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은 왜 노빠꾸 상남자 성리학자들이라고 할까? 한국성리학의 계보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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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리학의 계보 6부. 상남자 성리학자들의 붕당, 북인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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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돋보기입니다.
한국성리학의 역사를 알아보는 한국성리학의 계보 6부입니다.
조선중기 훈구파가 사라지고 향약 서원 등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내려
오던 살인파들의 성리학 커뮤니티 가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이제 성리학의 계보가 일환화 되지 않고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전개해서 붕방으로 이어졌 는데요.
우선 고려 말 성리학이 유입되고 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몇
백년간 성리학 계보가 내려오던 영남지방의 사대부들은
그들이 영남지방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그들을 영남학파라고 부르며 영남학파 사대부들은 성리학의 정통임을
자부했죠.
반면 비영남지방 사대부들은 경기도와 충청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그래서 비영남지방계파를 기호학파 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현실적인 사상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영남학파는 성리학 계보를 숭성 하며 퇴계이황의 이론을 계승하였고
기호학파는 영남학파의 주리론 에 반대하던 석영덕의 주기론을
이렇게 영남학파 대 기호학파 주리론 대 주기론에 따라 조선의 조정은
동인과 서인이라는 풍당으로 갈리게 되었죠.
이때 스스로를 정통임을 자부했던 동인은 퇴계이황과 더불어 다른
한 명의 사상을 더 계승하였습니다.
바로 난명조식이었습니다.
난명조식은 퇴계이황과는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퇴계이황과
같은 세대의 성리학자로 경남 합천 출신이었습니다.
역시 영남학파죠.
다만 난명조식은 특정 누군가로 부터 학문을 배우지는 않은
계보를 중요시 여기는 영남학파 에서 특정 계보에 속하지 않은
성리학자였습니다.
단순히 계보만 없는게 아니라 성리학 에서만큼은 원리원칙을 고수했던
영남학파였지만 난명조식의 경우 성리학을 뛰어넘어 유학의 다른
분과학문 심지어 불교와 노장사상 그리고
자파까지 모든 사상의 영역을 아우르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었죠.
성리학이 원리원칙을 중요시 여기는 입장에서 타 분과학문이나 타 사상을
공부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금지 되어 있다시피 한데
난명조식은 영남학파이면서 다소 자유로운 사상을 추구했죠.
그렇다고 영남학파의 살인들이나 퇴계이황의 제자들이나 난명조식을
싫어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존경했는데요.
난명조식은 비록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재하에 묻혀 살던 선비였지만
성격이나 언사가 꽤나 과격한 편 이었습니다.
13대왕 명종 시절 문정황후와 수람 청정을 하던 당시
문정황후를 조롱하고 까내리는 상소문을 명종에게 올리기도 하고
정치판에 대해서 필터링 없는 상남장식 표현을 서스럼 없이 하며
오히려 사활을 지친 영남학파 서대부들의 응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같은 영남학파이고 훗날 동인이란 붕당이
둘 모두의 사상을 계승한다고는 했지만
퇴계이황과 난명조식의 캐릭터는 완전히 상반됐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다를 수 있나 싶을 정도였죠.
난명조식의 제자들도 무시못할 정도로 많았으며
영남학파 출신들이 다같이 동인이란 붕당을 이루었지만
알게 모르게 동인 내에서 난명조식파냐 퇴계이황파냐
뭐 이런 견제구도가 존재했습니다.
임진왜란 직전 서인의 정철이란 신하가 제대로 사고를 진 적이 있었습니다.
1591년 정철은 14대왕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라고 건의합니다.
왕세자 책봉을 건져한다고 표현하는데
정철이 눈치없이 건져를 요청한 이 문제로
왜냐하면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광해군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던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할 생각이었거든요.
다만 아직 신성군이 어려서 신성군이 클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세자 책봉을 미뤄왔던 겁니다.
선조의 사랑을 받던 인빈 김씨가 정철이 자신을 음해하려 한다고 모함까지 하자
선조는 정철을 석탈관직시키고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정철과 더불어 서인의 대표 간부들이 대거 관직해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동인 쪽에서는 정철이 알아서 실언을 해주었으니
이 기회에 정철을 끝장내버리고 서인 대신들도 조정에서 싸그리 내쫓아버리자는 강경파와
과한 정치 보복은 삼가고 어차피 정철은 유배를 갔으니
이 정부 선에서 끝내자는 온건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정철에 대한 처분을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뉜 건
비단 의견 차이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주로 난명조식의 제자들이 강경파였고
퇴기이황의 제자들이 온건파였죠.
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노박구 상남자 조식과 온화한 대학재 이황의 이미지와도 상응하죠.
강경파의 대표로는 이산회가 있었습니다.
이산회는 난명조식과 퇴기이황 둘 모두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난명조식 쪽에 가까웠죠.
온건파의 대표로는 그 유명한 유성룡이 있죠.
유성룡은 퇴기이황의 직계 제자였으며
그 많은 퇴기 제자들 중에서도
퇴기이황이 가장 명민하고 똑똑하다고 인정한 사람이 유성룡이었죠.
결국 정철에 대한 처분권을 두고 이산회 중심의 난명조식파와
유성룡 중심의 퇴기이황파는
각각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고 말았습니다.
이미 조식과 이황 생전 알게 모르게 존재했던 대립구도와
또 그 제자들 사이에서의 경쟁구도가 이때 불거지며
동인은 결국 북인과 남인으로 나뉜 거죠.
