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4장의 일곱 번째 주제 실제를 보는 훈련을 요약합니다. 건강한 정신으로 살려면 생각과 실제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생각을 내려놓고 실제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아침에 눈 떠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뭔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잘관찰하는 것입니다. 잘 관찰해 보면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뒤섞여 있는데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단순화하다 보니 이렇게 뒤섞여 나타납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면 우리에게 입력되는 정보들을 자동화된 패턴으로 처리하게 됩니다. 관찰하는 연습들을 꾸준히 하다보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모르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으면 멈추게 됩니다 .
모르는 걸 모른다고 알고, 아는 걸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굉장한 지혜입니다. 생각, 감정, 선입견들이 머릿속에 너무 많이 들어 있을 때 마음은 혼란스럽습니다. 선정에 들었을 때는 마음은 명료해집니다. 선정에 들어가 평온과 집중의 마음만이 남았을 때 마음이 어떤 흔들림도 없이 뭐든지 정확하게 보게됩니다.
첫번째 질문 :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수행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두번째 질문 : 지혜라는 측면에서 모른다는 의미와 구체적 예를 알려주세요. 세번째 질문 : 초선정에 들었을때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란 무엇일까요? 네번째 질문 : 사전정까지 닦아 지혜의 눈을 꼭 얻어야 할까요?
사장의 일곱 번째 주제에 실제를 보는 훈련을 요약합니다.
건강한 정신으로 살려면 생각과 실제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생각을 내려놓고 실제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침에 눈 떠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잘 관찰하는 것입니다.
잘 관찰해보면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뒤섞여 있는데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단순화하다 보니
이렇게 뒤섞여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우리에게 입력되는 정보들을
자동화된 패턴으로 처리하게 됩니다.
관찰하는 연습들을 꾸준히 하다 보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모르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으면 멈추게 됩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아는 것이 굉장한 지혜입니다.
생각, 감정, 선입견들이 머릿속에 너무 많이 들어있을 때
마음의 아는 기능은 충분히 발휘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아는 기능은 선정에 들었을 때, 특히 사선정에 들었을 때 충분히 발휘됩니다.
사선정에 들어가 평온과 집중의 마음만이 남았을 때
마음이 어떤 흔들림도 없이 뭐든지 정확하게 보게 됩니다.
하루 종일 현재에 계속 집중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며
생각이나 의도의 내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종일 마음을 집중하는 것, 싸띠와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아는 것, 쌈빠짜냐를 지속하면
다른 것들이 끼어들 틈이 없어져 현재에 일어나는 것, 실제를 알게 됩니다.
기네요.
이제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제가 저의 경험으로는 젊어서는 현실을 굉장히 단순하게,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봤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흑과 백, 옳고 그름, 정의나 정의가 아닌 것, 도나 도가 아닌 것으로 보고
그런데 해결하려고 그러는데 뜻대로 안 되니까 이것저것 해보느라고 상당히 복잡하게 살았던 것 같거든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보니까 현실이 엄청 복잡하더라고요.
그런데 오히려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하는 것은 좀 단순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배우고 있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굉장히 단순한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주변에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면 점점 더 단순하게 사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제가 궁금한 게 이렇게 세월이나 나이가 들면서 이게 얻어지는 건지, 얻어져야만 하는 건지
만약에 초년의 수행이념을 만나서 정말 제대로 있는 그대로 보는 수행을 한다면
이런 세월이나 나이 드는 것 상관없이 좀 단축이 될까? 이런 생각도 해보는데
그렇지만 좀 단순하지 않은 게 부처님도 속세에서 많이 배우셨거든요.
왕자며 완전히 제왕 교육을 받았으니까 사실 기간은 짧았지만 엄청 많이 배우신 것 같거든요.
사실은 그리고 또 결혼도 하셔서 아버지나 남편 역할도 있었고
그래서 어느 정도 경험이나 세월이 있어야지 이렇게 좀 효과적으로 수행이든
뭔가 이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또 그런 거 없이 무슨 방법이 있어도
이 수행하는 시간이나 깨닫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건지 이게 좀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뭘 정확히 본다는 것은 정확히 보는 어떤 노력을 통해서 정확히 보는 거지
내가 선임이 됐다, 출가자다, 내가 또 교수다 이래서 정확히 보는 건 아니라고 봐요.
그러니까 우리 세상이란 것은 뭐 종교도 다르고 이념도 다르지만 우리는 현실을 공유하잖아요.
또 현실은 내가 볼 때는 인과의 법치상 일어나는 거예요.
그거를 이제 시간만 지난다고 난 된다고 생각은 안 해요.
