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명의 조선 성리학의 대가 율곡이이 등장, 붕당의 탄생 한국성리학의 계보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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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리학의 계보 5부. 훈구파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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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한국 성리학의 역사를 알아보는 한국 성리학의 계보 5보입니다.
고려시대의 안향, 백의정, 이재현, 이색, 정몽주의 계보는 조선시대로
이어져 정몽주의 제자였던 길제, 김숙자, 김종직, 김경필, 조강조로
이어졌습니다.
조강조의 직계의 제자들 중에서는 조강조를 이은 사람은 없었지만
김종직의 또 다른 제자의 제자였던 이현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퇴계
2황으로부터 다시금 조선중기의 성리학 계보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퇴계 2황은 만인의 성리학자들로 부터 추앙을 받던 대학자였는데
성리학의 이기론에 대하여 기보다 이를 더 중요시한 퇴계 2황의 주리론
에 반기를 든 두 학자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기대승이었고 그 다음엔 율곡이이였죠.
이번 영상에서는 율곡이이부터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스펙만으로 율곡이이를 따라갈 수 있을만한 성리학자가 있을까 합니다.
강원도 강릉에서 어머니 신사임당 의 집에서 태어난 율곡이이는 총
9반의 시험에서 모두 전국 1등 을 차지한 구도장원공의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가진 존재였죠.
조선시대판 수능이라고 할 수 있는 소과를 전국 1등 했을 나이가 고작
13살이었습니다.
율곡이이의 암기력이 특히 뛰어났다 고 하며 경연자리에서 이이가 입을
때면 아무도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율곡이이의 결정적인 단점 이 있었으니 정통 성리학자가 아니었다
는 겁니다.
이미 몇차례 언급했지만 한국 성리학의 메카이자 산실은 경북지역 영남
지역이었습니다.
영남학파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남 출신의 성리학자 및 사대부들은
그들이 영남 출신인 것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이 있었고 그들만의 카르테도
심한 편이었습니다.
그래도 율곡이이는 강릉 출신이고 나중에는 경기도 파주에 둥지를
튭니다.
즉 영남학파 출신이 아니라는 거죠 .
심지어 율곡이이는 스승도 없었습니다.
그동안 고려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어떤 스승에게서 수학했느냐 이런
학연을 대단히 중요시하겠는데 율곡이이는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했죠.
족부도 없는데 워낙 명민한 천지 이다 보니 영남 출신의 사대부들
과 유림들은 율곡이이를 굉장히 탐탁지 않아했습니다.
성경관 유생 시절에도 율곡이이는 따돌림을 당했다죠.
결정적으로 영남학파 사대부들이 율곡이이를 극도로 싫어하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이황기대승의 2기 논쟁 이후 다시금
율곡이이가 기의 중요성을 강조 하며 이황의 주리론에 반박을 한
겁니다.
이와 기는 하나처럼 보여도 서로 섞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존재
라는 2기 불상점에 반박하며 과거 기대승처럼 이와 기가 달라
보여도 결국은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2기 불상리를 주장했죠
.
정작 퇴계이황은 기대승 때처럼 율곡이이의 반박에 하나하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논쟁하며 건전한 토론 을 해주었지만 다른 영남학파 유림
들과 사대부들은 율곡이이를 매우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퇴계이황의 주리론과 율곡이이 의 주리론은 단순히 학문적 사상적
차이에서 넘어서 정치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와 기를 정치에 투영해본다면 이는 통치이념이자 원리이고 기
는 그것이 발현되는 정책이겠죠 .
지난 4부에서도 설명드렸듯 퇴계이황의 성량은 심철학이라고 하여 인간
개인의 심성 인간성의 수향을 강조 했습니다.
이건 정치적으로 해석했을 때 퇴계이황은 구강과 조정의 실현에 나가는
정책보다 그 정책에 깃든 원리와 이념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겁니다.
위정자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이념을 투영하느냐가 가장 선행
되어야 한다고 여겼죠.
아무래도 정치인보다는 학자로서 정체성이 컸던 퇴계이황은 원론
적인 이야기를 더 강조할 수 밖에 없었겠죠.
반면 주기론자였던 율곡이이는 정책에 투영되는 원리와 이념과
사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정책 그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율곡이이의 주기론은 이가 기보다 안 중요하다는게 아니라
기에 따라 이가 훼손될 수 있으니 기의 활용도가 중요하다고 여겼
죠.
그래서 율곡이이는 아주 현실적인 정책입안과 정책실현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래서 퇴계이황은 학자로서 율곡 이이는 정치인으로서 바라봐야 하는
겁니다.
퇴계이황이 죽고나서는 조선의 14대 왕 선조가 율곡이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습니다.
영남하팔 출신의 사대부들이 율곡 이이의 흠을 잡아도 선조는 언제나
율곡이이를 품어주며 총애했죠 .
이이는 선조의 지지에 힘입어 정말 여러가지 많은 개혁들을 건의하고
시도합니다.
이이의 10만 양병설도 이때 나온 겁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이의 10만 양병설 이 사실은 없었고 나중에 후손들이
이이를 숭생하기 위해 만들어냈다 는 이야기도 있죠.
10만 양병설의 진위를 떠나서 적어도 이이가 이때 내놓은 개혁은 정말
파격적인게 많았습니다.
잠시 조선의 정치 상황을 살펴보 겠습니다.
조선중기는 조선개국일의 공신 으로 특봉되어 기득권을 누려온
훈구파들과 고려말 정몽주 그리고 극제자 길제의 학풍을 영남지방
을 중심으로 이어오며 김종직 조광제에 걸쳐 정치적으로 등용되었던
살인파들간의 정쟁의 역사였습니다.
