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은 거북이 아니고 거북 모양을 한 탑비의 용 | 문화 역사 불교 탑비 문양 한국불교의 아름다움 12회

헬로붓다TV
24 팔로워
안녕하십니까.
이번 시간은 탑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탑비는 여러분들께서 사찰이라든가 사지를 답사를 다니시면
거북이가 커다란 비석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그런 어떤 조각 작품들, 유명한 사찰에서 많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불교 조각은, 불교 조각 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불상 조각만 많이 관심을 갖게 되는데
탑비라고 하는 굉장히 중요한 불교 조각의 한 작품들, 한 유파들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은 조금 생소하게 다가가거나
처음 들어보시는 그런 분들 계실 겁니다.
일반적으로 불상 얘기하면 그 불상의 형태나 양식이라든가 모양 얘기를 많이 하고
서로 그 모양이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 그 차이점과 공통점들을 비교하는
그런 접근 방법을 많이 활용을 합니다.
탑비도 마찬가지고요.
불교 조각을 공부할 때는 이러한 어떤 형태의 차이점과 닮은 점을 비교하는
연구 방법이 많이 진행되는데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번 시간에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은
그러한 형태뿐만 아니라 그러한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
또한 문헌 기록이 굉장히 한정돼 있기 때문에
발굴 조사를 통해서 새롭게 발견된 자료
그리고 고과학적 자료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배경을
기존에는 문헌 자료만 갖고 해석을 했다고 한다면
지금은 지금 말씀드리는 불상 자체
그리고 탑비 자체도 그 자체가 역사의 한 사료로서 사용될 수 있는
그런 접근 방법으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새롭거나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능한 쉽게 말씀드리면서
그 의미가 무엇이고 이러한 작품들이 사찰 속에 왜 만들어졌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 짚어나가겠습니다.
탑비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거북이 등에 비신이 있는데
그 비의 내용을 보면 유명한 왕사나 국사에 버금갔던 스님이 돌아가시면
그 유명한 스님의 살아생전에 대한 기록을 쭉 적어놓은 겁니다.
그냥 스님의 어떤 일대기를 적어놓은 기록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데
탑비의 중요성이 왜 중요하냐면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그 중요성을 한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 보면 삼국류사를 보면 신라가 망할 때쯤 되면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천왕사 벽화 속에 개가 짖었다.
벽화에 개가 멍멍 짖었다고 나오는데
그 삼국류사 내용 보면 삼국류사가 전설 같은 이야기도 많이 채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라가 망할 때쯤 되니까 그냥 나라가 기울어지니까 이런 일도 이루어지는구나.
저는 한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삼국류사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연도를 확인해보고 하니까
사천왕사 벽화에 개가 짖을 때 마침 그때 고르테조 왕권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918년이 됩니다.
사천왕사 벽화에 개가 그냥 짖은 게 아니죠.
신라를 멸망시킬 새로운 왕의 등장을 암시하는 그런 내용이
황당하고 전설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 황당한 이야기 내면에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담지되어 있구나 그런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제 920년에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요.
삼국류사 또 내용인데요.
거기에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한 달이나 거꾸로 서 있었다.
그리고 사천왕사 거기에 오방신의 화살의 활줄이 끊어졌다.
그게 이제 경명왕 4년, 920년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신라가 멸망할 때쯤 그런 모습을 나오는데
경명왕 4년, 경명왕 때쯤 되면
920년쯤 되면 이미 918년에 태조왕권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고 후백제는 견원이 당당하게
후백제라고 하는 나라를 운영하는 그때쯤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명왕 때쯤 되면 신라가 멸망하는 그 시점인데
재미난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경명왕 8년, 경명왕 8년쯤 되면
연도를 따지면 924년 정도 되는데요.
그럴 때 신라에서 갑자기 탑비를 전국에 4군데 정도 세우고자 노력을 합니다.
성주사라든가 봉암사라든가 여러 곳에 4군데의 탑비를 세우려고 노력을 하는데
지금 신라는 다 망해가기 직전인데
924년에 경명왕이 왜 탑비를 이렇게 세우려고 하냐 보면
태조왕권이 918년에 고려의 왕으로 등극을 하고
925년 정도까지 후백제 견원과 전쟁을 치르지 않고
일종의 소강상태가 지속됩니다.
한반도가 고려와 후백제와 신라로 나누어져 있지만
전쟁이 잠시 멈춰진 그런 시간이 몇 년 동안 지속되고요.
