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개판 오분 전이었던 브라질 건국 과정!!

지식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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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비디오 조회수·2024. 12. 30.
대항의 시대가 한창이던 15세기 후반
유럽 왕실의 지원을 받은 탐험가들은
새로운 항로를 찾고 신세계를 개척하고자 바다를 떠돌았고
이러한 해양진출을 주도한 국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해양제국으로 분리받은 국가는
점차 서로의 영역 침범에 대해서 불만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스페인 측 탐험가인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포르투갈에게 크나큰 위기감을 안겨다 주었죠.
결국 이러한 갈등 속에서 양국은 교황의 중재도 받아보고
양국 간 직접 협상도 진행하며 서로 간의 영역을 획정해 나갔고
그 결과물이 바로 1494년에 맺어진 토르 데시아스 조약이었습니다.
조약에서 양국은 서경 43도 37분쯤에 위치한
이 선을 기준으로 세계를 갈라먹기로 합의했고
경계선의 동쪽 지역은 포르투갈이
서쪽 지역은 스페인이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들 아시다시피 이 거창하고 허황된 조약은
훗날 등장하는 신흥세력들에 의해서 철저히 무시당하고
나중엔 두 국가가 한동안 연합왕국까지 수립하며
점점 유명무시를 졌으나
아무튼 조약체결 초반에는 양국 모두 최대한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탐험을 이어나가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500년 4월
카브랄이 이끄는 함대가 남아메리카 동쪽 해안에 도달하여
다치를 내렸습니다.
그가 오직 나무와 섞이밖에 없던 토착 원주민들을 마주한 이 순간이
포르투갈의 남미대륙 식민지화의 첫 번째 순간이었으며
이렇게 남미대륙은 스페인 포르투갈 두 열강의 신대륙 진출과 함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남미에서의 첫 개척에도 불구하고
당시 포르투갈은 남미 식민지 개발에 대해서
그다지 여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인도와 중국, 동인도 제도 등지에서 진행 중인 향신료 무역이
훨씬 더 수익이 높았으며
그저 남미에 고작 폐 몇 척을 보내
붉은색 염료를 얻을 나무를 벌목하는 수준만으로도
충분한 이윤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 나무를 파오 브라질이라고 명명했는데
여기서 파오는 나무를 브라질은 붉은색 같은
라는 뜻을 가집니다.
결국 상인들은 파오 브라질이 많은 이 지역을
테라 투 브라질
즉 브라질의 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날 브라질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당시까지만 해도
나무 벌목 정도로밖에 쓸모를 느끼지 못한 포르투갈 당국은
브라질 내 원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에 대해서는
상당히 미온적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 틈을 타서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포르투갈의 눈을 피해
나무를 몰래 벌목하고 빼돌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죠.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16세기 중반무렵이 되며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브라질 땅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성공하며
유럽 시장에 대량의 설탕을 공급할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전부터 나무를 도둑질을 하던 프랑스가
1555년에 이르러서는
현 리오데자네이로 부근에
기어이 본인들만의 식민지까지 설립하기에 이르자
더 이상 이 땅을 방치해선 안되겠다는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포르투갈은 1560년 무렵부터
군대를 동원하여 프랑스의 식민지를 때려부수기 시작했고
약 7년이 지나
식민지에서 프랑스를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16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인 브라질 개발을 시작한 포르투갈은
북부와 남부에 각각 총독부를 설치하여 통치를 이어갔고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서 원주민을 잡아다가 노예로 부리며
플랜테이션 산업을 더 크게 키워나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에 원주민들이 맹렬하게 저항하고
노예가 된 원주민들이 대거 질병 등으로 사망하며
노동력이 감소하자
결국 포르투갈 당국은
새로운 노동력 확보에 나설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아프리카 대륙에서
흑인 노예들을 대거 수입하여
브라질의 농장으로 밀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사탕수수의 생산량은
노예 노동력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포르투갈은 이를 유럽 전역에 팔아치우며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포르투갈이 남미에서 꿀을 빨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새롭게 부상 중이었던 유럽 국가들은
남미 식민지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고
1630년에는 기어이 네덜란드가
브라질의 금사라기 땅을 침공하며
플랜테이션을 강탈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포르투갈이 수십 년 만에
어찌어찌 네덜란드를 브라질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으나
이 기간 동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신흥국들이
자신들의 식민지에 유사한 사탕수수 농장 시스템을 도입하며
전 세계 설탕 공급은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포르투갈의 독점적 지위 또한 처참히 무너져내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 플랜테이션에서 탈출한 노예들이
약 3만 명에 달하는 자치 공동체까지 꾸려
식민 당국에 저항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브라질은 정체 경제적으로 큰 혼란에 빠지며
점차 쇠락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8세기 초반 무렵
브라질 땅에서 막대한 양의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울려 퍼집니다.
그간 다른 국가들이 대거 설탕 산업에 진입하며 무너졌던 식민지 경제는
재부상할 기회를 맞아야였고
수십 년 전 스페인에게서 독립하는 동안
오랜 전쟁으로 빈곤 상태에 빠져있던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광산을 바라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현지인 이주민들이 금광에 몰려들며
골드러시가 시작되었고
금과 다이아몬드 채광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은
포르투갈로 쏟아져 들어오며
본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의 국왕 주항 오세가질
이 거대한 건축물인 마프라 수도원은
브라질로부터 확보한 금과 다이아몬드가 없었다면
건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이야기가 돌곤합니다.
