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끝, 조용한 밤. 당신을 깊은 이야기 속으로 이끄는 오디오북 채널, 책과 함께하는 하루 '단잠'입니다. 🛏️ 잠들기 전, 🚶♀️ 혼자만의 감성 산책 시간, 🎧 눈은 쉬고 싶지만 마음은 이야기를 원할 때— 언제든 이곳에 들러주세요.
이번에 낭독할 작품은 서하진 작가의 단편 소설 "침이 마르는 시간" 입니다. 😊
[서하진 - 세련된 문체로 여성의 내면을 들여다본 소설가]
오늘은 제가 참 좋아하는 작가 한 분을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소설가 서하진 선생님입니다. 하진(河辰)은 필명이고, 본명은 서덕순입니다. 1994년 《현대문학》 신인상에 단편 「그림자 외출」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등단한 만큼, 오랜 시간 언어를 다듬고 이야기를 숙성시켜온 분이라는 느낌이 처음 작품부터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현재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과 창작 활동을 함께 이어가고 계십니다.
어떤 소설을 써온 분인가요? 서하진 작가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여성의 내면과 관계, 금기된 사랑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상처, 그리고 그로 인한 인간 내면의 균열을 탐구하는 주제가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데, 그 탐구의 시선이 결코 과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련되지만 담담한 문체로 일상을 그려내는 것이 이 작가만의 색깔입니다. 펴낸 작품들을 살펴보면 소설집으로 『책 읽어주는 남자』(1996), 『사랑하는 방식은 다 다르다』(1998), 『라벤더 향기』(2000), 『비밀』(2004), 『요트』(2006), 『착한 가족』(2008)이 있고, 장편소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2005), 『나나』(2011) 등이 있습니다. 제목들만 죽 읽어봐도 이미 어떤 분위기의 소설인지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고요하면서도 뭔가 아려오는 느낌이랄까요.
특히 주목할 작품들 초기 소설들에는 '그림자'라는 키워드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림자의 소풍」, 「그림자의 여정」, 「그림자의 유령」 등 초기 작품 다수가 '그림자'라는 주제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그림자란 늘 본체를 따라다니지만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감정, 말할 수 없는 욕망, 드러낼 수 없는 자아 — 서하진의 '그림자'는 그런 것들의 은유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작품은 「갯길」입니다. 조수(潮水)에 따라 드러났다 사라지는 갯길과 그 길로 연결된 신비한 섬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이상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최종 수상작보다 더 많은 관심을 이끌어내 서하진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소설 속에는 소실이었던 엄마의 길을, 유부남을 사랑하며 그대로 걷다가 죽음 또한 같은 방법으로 맞이하는 인간 윤회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루에 두 번만 열렸다 사라지는 바닷길처럼, 삶에서도 어떤 길은 잠시 보였다가 영원히 닫히기도 하지요. 또 재미있는 작품으로 「홍길동」이 있습니다. 결혼 갈등과 혼외정사를 다룬 이 작품은 고전 『홍길동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전통적 소재를 활용하면서도 섬세한 심리 묘사와 절제된 문체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누구나 아는 고전을 이렇게 비틀어 읽는 시도가 참 신선하지 않나요.
'방'이라는 공간에 대하여 서하진 소설을 읽다 보면 '방'이라는 공간이 자주, 그리고 의미 있게 등장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1990년대 작품에서의 '방'이 인물이 일상 속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공간이라면, 2000년 이후 작품에서의 '방'은 여성 인물들이 욕망을 외부로 발산시키지 못한 채 내부로 침잠하는 공간으로 변해갑니다. 겉으로는 평온한 일상인데, 그 방 안에서 홀로 무언가를 삼키고 있는 여성의 모습. 그것이 서하진 소설이 그리는 인물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입니다.
가족이라는 테마로의 확장 후기로 갈수록 서하진의 소설은 부부와 개인의 이야기에서 가족 전체로 시야를 넓혀갑니다. 그녀의 소설은 해체되거나 재구성된 가족을 단순히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고, 마치 누구나 부모이자 자녀이며 형제자매인 듯한 '일상의 공동체'를 그려냅니다. 가족 내부의 갈등과 화해를 차분하고 신중한 시선으로 탐구하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소설집 제목이 『착한 가족』이라는 점이 묘하게 아이러니합니다. '착한 가족'이라는 말에는 겉으로는 무탈하지만 안으로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눌러두고 있는가, 라는 물음이 이미 담겨 있는 것 같거든요.
어떤 분에게 추천할까요? 서하진의 소설은 자극적인 전개나 화려한 사건보다 세련된 소설 언어와 치밀한 사건 전개를 좋아하시는 분께 잘 맞습니다. 조용히 읽히지만 읽고 나면 오래 생각하게 되는 소설, 어딘가 내 안의 무언가를 살짝 건드리고 가는 소설을 원하신다면 서하진의 작품이 딱입니다. 처음 읽으신다면 「갯길」이나 소설집 『라벤더 향기』부터 시작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은은하게 스며드는 향기처럼, 소설이 천천히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
This story examines the rigid divide between social classes through the eyes of a lawyer. It explores the psychological toll of systemic inequality, the fragility of upper-class perfection, and the cynical survival instincts of those born into poverty, using the motif of \"dryness\" to symbolize universal anxiety and social alienation.