시간을 이제 어떻게 보내느냐, 눈앞에 벌어지는 일일 때
아 이거 잘못됐다 이러면 그 사람은 배울 수가 없을 거예요.
일어날 때 일어날 만한 뭐가 있어서 일어났다 이래서 그거를 유심히 보고 거기서 배우는 사람은 배울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이제 제대로 배운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그런 걸 잘 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세호라는 게 있어요. 세월이 주는 깨달음, 암, 깨달음 이래서
세상을 충실히 살아보면 거기서 깨달음이 있는 거죠. 시행착오를 통해서.
그런데 이제 그런 거를 단축시킬 수 있는 뭘 하면 또 단축이 될 거예요.
이제 부처님 같은 경우는 아까 부처님 말씀하셨잖아요.
당대에 뭘 그런 걸 얻었다 이래 생각하시면 곤란해요.
이제 당대보다는 그 이전에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 바람미라는 게 있거든요.
지혜바람이. 우리가 뭘 정확히 아는 건 지혜예요.
그게 이제 완성되는 게 지혜바람인데 지혜바람이를 충분히 닦았기 때문에
왕자로서의 삶에서 보는 거를 지혜로 봤을 거예요. 내가 볼 때.
왕자 아니라도 마찬가지예요.
제왕의 교육을 안 받쳐도 나는 어디 태어나든 간에 기본이 되어있기 때문에
자기 눈앞에 벌어진 일에서 정확히 봤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해요.
어쨌든 우리가 과거의 노력에 이어서 보던 정확히 볼 수 있는 뭐가 있어야 보는 거예요.
또 정확히 보려고 노력해서 보던지 간에 뭔가 정확히 보는 사람의 그 과정을 거친 거예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거 없이 그냥 세월이 흘렀다, 직업이 잃었다, 이래서 난 됐다고 생각을 안 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어리석은 사람도 있잖아요.
그래서 궁지로 몰려서 자살한 사람도 있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뭘 얻으려면 얻을 수 있는 충분한 벌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제 이 수행자로서 나는 수행자가 또 출가한 사람만 수행자는 아니죠.
제가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정확히 아는 거를 지혜라고 본다면 난 지혜는 두 가지가 있다고 봐요.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지혜하고 또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지혜.
이 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가 무화를 깨친다, 무상을 깨친다, 또 어떤 궁극적인 물질 정신을 본다.
그거는 수행을 통한 지혜일 거예요.
그렇지만 또 사람을 잘 관찰해서 사람이 어떤 것에 따라 움직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왜 성공하고 왜 실패하고 어떤 사람은 대인관계,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은 왜 좋고
뭐 이런 건 또 수행하고는 달리 살아가면서 잘 관찰해서 얻는 지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수행자는 내가 볼 때 두 가지를 갖춰야 된다고 생각해요.
살아가면서 얻는 지혜와 수행해서 얻을 수 있는 지혜. 이 두 가지가 돼야 돼요.
왜 그러냐면 살아가는 데 대한 지혜가 없으면 수행에 지장을 받아요.
수행이라는 게 무인도에 가서 혼자 할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어떤 식으로든 사람하고 연결되고 어떤 식으로든 현실의 제약을 받잖아요.
그럴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럴 때 다른 사람하고 지혜롭게 교류하지 않으면 자기 수행에 영향을 받을 수 있어요.
그 다음 두 번째는 우리가 수행을 해서 뭘 깨달아요.
그럴 때 세상에 펴고 남한테 도움을 줄 때 세상적인 지혜가 있어야 효율적으로 할 수가 있어요.
뭐 모아놓고 무상이다, 뭐 무하다, 고다 이 말만 하면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잖아요.
그 세상 사람들에 맞게 거기서 뭘 하려면 세상의 어떤 이치, 이런 지혜도 나는 필요하다 봐요.
그래서 사람들은 수행체에 가면 세상적인 지혜 이런 걸 경시하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지금도 기억나는 게 하동에 있는 절에서 내가 수행할 때에요.
깊은 산중은 아닌데 마을에서 떨어져 있고 좀 높아요.
높은 데서 내가 가만히 보니까 강물이 보통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잖아요.
이게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거예요. 이상한 거예요. 내가 볼 때는.
그래서 내가 거기 일하시는 사무장이 있어요.
그분한테 내가 이상하다. 보통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게 왜 남에서 북으로 흐르냐고.
그래가 수행하겠어요? 이러더라고.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수행에만 전념하세요.
그 말도 일리는 있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분은 오래 살았으니까 그에 대해서 좀 왜 이래 이상한 현상이 있을까 하고 물어본 거예요.