단 현실적인 정치보다는 철저한 성리학의 정신을 강조했던 살인파들은
그 과정에서 국왕들이 심기를 건드렸고 국왕들이 훈구파들과 함께 살인파
들을 축청한 사화가 4차례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끝내 사라진건 훈구파였 고 다시금 조선을 장악한건 살인파였습니다.
사화를 통해 축청당한건 살인파 인데 왜 훈구파가 사라졌을까요
훈구파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공신 으로 특봉된 대신들로 공신으로
특봉되지 않으면 훈구파는 만들어질 수가 없습니다.
반면 살인파의 경우 조선 전기부터 공격적으로 조정에 진출하기보다는
영남지방에서 성리학의 학기를 이어온 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굉장히 단단했습니다.
더군다나 학연을 중요시 여겼던 만큼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돈독
하기 때문에 누구 한명이 정치적으로 숙청당한다고 해서 그 제자들이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정계에 진출할 수가 있었죠.
따라서 살인파들의 권력기반은 정치권력이라기보다는 영남지방
을 중심으로 한 지방의 터전에서 나왔습니다.
또한 훈구파들도 결국은 같이 성리학 을 숭상하는 사대부들이었기에
이들도 살인파들의 커뮤니티에 동화되며 훈구파가 자연스레
살인파로 넘어갔던거죠.
그렇다면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성리학기를 이어오던 살인파가
있고 비영남지방 출신의 사대부들이 또 있지 않겠습니까
영남지방 출신의 성리학자들은 영남학파인 것에 대해 엄청난 프라이드
를 갖고 있었고 비영남지방 성리학자들에 대해 다소 배타적이었습니다.
비영남지방 성리학자들은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출신들로 모여들었고
따라서 비영남지방 성리학자들을 개파적으로 기호학파라고 부릅니다.
영남학파 출신들은 자신들의 안양 백의정 이재현 이색 정몽주 길제
김숙자 김종집 김깅필 조광조 그리고 이언접과 태기이왕으로 다시 시작하는
정통 성리학 계보라는 정체성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그래서 성리학의 정신을 더 원론 적으로 파고들고 다소 보수적인
이념을 갖고 있었죠.
반면 기호학파의 경우 조금 더 융통성 있게 성리학을 이해하며
현실적인 정책에 더 주안점을 두 었죠.
그렇다면 기호학파의 경우 2황과 2이 중 누구를 더 따랐을까요
당연히 2이겠죠 14대왕 선조 제위 초중기 정치계
최대의 화두는 척신정치의 잔재 였습니다.
척신정치란 외척 그 구강의 외가 나 처가가 강한 권력에 개입하여
국정을 농단하는 행위를 뜻하는데 선조의 선대왕이었던 13대왕 명종
때 어머니였던 문종황과 그녀의 동생이었던 윤헌황이 권력을 잡
았단 말이죠.
윤헌황이 죽자 다시는 외척에서 윤헌형같은 간신이 나오지 않도록
척신정치의 잔재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이때 입장이 애매해진 한 대신이 있었습니다.
심의겸이라고 심의겸은 13대왕 명종의 처남이었습니다.
심의겸은 퇴기 2황 밑에서도 수학 한 제자였으나 심의겸이 영남지방
출신이 아니고 또 척신이라는 이유로 영남학파에서는 심의겸을 같은
살인파로 엮어주질 않았습니다.
당연히 심의겸도 이런 영남 출신 들을 좋아할 리가 없겠죠 1572년
선조가 김효원을 2조 정랑직에 임명 했습니다.
김효원은 2황의 제자로 전형적인 영남 출신의 정통 살인파였고 2조
정랑은 실무 공무원들의 인사권 을 쥐고 있는 벼슬이었습니다.
공무원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었 기에 김효원이 2조 정랑이 되면
김효원은 영남학파 출신들로 인사권 을 발동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심의겸
이 김효원의 2조 정랑 임명을 두고 반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김효원이 2조 정랑이 되기는 했습니다만 3년 후에 김효원이 다른
관직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2조 정랑 후임자를 두고 심의겸의 동생이
추천이 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합니다.
이 사건을 두고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는 대결구도가 되었고 영남
학팔 출신들의 터스에 불만이 많 던 기후학파들은 전부 심의겸을
지지했죠.
경복궁 기준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어서 심의겸
을 지지하는 기후학파들의 서인 김효원을 지지하는 영남학파들을
서인과 동인 이게 바로 조선시대 붕당의 시작입니다.
동인의 경우 퇴계 2황을 사상적 스승 으로 모시면서 성리학계의
정통임을 자부했고 서인의 경우 몇 세대 전 이언적의
주리론에 반박했던 주기론자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석영덕의 주기론
을 학문적 토대로 삼으며 선조의 총애를 듬뿍 뻗던 율곡이이를 지지
하였습니다.
정작 율곡이이는 붕당 정치가 옳 지 못하다며 비판하긴 했지만 말
이죠.
선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이이 는 49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이이의 개혁안들은 전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가 주장했던 거의
모든 개혁들은 결국 조선후계 다시 실현을 된답니다.
이이의 죽음으로 서인들은 끈이 떨어졌고 이이 사후 선조가 영남학파
동인들을 더 챙겨주면서 조선붕 당의 시작은 동인이 우사한 형태로
시작했죠.
이렇게 선조때에 이르러 이제 성리 학위 계보는 학연적으로 지연적으로
그리고 붕당이라는 개념화에 정치 적으로 분열되어 이 황해의 학파
와 이이의 학파로 나뉘어 전개된 답니다.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