그럴 때 924년에 경명왕이 갑자기 전국에 탑비를 4군데 정도 세우려고 시도를 합니다.
경명왕은 왜 그랬을까?
탑비의 중요성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탑비는 아무나 세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탑비를 세울 수 있는 승려등, 왕사나 국사정도
고려시대 같은 경우는 왕사나 국사 최고위에 올라갔었던
승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던 승려들만이 탑비를 세울 수가 있고요.
탑비를 세우는 절차를 보더라도 일종의 진행 과정이 있습니다.
유명한 스님이 입적을 하시게 되면
입적한 사찰에 있었던 제자들이 스님의 묘소가 되는 승탑,
구도를 제작해서 만들게 되고요.
그리고 나서 스님의 살아생전 행적들,
일대기들을 쭉 기록을 모으게 됩니다.
모으고 난 다음에 고려 중앙정부에 제출을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 스님의 탑비를 세워주십시오 하고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럼 왕은 도정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문사,
문사라고 불리는 글을 잘 쓰는 신앙한테
우리 스님에 대해서 비문을 작성해라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 비문을 작성을 다 하게 되면 탑비를 세우게 됩니다.
탑비를 세울 때 승탑에 대한 명칭과 탑비에 대한 명칭,
스님의 탑에 대한 명칭을 내려주게 됩니다.
유명한 법천사 지강국사 현묘탑 같은 경우는
혜린 스님의 승탑과 탑비인데요.
지강국사 현묘탑이라고 하는 명칭을 왕이 내려주게 됩니다.
이런 것처럼 유명한 스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세우는
승탑과 탑비의 명칭을 왕이 내려주기 때문에
승탑은 스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제자들이 승탑을 세우기도 하지만
탑비는 특별히 왕의 허락을 받아야지만 세울 수 있는
그런 매우 중요한 상징성이 있는 기념물이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사천왕사의 벽화에 개가 짓고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끊어지고
신라가 거의 멸망하기 직전이라는 상징적인
시그널들, 신호들은 막 나타나는데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인데 924년에 경롱왕이 전국에 탑비를 세웠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되냐면
신라는 비록 지금 멸망하고 있지만
이 땅의 주인, 후백제도 있고 고려도 있지만
이 땅의 주인은 왕권도 아니고 견원도 아니고
이 땅의 주인은 신라의 왕 나다.
그런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경명의 의도가 관양되었다.
탑비의 중요성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탑비는 누가 왕이냐 그런 것을 보여주는
굉장히 상징적인 조각물이다, 기념물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사찰에 가면 거북이도 하도 많고
거북이에 비신이 세워져 있는 작품들이 많다 보니까
이 거북이도 그렇고 저 거북이도 그렇고 다 비슷비슷한 거북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이 들지만
통일신라 후반기부터 고려 초, 고려 전기에 이르는 탑비는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그 탑비에 대해서 조금만 알아보시면
통일신라나 고려 시대의 사료에 나오지 않는 역사의 흐름
역사의 흐름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굉장히 중요한 불교 조각 작품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때 탑비들이 많이 만들어지는데요.
그 탑비들 중에서
구체적으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탑비가 집중적으로 모여있는 곳이
고려 초부터 고려 전기에 건립된 남한강 유역의 탑비입니다.
그 남한강 유역의 탑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남한강 유역의 남할 여초부터 시작해서 고려 전기에 이르는
매우 중요한 사찰들이 있습니다.
원주 흑법사에도 탑비가 있고
충주 정토사에도 탑비가 있습니다.
여주 고달사에도 탑비가 있고
그리고 원주 거돈사에도 탑비가 있습니다.
법천사에도 아주 유명한 탑비가 있죠.
지금 이 탑비 중에서 가장 먼저 말씀드릴 탑비가
흑법사지 진공대사 탑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흑법사지 진공대사 탑비는
원주 흑법사에 있습니다.
지금 폐사지인데요.
거기 가면 현재 폐사지가 거의 농작물이
밭을 주로 경장 많이 되어있었는데 최근에 발굴 조사가 됐고요.
현재 가보면 3층 석탑이 남아있고
그곳에는 비시는 임지들한테 파손이 됐다 알려져 있습니다.
비시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있고
탑비에 있는 거북이하고
비신 꼭대기에 있는 이수라고 불리는 용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이수라고 하는 부분이 두 개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진공대사의 승탑, 진공대사의 부도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진공대사 승탑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진공대사 충담이라는 스님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충담스님은 시미라고 하는 통일신라 시대
통일신라의 국사 역임했던 시미 스님의 제자입니다.
