는
철수하는 영국 프랑스군을 전멸시키는 쪽을 선택해서
현장에 있는 독일 제국군에게 파리로 가지 말고 영국 프랑스군이 모여있는 방향으로 길을 틀라고 지시합니다.
이 때 프랑스 측 사령관도 작전을 바꾸어 무작정 철수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며 영국 프랑스군의 모든 힘을 모아 독일 제국군에게 반격을 가하기로 하죠.
그래서 양측이 파리 외곽의 마른강 유역으로 모이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의 파리가 근처에 있다 보니 파리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송차들을 다 끌어모아 물자를 나르기 시작했죠.
이 전투가 마른 전투입니다.
마른 전투에선 영국 프랑스군이 이 악물고 반격에 나서자 독일 제국군은 당황하여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조금씩 뒤로 밀리는 형국이었죠.
항공정찰을 하던 영국의 항공기가 독일 제국군 중 제1군의 방어가 다소 취약한 것을 알아내고
1914년 9월 7일 프랑스군은 독일 제국군 제1군의 측면을 집중 공격했습니다.
겨우 막아내기는 했지만 1년의 전투들이 누적되면서 독일 제국군의 제1군과 제2군 간격이 너무 멀어진 겁니다.
이러면 긴밀한 상호 협조가 안되기에 만약 그 사이를 협상군이 비집고 들어오면 독일 제국군은 무너질 수밖에 없죠.
실제 영국군은 독일 제국군 제1군과 제2군 사이로 들어와 차단하려고 했고요.
이대로 가다간 전멸의 위험이 있기에 독일 제국군 제2군이 먼저 벨기에 쪽으로 다시 철수해버립니다.
제2군이 철수한 바당에 제1군도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만 했죠.
결국 9월 11일에서 12일 독일 제국군은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지대에 흐르는 엔강까지 철수하며 프랑스 진입은 다시 좌절되었죠.
프랑스 입장에서는 파리 함락 직전에 마른강에서 독일 제국군을 내쫓았기에 프랑스에서는 마른 전투를 마른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답니다.
마른 전투로 인해 6주 안에 벨기에를 크게 우회해서 파리를 포위하겠다는 슐레핀 계획이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이 책임을 물어 독일 제국의 몰트케 참모총장은 해임되고 팔케나인 총장으로 교체되었습니다.
한편 영국 프랑스군은 독일 제국군을 벨기에 넘어까지 완전히 철수시키고자 엔강을 넘어 공격하지만
이번엔 독일 제국군의 반격에 실패했죠.
이렇게 프랑스 벨기에 국경지대에서 전선이 고척화되어버렸습니다.
독일 제국군도 여기서 물러나면 안되기에 그냥 프랑스 벨기에 국경지대에 눌러 앉아버립니다.
더 확실하게 자리 선점을 공고히 하기 위해 독일 제국군은 참호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니 영국 프랑스 벨기에 군도 똑같이 참호를 파기 시작했죠.
그런데 양측이 서로 더 길고 큰 참호를 파기 위해서 참호에 참호가 계속 이어지며 서부전선에서는 거대한 참호전이 전개되었죠.
최초의 참호전은 1914년 10월 벨기에 이프르에서 벌어진 1차 이프르 전투입니다.
9월 말에서 10월 초 벨기에의 엔투어프를 함락한 독일 제국군은 이프르 방면으로 진격하려고 했는데요.
이프르에서 영국군이 참호 속에서 방어하며 독일 제국군의 진격이 무력화됩니다.
독일 제국군은 더 정예병을 투입하면 돌파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해 정예부대를 투입했지만
역시 참호에서 대응하는 영국 프랑스군에게 기관총 세례를 받고 죽어 나갈 뿐이었습니다.
참호전은 공격하고 돌격하는 쪽이 무조건 피해를 보게 되어있습니다.
1차 이프르 전투에서 생각없이 돌진해서 죽은 독일 제국군 수가 무려 8만 명.
1차 이프르 전투에서 죽음의 피해를 본 독일 제국군도 이제는 생각없는 돌진이 아니라 참호전을 고수하는 쪽을 선택하죠.
이로써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참호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참호전이 왜 끔찍하냐면 일단 위생 상태가 최악이죠.
참호전에서 진격하기 위해선 우선 상대 측에 폭격을 엄청 때려야 합니다.
서로 폭격을 퍼붓다 보니 땅에는 웅덩이가 생기고
이때 비가 내리면 진흙이 형성되면서 진군이 더 힘들어집니다.
진흙을 밟으면서 진군하면 상대방 공격에 대응하기가 너무 힘들죠.
그리고 서로가 진지 앞쪽에 철조망을 무수히만해 설치해놓는데
철조망으로 적군의 진군을 더디게 만들 때 그때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 겁니다.
이 참호전으로 인해 기관총이 인류 전쟁사에서 본격적으로 극대화되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기관총이 만들어진 것은 한참 전이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리처드 게틀링이 군당 4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게틀링 기관총을 만든 게 시초였고
19세기 말 영국의 하이런 맥심이 게틀링 기관총을 더 발전시켜서 맥심 기관총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맥심 기관총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관총의 프로토타입입니다.
1차 세계대전 때 기관총이 처음 쓰인 건 아닙니다.
