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과 탄핵 사태 가운데 들어야 할 본회퍼 목사의 설교] 끔찍한 사건들을 대하는 크리스천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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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과 탄핵 사태를 통해서 대한민국은 극심한 혼동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이런 끔찍한 사건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곧잘 일어납니다. 이때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회퍼 목사가 [끔찍한 사건들을 대하는 크리스천 자세]에 대해 설교한 내용들 들어봅시다.
#탄핵 #비상계엄 #본회퍼 #윤석열 #한국교회 #기록문화연구소
바로 그때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재물이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귀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신로함이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어 죽은 18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귀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누가 보금 13장 1절부터 5절
여러분은 이 본문에 깜짝 놀라서
이 본문은 오늘날 읽기에도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예배에는 위험한 본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만이라도 신문과 뉴스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중시한다면
이러한 태도가 대단히 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나가자마자
세상이 다시 우리를 습격하는 일이 없게 하고
세상이 우리를 사로잡아 노예로 만드는 일이 없게 하며
우리가 세상을 이긴 상태로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건들에서 벗어나는 것
이 사건들에 대해 눈을 감는 것
이 사건들을 되도록 빨리
그리고 잠시만이라도 잊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오인으로서
이 사건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이 사건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사건들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도무지 장례식장에 가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그들은 고인을 직접 가까이 함으로써
오는 충격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이 측면을 보류하지 않고
그렇게 보지 않음으로써 그 사건을 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인생의 어둡고 캄캄한 면을 보지 않고
이 세상의 재앙들을 외면하고
유쾌한 낙천주의자가 되어 자기를 관조하며
경건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굉장히 신신깊은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기만하는 것은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의 진실을 기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도 기만합니다.
공경에 처한 이웃을 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눈을 감고
슬픈 일과 끔찍한 일을 보아야 할 곳에서
우리를 짓누르는 경악스러운 사건들을 외면하는 것은
결코 옳은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좀 더 인간적이고 진지한 시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도는 비기독교적인 길로 밝혀집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보는 가운데 거리에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누군가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칩니다.
우리는 몹시 놀라서 넋나간 듯이
잠시 서있다가 대뜸 묻습니다.
누구 잘못이지?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 있을 법한
매우 일반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한 예입니다.
경악스러운 일이 우리에게, 우리의 일신에,
우리 가족에게, 우리 민족에게 닥치고
우리가 넋나간 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드는 의문입니다.
누구 잘못이지?
그때부터 우리는 안절부절 못하고
우리의 생각이 이리저리 날뛰고
이 불행한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가담한 사람들이 눈앞에 떠오르고
우리의 눈이 점점 더 예민해져 날카로워지고
점점 더 기분이 나빠져
누구 잘못이지?
누가 옳은 거지?
누가 옳지 않은 거지? 하고 물을 것입니다.
인간은 철저히 도덕주의자입니다.
한 사람을 고소하고 다른 사람을 풀어주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일어난 사건을 재판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한쪽 사람을 옳다하고 다른쪽 사람을 옳지 않다고 함으로써
끔찍한 재앙을 끝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삶 속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들을 떠올려 보고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대재앙도 떠올려 보십시오.
인간이 재판관이 되려고 하는 것은 그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판단을 잠시 멈추기를 바랍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그분의 출신지에 재앙이 닥쳤다는 소식
우리식으로 말하면 떠들썩한 신문기사를 어떻게 받아들이시고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유일하게 보도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목격자들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
곧 예수의 지방 사람들 몇 명을
아마도 폭도나 국사범이었을 텐데요
어떻게 처형시켰는지
이 처형이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져
경건한 유대인들의 피를 끓게 했는지를 예수께 알렸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성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려던 사람들이 붙잡혀
성전 구역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감정을 대단히 격앙시키고 의견과 반대의견을 촉발하고
정치적 토론을 강력하게 일으키는 소식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사람들 사이에 다양한 의견이 오갔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옳다는 의견과 옳지 않다는 의견이 오고 갔겠죠.
그리고 갈릴리 사람들이 폭분에게 희생되었다는 의견과
반대로 마땅한 벌을 받았다는 의견도 오고 갔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제넘게도 갈릴리 사람들이
아무 죄 없이 그토록 두려운 운명에 처하고
그토록 끔찍한 죽음을 맞았을 리가 없다는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죄가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토록 끔찍한 불행이
일어나게 하실 리 없지라는 것이죠.
이것은 다름 아닌 진지한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의 해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행복이든 불행이든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오며 그분의 심판은 오르니
이 사실과 이 사건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죄인들은 하나님이 진노를 받아 처형된 것이니
이들을 저버려도 되며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사건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것이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
오늘날 우리로 치면 이 사건에 대한 일간지의 견해였습니다.
이제 예수의 차례입니다.
예수는 담과 같은 견해를 화재의 실마리로 삼는 듯합니다.