이분이 중국에 유학 갔다가 돌아오시는데
태조 왕건이 나라를 막 세웠을 때 그때 돌아오세요.
그러니까 태조 왕건이 중국에서 유명한 스님이 오셨다 하니까
얼른 달려가서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그 스님을 원주 흑법사의 주지를 맡아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원주 흑법사 주지를 맡고 거기서 살고 계시다가
940년경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입적을 하십니다.
936년 태조 왕건이 후상국 통일한 거 보시고
40년에 돌아가시는데 돌아가시자마자 거기에 바로 승탑을 세우고
바로 태조 왕건이 바로 탑비를 만듭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 때 탑비 만드는 시간을 보면
편차가 굉장히 큽니다. 30년 이상 걸린 경우도 있지만요.
승탑을 만들고 탑비를 만들고 스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입적하시고 나서
탑비를 만드는데 보통 6, 7년 정도 걸립니다.
왜냐하면 비문 적는 시간이 필요한 거죠. 비문도 적어야 되고
그 스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행정도 살아생전의 기록도 다 모아야 되니까
제자들도 그렇고 그 탑비를 작성하는 비문을 작성하는
시나의 시간도 필요하다 보니까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특이하게도 승법사 진공대사 원중법사 진공대사 탑비는
승탑이 세워지고 바로 다음에 탑비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태조 왕건때 약 11건의 탑비를 태조 왕건이 세우고자 합니다.
11건의 탑비를 만드는데 처음 태조 왕건이 세우는 탑비가
937년에 탑비를 처음 세우게 됩니다.
물론 태조 왕건이 후상국 시대에 있을 때 많은 승녀들이 있었고
그 승녀들이 후상국 시대에 돌아가시기도 하는데
통일이 되기 전에 돌아가시기도 하는데
태조 왕건은 그 스님이 돌아가자마자 승탑 세우고 바로 탑비를 안 만듭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가 멸망하고 새로운 후백제에서 승리를 거둔 936년이 되자
바로 그 다음에 937년부터 탑비를 세우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그냥 탑비 보면 거북이가 빚이 나나 들고 서있네 이렇게 알고 있지만
사실 당시에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탑비는 아무나 세울 수 없고
왕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세우게 되는 것을 보았을 때
937년부터 태조 왕건이 본격적으로 전국에 탑비를 쭉 세우는 이유는 뭐냐면
이제 통일신라는 끝났고 새로운 통일왕족 고류가 등장했고
고류의 왕은 바로 나다 그런 것을 대대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역할 또한
사실 탑비의 본래의 목적은 스님의 사락행전의 내용을 추모하고 기록하는 내용이지만
사실은 태조 왕건은 그거와 더불어서 정치적인 목적도 굉장히 효과적으로
효과적으로 탑비를 통해서 발휘하고자 그렇게 노력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태조 왕건 시대에 만들어진 11개 탑비 중에서
원주 흑법사 진공대사 탑비를 왜 주목해서 봐야 되냐면
11개 탑비 중에 태조 왕건이 비문은 대략 최원이라고 하는 분이 대부분의 비문을 작성하는데
유독 11개 탑비 중에 흑법사 진공대사 탑비는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작성하세요.
그것도 모자라서 당태종 글씨를 직접 집자해서
흑법사 진공대사 탑비를 작성을 하십니다.
다른 스님들은 안 그래요.
다른 스님 탑비는 안 그러는데
원주인 흑법사 진공대사 탑비만 유독 태조 왕건이 직접 글도 쓰고
당태종 글자까지 집자해 놓고 굉장히 역동적이고 뛰어나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 굉장히 저도 평상시에 궁금했었습니다.
궁금해서 이것도 찾아보고 자료도 찾아보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흑법사에서 주석을 했던 주지의 스님을 했던 충담스님이
신라의 국사 대우를 받으셨던 심의 스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심의 스님으로 대표되는 통일신라 불교의 전통이
고료로 충담스님을 통해서 고료가 계승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충담스님의 탑비를 굉장히 정성 들여서 만들었다.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하나 있죠.
궁금한 게 11개나 탑비를 만들었는데
다른 스님도 심의 스님 제자도 있고
더 태조 왕건과 굉장히 친밀한 스님도 있고
어떤 스님은 태조 왕건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서 궁예 때 죽기도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스님도 있는데
하필이면 충담스님만 왜 이렇게 태조 왕건이 정성을 들였을까 보면
저는 심의 스님의 제자라고 하는 기존의 학설도 중요하고
그거보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될 게
바로 흑법사라고 하는 장소성에서 우리가 주목을 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충담스님이 흑법사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만약에 정토사라든가 아니면 태조 왕건때 비물이 만들어진
또 다른 사찰에서 돌아가시게 되면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물을 썼을까?
