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처럼 사는 방법 살인, 도둑질, 삿된 음행, 거짓말, 술 마시지 말라 | 마음공부 불교 행복 말씀 이야기 | 영가현각 증도가 79회(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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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할 부분은
지난번에 이제 용을 항복시킨 바루와 호랑이의 싸움을 말린 석장
두 갈래 여섯 고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이렇게 했어요
가섭 삼형제가 믿고 있는 그 불을 뽑는 용을 항복시켜서 바루에 넣었다는 이야기
또는 석장을 가지고 두 큰 호랑이를 말렸다는 이야기
이제 그런 모양, 그런 이야기를 보면은 우리는 이제 모양을 따라가죠
그래서 그 모양에 뭐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에요
이 모양 속에서 뭔가 야 역시 불교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부처님 같은 분
또는 이렇게 불교에 안목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돼야 되는구나
이렇게 모양 따라서 이해하기가 쉬워요
이런 역사 속의 이야기들 또는 불교
불교 안에는 큰 스님들에 대한 온갖 이런 이야기들이 많잖아요
큰 스님들은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큰 스님이 아니라 위인 정도만 해도
으앙으앙하고 낫자마자 우는 소리가 서울 시내 다 퍼졌다고 한다든지
알에서 나왔다고 하든지 별의별 온갖 이야기들이 많이 있단 말이에요
그럴 때 그 이야기를 따라가서 그 이야기 속에 뭐가 있구나
그 이야기라는 그 모양 속에 뭔가 도가 있나보다
그래서 그런 어떤 모양을 자꾸 쫓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는 이런 말을 했어요 오늘 이제 할 부분이
모양을 나타내려고 헛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여래의 법의 주장자를 신이 본받음이다 이랬습니다
모양을 나타내려고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모양에서 뭔가가 있는 걸 드러내려고 부처님께서
부처님이 나는 이 정도 하는 사람이다
용도 바로에다가 지워넣는 정도의 사람이다
뭐 이런 모양의 어떤 신통을 부리는 걸 통해서
우리 중생들을 굴복하려고 거기에 뭔가 뜻이 있어서
깨달으면 이렇게 해야 되는 줄 알고 그렇게 한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 낙처가 중요하다는 소리예요
그래서 이 여래의 법의 주장자
이 법의 같은 이 마음, 법 주장자, 이 진리
이거 하나를 신이 본받을 일이지
그 모양에서 부처님이 용을 항복시키고
호랑이도 조복시키고 이런 모습을 쫓아가서는 안 된다
옛날에 보면 이제 큰스님들은 어디 숲속을 이렇게 만행 다니다가도
자고 일어났는데 한 겨울, 추운 겨울날
얼어 죽을 줄 알았는데 딱 눈이 막 서벅이 내려가지고
눈이 막 그냥 간딱 내려있는데
큰스님이 본인은 죽는 줄 알고 나무 옆에 기대서 자고 딱 일어나니까
딴 데는 눈이 막 이만큼 살았는데
본인은 멀쩡하고 괜찮다라는 거죠
옆에 이렇게 보니까 곰 발자국이 이렇게 있어서
곰들이 와가지고 옆에서 나를 이렇게 죽지 않게
내 옆에서 이렇게 같이 자주고
곰 발자국이 이렇게 이 부분만 이렇게 눈이 없더라
옛날에 이런 이야기를 보고서는
와, 이게 큰스님이지, 이게 도인이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와, 멋있다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
또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어요
호랑이가 와서 덤벼도
우리들 같으면 호랑이를 만나면,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면
호랑이가 우리를 넘쳐서 잡아먹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큰스님이 호랑이를 딱 마주쳤는데도 불구하고
호랑이가 큰스님한테 가서
일 잡아먹으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더라
그럼 그 모습을 보고
이야, 진짜 큰스님들은 대단하다
정말 공부의 힘이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이제 우리는 생각한단 말이에요
근데 제가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럴 수 있겠어요
왜냐하면
여러분,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키워서 맨날 먹을 걸 주잖아요
그럼 호랑이가 먹을 거 주는 사육사를 물겠어요?
어릴 때부터 같이 커온 사육사가 있다면 사육사를 안 물어요
사육사를 물 만큼 그렇게 배고프지 않고
그 정도 배고플 때가 되면 먹을 걸 항상 주니까
굳이 잡아먹지 않아도
사자나 호랑이들이 배고플 때만 사냥을 하는 건 아시죠?