그건 내가 볼 때는 물어보는 거는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지혜. 그것도 굉장히 중요하단 말이에요.
전쟁이 터졌다 칩시다. 이래 흐르니까 이게 북쪽, 남쪽이다. 갔더니 북쪽으로 가면 죽잖아요.
살아가는 게 중요하잖아요. 물론 그분은 수행에만 전념해라. 그것도 중요하지만 이것도 중요한 거예요.
그렇듯이 우리가 세속을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거. 그런 것도 되게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거는 단순히 시간만 그런다고 나는 되진 않아요.
그러니까 뭘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렇죠. 인간의 법칙상 알 수 있을 때는 알 수 있는 뭘 한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인데요.
박사님께서 계속해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아는 게 그게 지혜다.
그 지혜가 수승하다 이런 말씀을 여러 차례 하시는데요.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이게 진리의 말씀이신데
이런 거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시중에는 아예 모른다만 계속하는 명상도 있잖아요. 모른다 모른다.
그래서 이게 같은 의미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래서 지혜라는 측면에서 모른다라는 것의 의미와
이게 좀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예시를 들어서 좀 설명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방금 아까 세속에서 모른다 모른다고 수행했다니까
그 숭산선임이라고 있어요. 미국에서 영향을 많이 미친 분인데
그분 물어보면 돈 노 그랬다 그러더라고. 모른다는 거죠. 돈 노.
그 다음에 존 카파진이라고 있잖아요.
MBSR 만든 마음 챙김에 기반한 스트레스 감소 세계적인 작품이죠.
그분이 유튜브를 보니까 딱 앉아 가지고 뭐 하다가 이런 말하더니
I don't know. Who am I? 그러더라고. 난 모른다. 내가 누굴까.
그게 하여튼 모른다는 게 있어요.
왜 진짜 이게 중요하냐면 지혜란 것은 정확히 아는 거예요.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고 그게 지혜예요. 정확히 모를 때 모른다는 걸 아는 게 굉장히 중요한 지혜예요.
근데 모른다는 말을 한번 봐봐요. 모른다는 건 동사잖아요.
뭐를 모른다가 있잖아요. 있잖아요. 모른다 할 때는 그 사람은 뭐를 모른지를 아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모른다의 대상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거를 또 모른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요.
거기서 알고 싶으면 그 대상이 분명하니까 이거를 알 수 있는 길이 있을까 하고 찾겠죠.
그러면서 찾는 과정에서도 모른다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조금 알고 이거다 하고 끝나는 사람 있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지만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 모른다 모른다 하면서 정확하게 찾아가는 거죠.
요즘 이스라엘 사람인데 유발하랄이라고 있어요.
사피엔서스고 호모데우스 21세기의 스물한 가의 조언인가.
그분이 지금 거의 한 40대 후반 50대 초반인데 세계적인 사람이 됐잖아요.
이 사람이 내가 볼 땐 모른다를 잘 아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이미 많이 알려졌으니까 이야기할 수 있는데 동성애자예요.
그러다 보니까 얼마나 고통이 많았겠어요.
10대 때 누가 그랬어요. 명상 좀 해라 했는데 그걸 안 했어요.
그러다가 23살인가 24살에 고엔카 명상이라고 있어요.
거기 가서 여로를 하고 와서 썬 걸 내가 본 적이 있어요.
그거 보니까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는 90몇% 사실이 아니구나.
내 생각일 뿐이구나.
생각과 실제 이것을 관계를 하는 게 모른다.
이 사람이 영국에 가서 중세 전쟁사로 박사를 했거든요.
중세 전쟁사를 공부할 때 어떤 사람은 책 좀 보고 강의 좀 듣고 논문 읽으면
아 중세 전쟁이 이렇게 일어나서 할 거예요.
근데 내가 볼 땐 유발하랄은 자기가 안 봤잖아요. 모른다 할 거예요.
모른다는 게 엄청나게 사실에 가까운 걸 계속 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볼 때는 모른다가 언제나 작용하면 좋아요.
그러니까 알고 모르는 게 분명해야 돼요. 분명한 건 잊고.
우리는 보통 분명한 거에다가 불분명한 걸 막 붙여요.
그런데 확실히 아는 거 있잖아요. 이게 내 손이다 이거 알잖아요.
누가 나 때렸다 그러면 알잖아요.
근데 이래서 때렸다 그건 알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알고 모르고가 분명할 때 그걸 꾸준히 견제하다 보면 정말 알게 돼요.
그래서 모른다 이게 나는 알아가는 데 굉장히 중요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모른다 아는 지혜가 계속 돼야 돼요.