이를테면 이 끔찍한 사건을 하나님과 관련지어 생각해야만 하며
여기서 행동하는 이는 빌라도가 아니라 선한 일에서든 악한 일에서든
유일하게 활동하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께서 관여하신다는 이 견해를
일반적인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는 빌라도가 옳은지 그른지를 전혀 언급하지 않으시고
갈릴리 사람들이 옳은지 그른지도 언급하지 않으시며
정치적 판단이나 도덕적 판단 또한 일절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는 판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두쪽 중 어느 한쪽이 옳다고 시인하지 않으며
이 사건을 진지하게 도덕적으로 해석한
경건한 사람들이 옳다고 시인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는 경건한 자들의 해석을 거부하십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예수는 경건한 자들의 견해를 거부하시고
이 경악스러운 사건을 심판자처럼 종결시으려는
그들의 시도도 거부하십니다.
예수께서 거부하신다는 것은 다양한 충고, 다양한 해석,
유식한 차하며 판단하는 것을 중지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사건을 간단히 종결지으려는 시도를 중지하시는 것입니다.
중지가 먼저입니다.
그 이유는 이 사건이 너무나 엄청나서
하나님께서 친히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은 여기에는 어리석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 자리하고 있으니 모든 판결,
곧 이쪽이나 저쪽을 옳다고 인정하는 행위를 그만두고
조용히 삼가며 침묵하여라.
여기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자리하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침묵과 경애하는 마음을 명령하시고
거센 부정을 선언하십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분은 스스로 판결함으로써
그 현장에 있으려고 했던 자들에 대한 반박으로 넘어가십니다.
그렇지 않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우선일까요?
예수는 이 판결의 근거로 자신이 일생토록 행한 일을 하십니다.
즉 그분은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니 회개하여라.
예수는 성전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대한
이 충격적인 신문 보도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건네시는
하나님의 회개 촉구.
대충들어 넘길 수 없는 새로운 회심 촉구로 여기십니다.
그분은 이 사건을
인간은 하나님의 비밀과 권능 앞에 겸손하고 회개해야 하며
하나님이 옳다고 시인해야 한다는
자신의 설교에 대한 명백하고 생생한 예야로 삼으십니다.
이제 상황이 위태로워집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구경꾼, 관찰자, 심파자가 될 수 없고
수신자, 당사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일이 바로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는 저 갈릴릴 사람들보다
저 빌라도보다 더 나은 사람인 채 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섭리를 마주하여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하고 오만하게 말하지 말고 너의 자신을 위해
하나님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여라.
예수께서도 여기서 죄의의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문제에 달리 답하십니다.
그 답은 빌라도나 갈릴릴 사람들을 겨냥하지 않고
끔찍한 인간적 재앙에 직면하여 그리스윈에게 중요한 것은
오만한 구경꾼의 자세, 심판자의 자세, 아는 채 아는 자세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인식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은 나의 세상, 내가 사는 세상, 내가 죄짓는 세상,
내가 날마다 미움과 불친절의 씨를 뿌리는 세상이다.
이 사건은 나와 내 형제가 뿌린 씨의 열매다.
이 피해자들, 갈릴리 사람들, 빌라도 이들은 내 형제들이다.
죄와 증오와 악의와 불친절에 쌓인 내 형제들이요.
죄에 쌓인 나의 형제들이다.
그들이 당하는 일은 나도 당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가락일 뿐이다.
그 손가락은 우리 위에도 닥친다.
그러니 회개하고 우리의 죄를 알자. 심판하지 말자.
어렵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자세만이 세상을 이긴다고 회개를 통해서만 세상이 새로워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정말 이러면 더 나은 성과가 있을까요?
과연 이렇게 함으로써 뭔가 개선되긴 할까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모든 것이 개선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이르는 길을 찾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어떤 사람도 옳지 않고 하나님만이 옳으시다는 사실이
그분의 여러 길에서, 끔찍한 사건 속에서, 그리고 그분의 자비 안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한 위인은 이교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비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의 전기에서 그가 학교를 운영하면서 한 젊은이를 위해 온 힘을 기울인 일에 대해 말합니다.
어느 날 이 학교 공동체 안에서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는 불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그는 죄를 범한 그 학생을 처벌하고 심판하라는 촉구를 듣지 않고 회개하라는 촉구만 들었습니다.
그는 가서 며칠 동안 단식하고 단념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첫째, 그가 자기 학생의 죄를 그 자신의 죄로, 자신의 사랑 부족으로, 자신의 인내 부족으로, 자신의 진실성 부족으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둘째, 그가 겸손히 죄를 인정하는 마음 속에서만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실 수 있음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셋째, 그가 회개 아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존재함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아직 충분히 믿지 못하고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우리가 어떻게 심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럴 수 없다.
회개를 통해 쇄신으로 나아가는 길은 고요한 길, 놀라운 길, 더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만이 하나님의 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식을 품고 교회에서 돌아와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만
우리는 신문의 세상, 끔찍한 사건의 세상, 심판의 세상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백성을 회개로 이끄시고 우리에게서 그 일을 시작해 주십시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