배고프지 않으면 아무리 옆에 있어도 절대 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래요
그리고 이미 배가 부르고 나면
옆에서 어떤 동물이 왔다 갔다 하더라도
그건 뭐 신경 안 쓴단 말이죠
아마 큰스님이 지나갈 때 그랬겠죠
배가 불렀겠죠
배가 부르니까 그냥
큰스님 지나가는 것 같다, 지나가는 것 같다 했을 거고
사람이 지나가다 잡아먹을 것 같으면
배가 어마어마하게 고팠겠죠 아마
인연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우리는 그 모양에 무슨 뜻이 있는 줄 안단 말이에요
아, 도인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짐승도 그러지 않는다
그 말은 다르게 말하면
도인은 모기도 도인 몸을 물지 않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게 맞다면
짐승들도 도인을 알아본다고 한다면
우리는 사람인데
사람도 도인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못 알아보잖아요
저 사람이 도인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니까요 사람들이
안목이 없으면 몰라요
우리보다 짐승들이 더 뛰어나는 거예요
도인을 알아볼 정도면
그러면 큰스님이 딱 좌선하고 있을 때
모기가 와서 피를 빨아먹지 말아야 되잖아요
근데 남방불교 가면
다 모기장 안에 들어가서 이렇게 앉아 계신단 말이에요
도인이라고 해서 모기장이 필요 없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아직 공부하는 사람은 다 모기장이 들어가 있는데
큰스님만 모기장 없이 딱 앉아 있는데도
아무 모기가 오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단 말이에요
인연 따라 몸이 깨끗한
목욕한 지 얼마 안 되고 깨끗하면서
뭘 모기 깊이실에 뿌려놓으면 잘 나오겠죠
근데 땀 냄새도 많이 나고
뭐 이래저래 하면 더 많이 올
뭐 그런 정도의 인연 따라 이런 건 있겠지만
공부해서 그런 공부를 하면
이렇게 달라지고 저렇게 달라지는 모양의 세계가
어떤 뜻이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게 되게 중요한 말이에요
근데 우리는
여기서 말했듯이
모양을 나타내려고 헛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이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공부는
모양을 나타내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모양에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견해
그게 이제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그 상을 따라가는 견해거든요
우리는 불교를 다 그렇게 생각해요
불교를 모양으로 불교를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죠
어떤 스님이 계세요
근데 앉아가지고 오래오래 앉아있는 스님은
아주 훌륭한 스님처럼 보여요
근데 오래 앉아있지 않으면
좀만 앉아있어도 허리가 아프고
다리를 막 바꾸고 이러면
스님이 없어 보인단 말이에요
스님이 한 번 앉으면 그냥 다섯 시간이고
딱 털어짐 없이 그냥 앉아있어야 될 것 같단 말이에요
근데 스님이 앞에 앉아가지고
다리 아프다고 다리 바꾸고 바꾸고 이러면
좀 그런 느낌이 들잖아요
이런 것처럼 모양으로 수행을 하는 줄 알아요
수행이라는 것의 어떤 성취가
모양으로 드러나는 줄 안단 말이죠
연부를 잘하고 독경을 잘하고
좌선을 잘하고 절을 잘하고
아침 예부를 잘하고 저녁 예부를 잘하고
또 예불 시간을
이게 우리는 기도 오래하면 수행
신신깊은 스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스님은 예부를 하는데
한 30분에 끝내는데
이번에 새로운 스님은
이야 새벽 예부를 1시간 반을 해?
그럼 그 스님은 엄청 신심이 깊고
대단한 스님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저도 그렇게 처음 출가했을 때
그 상으로 공부가 상에 있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종진할 때 시간을 더 길게 하면
더 뭔가 이렇게 있어 보이는 걸 줄 알았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제가 기도 수행에서 뭔가 있는 줄 알고
한 번 4분 정근을 열심히 해봐야겠다 해가지고
새벽 4시 2시 저녁 해가지고
얼마 길게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근데 처음에 그렇게 시작을 했는데
첫 시작하던 날 뒤에서 신도님들이
1시간 해야 되는데 1시간 반 넘어가니까
우와 이러면서 감동을 하고 되돌아서 나갔는데
평소보다 더 스님이라면서
이랬던 기억이 나요
다들 그렇게 모양으로 기도를 길게 하고
염부를 더 길게 하고
염부를 하는데도 그냥
그냥 관세염보살 이렇게 하는 것보다
막 고성염부를 신나게 목탁도 신이 나게 치면서
하면 막 신이 나잖아요
그러면 정말 신심 있는 스님이라고 생각이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저희 그때 우리 절에는
어떤 스님이 진짜 목탁을 신나게 치는 스님이 계셨는데
목탁을 사놓는 족족 깨버리는 거예요
너무 세게 쳐가지고
그 나중엔 손이 좋은 목탁 필요 없고
안 깨지는 목탁 막 구하러 다니고
그랬던 기억이 나거든요
근데 하여간 그렇게 우리는 딱 모습을 본단 말이에요
모습에 도가 있는 줄 안단 말이에요
모습에 도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근데 이제 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모습에 이 공부가 없는 건 아니에요
방편으로 보면 모습도 중요해요
그래서 이걸 이제 위의 라고 하잖아요
스님으로서의 어떤 위의 모습
이것도 제가 이제 완전 무시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서 모양을 나타내려고
이런 헛일을 벌인 것이 아니다