내가 이래 보면 사람들이 쉽게 안다 하는 게
어떤 사람은 그래요. 병원에 찾아온 나이 드신 분이 그래요.
나 안 아프고 죽고 싶다 그래요.
우리 불자들도 그런 말 많이 하더라고요.
내가 그래요.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으면 끝이지 뭐가 있어요 그래요.
그러면 죽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그 사람은 아직 모르면서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안 그래요? 그리고 또 우리가 사람을 보면
그 사람 마음속에 있는 걸 우리가 정확히 보면 어려워요.
타심통이 있으면 몰라도. 그러면 짐작은 갈 뿐이지 100% 모르잖아요.
그러면서 이 사람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도 그건 곤란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모른다는 게 정말로 잘 활용할 때
세상의 어떤 이치를 잘 알 수 있는 그런 좋은 그게 되고 치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보면 어려움이 있어서 찾아오잖아요.
그럼 그 어려움을 가져오게 된 걸 잘 보고 거기에 작업을 해야 이 사람 나아지잖아요.
안 그래요? 그럴 때 그 사람 이야기를 잘 듣고 분명한 거
분명하면 분명한 거예요.
그 다음 분명하지 않은 건 또 우리가 실험을 하든지
뭔가 지금 분명하게 이 사람한테 해가 되는 걸 하는 거는 멈춰보고
그랬을 때 어떤 결과가 오나 이런 걸 해야 되잖아요.
근데 이거다 이러면 곤란해지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문제가 생긴 걸 부모 자식 관계에서 생겼다.
그럼 곤란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이래 볼 때 어떤 사람이 문제가 있다.
그러면 그 문제가 언제 생긴지를 볼 때 그거는 분명한 거예요.
그렇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에 생겼다는 건 또 알 수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점을 모른다는 걸 잘 활용하면
잘못 보고 우리가 피해 볼 수 있는 게 많이 줄어들어요.
그래서 수행도 마찬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고
학문적인 활동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모른다가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모른다면 멈추게 돼요.
예를 들어서 주식이 이 주식이 올라갈 것 같다.
고급 정보를 아는 사람한테 들었기 때문에 올라갈 것 같다.
올라갈지 안 할지 다음 날 대봐야 알잖아요.
모른다고 유심히 보는 거하고 올라간다고 하는 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모른다면 멈추고 더 알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영향을 받게 돼요.
그래서 지금 보니까 진짜 지혜라는 게 아는 게 지혜가 아니라
모르는 걸 모르는 줄 아는 게 지혜래요.
그렇죠. 정확하게 아는 거예요.
그리고 그러면 멈추게 돼서 더 잘 보게 되네요.
그렇죠.
자기 걸 안 붙이는 게 중요해요.
우리는 자꾸 은연 중에 막 붙여요.
그렇죠.
네. 알겠습니다.
네. 그 다음에 세 번째 질문인데요.
초선정에 드는 것도 참 저희가 힘든데
어쨌든 초선정에 들었을 때는
일으킨 생각, 지속적인 고찰, 희열과 행복이 남아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경험을 하면 당연히 알겠지만
경험을 안 한 사람 입장에서 또 뭔가 좀 부족한 입장에서 봤을 때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하는 게
이게 어떤 상태일까? 이런 걸 좀 궁금하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명상할 때 초 집중해서 딱 어떤 상태가 됐을 때
이게 진짜 선정인가? 이럴 수도 있어요.
근데 그때 일으킨 생각, 지속적인 고찰, 희열, 행복을 느낀다는 건 뭘까?
아니면 그 상태가 되면 저절로 아나? 이런 것도 궁금하지만
특히 그중에서도 희열과 행복은 왠지 좀 알 것 같은데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좀 정리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일으킨 생각, 지속적 고찰이 윗답과 윗자라의 번역이에요.
근데 그게 생각이 들어가니까 조금 헷갈리는 거예요.
일으킨 생각, 지속적 고찰, 고찰도 뭐.
그러니까 사실은 명상 전통에 따라서
초기불교에서 또 초기불교의 수행을 중시한 데서 이걸 해석하는 것하고
또 대성불교, 티벳불교 조금씩 달라요.
다른데 어쨌든 수행 전통에 입각해서 내가 좀 이야기를 하면
일단 고전에 선정에 드는 과정을 내가 좀 설명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선정이나 산매, 산매는 근접산매와 본산매가 있어요.
본산매는 초선, 이선, 삼선, 사선, 이게 선정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산매를 선정산매라고도 이야기해요.
그럴 때 일단 보면 선정이 어떻게 되냐.
산매 내지는 선정은 마음이 한 대상에 딱 집중되어 있는 거예요.