정치적으로 북인을 이끌던 대표는 이산회였지만
제하에서 학문적으로 북인을 이끌던 난명학파의 대표는 정인홍이었습니다.
정인홍은 난명조식과 같은 고향으로
어릴 적 난명조식 밑에서 수학한 직계 제자였죠.
오히려 학문적으로는 난명조식의 학문을 정통으로 이은 사람은
정인홍이었습니다.
스승 조식을 너무나도 존경한 정인홍은
스승처럼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채 제하의 선배로 담았고
임진완의 당시에는 의병장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더라도
정인홍은 난명조식의 직계 제자이며
난명조식의 계보를 이었다는 상징성 덕에
북인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임진완이 끝나고 유성룡이 정치적 압박을 받고
본인도 정치의 환멸을 느끼고 낙향하면서
유성룡이 이끌던 남인의 사력이 주춤하였는데
그때 북인 정권이 위세가 강해졌습니다.
1599년 선조는 홍여순을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했습니다.
홍여순도 북인 소속의 대신이었는데
당대에 간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평판이 워낙 개판이었습니다.
홍여순 역시 난명조식의 제자였는데
홍여순이 워낙 평판이 개판이다 보니
북인 내에서도 홍여순을 꺼려하고 있었습니다.
홍여순은 늙은 선조에게 워낙 사탕발린 말을 많이 해대며
선조의 환심을 사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선조가 홍여순을 대사헌에 임명해 주었는데
같은 북인 내에서 유영격, 남의국, 김신국 등이
홍여순의 대사헌 임명에 반대를 한 겁니다.
그런데 이때 난명조식의 수제자이자 직계제자였던 정인홍
그리고 정치적으로 북인의 당수였던 이산회가
홍여순을 감싸주었습니다.
이 홍여순 대사헌 임명권을 두고
북인 내에서는 정인홍파와 유영경파로도 나뉘게 됩니다.
사람들은 정인홍파를 대북, 유영경파를 소북이라고 불렀죠.
이때까지만 해도 대북과 소북의 대립은 단순 의견 차이가 끝인 줄 알았습니다.
1606년 선조는 새로 장가려던 임목 왕후 사이에서
영창대군이라는 원자를 놨습니다.
그간 선조는 후공돌 소승의 아들들만 있었을 뿐
왕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터지자
가뜩이나 적자도 없겠다.
서자들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난 광해군을 세자에 측봉했는데
임진왜란 이후 덜커덕 선조는 적자를 보게 된 겁니다.
이러면 광해군의 입장이 아주 애매해지겠죠.
일단 선조는 당장에 광해군을 세자에서 패위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교체할 생각이었으나
아직 영창대군이 갓난액이라 세자 교체에 대한 명분이 없었죠.
소북을 이끌던 유영경은 역시나 선조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는데
선조의 뜻에 따라 나중에 가서 영창대군이 다 컸을 때
세자 교체를 성공리에 해내면 세상은 소북의 세상이 될 것을 알고
유영경은 조정래 영창대군 지지파를 규합했습니다.
이에 정인홍, 이산해, 홍여순 그리고 정인홍의 제자였던 이이천 등이 나서서
어디 감히 세자를 교체하려고 하냐며 광해군을 지지하였죠.
심지어 정인홍은 당시 영회장이었던 유인경에게
상소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영경이 세자를 해치려는 정상이 이미 폭로된 것을 알고
시기가 날로 극심하니 자신을 위한 모략이라면 못하는 짓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보건대 전하의 부자를 해치는 자도 영경이고
전하의 종사를 마치는 자도 영경이며
전하의 나라와 백성을 해치는 자도 또한 영경입니다.
유영경이 이러한 짓을 하는 것은 전하에게 아처마여 총애를 굳히고
국가를 멋대로 하려는 계획이 아닙니까?
하지만 선조 본인도 세자 교체를 원했기에
선조는 정인홍을 욕하며 유영경을 감싸 안아주었죠.
이에 소북파 대신들은 정인홍, 이이천 등을 탄핵시켜버렸죠.
하지만 얼마 안에서 선조가 1608년 급작스레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아직 영창대군의 나이 2살이었기에 세자로 측봉될 수가 없었고
그렇게 세자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세자였던 광해군이 조선의 15대 왕으로 지지하였죠.
광해군은 곧바로 정인홍, 이이천 등의 대북파를 불러들였고
유영경은 자결 명령에 떨어지고 심지어 부관참시까지 당했죠.
이렇게 소북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남은 소북파 대신들은 남인으로 흡수되었고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만 서인으로 흡수되었죠.
하지만 광해군 시절 서인과 남인들도 길을 못 펴는 작은 야당에 불과했고
광해군 제위기에는 대북파의 독주였습니다.
정인홍이 뒤를 이어 북인을 이끌던 사냥기의 이이천도 미친교로 유명하죠.
그런 광해군과 대북파였지만 끝내 서인들의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은 폐위되고 대북파는 몰락하였습니다.
이번엔 서인이 대북파를 이렇게 박살내버렸고
대북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어
북인은 역사 속 붕당으로 없어지고 서인과 남인만이 남게 되었죠.
어떻게 보면 다시 이이의 정신을 계승한 기호학파와
이황의 정신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대립구도로 돌아오게 된거죠.
그렇다면 동인도 난명파와 퇴기파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는데
이제 인조 반정으로 정권을 주게 된 서인은 내부적으로 안나뉘었을까요?
왜 안나뉘었겠습니까?
서인의 분열 다음편에서 계속됩니다.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저희 역사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