이렇게 선어록에는 본질이 나오지
근본법을 얘기를 하지
방편법을 얘기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제가 지금 이렇게 얘기를 한다고 해서
또 이 말을 따라가 가지고
아 모양 다 쓸데 없구나
모양으로 스님이 거룩해 보여 봐야 조용 없구나
이렇게만 무조건 생각해서는 또 안 돼요
그것만 따라가도
당연히 스님답게 모습을 위의를 갖추고
또 그러잖아요 사실 이 마음을 깨달으면
팔만 세 행과 가진 위의가
저절로 갖춰진다 이런 표현이 있거든요
스님이 자기가 법이 없으면
내가 겉으로 모양으로써
괜찮은 스님처럼 보이려고
온갖 노력을 해야 되고 애쓰어야 되고 할 게 많단 말이에요
그 계율을 지켜야 되고
스님으로서 할 또리와 하지 않을 또리를
다 공부해 가지고 지켜야 되니까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어요
그게 자기를 구속하겠죠
그런데 본인이 딱 깨닫고 나면
내가 뭔 짓을 해도 그게 다 팔만 세 행이 되고
팔만 가지 세세한 실천해야 될 행동이
행동의 모양 그 자체에 정해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깨닫고 나면 뭔 짓을 해도
그게 팔만 세 행이 갖춰진 거고
온갖 위의가 적정하게 갖춰진 거란 소리죠
모양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딱 법이 있으면 모양이 중요하지 않잖아요
그럼 내가 하루에 한 끼
그것도 풀만 한 끼 먹고 사는 것과
그냥 뭐 인연 따라 그냥 주는 대로
막 모고잡이로 먹고 사는 것과
인연 따라 먹고 사는 것과
다를 게 없단 말이죠
자기가 법이 있다면
그런데 법이 없을 때는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위의를 지키고 또 지켜야 할 것, 어겨야 할 것
계율을 잘 지키면서 하는 게 필요 없단 얘기는 아니에요
그런 것들이 필요하죠
그러나 이제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낙처를 설명하는 거예요
낙처, 이걸 알고 나서 이제는 지킬 수도 있고 범할 수도 있는 거예요
이걸 깨닫고 난 다음에는
불교 공부를 할 때 우리가 근본법으로서
제대로 딱 알고 있어야 되는 게 있단 말이에요
그게 이 공부는 모양 따라가는 공부가 아니라는 사실
그러니까 모양으로 하는 수행이 아니에요
모양으로 따라가는 공부가 아니고
그런데 모양의 세계를 사는 사람을 중생이라고 하잖아요
모양의 세계가 중요하다고 여기며 사는 중생들은
모양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우리 공부를 하면서
수행하는 거 아닙니다
그렇게 뭐 염불하고 독경하고 기도하고
백일 기도를 해야만 하고 오래 안 자야만 하고
절을 반드시 해야만 하고
새벽에 무조건 새벽 3시에 나가서 염불을 동참해야만 하고
2시간씩 신묘장구 대단하를 해야만 하고
그렇게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수행하는 게 아니다
중도라는 것은 그런 유의 조작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었을 때
많은 신도림들이 되게 당황했단 말이에요
이번에 주지가 미친놈이 왔나 보다
나중에 그런 얘기를 하더라니까요
처음에 저 부산의 근본사원 갔을 때
처음 6개월 동안 우왕좌왕 했대요
나중에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한 6개월 걸렸대요
이게 이제 확 받아들여지는데
얼추 와서 한 6개월 걸린 것 같다는 얘기를 누가 하더라고
스님 앞에서는 그냥 다른 얘기를 안 하고
그냥 스님이 하시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대요
근데 뒤에서 스님 딱 나가고 나면
이게 뭐냐 지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지금
여태까지 지금 한 50년 된 사찰인데
50년 동안 지금까지 왔던 스님들이
전부 다 기도해라 연불해라 백일기도 해야 된다
뭐 해야 된다 뭐 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저 놈은 주지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지 혼자 그거 아니라고 저렇게 강력하게 얘기를 하느냐
지 말만 옳다고
그리고 말이 되는 소리냐 저 말이
기도해라 수행해라가 맞는 말이지
기도하는 게 아니다 수행하는 게 아니다가
말이 되는 소리냐 하면서
너무 당황했다는 거죠
그 원로 그룹 보살님들에서부터
이게 뭔지 나도 모르겠다 지금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이거 좀 더 두고 보자
좀 더 지켜보자
좀 더 왜 저러는지 우리가 법문을 들어보자
뭐 이런 분들
근데 하나하나 들으면 또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분들은 막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이런 분도 있어서
우왕좌왕하기를 한 6개월 갔다는 얘기에요
한 5개월 6개월 지나고 나니까
아 저 말이 왜 저런 얘기를 했구나
저게 수행하지 말란 말이 아니라
중도 바른 공부를 하란 얘기였구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약견 재상 비상
상이 상이 아닌 줄을 깨닫는
이 진짜 공부를 하란 얘기였구나라는 걸 깨닫는데
조금 이해하는데
아 저 스님이 영 사이콘 아니구나라는 걸 깨닫는데
6개월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었다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 얘기 듣고도
아이고 6개월 정도면
그때 당시는
와 이분들 근기가 대단하다
6개월 만에 마음을 다 바꿀 수 있다?
마음을 열 수 있다?
이것만 해도 근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안 될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사실은
어찌 보면 모험 한번 해보자 하는
심정도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약간 좀 놀랐죠
6개월이면 바뀐단 말이야?