어디 다른 데 가지 않는 거예요.
집중이 딱 된 상태예요.
이걸 성공하면 우리는 산매 선정에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산매 중에서 제일 많이 하는 게 아나파나 사투리에서 호흡을 가지고 하거든요.
이걸 가지고 간단하게 내가 이야기할게요.
부처님 말씀에 입각하면 숨이 길면 긴대로 아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이 숨은 길다 이러면 안 돼요.
그냥 어떤 숨이든지 딱 보는 거예요. 거기에 집중하고.
그러다가 생각이 다른 데 가면 놓고 돌아와요.
왜냐하면 마음은 한 번에 한 곳을 가기 때문에
여기 있다가 여기 가면 이건 못하는 거예요.
둘 다 할 수 있으면 이것도 하고 이것도 하면 되겠죠.
그런데 마음은 한 번에 한 곳을 가기 때문에 돌아와야 돼요.
그래서 가면 돌아오고 또 있다가 또 가면 돌아오고
하여튼 긴 숨은 긴 숨대로 짧은 숨은 짧은 숨대로 집중을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게 숨을 하나도 놓치지 않은 상태가 돼요.
호흡의 전 과정을 아는 상태가 돼요.
그러면 거기서 또 계속 집중을 해요.
하면 미세한 호흡 상태가 돼요.
자연히 그렇게 진행돼요.
미세한 호흡이란 건 숨을 쉬고는 있는데 숨을 잘 발견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미세한 호흡이에요.
그것은 숨을 열심히 봤기 때문에 미세한 상태에 온 거예요.
그럴 때 숨이 미세하지만 아까까지 감지할 수는 여기에 있을 거 아니에요.
거기에 딱 집중하는 거예요.
하다 보면 숨이 빛으로 바뀌어요.
숨과 빛이 하나가 되는 상태가 돼요.
그러면 그때도 호흡이 있을 때는 호흡을 봐요.
호흡이 없으면 그 자리에 빛이 있으면 같은 대상이니까 빛을 봐요.
그렇게 쭉 하다 보면 선정에 3매가 들게 돼요.
선정에는 4단계가 있다고 했잖아요.
초선, 2선, 3선, 4선.
초선에 들게 되면 초선의 구성 요소가 5가지에요.
일어진 생각, 지속적 고찰, 희열, 행복, 집중 이게 있어요.
여기서 그러면 일어진 생각은 뭐고 지속적 고찰은 뭐냐가 질문이잖아요.
일어진 생각은 이래요.
우리가 대상에 언제나 1초에 1조번의 정신이 일어난다고 해요.
그래서 딱 일어나요.
또 사라지고 또 있어요.
일어난 정신이 명상 대상에 향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일어진 생각이에요.
그 다음에 계속 지속적으로 가는 거예요.
일어치고 가고 일어치고 보통은 일어치고 다른데 가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같은 대상에 계속 가는 거예요.
딴 데를 가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어친 생각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보통은 그 정도 되면 빛을 보는 거예요.
님이 따라해서 빛을 보는데 빛의 마음이 알게 모르게 은연 중에 딱 가는 거예요.
가고 그걸 계속 하고 있는 상태예요.
딴 데는 안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어친 생각, 지속적 고찰은 뭐냐면 빛을 향해서 계속 가는 상태다.
그렇게 해석하시면 돼요.
생각을 계속 하는 게 아닙니다.
알겠죠?
용어가 이렇게 생각이 다르니까 왜 거기서는 생각이 있는가 하니까
보통은 내 경험상 호흡을 하나도 놓치지 않은 그 단계에서 생각은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네 번째 질문인데요.
계속해서 선정 상태에 대한 질문인데
그래서 이제 2선정이 됐는데 그때 어쨌든 희열과 행복이 남아있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사람들이 참 행복할 것 같은데
그리고 가성적으로 제가 이렇게 명상할 때 이렇게 설명할 때를 생각을 해보면
어느 상태에 초선부터 사선까지 설명해주고 어느 상태에 머무르고 싶냐고 선택하라고 그러면
사실은 이제 제 생각에 2선, 3선은 선택할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걸 제가 듣기도 했어요.
아우, 뭐 그렇게 고생이 아냐.
그 사람은 하여튼 선정태어 만한 사람이죠.
아니, 만한 사람이죠.
그래서 궁금한 게 지혜의 눈을 얻으려면 사선까지 가야만 한다고 하는데
꼭 그렇게 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초선만 해도 어느 정도 살아가고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지혜?
그 정도에 있어서 그래도 사는 데 지장이 없는지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초선 안 닦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어요, 얼바르게 살면.