저는 거기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아니다 이런 대답을 하게 되겠습니다.
충담스님이 돌아가시는 해가 940년의 일입니다.
940년이 어떤 시기냐면
태조 왕건이 직접 문서를 작성하는 기록들이 남아있는 거 보면
대표적인 게 개퇴사 화음법회소라고 하는 문서를 직접 작성을 하십니다.
통일을 기념해서 만든 개퇴사 중공식을 했을 때
중공기념문이죠 일종의.
중공기념문을 태조 왕건이 직접 작성을 하시고
그게 940년에 작성합니다.
940년경에 흑법사 진공대사 탑 비문을 또 작성하십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개퇴사의 의미입니다.
개퇴사의 의미는 새로운 통일왕조 고류가 등장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기 위한 통일기념 석불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후백제 신금의 항복을 받은 그 장소에다가
개퇴사 석조삼전불 입상을 세움으로 해서
새로운 통일왕조 고류가 등장했다는 것을
만방에 알렸다고 한다면
흑법사에 태조 왕건이 굉장히 역동적인 탑 비문을 만든 이유는
이것 역시 개퇴사 석조삼전불 입상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통일왕조 고류가 등장했다는 것을
알리는 그런 중요한 기념물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알 수 있는 게 939년에 만들어진 탑 비들이 있습니다.
역시 태조 왕건 시기에 만들었는데요.
보리사 대경대사 탑 비, 비로함 진공대사 탑 비
그다음에 이제 낭원대사 탑 비, 강릉에 있습니다.
이런 탑 비들을 보면
귀부라고 불리는 거북이가 작거나 약간 성약하거나
아니면 용이 있는 머릿부분, 이수라고 불리는 머릿부분이
깊이가 얕고 조각의 역동성은 떨어집니다.
그런데 흑법사 진공대사 탑 비를 보면
귀부의 크기가 갑자기 엄청나게 커집니다.
그리고 이수도 그 조각의 깊이가 굉장히 깊어지고
지금 화면에서 보시면 이수라고 해서
비신 꼭대기에 있는 용들이 용트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정말 용이 튀어나올 것 같이
꿈틀대는 용들을 역동적으로 조각해놓고
그리고 용의 조각의 깊이도 굉장히 깊고
용의 귀부라고 하는 거북이의 머리도 용두
용의 머리로 만들므로 해서 굉장히 입체적으로 조각하고 있습니다.
규모도 커지고 굉장히 역동성 있게 조각하는 모습
바로 한해전에 만들어진 탑 비와 또 다른 모습
갑자기 탑 비가 굉장히 강조되고 있는 그런 모습을 알 수가 있습니다.
흑법사 진공대사 탑 비는
지금 흑법사지의 위치를 통해 봤을 때
경상북도 북부나 강원도 지역에 있었던 통일신랄 사람들이
개경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되는 그런 장소가 됩니다.
바로 이제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개경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되는 장소에다가
새로운 통일왕족 고려가 등장했고
이제는 탑 비를 만들도록 허락하는 왕이
신라의 왕이 아니라 고려의 왕이라는 것을
만방에 보여주기 위해서 흑법사에서 만들었다.
왜냐하면 흑법사가 지금 강원도, 경상북도 북부의
북부 사람들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에 딱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재미난 것은 지금 탑 비의 위치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탑 비는 통일신랄 시대 같은 경우는
승탑과 탑 비가 사찰의 외곽에 떨어져 있습니다.
사찰이 있으면 사찰 경내 바깥에 떨어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요.
대표적인 경우가 이제 화순에 있는 쌍봉사.
쌍봉사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승탑과 탑 비가
쌍봉사에 있습니다.
쌍봉사 탑 비 같은 경우는 사찰 외곽 바깥에 있습니다.
아마 이제 주로 선종사찰에서 이제 많이 승탑들이 만들어지는데요.
선종사찰 같은 경우 선종의 특성상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다.
이제 그런 주장을 하게 되는 거죠.
선종의 구산, 구산선문을 만든 그런 종조.