이렇게 오랫동안 그냥 기도 이런 거에
매진하던 사람조차도
한 6개월이면 마음을 열 수 있구나
완전히 이 공부에 발심을 못 할지라도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선사 스님들이
기존에 방편을 쓰는 불교에서
이 방편 저 방편 기도하세요
연불하세요 독경하세요
49지 해야 됩니다
뭐 이런 걸 해야 됩니다
저런 걸 해야 됩니다 하고
모양의 세계로 공부하고 갈고 닦아오던 것을
탁 돌이키는데도 오랜 세월이 걸려요
그걸 받아들였는데도 쉽지가 않단 말이죠
제가 출가했을 때 서초동 대성사에 있을 때
49제가 하루에 5개 6개 7개씩 막 들어왔었어요
서울 강남 쪽이 얼마나 많겠어요
신도인들도 많고 했던 곳이고
저희 은사 스님은 큰 스님이라고 워낙 유명했으니까
신도인들도 엄청 많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49제가 엄청 많이 들어왔는데
그게 그때는 많은 줄도 몰랐어요
49제 제발 좀 만들어 놨으면 좋겠는데
자꾸 들어와서
스님들이 한 7명 정도 계셨거든요
그런데도 이게 막 그냥 감당이 안 될 정도로
49제가 늘 돌아가니까 공부하고 이럴 시간이 없었어요
저는 처음 출가하면
산골짜기 한적한 숲 속에 있는 절에서
하루 종일 공부만 하고
그런 줄 알았어요
근데 하루 종일 49제만 하고 있다란 말이에요
공부할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다가 저희 신도인들이 너무 신심도 있고
뭔가 참 훌륭한 스님들이 많았어요
꼭 그 당시 정서에서는
49제를 할 때 올바로 40기조를 하는 것은
길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막제하는데 한 7시간 걸렸던 것 같고
그냥 기본제 하는데 무조건 3시간 이상은 해야
신심 있는 스님
근데 어느 날 너무 힘들어서
나중에 일곱 번째 하는 기도 같으면 너무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최소한만 하자 싶어가지고
한 2시간에 끝나고 내려오면
약간 중간쯤 되는 어른 스님들 호출이 와요
정성스럽게 해야 된다
그게 스님으로서 할 수 있는 도리다
이런 얘기를 한 번씩 들었던 생각이 나거든요
그러니까 길게 하는 것이 미덕이었단 말이에요
그것이 올바르다라고 생각을 하고 살았죠
그런데 지금 한 20년 지났잖아요
지금은 서울의 큰절에서 49제를 해도
7시간씩만 이렇게 하는 데가 별로 없죠
왜냐하면 깨달은 거예요 사람들이
저는 그때 7시간을 하고 나서 딱 돌았으면
이분들이 막 신심 어린 눈동자로
정말 스님 고생하셨습니다
막 이렇게 노후산림들이 손을 잡고
이렇게 정성스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러길래
그게 진짜로 받아들였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 노후산림은 진짜 고맙습니다 이러는데
그 옆에 따라온 손자, 자식들은
좀 짜증났었을 거예요 아마
내가 지금 7시간을 양복 차려입고
앉아가지고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었을 거예요
지금은 49제 할 때 제가 들어보니까
요즘에는 평제는 한 1시간에 끝내고
막제를 해도 한 2시간이면 끝낸다더라고요
그런데 옛날에 시달림 가면요
시달림 요즘에 30분이 끝난다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옛날에 시달림 가면
2시간, 3시간을 해야 신심 있는 스님이었어요
그냥 제 느낌에
그래서 어느 곳에 갔을 때
제가 제일 길게 했던 기억은
금강경을 7독을 할 마음 먹고 갔던 거예요
그냥 계속 하자 그냥 앉아가지고
그거 한 서너 시간을 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야 이분을 내가 정말
우리 공부 같이 하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돼가지고
이분을 위해 내가 마음 내줄 수 있는 게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 정도는 해야 스님으로서
이렇다 이렇게 생각했단 말이죠
그러면 7독 안에 한 독만 하고 갔으면
신심이 없는 스님이겠냔 말이에요
그런데 물론 전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모양의 세계에서는 중요하죠
모양의 세계에서는 그런 정성도 인정할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고
그것도 좋은 일인데
옛날에 그걸 생각해가지고
지금 절들의 스님들은 신심이 없어
옛날에는 사실 몇 시간씩 했는데
지금은 한 시간밖에 안 해
돈은 똑같이 받고
이러면서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수도 있어요
제가 초기에는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스님들끼리 모여가지고
큰 스님들 기제사 같은 거 하잖아요
옛날에는 기제사 할 때
큰 스님들 기제사는 더 길게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최근에는 스님들끼리 모여가지고
큰 스님도 기제사 하잖아요
연불을 아예 안 해요
스님들 모여서 딱 앉아가지고
딱 죽빛 치고 앉아서 잠시 좌선해요
그리고 죽빛 딱 끝나고
나와가지고 그룹별로 나와가지고
문중별로 나와가지고
잔 따라 올리고 절 한 번 하고
그리고 끝내요
연불하고 독경하고
금강연 독상하고 이런 거 안 하기도 한단 말이죠
처음엔 낯설었죠
이렇게 해도 되나?
그런데 오히려 큰 스님
선사 스님 열반하신 기제사를
이렇게 깔끔하게 지내니까
이게 뭔가 뜻이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느 날 보니까
그런 게 이런 거예요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닌 거에요
이 공부에서는
여러분들 공부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분들이 그래요
지금은 조금 들었는데
한동안 그런 질문이 많았어요
스님 제가 10년, 20년, 30년을
기도하고 독경하고 연불하고
집에서 매일같이 금강연 독상하고
천숙연 독상하고 다라니 독상하고
기도를 안 한 적이 없이
몇십 년을 해왔다 보니까
이 습관이 딱 됐는데
스님 법문문 듣고 나서는
이거 그냥 다 끊고
그냥 법문만 듣고 있는데
한쪽으로 불안합니다
뭐가 불안하세요?
기도를 끊어놓으니까
이게 뭔가 좀 안 좋은 일이 생기진 않을까
부처님이 나를 좀 미워하진 않을까
뭔가 이렇게 기도의 힘이 좀 약해지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는 얘기를
하는 분들이 계셨단 말이에요
그분한테
그러면 요즘에 뭘 하세요?
그냥 하루종일 법문만 듣고 앉아있대요
그러면
부처님 생각하기에
옛날에 기도 1시간 열심히 하고
그리고 하루종일 다른 일을 하고
일어있을 때 하고 지금 하고
하루종일 정말 공부에 대한 간절하고
공부에 대해서 정말 내가 깨닫고 싶고
이게 궁금하고
그러니까 자꾸 법문을 틀어놓고
그래서 이 법문에 매진을 하고 있고
뭔가 마음이 이 법문에 늘 가있고
뭔가 이게 뭔지 궁금하고
이런 마음이 지속되니까
지금 법문 듣는 거죠?