그러니까 왜 우리가 3매 선정을 닦아야 되나?
그리고 아까 지혜의 눈을 얻는 데 사선정이 필요하냐?
그거에 대한 질문하고
그 다음에 잘 경험 안 한 사람이 2선, 3선이 좋을 것 같다.
그걸 좀 이야기를 할게요.
우선은 왜 우리가 3매를 닦아야 되나?
그에 대해서는 안한다라고 부처님을 모셨던, 25년간 모셨던 시자가 질문을 해요.
안고따라니까에 보면 3매의 이익과 목적이 뭡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 3매의 이익과 목적은 법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다, 알고 보는 거다 하는 거예요.
거기서 말하는 법이라는 건 궁극적인 실제예요.
그냥 관섭적인 실제가 아니고 궁극적인 물질 정신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뭘 우리가 알고 볼 수 있다면 보는 눈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3매는 지혜의 눈을 얻기 위한 거예요.
그래서 나는 사마타 이빠사나라는 책을 썼잖아요.
미국에서도 나왔어요.
그때 내가 3매 선정의 정의를 내렸어요.
왜 내렸냐면 수행처에 가보면 말들이 많아요.
소리가 들린다, 안 들린다, 여러 가지 하는데
내가 볼 때는 선정은 깊이가 다 달라요.
그런데 부처님 말씀하신 대로 법을 볼 수 있으면 되는 거예요.
법이 안 보이면 곤란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혜의 눈이 있나 없나를 가지고 우리는 3매를 이뤘나 안 이뤘나를 봐야 될 것 같아요.
다른 건 다 격가지예요.
소리가 하나도 안 들렸는데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럼 나는 3매를 얻었다고 볼 수가 없다.
물론 소리 안 들릴 정도면 굉장히 한 곳에 다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어쨌든 우리는 선정이나 3매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그때 번뇌가 없어서 편안해요.
그 다음에 지혜의 눈이 생겨요.
그 다음에 하나 더 추가하면
그때 보통은 속행이 일곱 번 일어나요. 정신이잖아요.
선정에서는 수도 없이 일어나요.
그러면서 엄청난 과보, 미래에 좋은 게 되기 때문에
그 점에서 우리가 3매 선정은 꼭 얻는 게 좋은데
지혜의 눈이 생기는 건 근접 3매도 가능해요.
근접 3매부터 초선, 2선, 3선, 4선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보통 우리가 초선, 2선, 3선, 4선 나와서 봐요.
어쨌든 올라갈수록 더 좋죠.
좋은데 그러면 어느 선정이 제일 좋을까?
아까 그런 질문이었잖아요.
사람들은 희열 행복을 되게 좋아해요.
그런데 실제로 경험하잖아요.
참 묘한 게 보면 우리가 3매를 얻으면 이게 번뇌가 없는 상태에요.
번뇌가 없으니까 마음이 어딘가, 내가 마음을 어딘가를 향하잖아요.
그럼 그게 그대로 돼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선정을 얻어요.
초선정을 얻으면 파이브 메스터리라는 걸 해요.
오자제라는 걸 해요.
그러니까 초선정을 자기대로 만드는 거예요.
예를 들면 내가 앉아서 얼마 후에 선정에 들어가겠다.
또 선정에 얼마나 머무르겠다.
노을 때 언제 노겠다.
또 선정에 요소가 있거든요.
요소를 향하겠다, 또 보겠다.
이걸 수시로 해요.
해가지고 그게 성공하면 초선정은 언제나 될 수 있는 거예요.
그것에 대해 먼저 2선정으로 들어갈 때 놀라운 경험을 해요.
2선정 들어갈 때 이렇게 딱 들어가요.
초선은 5개와 가깝다. 5가지 덮개.
그러니까 5가지 덮개가 있다가 거기가 없어져서 초선에 들어가잖아요.
어쨌든 초선은 5개와 가깝잖아요.
그래서 2선 들어갈 때 초선은 5개와 가깝고
초선에 일으킨 생각, 지속적 고찰은 거친 요소다.
이제 그것이 없는 2선에 들어가겠다 하고
마음 먹으면 바로 2선 상태가 딱 돼요.
놀랍더라고요.
그때 내가 보니까 초선하고 그전에 선정 들기까지 빛이 환하고 이럴 때
너무 빛 보는 게 좋아요.
초선에서도 좋았어요.
그런데 2선에 딱 들어가니까 일으킨 생각, 지속적 고찰이 없잖아요.
빛을 향한 게 없어요.
없는데 기본 집중이 있어요.
