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왜 영국이 가져간 걸까..?

지식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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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의 시대가 한창이던 16세기 무렵,
이곳 포클랜드 제도는 다양한 국가들의 탐험대에 의해서 발견되며
그 존재가 드러났습니다.
제도의 이름인 포클랜드의 어원도,
1690년 무렵 이 제도를 발견한 영국의 탐험대가
자신들의 후원자인 포클랜드 자작이 기어를 기르기 위해서 지은 것에서 유래하죠.
당시 포클랜드는 남미 대륙의 원주민들조차 살지 않던 무인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제도를 발견한 국가들도 섬에 고립된 위치와 낮은 경제적 가치로 인해
정착지로 삼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이렇게 포클랜드는 다양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중반까지 무인도로 남은 채 식민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764년,
마침내 프랑스가 제도의 동쪽 섬인 이곳에 깃발을 꽂아 넣으며 식민지를 선포했는데,
바로 다음해인 1765년 프랑스가 정착촌을 세웠다는 사실을 몰랐던 영국 또한
섬의 서쪽에 깃발을 꽂으며 식민지를 선포했고,
이렇게 포클랜드에는 열강들 간의 분쟁의 불씨가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딱 이 시기,
프랑스의 부르봉왕과와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던 스페인은
프랑스와 가족협약을 맺으며 공고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자신의 영역인 남미 쪽 섬에 식민지를 설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은 즉각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프랑스에 항의했고,
결국 1767년 프랑스는 스페인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 정착촌을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섬에 대한 분쟁은 영국과 스페인의 것으로 이어졌죠.
수년 동안 섬의 영유권을 두고 외교적 다툼을 이어가던 영국 간의 긴장은
1770년, 스페인의 함대와 1400여 명의 군대가 포클랜드 서쪽의 주둔 중인 영국군에게
압력을 가해 쫓아내면서 절정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스페인의 무력 행사에 망신을 당한 영국 당국은 즉각 스페인 측에 맹렬히 항의하며
자신들의 정착촌을 즉시 복구하라고 압박했고,
이러한 요구에 스페인이 계속해서 회피하고 있자,
영국은 결국 전쟁 준비를 이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놀란 스페인은 영국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서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프랑스는 스페인의 요청에 대해서 슬슬 회피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고,
결국 영국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일 입장이 아니었던 스페인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1771년 스페인은 서쪽 섬에 대한 영국의 정착촌을 복구하는 데 합의했고,
포클랜드 제도에는 스페인과 영국군이 다시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영국은 북미에서 벌어졌던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었고,
설상가상 북미 지역에서 본국과의 차별과 막대한 세금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식민지주들은
독립전쟁을 선포하기 직전의 상황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위기를 겪고 있던 영국은 1774년부터
재정만 갉아먹던 불필요한 식민지들을 정리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고,
별다른 자원도, 전략적 이익도 부족했던 포클랜드 또한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1776년 영국은 자신의 영토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대충 깃발과 기념비만 꽂아놓고는 포클랜드에서 떠나버렸습니다.
이렇게 영국이 떠난 뒤 스페인은 포클랜드를 온전히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나,
스페인 또한 수십 년 후 나폴레옹 전쟁과 더불어 남미 지역에서 벌어진 독립전쟁을 겪으며
식민지들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영국과 마찬가지로 깃발과 기념비만 꽂아두고
1811년에 포클랜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과 스페인이 떠나 항무지가 된 제도는
당연하게도 남미에서 스페인을 몰아내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이들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포클랜드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건국된 아르헨티나였죠.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를 스페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영토로 간주하며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1820년에는 함대까지 파견하며 본격적인 영영역을 행사해 나갔습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꾸준히 정착민들을 보내 포클랜드의 시류 지배를 이어나가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행보는 과거 포클랜드의 깃발을 꽂아두고 떠났던 영국의 심기를 자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무렵 영국은 말 그대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며
섬을 포기했던 6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국력을 보유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1833년, 영국은 섬을 재정복하기 위해서 군함을 이끌고 포클랜드로 향했고,
섬에서 무장 중인 아르헨티나군을 향해 당장 섬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으로 여겨지던 영국 왕립 해군과 도저히 싸울 의지가 없었던 아르헨티나군은
결국 깃발을 내리고 섬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영국은 다시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하여 영유권을 행사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도 아르헨티나는 영국의 무력 행사에 항의하며 주기적으로 포클랜드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당연하게도 영국은 이를 단칼에 무시해버렸고,
오히려 섬의 새로운 정착민들을 계속해서 이주시키고 양을 풀어놓고 소를 반복하며 실질적인 지배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한 세기가 지나 포클랜드에는 정착민들로만 3000명을 상해하고 있었고,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략적 해군 지제로 활용되며,
독일 제국의 함대를 격파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마무리된 이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양강 체제로 재편되며,
구 열강 세력인 영국 프랑스가 구축한 식민제국의 질서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프로파간드 앞에 풍전등화에 놓인 신세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열강들의 지배하에 놓여있었던 수많은 식민지들은 탈식민주의를 부르시며 독립을 주장하거나 전쟁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아르헨티나 또한 영국이 오랜 기간 지배하고 있던 포클랜드를 탈환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분쟁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아르헨티나는 1945년에 포클랜드 제도를 자국의 또 다른 섬인 티아라 델프해구의 일부로서 헌법에 포함시켰고,
섬들에 대한 분쟁을 유엔총회의 정식안건으로 격상시키는 등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한 온갖 노력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 제도에는 수천명의 영국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타전을 읽어 살아가고 있었고,
영국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며, 자신들은 섬에 살아가는 주민들의 뜻을 존중할 것이라 주장하며 아르헨티나의 협상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분쟁은 2차 대전 이후 50년대, 60년대, 그리고 70년대가 될 때까지 도무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죠.