가장 이제 스승이 되는 그런 스님이 돌아가시게 되면
그 스승이 부처다 이런 어떤 개념을 갖고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스승을 위해서 탑을 만드는데 그게 바로 승탑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제 처음 그런 작품들이 이제 부도가 이제
부도 승탑이라고 불리는 돌아가신 스님의 무덤들이 만들어지는데
여기에 또 딜레마가 있습니다.
무슨 딜레마가 아니면 사찰 아래에 이미 탑이 있습니다, 탑.
3층 석탑이라든가 목탑이라든가 탑이 있는데
탑은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사리가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탑이 부처님의 사리가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탑은 곧 부처님의 무덤이 되며 곧 탑 자체가 부처님이 됩니다.
그런데 구산선문의 대표적인 스승이 돌아가셨는데
그 스승을 위해서도 그 스승도 부처가 됐기 때문에
탑을 만들어드립니다.
탑을 만들었지만 문제는 부처님과 돌아가신 스님이
이론상으로는 똑같이 부처님이지만
같은 경례에 있기에는 아직까지는 위계의 차이가
어쩔 수 없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초창기에 승탑과 탑비가 만들어지면
승탑과 탑비의 위치가 사역 바깥에 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조금씩 안에 들어오는데
고려초가 되면 고려초의 흑법사지 진공의 탑비가 대표적인데요.
이 탑비를 태조왕권은 936년에 통일하고 나서
937년부터 탑비를 일종의 새로운 통일왕적 고려의 왕은 나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 도구처럼 이용을 하는
그런 어떤 정치적 목적도 거기에 반영이 되다 보니까
탑비를 사람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세우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외곽에 있었던 탑비가
특히 흑법사지 진공의 탑비 같은 경우는
지금 보면 석탑 바로 뒤에 대웅전이 있고
그 대웅전 바로 옆에 탑비를 세워놨습니다.
그러니까 개경으로 가는 사람들, 여주 고달사 거쳐서
개경으로 갈 사람들이 원주 흑법사에 오게 되면
무조건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겠죠.
그런데 부처님께 예배 드리고 법당에 예배 드리고 나왔는데
그 법당 바로 옆에 탑비가 있습니다.
탑비는 무조건 다 보는 거죠.
탑비를 보니까 이 탑비는 태조왕권이 직접 비누를 짓고
당태종 글씨를 직접 해서 만들었는데
크기도 엄청 크고 역동성이 있고
그리고 이제 앞시대에 보지 못했던 활력이 넘치는
뛰어난 탑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이제 세상이 바뀌었구나, 사람들이 이렇게 느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탑비의 중요성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승려의 기념물 그런 차원이 아니라
이거는 국가의 등장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태조왕권은 진공대사 충담이라는 분을 흑법사제에 세우고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유학 갔다 오신 분이 또 오게 됩니다.
법경대사라는 분이 오시게 되는데
충주 정토사의 주지로 머물게 되시는데
후상국 통일 이후에 얼마 안 있다가 돌아가시게 됩니다.
돌아가시게 되는데 원중법사제 진공대사 탑비 만들어지고 나서
바로 충주정토사 법경대사 탑비도 만들어지게 됩니다.
시의 차이가 얼마 안 나기 때문에
충주정토사 법경대사 탑비를 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이렇게 큰 용의 머리를 하고 있고요.
그리고 이수라고 해서 비신 꼭대기에 있는
용트림하고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
머리돌이 비신 위에 올라가있게 되는데
용의 배치가 굉장히 흡사합니다.
이런 걸 통해서 같은 장인 집단에 의해서
시의 차이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에
원중법사 만든 장인들이
충주정토사 참여해서 만들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통신화 말부터 활동했던 중요한 스님이 또 한 분 계십니다.
영월 흑령사에 가면
징요대사 절충스님의 탑비가 있습니다.
징요대사 절충스님의 탑비 비문은
통일신라 경명학대 작성됐는데
이 탑비는 한참 뒤에 세워지게 됩니다.
944년경, 그러니까 돌아가시고 나서도
한 40년 이따가 세워집니다.
세워진 시기를 보았을 때
흥법사직, 원중법사직이나
아니면 충주정토사직, 고려태조 왕권때 세워졌던
굉장히 역동성 있는 탑비하고 또 모양이 달라요.
국가에서 왕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세우는 탑비라고 한다면
같은 장인들이 비슷한 시기에 내려와서 만들었으면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져야 될 텐데
지금 흑령사 탑비의 모양을 보면
용머리도 좀 작고요.