그랬더니 당연하대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시키지도 않았는지
저절로 듣고 있대요
자기 전에도 법문을 듣다 잔대요
그래서 늘 이게 유지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냥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에
기존에 그렇게 기도 잠깐 했을 때와
지금 이렇게 하루종일 뭔가 모르게
공부에 대한 마음이 끊이지 않고 있을 때
어느 때가 더 공부가 되는 것 같습니까?
진짜 공부는 뭐 같습니까?
스스로에게 한번 직접 물어보세요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그거 믿겠습니까?
그러면 무슨 말을 포포스톡 하시는 거예요
사실은 지금 제가 늘 이거 하나가 궁금하고
뭔가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된다는 생각이
하루종일 뭔가 모르게 이렇게 있고
딴 일을 하다가도 탁 돌아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늘 이게 뭔가 싶고
잠을 자려고 눈을 딱 감고 나면
옛날에는 온갖 잡생각이 일어났는데
이제는 눈을 감고 자려고 눈 딱 감으면
바로 그냥 보고 있대요 나도 모르게
숨 쉬는 것도 보고 있고
이게 뭔가 하면서 보고 있고
여기저기 빵빵 소리, 윗집에서 나는 소리
모든 걸 그냥 이렇게 딱 보는 상태랄까
나도 모르게 그게 끊어지지 않고 그러고 있대요
그러면서 뭔가 모르게 이 궁금함
이게 늘 유지가 된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선에서 화두가 들려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럼 보살님은 전에에 비해서 지금 더 화두가 들려있는 거죠?
그랬더니 맞대요 확실히 들려있다는 거죠
그럼 그 전에 기도할 때는 화두가 들려 있었습니까?
아니 그때는 그냥 기도해야 된다는 성취감
또는 기도 끝나고 나면 오늘 할 일을 했다 하고
또 딴 일을 하고
그 시간만 그냥 열심히 기도하고
잘 되게 해주세요 하고
그러고 있었다는 거죠
그러면 뭐가 중도겠습니까?
그러면 진짜 화두를 든다는 건
화두 들 때 모양으로 드는 화두가 아니에요
이렇게 앉아가지고 들어야만 화두 드는 게 아니에요
진짜 화두 든다는 건
평주좌와 어묵 동정간에 하는 게 선이라리잖아요
움직이나 앉으나 가나 서나
언제나 이게 들려있어야 되는 거거든요
이게 진짜 화두 들리는 거잖아요
그게 진짜 중도죠
앉아가지고 어떤 모양의 화두를 드는
그게만의 화두가 아니란 말이에요
진짜 화두는 내가 화두 든다는 상도 없이 들려있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법문이 간절한데
내가 공부한다는 생각이 드냔 말이에요
옛날에는 기도 열심히 했을 때 공부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지금은 오히려 공부한다는 생각이 안 들잖아요
내가 화두가 들리다는 생각도 안 들고
중도 수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안 들고
수행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도 안 든단 말이에요
좀 그런 게 있지 않아요?
기도 안 하는 것 같단 말이에요
근데 그게 찜찜하냔 말이에요
처음엔 찜찜할 수 있어요
왜? 모양의 수행을 수행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모양에만 딱 꽂혀있을 때는
모양의 세계에서는 이게 좀 틀린 것 같아요
그래서 불안해요
왜?
모양으로 열심히 뭔가 갈고 닦아가는
그걸 안 하면 불안하게 느껴지거든요
중생심은
인광보호가 중요하니까 모양의 세계에서는
근데 진짜 공부는 모양으로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데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없어요
화두를 들고 있다는 생각조차 없어요
이게 공부가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이게 진짜 공부예요
진짜 중도예요
내가 공부를 잘하고 있어?
이걸 잘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진도가 나가고 있어?
이러다가 깨닫겠네?
이렇게 이런 느낌이 들잖아요
이야 이렇게만 계속 가면 깨닫겠네?
이러면서 뭔가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고
한 달 전보다
본문 처음 듣기 전보다 지금이 훨씬 좋아지고
이런 식으로 그렇게 되지 않고
이야 어떻게 1년을 본문을 들었는데도
아직도 깜깜하냐?
아직도 모르겠냐?
진짜 미쳐버리겠네
처음에 한 달째 모를 때야
처음 한 달밖에 안 됐으니까
모를 수 있다 생각하는데
1년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더 깜깜하다
물론 알아들을 귀는 더 열리고
나도 모르게 가벼워지는 것도 있고
집착이 저절로 좀 놓여지는 것도 있고
좀 뭔가 삶이 편안해지는 건 있어요
현실에서
그런 거는 그냥 저절로 수반돼요
근데 그런 건 본질적인 게 아니니까
그 모양이잖아요 또한
그 모양을 제기고 나면
이 공부에 대해서는 더 깜깜해진단 말이에요
오히려
이 깜깜함을 그냥 더 모르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1년 공부한 만큼
한 달, 두 달, 세 달 공부한 만큼
점점 더 깨닫음에 가까이 가고 있구나
이런 느낌이 안 들어요
깨닫기 직전까지도
더 모르겠어서 더 답답하죠
한 달 공부하고 모르겠는 사람하고
1년, 2년 공부하고 모르겠는 사람하고
1년, 2년 공부하고 모르겠는 사람이 더 깜깜해요
이거는 확
그래서 도너라고 하는 거예요
확 확인하는 그 순간까지
진도가 나가는 느낌이 안 들어야만
잘하고 있는 공부예요
진도가 나간다?