우리 마음 부수 중에 기본으로 대상에 가는
그 집중의 힘만으로 선정이 유지되는 거예요.
그런데 더 깊이는 깊어요. 더 좋아요.
그럴 때 내가 느낀 게 이거예요.
아, 초선에는 물동이를 들고 있었구나.
그 물동이 들면서 내가 무거운지도 모르고
그걸 좋아했구나. 이런 걸 내가 느꼈어요.
그래서 다시는 물동이 들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2선 상태의 기본적인 집중으로 선정을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이제 2선정을 또 자기가 자기 거로 만들어요.
오자제를 통해서 파이브 메시지를 통해서.
그리고 3선정을 들어가요.
3선정 들어갈 때 어떻게 들어가냐면
2선은 1선과 가깝고
또 2선의 희열, 좋아하시는 희열은 거친 요소다.
그것이 없는 3선에 들겠다고 탁 있으면 3선상태가 딱 돼요.
그때 행복만 있는 상태, 행복과 집중.
그때 희열이 덜 뜬 행복이라는 걸 알게 돼요.
덜 뜬 기쁨.
그전에는 그거 너무 좋았거든요.
왜냐하면 번뇌가 없어지면서 희열이 생겨요, 사실.
그러니까 그때 하면 아, 이거 별로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다음에 3선을 또 열심히 해서 자기가 되면 4선에 들어가요.
그때 3선정은 2선과 가깝고
3선의 행복은 거친 요소다, 4선정에 들어가겠다.
하고 4선에 들어가면 집중만 딱 있는 상태.
그때 보면 행복도 좀, 희열보다는 좀 덜해도
뭔가 불필요한 거다 하는 게 딱 들어요.
그러면 앞에 말씀하신 희열이 있는 걸 별로 선호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물덩이 얘기하시니까 느낌이 오는데
왜냐하면 명상해서 생각이 끊어지는 경험만 해도
사람들이 이렇게 죽면 살만하다고 좋아하는데
지금 그 물덩이를 쥐고 있다가 내려놓는 기분이라 그러니까
너무 잘 이해가 되고 그 설명을 해야 되겠네요, 저도 그렇고.
네, 알겠습니다.
자, 마지막 질문인데요.
이건 좀 좁은 의미의 질문이지만
이것도 이제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많이 하는 얘기니까
이 싸띠와 쌈바짜냐가 이렇게 구별이 과연 구분이 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왜냐하면 싸띠가 있으면 당연히 쌈바짜냐가 저절로
거의 직후나 동시에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싸띠만 있고 쌈바짜냐가 없는 게 과연 가능한가?
왜냐하면 이게 구분이 된다는 건 그래야서 있는 거잖아요.
내용이 다르다는 거죠.
그러니까요. 그래서 궁금합니다, 이게.
그러니까 이제 부처님 가르침에 보면 항상 싸띠, 쌈바짜냐가 나와요.
그리고 디가니카에 보면 사리부리, 부처님 법을 쭉 정리한 게 나와요.
두 개의 법 할 때도 보면 싸띠, 쌈바짜냐가 나와요.
둘은 불가분의 관계예요.
이걸 비유하시면 돼요.
싸띠는 대상에 딱 집중하는 상태예요.
딴 데 마음이 가지 않고 그 대상에 딱 집중하는 그 마음이에요.
그런 노력이에요.
그랬을 때 그걸 딱 집중하니까 알게 되는 현상이 있잖아요.
그걸 쌈바짜냐라고 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보행 명상할 때 걷는 데다가 딱 집중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그냥 발이 걸어다니는 줄 알지만
잘 보면 발을 들고 가고 놓잖아요.
또는 발을 들 때 보면 의도가 있어서 들고
이런 걸 걸음에 딱 집중하는 걸 싸띠라고 보시면 돼요.
그 다음에 집중하니까 이게 발이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또 의식이 있는 3단계다.
이런 걸 아는 그 내용이 쌈바짜냐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우리가 수행하다가
예를 보면 어디에 집중하면 그 현상을 알게 되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우리가 바깥에서 막 소리가 들려요.
그럼 창문을 열고 보잖아요.
창문을 열고 보는 행위 자체가 쌈디라고 보면 돼요.
거기서 딱 보면 싸우고 있잖아요.
거기의 내용이 쌈바짜냐라고 보면 돼요.
그렇게 보면 따라올 수 있어요.
근데 수행의 정도에 따라서 쌈바짜냐는 좀 다를 수가 있어요.
물론 쌈디도 좀 깊이가 차이도 있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집중은 다 했어요.
했지만 내 경험상 이래 보면 딱 이래 하잖아요.