아무튼 금광이라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통해
브라질 내 도시들 또한 빠른 속도로 발전을 이룩했고
이 시기 동안
파라티, 오르프레투, 지하만치나, 살바도르, 상로이스 등
금광을 낀 마을 및 도시들이 막대한 부의 유입으로 번영을 이뤘습니다.
이렇게 광활한 자연환경과 농장, 금광, 그리고 바닥까지 끼고 있는 브라질은
점차 포르투갈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경제 활동을 이어가기 시작했고
식민지에 대한 지배력 상실을 우려한 포르투갈이
다른 국가와 브라질 간 무역을 통제하고
현재의 생산 능력 성장에 제동을 걸고자 하였지만
날이 갈수록 강대해져가는 브라질을
언제까지고 찍어누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던 1808년
포르투갈의 왕실이 통째로
브라질로 이주해오는 대사건이 벌어집니다.
18세기 후반에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은
이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지며 온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기 시작했고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내리며 영국과 손잡은 국가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자
영국과 오랜 동맹관계였던 포르투갈은 자연스레 침공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간 브라질을 통해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던 포르투갈 왕실은
자칫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폴레옹이 1807년에 이베리아 반도까지 침공해오자
결국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가는 수많은 귀족과 관리, 그리고 재화와 보물을 박박 긁어모아 배에 실었고
영국 해군의 호유를 받아 대서양 너머에 위치한 브라질로의 야반도주를 감행했습니다.
포르투갈 왕실은 왕가가 나라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온갖 비난을 뒤로한 채
끝끝내 브라질에 도착하였고
리우드의 잔해 유류를 거점삼아 수많은 치욕을 감수하며
먼 훗날의 재기를 도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후 브라질은 기존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포르투갈의 공식적인 연합왕국의 일원으로 격상되었고
이 덕분에 브라질의 수많은 도시들은 식민지로서의 제약이 풀려나며
정치, 행정, 문화, 교육, 경제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유럽의 전쟁이 잦아들자
브라질에 머무르고 있던 국왕 주황육세가
과연 언제 본국으로 돌아갈지가 주요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왕실이 브라질에 온 이유 자체가 결국 나폴레옹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니
이제 전쟁이 끝났다면 당연히 왕은 포르투갈로 복귀해야 한다고
여기는 시각이 컸던 것이었죠.
하지만 주황육세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았습니다.
브라질에서 안정을 찾은 그는 전쟁의 여파로 아직까지도 불안정한 포르투갈보다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며 심시티처럼 키우는 맛이 좋았던 이 신 대륙의 영토에서
당분간 통치를 이어가는 편이 낫다고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불안불안했던 포르투갈 내부에서는
결국 자외주의 세력에 의한 혁명까지 발발하게 이르렀고
이후 의회는 입헌 군주제를 요구하며
국왕에게 본국으로 귀국하라며 압력을 가했습니다.
결국 국왕은 1821년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에게 브라질을 맡겨두고 본국으로 돌아간 뒤
포르투갈에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수락하였습니다.
이후 본국의회 내부에서는
브라질이 더 이상 발전을 이룩하면 언젠가 완전히 독립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브라질을 예전처럼 식민지를 격화시키고
독자무역의 제안, 독자적인 정책 실행 금지된 것 같은 정책으로
브라질에 대한 온갖 족쇄를 다시 채워나가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주왕 욕세가 브라질 섭정으로 남겨둔 아들 페드로는
점점 왕실의 권위 대신 의회의 명령에 굴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죠.
그리고 당시 12년간 왕국이 일원으로 대우받으며
높은 자율성을 누려왔던 브라질인들은
이러한 본국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도 의회는 페드로에게 당장 포르투갈로 돌아오라고 압박했으나
브라질 내부에서는 페드로를 향해 제발 가지 말아달라는 탄원의 쇄도와 함께
결국 1822년 1월 9일 결심을 마친 페드로는
결국 포르투갈 및 독립 반대 세력은 군대를 동원하여 그를 강제로 본국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페드로를 지지하는 군인들과 자체적으로 결집한 시민군들은
포르투갈군을 향해 반격에 나섰고 성공적으로 왕자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후 페드로는 브라질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1822년 9월 7일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유명한 선언과 함께 브라질의 독립을 선포하였습니다.
이후 페드로는 브라질 제국의 초대왕제인 페드로 1세로서 즉위하였고
독립을 결코 응인할 수 없었던 포르투갈은
즉각 브라질 내 주둔군을 긁어모아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온 국민의 지지를 받는 페드로와의 전쟁은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나 마찬가지였고
1825년 8월
브라질의 독립을 막을 수 없었던 포르투갈은
공식적으로 이들의 독립을 인정하며 평화 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렇게 수세기가 넘는 식민지배의 역사
전쟁과 혼란
그리고 극적인 독립 과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브라질이 스스로의 길을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억압 속에서 꽃을 피어낸 신생제국은
방대한 인구와 영토
그리고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그간 포르투갈로부터 전해받은 법과 제도
문화, 기술을 활용하여
눈부신 미래를 향해 전진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1826년 초
그 장밋빛 기대를 흔드는 예기치 못한 소식이
대서양 건너에서 날아듭니다.
페드로의 아버지인 주앙 육세가 사망하였으니
아들인 페드로는 이제 포르투갈의 왕위를 물려받으라는
갑작스러운 요구가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