이런 느낌이 안 든단 말이에요
그런데 염불하고 독경하고 절하고
뭐 이렇게 유의 조작의 모양의 수행을 하면
뭔가 진도 나가는 느낌이 들잖아요
삼천배 하고 나면 뿌듯하잖아요
뭔지 모르게
몸도 뭔가 땀도 나고
몸에서도 뭔가 다리도 후들거리고
법당 내려갈 때 막 후들후들거리고
이러면 뭔지 모르게 성취감이 든단 말이에요
남들한테 할 말도 있고
너 삼천배 해봤어?
나 해봤어
나 몇 번 해봤어
밥 먹듯이 해
너 할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공부할 때 할 말 있습니까?
어디가 말을 못 하겠어요
나 수행한다는 말도 못 하겠다니까요
뭐 한 게 있어야죠
뭐 누구한테 내세울 게 있어야죠
하면 할수록 모르겠는데
내세울 게 없잖아요
이게 하되 함의 없이 하고
상에 사로잡히는 공부를 하지 않는 공부라서 그래요
그게 중도의 공부라서 그래요
중도의 공부는 한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모양으로 어떤 성취감 같은 게 느껴지는 공부가 아니에요
그게 진짜 제대로 하고 있는 공부예요
그러니까 이제 안목을 어느 정도 갖추면 이걸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모양의 세계에서 뭔가를 하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 새가 없어요
그냥 내 온 마음이 공부에 딱 꽂혀 있으니까
나머지는 그냥 변죽, 뭐랄까
비본질적인 것들이에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 어찌 보면
현상 세계에선 중요한데
이 공부, 이 자리에서, 이 근본법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
어차피 이렇게 말을 했으니까
이런 얘기를 했으니까 이 얘기도 해보죠
계율을 지키는 거 그것도 모양이잖아요
계율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당연히 모양의 세계에서 또는 공부 초심자들한테는
계율을 지키는 게 중요하죠
그런데 여러분들 큰 스님들 계율 막 어기는 얘기가
이렇게 되게 도인 것처럼 회자되는 얘기를 들어보셨을 거예요
어떤 스님이 근세에 도봉산 밑에 계시던
춘성 스님 같은 분의 이야기들 들어보면
맨날 절에 있다가 시내 시장터 내려와서
막걸리 달라고 막걸리 먹으면서
온갖 입에로 험한 얘기도 하고
험한 얘기라는 게 가르침을 설할 때
그냥 걸리는 거 없이 그냥 막 얘기해 준다는 거죠
그럼 어떤 경찰이 와가지고 이상한 놈 하나 나왔다니까
경찰이 와가지고 신문을 하는데
주소가 뭐냐 이러고 막 그러니까
말에 담지 못할 만한
우리 엄마 어디서 나왔다 이러면서
막 그냥 이런 얘기를 막 걸림없이 했다 그러죠
그러고 그냥 시장에 있는 아줌마, 할머니들
힘들고 괴로운 사람이 있으면
붙잡고서 하손도 들어주고 이야기도 하고
그러면서 공부를 했다는데 그걸 가지고 누가
저 미친 중이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분이 공부 안목이 있던 분이라니까
그런 이야기들이 폐자된단 말이에요 불교 안에서는
원효 스님이 표주박을 두들기면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만들어가지고 다 노래를 부르면서 시장터에서
그렇다고 그러고 요속공주라는 경우에 설총을 났고
이런 걸 가지고 욕을 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잖아요
그게 뭐겠어요?
그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얘기에요
낙처를 확인하는 게 중요한 것이지
그 모양의 세계는
여러분 심지어 보세요
살도 음망주
계율의 다섯 번째가 살생하지 말라잖아요
근데 이 공부에서는 살생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모양의 세계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하잖아요
살생한 건 나쁜 놈이잖아요
근데 모양이 아닌 이 공부에서는
살생한 사람도 똑같이 공부를 이끌어요 부처님께서
앙굴리마라가 100명을 넘게 죽인 살인마잖아요
근데 부처님께서 앙굴리마라를 가서 교화해서
아라안과로 이끈단 말이에요
말이 되겠냐는 말이에요
이 세간의 모양의 세계로 봤을 때는
부처님이 정말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거 아니에요
요즘 우리가 유명하게 잘 아는
유영철, 박호순 이런 온갖 연세 살인마들
걔네들 있는 곳에 가서
그 친구들을 다 깨닫게 한 것과 똑같아요
그 친구들은 앙굴리마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죠
앙굴리마라는 100명 가까이 죽였다니까요
그러면 이게 우리가 기본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잖아요
모양의 세계에서 봤을 때는
살인마는 첫 번째 계율을 이긴 사람이고
가장 나쁜 짓을 한 놈들이잖아요
그러면 부처님 세계에서는 영원히 추방될 것 같단 말이에요
불국토에서 완전히 추방되고
부처님이 그놈들을 응징하고
이런 거에 앞장서야 되는 게 부처님일 것 같잖아요
우리 생각에는
나쁜 놈들한테 응징하고
좋은 사람은 복 주고 상 주고
그래야 될 것 같잖아요
그게 분별하는 종교에서는 그렇게 하죠
옳다 그르다를 분별해가지고
신이 절대자가 이건 옳은 거고 저건 나쁜 거야
옳은 건 하고 그런 건 하지 마
내가 정한 이 규칙에 따라서 내가 죽고 나면 심판할 거야
이건 옳은 사람은 천당 보내고
나쁜 짓 한 사람은 지옥 보낼 거야
그래서 그 기준을 가지고 그런 종교에서는
옳다 그르다를 나눈 다음에
옳지 않은 일을 한 사람은 지옥 보내죠
그게 그 종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잖아요
그게 분별의 종교는 그렇잖아요
근데 이 공부는 무분별의 종교란 말이에요
무분별의 가르침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보세요
만약에 그 전자가 분별해가지고
나쁜 짓 한 사람은 지옥 보내고
좋은 짓 한 사람은 좋은 곳에 보내는 것만이 절대적으로 맞을까요?