했을 때 준비된 정도에 따라서 쌈바짜냐는 내용이 좀 다를 수 있어요.
예를 들면 걷는 걸 통해서 한다.
그러면 걸을 때 3단계구나.
그것만 아는 사람도 있어요.
근데 쌈바짜냐 내용이 걸을 때 집중하는 쌈디를 했어요.
했는데 어떤 사람은 걸음이라는 게 덜고 가고 놓는구나 이것만 알 수도 있어요.
근데 좀 더 관찰을 자꾸 하다 보니까 거기에서 어도가 있어야 들리구나.
덜 때는 어도가 있어서 들리고 갈 때도 어도가 있어서 가고
어도가 있어서 놓을 수 있구나 하고 좀 더 알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 상태가 또 있을 수 있어요.
좀 더 가면은 어도가 어떤 마음에서 만든 물질을 만들어가지고
바람이 중심이 돼서 들리구나.
또 이래 갈 수 있구나.
쌈바짜냐 내용은 좀 다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거는 좀 딱 모든 걸 처음에 다 알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하여튼 쌈디고 그 사람의 정도에 따라 쌈바짜냐의 내용은 좀 달라질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볼 때 그럼 쌈디의 수준에 따라서 쌈바짜냐가 수준이 달라지는 거니까
같이 가는 거 아니에요?
쌈디...
그렇죠.
뭐 쌈디의 수준도 좀 다를 수 있고
쌈디를 그냥 고기만 딱 하는 사람도 있고
아주 깊이 깨는 사람도 있고
그것도 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지혜가 또 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면은 이게 그러니까 저는 경험으로 보면은
쌈디 있는 순간에 이게 쌈디다, 쌈바짜냐가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거든요.
그렇죠.
그래서 이게 이해로서 어떤 설명하려고 그렇게 말을 붙였는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경험에서는 그냥 하나 같거든요.
하나인데 이제 이래 되는 거죠.
예를 들면 내가 밥을 먹을 때 쌈디를 해요.
음식을 씹을 때 쌈디를 해요.
그러면 쌈디라는 건 일단 거기에 주의를 기우는 거예요.
기울였을 때 음식을 씹을 때 침이 나오구나 하는 건 쌈바짜냐예요.
그러니까 그거를 하나다 이래 말하기는 좀 그렇죠.
이거를 주의를 기울인 것을 쌈디라고
그것을 알 수 있는 걸 쌈바짜냐로 이래 볼 수 있죠.
그러니까 보면 그 대념적용 주석서라고 있어요.
쌈디에 대한 것은 가장 철저한 게 대념적용이에요.
네 가지 신수심법에서.
거기 보면 걸을 때 쌈바짜냐 가지고 있다 이래 되거든요.
그러니까 분명한 알림이 있다는 거예요.
주석서에 보면 그 네 가지를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하나는 분명히 아는데 이게 이익되나 안되나를 분명히 아는 거예요.
그 다음에 적절한가 안한가 적당한 때인가 아닌가 적절한가 안한가
이거를 또 아는 거예요.
그 다음은 영역의 바른 알림이라고 하는데
이거는 그냥 그 행위를 하면서 계속 쌈디를 유지하나 안하나예요.
그런 해석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미혹됨이 없이 철저히 아는 바른 알림이 있어요.
그걸 조금 참고로 하면 우리는 집중은 하지만
저희가 이상한 데로 갈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 집중하는 것이 이익이 되는지를 아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건 이익이 되잖아요.
그거는 이익된다고 아는 거예요.
예를 들면 어디 절에 가는 건 좋아요.
이익되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지금이 적절한 때가 아닐 수 있어요.
거기에 지금 많은 여자들이 있고 이러면 마음이 흐려질 수 있잖아요.
그러면 사람이 없을 때 가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적절한가 적당한가 안한가 이것도 포함해요.
그 다음은 지금 절까지 가면서 이익도 되고 적절하지만
발걸음을 딱 나서는 순간 도착하는 순간까지 계속 쌈디를 하는 사람도 있고
중간에 안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것도 따져요.
그 다음에 맨 마지막 이게 철저한 게 뭐냐면
미혹함이 없는 바른 암.
이건 뭐냐면 걷는 순간마다 내가 걸어야 되겠다는 마음에서 만든 물질을 내고
그 중에 바람 성분이 움직여야 하고 있다.
이런 걸 철저히 하는 거예요.
그런 주석서는 또 그렇게 좀 나와 있고
그냥 간단히 말하자면 하는 데 집중하고
거기서 일난상을 정도에 따라서 알 수 있다는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그 주석서 설명하시니까 조금 더 제가 구분이 되는 것 같아요.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