비신 위에 있는 이수라고 하는 용이 꿈틀거리는 모양도
굉장히 평면적으로 만들어졌고
규모가 좀 작고 오히려
통일신라 탑비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탑비는 왕의 허락이 있어야 되는데
아마도 흑령사 징요대사 탑비는
당시의 왕은 944년경을 전환시키면
당시의 왕은 해종입니다.
해종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세운 탑비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그럼 누가 탑비를 세웠을까?
비문은 통일신라 시대 때 만들어졌는데요.
비신에다가 비문을 새기고 나서
비를 막 세우고 건립할 때
그 비문 뒷부분에다가
음기라고 해서 비신을 세울 때 추각을 합니다.
추후에 다시 새기는 기록이 있는데
그게 음기라고 합니다.
비문은 900년경을 전환시키게 만들어졌는데
음기는 탑비를 세우는 944년경에
영월 흑령사 징요대사 탑비의 음기가 세워졌는데
그 음기를 분석해보면
그 탑비를 세운 사람들의 목적이 알 수가 있습니다.
추후로 기록한 비문을 살펴보면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해종과 정종입니다.
충주 유시들이 대거 참여합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
충주 유시가 그럼 뜬금없이
영월 흑령사 징요대사 탑비에 만드는데 왜 참여하냐.
이 시기를 보면 그들의 야망을 알 수가 있는 거죠.
지금 고려태조 왕건이 죽고 나서
나주오시의 아들, 태조와 나주오시의 아들 사이에서
나온 해정이 이대왕이 됩니다.
근데 나주오시 세력이 힘이 미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충주 유시.
태조와 충주 유시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던 정종.
정종을 비롯한 충주 세력들이
나주오시의 아들 해종을 왕으로 인정 안 하겠다.
우리가 왕이 되겠다.
그런 욕망을 여기 탑비에다 드러내고 있는 거죠.
이 탑비를 보면 현재 그냥 생김새가 다르구나.
모양이 다르니까 그냥 다양한 종류로 만들었나 보다.
그런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모양이 다른 이유는
그 맞는 장인이 다른 거고
장인이 다르다는 것은
중앙정부, 해종이 허락하지 않은 탑비가 되는 거고
중앙정부에서 장인이 파견되지 않은 탑비다.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고요.
그럼 그 탑비는 누가 만들었냐면
그 뒤에 음기, 뒤에 추각한
후대에 다시 새겼던 비문을 분석해보면
충주 유시 세력이 이 탑비를 만드는 왕의 허락이 있어야만 되니까
이 고려의 왕은 해종이 아니라 우리가 돼야 된다는
그런 욕망을 여기서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해석하시면
고려사 기록상부 보면
해종하고 정종 왕의 계승이 그냥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치열한 왕의 계승전과
그 왕의 계승전을 준비하고 있는
충주 유시 세력들의 철저한 준비성 같은 것도
우리는 탑비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태조 왕권 시기를 전환 시기 때
원주 흥법사, 충주 정토사
한강 유역에, 남한강 유역에 있는데요.
또 하나 우리가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탑비가
고달사지 원정대사 탑비입니다.
고달사지 원정대사 탑비는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저 개인적으로는 가장 뛰어난 탑비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탑비의 예술성을 논할 때
원주 법천사에는
지강국사 현멸탑이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탑비다
이렇게 인정을 받고 있는데
예술성으로 본다면 지강국사 현멸탑이 가장 뛰어나다고 말씀드릴 수 있지만
어떤 그 유기적으로 결합되고 역동성과 예술성이 다 나타난
뛰어난 탑비 하면
저는 개인적으로 여주 고달사지 탑비가
더 그 작품성이
물론 다 독특한 어떤 문화재만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술적으로 그리고 역동성과 예술성이 함께
어우러진 뛰어난 탑비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여주 고달사지 원정대사 탑비를 꼽습니다.
지금 여주 고달사지에 가시면
승탑, 승탑도 굉장히 뛰어난 승탑이 남아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답사도 한번 다니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여주 고달사 원정대사 탑비를 이해하는 방법이 있는데요.
바로 광종 후반기 때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불상에서 보았을 때 광종 후반기 때
만들어진 작품을 살펴보면
논산 관척사 석조 보살 입상, 은진미르기 있습니다.
논산 관척사 석조 보살 입상의 조성 배경에 대한 많은 의견이 있지만
일종의 자신의 권위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권의 권위와 맞먹거나
그거보다 더 하다는 것을 사실은 보여주고 싶어하는
광종의 당시의 정치적 상황, 개인적 욕망 등이 반영됐다고 해석할 수가 있는데요.