그러면 모르긴 해도
여기 계신 분들 저를 포함해 여기 계신 분들 모두 다
우리 모두 다 뭔가 뜨끔해요
뜨끔한 게 많아요
살또 운망주 뿐만이 아니라 계율이 지금 얼마나 많은데
여기까지 오기 쉽게 이거 완벽하게 깔끔하게 다 지켰습니까?
남들은 모르지만 남들한텐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내 혼자 몰래 저지른 잘못 없습니까?
알고도 저지르지만 모르고 저지른 잘못은 얼마나 많겠어요
제가 대학 다닐 때 계율을 잘 지켜야 된다거나
뭐 내지는 이런 모양의 불교 공부를 했었겠죠 그 당시
근데 대학교 때 오토바이를 한 번 탄 적이 있어요
밤에 재미가 있어서 밤에 그냥 딱 타고서
그 산을 한 바퀴 산 주변으로 이렇게 있는 도로를
한 100km로 막 달면서 한 바퀴 빙 돌아서 집에 딱 도착했는데
집에 가서 보니까 온몸에
온몸에 날벌레들이 그 산길을 달려간
날벌레들이 따닥따닥 달라붙어 가지고
그 시체들이 온몸에 막 다 달라붙어 있는 거예요
그거 되게 그때 좀 충격적이었어요
나는 그냥 오토바이를 탔을 뿐인데
내가 이 많은 생명을 죽였구나
근데 그거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에요
낮에 서울 왔다 갔다 하면 강의 끝나고 나가다 보면
오후가 되고 도착하면 요즘 5시는 어둡잖아요
도착하면 밤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유리창 앞에
날벌레들이 막 엄청나게 그 시체가 붙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어느 날은 주변에 누구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유리창에 뭘 이렇게 발라주더라고요
누가 뭘 사가져와서 이렇게 발라주면 이걸 주고 가더라고요
뭐냐 했더니 이걸 하면은 덜 붙는다고 그랬어요
덜 붙더라도 죽긴 죽겠지 아마
콩고 앙골님 아라나 전하 뭐가 다를 게 있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에 모양이 아닌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과 짐승을 죽이는 게 다르지 않아요
부처님 인행시 과거 전생 이야기를 들어보면
새 한 마리하고 자기 몸을 올려야지 똑같아지더라 그러잖아요
생명의 근본 본질, 이 불성은 다르지 않다는 얘기거든요
그러면 이 모양의 세계가 헷갈릴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끊임없이 토론해야 되고 논쟁해야 되고
올코그루고를 가지고 죽을 때까지 토론해도 끝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이제 모양의 세계에 발을 담고 있으면 어떻게 되냐면
야, 법상스님이 매일같이 저렇게 날벌레들을 죽이면서
수백 마리씩 죽이면서 서울,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법문을 한다고 찝적거리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게 옳으냐
그럼 그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안 다니는 게 옳으냐
그러다도 다니는 게 옳으냐라고 만약에 논쟁이 붙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의견을 내겠어요
맞다 하는 견해와 틀리다 하는 견해가 얼마나 많겠어요
죽을 때까지 결론이 날까요?
그래도 이게 중요하니까, 사람이 그래도 더 중요하니까
이렇게 깨닫게 하는 게 낫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게 끝까지 결론이 안 나요? 왜 그럴까요?
모양의 세계니까 결론이 안 나요
모양의 세계에서는
한편으로는 모양의 세계에 가지고 이야기를 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출세간을 가지고 이야기하게 되니까
이거 가지고 자꾸 줄다리기 해야 된단 말이에요
옛날에 일본이 쳐들어왔을 때
스님들이 살생을 하지 않아야 되는 스님들이 승군을 조직해가지고
일본 군대에 맞서가지고 용맹하게 싸웠다 그러잖아요
일본 전쟁 야사에
그 스님들 승군 만나면 일단 도망가야 된다
이랬다 그래요
너무 대책 없이 앞만 보고 그냥
제일 센 군대다 이런 얘기가 있었다 그래요
제일 잘 죽였다는 얘기 아니에요 스님들이
그게 옳으냐 그르냐 가지고 싸우면
세간과 출세간이 왔다 갔다 하면 답이 나오는
원래 이 세간법에는 답이 안 나와요
견해가 달라요 사람들마다
견해가 다르고 생각이 달라요
그거 옳고 그름을 죽을 때까지 논쟁을 해도 끝나지 않아요 그 논쟁은
그게 분별법의 구조예요
분별법은 사람마다 분별하는 생각이 다 다르기 때문에
누군 옳다 누군 그르다라고 해요 모든 사건을 가지고
그런데 그걸 너무 극단적으로 옳다고 하거나
너무 극단적으로 틀렸다고 해요
극단적으로 옳다거나 극단적으로 틀렸다고 하면 어떻게 돼요?
상대방이 이해가 안 되죠
상대방이 미친놈 같죠?
어떻게 이걸 옳다고 생각할 수 있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저 사람은 이걸 틀리다고 할 수 있어?
내가 지금 이 시대에 상식이 안 통하는 저런 미친놈들하고 살고 있는 거야?