기관총은 주로 제국주의 열강들이 소지하고 있어서
이 제국주의 열강들이 치사하게 무기가 열악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약소 국가들 민족운동을 학살할 때 썼죠.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열강들끼리 서로 쏜 겁니다.
기관총을 쏘기만 했지 맞아본 적은 없는 국가들끼리 기관총 세례를 퍼붓다 보니까 피해가 극심하게 늘어날 수밖에 없었죠.
이러니 참호전이 얼마 지나지 않아도 이미 양측이 지쳐버린 겁니다.
의미 없이 사상자만 늘리는 참호전 이 지속되다가
어느덧 1914년 12월 25일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첫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양측이 서로 크리스마스만큼은 조금 쉬고 싶었던 겁니다.
양측의 참호 사이는 그래봤자 불과 몇백미터였어요.
그런데 한쪽 진영의 참호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기 시작하자
상대쪽 진영에서도 같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며 갑자기 크리스마스 캐럴 떼창이 되어버린 겁니다.
캐럴이 끝나갈 때쯤 독일군 참호 에서 한 병사가 크리스마스 트리
를 들고 참호를 나오더니 영국 프랑스 참호 쪽으로 오는게 아닙니까
그러더니 영국 프랑스 참호 쪽 에서도 영국군 프랑스군이 무장
하지 않은 상태로 참호에서 나왔 고 시간이 지나더니 양측에 더 많은
병사장교들이 참호에서 나와 서로 부둥켜 안으면서 선물을 교환하고
이 크리스마스 하루만큼은 싸우 지 않기로 합니다.
심지어 축구 시합도 했다고 하죠 .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바로 다음날 26일부터는 다시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호전이 시작했고 훗날 이 소식을 들은 양측 지휘부에서는 현장에
있는 너희들끼리 멋대로 싸움을 중단하는게 말이 되냐며 앞으로
상대측 진영에서 크리스마스 캐럴 을 들리면 폭격하라는 지시를 내리
죠.
한편 협상국이든 동민국이든 그들이 유심히 신경쓰고 있던 국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스만 투르크였죠.
오스만 투르크는 중립을 펴방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오스만 투르크는 영국 프랑스 독일 세 국가와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도움을 받고 있었죠.
오스만 투르크가 적대시하던 나라 는 러시아 뿐이었습니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는 독일과 조금 더 가깝게
지냈고 터키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는 길목
인 다르다넬스 해업을 독일군이 점거해버렸죠.
다르다넬스 해업은 고대시대에 페르시아 군이 그리스반도로 들어간
입구였으며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에 나설 때 출바지였던 매우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였습니다.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에 당장 협상국의 일원으로 싸울 것을 종용했으나
오스만 투르크는 자위반 타위반 으로 중립을 유지할 수 밖에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다르다넬스 해업을 점거한 독일 군이 흑해까지도 노릴 수 있는 상황에서
영국에게 오스만 투르크의 중립 은 중립으로 볼 수가 없었고
처칠은 오스만 투르크를 응징해야 한다며 다르다넬스 해업을 공격
해서 독일군도 내쫓자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처칠이 이토록 강하게 나온 이유가 있었는데요.
당시 처칠은 해군 장관이었고 유럽 본토로 보낸 영국 원정군 10만은
육군이었습니다.
육군의 활약이 입지가 좁아질까 불안했던 해군 장관 처칠은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육군의 지원 없이 해군 단독으로 다르다넬스
해업의 갈리폴리를 장악하고 2주 안에 오스만 투르크의 수도 이스탄보를
함락시키겠다고 자신했죠.
1915년 2월 프랑스 해군이 살짝 지원한 연합군 해군이 다르다넬스 해업으로
들어왔는데 좁은 해업의 양해안에 포대들이 질비해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해안포대의 집중 포화와 오스만 투르크 해군이 야간에
몰래 설치해둔 기례에 이 연합군 해군이 큰 피해를 입으며 상륙작전
이 무려 6주나 지연되었죠.
해군의 고전에 영국 정부는 결국 육군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영국 육군은 갈리폴리 뒤편 해안 에 상륙해서 해안포대를 뒤에서
제압할 계획이었는데 이 처칠과 영국군은 오스만 투르크의 군사력
을 너무 얕봤죠.
영국 육군은 상륙만 했을 뿐 진 군하지를 못합니다.
갈리폴리 상륙작전의 가장 큰 문제점 은 영국군의 축차 투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꺼번에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조금씩 나누어 군대를 보내는 방식
인데 이렇게 파편화된 부대는 오스만 투르크가 막을만 했던 거죠.
케말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투르크 군은 매우 용맹하게 싸웠고 1916년
1월까지 계속 병력만 잃어가던 영국 군은 퇴각을 결정했습니다.
채 1년이 안되는 갈리폴리 전투 에서 연합군은 57만 명 중 25만 명
이 전사했습니다.
연합군에 참여했던 호주군과 뉴질랜드 군의 피해도 극심했죠.
갈리폴리 전투는 영국의 아니 처칠의 대실패작이었고 갈리폴리는 처칠
에게 금기어였습니다.
자 그런데 이쯤 되면 여러분께서 의아해 하실게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협상국과 동맹국 의 대결입니다.
협상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싸우고 있고 동맹국 독일 오스트리아도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맹국의 일원이기도 한 이탈리아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저희 역사돋보기가 멤버십 가입 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