여주 고달사지 원정대사 탑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냐면
일단은 여주 고달사지 원정대사 탑비 같은 경우는
굉장히 많은 공력을 들여서 뛰어나게 조각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탑비의 위치가 약간 외곽에 있거나
아니면은 승탑 옆에 있어야 되는데
당시에 고달사의 발굴 성과를 보면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바로 옆에서 올려다보는 위치
올려다보는 위치에 탑비가 있는 거죠.
올려다보는 위치에 탑비가 있으니까
이 탑비는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거죠.
의도적으로 기존의 탑비의 위치와는 다르게
흥법사지에서 진공대사 탑비를 봤던 사람은
여주 고달사지에 와선 무조건 원정대사 탑비
고달사지 탑비를 봐야 됩니다.
그런데 고달사지 탑비는 광종이 또 만든 거죠.
그러니까 광종은 아마도 자신의 권위를
다양한 방면으로 드러내고자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10세기의 탑비를 쭉 봤는데요.
탑비 본연의 목적, 돌아가신 스님을 추모하기 위한
어떤 기념물로서의 목적뿐만 아니라
어떤 정치적인 선전 도구로서도 많이 이용되고 있구나.
특히 10세기의 특징이구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 11세기의 남한강역의 탑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충주 정토사의 흥법국사비라고 하는 탑비가 있습니다.
기록을 통해서 이 탑비가 1017년경에 세워졌다는 걸 알 수가 있는데요.
흥법국사비의 특징을 보면
비문 뒤에 음기라고 해서 세울 때 새롭게 추가로 조각한 비문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제자들이 쭉 열거되어 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여기서 탑비 본연의 목적으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탑비는 또 한편으로는 등기부등본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갑자기 뜬금없이 왜 등기부등본이 나오냐 하면
그 높은 고승의 자리에 있었던 스님이 머물게 되는 사찰
그 사찰에서 돌아가시게 되는데 그걸 하산소라고 합니다.
그 하산소 사찰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습니다.
그 스님의 제자들이, 문도들이 그 사찰을 계속 운영하고
그 사찰에 대한 일정의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의 제자들이 그 사찰을 운영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가 바로 탑비가 됩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스님의 제자들의 사찰이니까
이게 다른 종단이라든가 다른 종파에서
이 사찰에 대해서 권리를 침범하거나 그러지 마라 그런 걸 보여주는 거죠.
왕이 교통정의를 해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그럼 계경에는 왜 없냐 하면
계경의 사찰은 대부분 원찰이 많고 국가 소속의 사찰이 많다 보니까
그 계경에 있던 사찰을 어떤 한 스님의 제자들이 독점적으로
그 사찰을 운영하는 것을 일종의 방지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탑비는 왕의 허락을 받고 세우는 국가적인 기념물
스님의 기념물 이렇게도 이해하시면 되고요.
거북이 위에 높은 비신이 세워진 탑비 보시면
저거 돌아가신 스님의 제자들이 이 사찰의 운영권을 갖고 있다는
등기부 등본이구나 이렇게 이해하시면
우리 좀 쉽게 탑비의 성격을 이해하실 수가 있으실 겁니다.
거돈사지에도 11세기에 만들어진 탑비가 있는데요.
거돈사지는 통일신라 시대 때 만들어진 사찰입니다.
그런데 원공국사 지종이라고 하는 스님이 돌아가십니다.
1215년에 원공국사 승려탑이라고 하는 그런 탑비가 세워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난 것은 원주 거돈사지는 원주 흥법사지와 굉장히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탑 팔각 원단형이라고 일반적으로 불리는
스님의 묘소라고 볼 수 있는 그 승탑 부도
부도의 생김새가 흥법사지 부도하고 굉장히 승탑하고 비슷합니다.
그런데 탑비도 그렇고 탑비의 거북이도 그렇고 탑비의 이수에 있는 용도 그렇고
역동성이 확 떨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왜 거돈사지 옆에 굉장히 흥법사지 진공국사 탑비처럼
굉장히 뛰어난 역동성을 갖고 있는 탑비가 있는데
1025년경에 만들어진 11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탑비에서는 왜 이렇게 갑자기 힘이 쭉 빠졌지?
하고 이제 우리가 궁금증을 자아낼 수가 있는데
그것도 역시 탑비를 만드는 장인들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탑비를 만드는 탑비 승탑을 만드는 장인들은
인류 장인들이 가게 돼 있는 거죠.