저거 완전 또라이 집단 아니야? 이렇게 생각한다니까요
정치도 그렇잖아요
같은 사건 하나가 일어나도
어떤 사람들은 맞다고 강력하게 집착하고
어떤 사람들은 틀렸다고 강력하게 집착하고 있단 말이에요
답이 나올까요? 답이 안 나와요
역사 속에 있던 모든 사건들이 전부 다 그렇게 답이 안 나와요
왜 그럴까요?
모양의 세계, 분별의 세계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옳고 그름이라는 게 정해져 있습니까? 이 세상에?
옳고 그름이라는 게 정해져 있을까요?
무분별심에서 봤을 때 옳음, 그름은
인연 따라, 상황 따라 옳기도 하고 상황 따라 틀리기도 하잖아요
원래 옳고 그름이 없어요
옳고 그름은 분별 속에서만 그 조건 속에서만 옳고 그름이 등장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남편이 세 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한 사람이죠
그런데 1차 다부제 국가나 일부 다처제 국가에서는
크게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그냥
괜찮은 사람이에요 아주 능력이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럼 뭐가 옳으냐?
이거 옳다 그르다라고 말할 수 없단 말이에요
인연 따라 그곳에선 그게 옳고 이곳에선 이게 옳고
인연 따라 다른 것뿐인 거죠
그러면 그거 인연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거 말고
진짜 진실이 뭐냐? 이게 궁금한 거 아니에요
진짜 진실에는 무분별심, 무분별 지혜는 모양 아닌 진실의 세계
여기에서는 이 법 하나가 중요하지 분별의 세계가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공부를 분별로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수행도 분별로 해야 되는 줄 알아요
그러니까 제가 수행하지 말라고 할 때 그 수행이란
수행하지 말라고 할 때의 수행은 유의 조작하는 수행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모양의 세계에 치우쳐서 이 모양이 수행인 걸로 착각해서 집착해서
모양으로 하는 걸 수행으로 집착하는
그래서 유의 조작해서 애쓰는 거
그건 정확하게 거꾸로 가는 수행이에요
거꾸로 가는 거예요 정확하게
그런데 제가 수행을 해야 됩니다 할 때는
유의 조작의 수행이 아니라 무의의 하되 함의 없이 하는
무의법의 중도 수행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법상스님은 수행하지 말라고 하더라 미쳤나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법상스님은 수행을 하지 말라는 얘기 한 적이 없는데
진짜 제대로 된 수행을 해야 된다고 얘기했지
중도를 얘기를 했지
유의 조작하는 그런 모양의 수행을 하지 말라고 한 거지
중도하지 말라고 한 게 아니야
삿댄 걸 파사현정 삿댄 걸 깨뜨려야 바른 게 드러나니까
그렇게 방편으로 얘기를 한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이게 선에서 하는 게 그렇다는 얘기에요 선에서 하는 게
선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모양으로 하는 모든 공부를 과감하게 깨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육조스님이 인류 역사상 불교 역사상 최초로 단 한 명
중국 사람이잖아요 인도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인도 사람조차 인도에서 깨달았다 할 만한 위대하다 하는 스님들조차
바스반도 세친이나 용수 나가르주나 같은
제2의 부처다라고 이름을 불리는 사람들이에요
중간사장을 펴고 유식사장을 펴뜬
그런 사람들조차 그분들이 쓴 책을
중론, 백론, 십이문논 이런 식으로 논이라고 부르거든요
유식삼십송, 송이라고도 부르고
논이라고 부르는 것도 상당히 높여준 거예요
논이라고 부르는 거는 부처님 가르침에 논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보살 지위 이상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거거든요
나가르주나나 세친 같은 위대한 스님들도 보살밖에 안 되는 지위다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살이니까 논서를 쓰는 거예요
그런데 그나마 부처님하고 국적이 같은 인도 사람이니까
높여가지고 논 써준 거예요
한국에는 논이라고 불리는 스님이 없어요
딱 한 사람, 딱 한 사람
논이라는 건 보살 쯤 돼야 써주는 거니까
그러니까 인도 사람들이 논이라고 하는 거는
인도 부처님하고 태생이 같은 사람 아니고서는
어디 중국이나 이런 저 변방 따위에서 논을 붙이냐
절대 안 된다, 아예 인정 안 한단 말이야
논이라고 한 경우도 없어요 중국, 한국에서는
딴 한 사람이 누굴까요?
우리나라의 원효 스님이 쓴 금강산매경론
이것만 중국사람, 인도 사람들이 논이라고 붙였어요
이거는 보살이 쓴 책이다
이걸 쓴 사람 정도면 이건 논서다
중관사상, 중론, 백론 이런 것 같은 범주로
그래서 원효 스님을 원효, 보살로 이렇게 칭했단 말이죠
그런데 그까지도 다 보살들이잖아요 전부 다
논 쓴 사람도 다 보살들이잖아요 부처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딱 한 사람 중국에 그것도 인도도 아니고 중국에
육조해능 스님을 육조단경이라고 부르는데
아무도 토를 달지 않잖아요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대부분 종파가 선종이거든요
그게 다 육조 스님 밑으로 온 종파들이에요 전부 다
육조 스님은 거의 부처님급으로 본단 말이에요
그런데 왜 그렇게 보는지 아세요?
왜 그렇게 보냐 하면
부처님 이후에 수없이 많은 스님들이
논서를 쓴 수없이 많은 스님들이 전부 다
상을 가지고 불교를 폈어요 상을 가지고 모양을 가지고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다 상을 얘기를 한 거예요
좋게 다르게 말하면 방편으로 본문을 한 거죠 방편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