한편, 기존부터 아르헨티나는 영국뿐만 아니라 칠레와도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881년에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이곳 비글해협을 기준으로 영토를 나누는 국경조역을 맺은 바 있었는데,
아르헨티나는 20세기에 접어들며 조역에서의 허점을 지적하며,
양국의 경계가 되는 비글해협이 사실은 이게 아니라 이것이라고 주장하며, 세계의 섬이 아르헨티나의 것이라는 주장을 이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2차 대전 이후로도 무력 충돌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로 고조되었고,
결국 양국은 제3자인 영국 정부에게 중재를 요청하며, 양국이 지명한 5명의 국지 전문가에 의해서 판단을 맡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 결과 1977년, 영국은 이 세계의 섬이 과거 국경조역에 따라 칠레에 속한다는 것을 재확인시켰고, 칠레는 즉각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문원의 왜곡, 논리적 모순, 해석의 오류, 영국의 편파성을 주장하며 중재에 불복했고, 세계의 섬들을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한 준비를 이어나갔습니다.
이후 사태 해결을 위해서 교황청이 직접 나서서 양국 간 갈등을 중재해주고자 하였으나, 아르헨티나의 지속적인 문제 제기로 인해 양국은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갈등을 키워나갈 뿐이었습니다.
한편 아르헨티나에서는 1976년에 마치 열리 행사하듯 얻던 군사 쿠데타가 또다시 발발하며,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아르헨티나는 내부적으로 정치적 불안정과 경기침체를 겪고 있었는데, 1981년엔 GDP가 6% 가까이 하락하고 연간 인플레이션은 100%에 달하며 국민들의 불안이 극에 치닫는 시점이었습니다.
결국 군부는 이 같은 내부적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민족주의 정세를 고조시킨 것이 확실한 방안이라고 판단했고, 오랜 기간 영국과 분쟁을 벌이고 있던 포클랜드를 침공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군부는 다음에 곧바로 군대로 하여금 섬의 점령을 명령 내렸고, 이것이 바로 아르헨티나 세상 최악의 전쟁이 되어버린 포클랜드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군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군축까지 단행하고 있던 영국이 구태어 식민제국이란 비난까지 감수하며 군사적 대응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반식민주의 정서가 퍼져있던 이 시기, 굳이 미국이 제국주의라는 비판까지 감수하며 영국 편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죠.
그리고 이러한 군부의 오판은 대참사를 야기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점령을 영국의 주권과 민족적 자부심을 건드리는 행위로 보고 즉각 군사적 대응을 이어나갔고,
양국 사이에서 중재를 막고자 했던 미국은 외교적 해결에 최종적으로 실패하자 결국 영국 편에서며 영국에 대한 공기적 지지를 발표하기에 일을 넣었습니다.
한편 아르헨티나와 계속해서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던 칠레 또한 영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각종 지원을 이어나가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1982년 4월 2일부터 6월 14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결국 아르헨티나는 영국에 패배하며 다시금 포클랜드를 넘겨줄 수 밖에 없었고,
가뜩이나 민심을 잃어가던 군부는 이 사건으로 인해 대중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그해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군부를 귀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며 군부는 결국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다음에 아르헨티나에는 다시금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군사적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해버렸고, 칠레와 벌이고 있던 비글헤어 분쟁도 더 이상 무력으로 어찌해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도 교황의 제안에 따르자는 여론이 압도적인 상황이었고,
이렇게 아르헨티나는 결국 국경 문제를 교황청의 결정에 맡겼고, 1984년 11월, 영국은 조약에 서명하며 비글헤어에 대한 완전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이 조약으로 해상 국경, 항해 권한 등 군쟁의 여지가 있던 모든 부분들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었고,
이렇게 무력으로 포클랜드와 비글헤어 남쪽의 섬을 점령하고자 했던 아르헨티나의 계획은 군사적 외교적 측면에서 완전한 실패를 맞아하며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까지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의 영토로, 비글헤어 남쪽의 픽턴, 레녹스, 누에바 섬도 그대로 칠레의 영토로 남게 되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 남미 대륙에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전부 독립을 한 가운데, 아직도 독립하지 못한 지역이 한군데 남아있습니다.
바로 남미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프랑스령 기아나인데요.
영국령 기아나, 네덜란드령 기아나는 모두 독립을 맞이한 가운데, 왜 프랑스령 기아나는 오늘날까지 프랑스의 해외 영토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다음 영상은 기아나 편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지식한잔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