국가의 소속이거나 아니면 최고의 기술을 갖고 있는 장인들이
왕의 허락을 받고서는 뛰어난 작품을 만드는데
그런데 승탑, 탑비 만드는 작업 횟수가 광종대까지는 꾸준히 나옵니다.
태조왕검부터 광종, 경종대까지 오대왕까지는 쭉 나오다가
갑자기 성종, 목종 해서
유교를 국가 운영의 주요한 모토로 내세우게 된 성종대부터 시작해서
승탑이라든가 탑비 잘 안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까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단절이 되죠.
한 30년 단절이 있습니다.
30년 단절을 거쳐서 한 세대 정도 단절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승탑과 탑비가 거돈사지 탑비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평령적인 모습을 띄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탑비가 법천사지지강국사 탑비.
여기서 한 번쯤 들어보셨을 거예요.
지금은 수리안이라고 옮겨졌는데요.
예전에 경복궁 들어가시면 고궁박물관 있습니다.
고궁박물관 바로 옆에 굉장히 뛰어난 승탑, 지강국사 현묘탑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예술작품, 석조미술의 최고의 화려한 예술작품이라고 불리는데
그 화려한 예술작품이었던 지강국사 현묘탑과
현묘탑비가 법천사였습니다. 원주법천사.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우리가 던질 수가 있죠.
최고의 작품이 계경에 있던 큰 사찰에 있거나
아니면 중요한 지역에 있어야 되는데
법천사, 원주 시내도 아니고 남한강하고 가까운 지역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곳에
굉장히 최고의 작품이 만들어졌단 말이죠.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왜 계경에도 안 만드는 걸 시골에다가 이렇게 만들어놨을까 하면
이 위치랑 당시의 사회상의 역시 반영이 됩니다.
왜냐하면 현종때 비롯한 시기에 만드는데
이 시기에 조세 제도가 바뀝니다.
조세 제도가 바뀌면서 세금을 지방에서 걷어다가
계경에다가 전하는데 그동안은 60개의 포구에서
세금 모아서 계경에다가 전달했다고 한다면
이때쯤 되면 12개를 확 줄여버립니다, 포구를.
세금 모으는 장소는 줄어들지만
그런데 법천사, 지강국사, 현묘탑이 있었던
그 장소 바로 옆에는 한강의 중요한 조창 중에 하나였던
흥원창이라고 하는 조세를 모으는 창고가
바로 법천사 옆에 만들어지게 됩니다.
지금 강원도 지역이라든가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있었던 모든 물류가
지금 남한강에 집중이 되죠.
특히 흥원창 지역의 강원도 지역의 모든 세금, 물류,
엄청난 부가 법천사 주변에 몰리게 되니까
법천사를 새롭게 커다랗게 중착을 합니다.
이런 것을 보았을 때 원주 법천사, 지강국사, 현묘탑이
굉장히 화려하게 세워진 이유는
지금 어느 지역보다 엄청난 부가 법천사 주변에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고
그렇다면 그 문도들, 지강국사, 현묘탑의 주인공은 혜린 스님이신데
그 혜린 스님은 굉장히 추앙받던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셨던
그런 스님이 되십니다.
그 스님을 따랐던 많은 제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만한 경제력이 있어야 되는 그런 사찰이 필요했었고
그만한 경제력이 있었던 사찰이 바로 원주 법천사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제자들이 혜린 스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왕한테 허락을 받고 지강국사, 현묘탑을 만들고
지강국사, 현묘탑비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 탑과 탑비가 있었던 장소를 아주 화려하게 장식을 해놓는 거죠.
지금 지강국사, 현묘탑비는 권위를 있는 대로 높여놓고
이 이후에 법천사의 경제력이라든가 법천사의 운영권은
지금 지강국사 혜린 스님, 혜린 스님의 제자들이
법천사의 관리를 맡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대회에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런 의도가 반영된 그런 작품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남한강 유역의 탑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단순하게 형태만 보고
아니면 거북이가 이렇게 생겼네, 아니면 부처님이 크네
단순한 형태만 보고 조각의 우수성 정도만 논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남한강 유역의 탑비
또는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많은 부처님은
어떤 부처님의 자비, 부처님의 지혜를 전파하는 종교의 대상으로서도
일차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띄고 있지만
그 부처님과 불교 미술품, 석조 미술품을 조금만 더 우리가 관심을 갖고 본다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그 이면에 숨겨졌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료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남한강 유역의 탑비에 대한 강의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