오늘은 서하진 작가의 단편소설
침이 마르는 시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요즘 시대에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적인 모습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생각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작품이거든요.
끝까지 저와 함께 감상하시면서
좋은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작품 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피의 남편은 저명한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였다.
연봉 수억, 기사 딸린 검은 벤츠를 탄다는 그 남편이야말로
학창시절부터 우리가 알고 있던 거의 완벽한 유일한 남자였다.
그 시절로부터 이어져온 그 남자의 피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을 확인케 해주는 것은
전국 최고의 공시지가를 자랑하는 장엄한 빌라
엄지손톱의 두배만한 사파이어 반지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총총히 박힌 티파니 시계
이름도 어지러운 외국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는
은회색의 민크코트 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우리를 짜증나게 한 것은
이름붙은 날이면 어김없이 그 남편이 버려준다는 다양한 이벤트였다.
가령 자동차 트렁크 한가득 풍선을 넣어두고 열어보게 한다든가
배달된 종이상자를 열면 또 작은 상자가 나오고
그 안에 또 상자 다시 상자
그리고 마지막 상자 안에 들어있었다는 편지
거기 적힌 낯간지러운 우리들의 남편이 오래전에 한 번쯤 했었던
혹은 단 한 차례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랑의 고백들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유치한 이야기를 유치한 표정으로 늘어놓으면서
자랑을 적절히 감출 줄도 않은 겸손 또한 피는 갖추고 있었다.
그저 심심해야 할 친구들에게 얘기거리를 제공할 뿐이라는 듯 심상하게
그러나 지나치게 심드렁하지 않게 그건 피가 가진 기술이었다.
그 이야기를 한 후 피는 곧바로
예, 나는 그날 진짜 니네 신랑 생각나더라.
그 사람 그 시절에 드문 이벤트 왕자였잖니?
하며 옆 친구에게로 공을 넘기는 거였다.
예쁠 뿐 아니라 착하고 똑똑하고 교양 그 자체인 여자
그런 피가 남편의 진료실을 찾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아, 이제야 그 애도 한 군데쯤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모양이로군 싶어.
오히려 반가운 기분이었다.
남편에 따르면 피는 입안이 마르는 증세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했다.
갱년기객관이 하고 넘기기에는 통증이 과했던 모양이었다.
침샘에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그렇더라도 남편의 병원을 찾았다는 건 좀 의외였다.
피라면 그 남편이라면 장안의 한다 하는 어떤 닥터에게도
당일 진료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허름한 대기실, 복잡거리는 사람들 틈에 앉아있는 피를 상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글쎄, 뭐 검사를 해봐야겠지.
남편의 대답이 조심스러웠다.
애도 참, 내게 연락이라도 하고 가지.
많이 기다리진 않았대?
나는 기껏 그렇게만 묻고 말았다.
남편은 피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피의 신분, 그 애가 속한 계급의 혐오를 갖고 있었고
피가 내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실을 의아해했다.
피의 부드럽고 우수에 찬 듯한 검은 눈이 그런 감정을 드러내기 어렵게 했으므로
남편은 피를, 피에 관한 이야기를 언제나 불편해했다.
좀 여유였던걸?
남편의 부연이 뜻밖이었지만
문제가 있으면 치료하면 되지 뭐.
당신, 모처럼 유류환자가 생겼네?
내 농담 같은 진담에 남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을 뿐
나는 곧 그 일을 잊었다.
그 즈음, 나는 막 옮긴 직장에 적응 중이었으므로
피의 침샘을 걱정할 겨를이 없기도 했다.
고른 나눔장학재단, 그것이 내 새 직장의 명칭이었다.
사소한 탈세 문제로 시작되어 불거진 회사의 비리 때문에
어느 재벌이 속량의 뜻으로 출연한 재단이었다.
그 액수가 적지 않았으므로
군침을 흘리며 파리대처럼 꼬이는 인간들 또한 적지 않았다.
여성, 변호사, NGO 경력,
그런 조건을 갖춘 이가 많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나를 원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현재 아무런 단체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내게 주어진 일은
어떤 아이가 얼마만큼 절박한가를 따지는 것,
재단의 뜻에 맞게 자라줄 아이를 점치는 일이었다.
공정하게, 누구의 입김도 작용하지 않게.
그들의 요구는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었으나
내 싸인 하나가 천국과 지옥으로 아이들을 가른다는 건
일견 끔찍한 일이었다.
출근 첫날부터 내게는 산더미 같은 서류들이 주어졌으며
첫밤부터 나는 그것들을 안고 꼬부린 채 잠들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수한 성적,
촉망되는 장례성을 지닌 아이들은
저마다의 절박함을 요려한 문장으로 풀어낼 줄 또한 알았으므로
대개의 경우 나는 그 아이들을 일일이 만나는 편을 선택했다.
신경줄이 날카로워지고
머릿속에서 말벌이 잉잉거리는 듯한 날이 이어졌다.
이상해.
검사 결과는 다 정상인데 증세는 그저 계속되는 거야.
처방을 하기도 마땅치 않고.
어느 저녁, 남편이 지나가는 말처럼 피의 얘기를 했을 때까지
나는 피를 입고 있었다.
전날 만난 고학생 둘의 문제에 시달리던 터였다.
다른 과 문제인 건 아냐?
남편은 유능하고 세심한 전문의였지만
적지 않은 시간을 무료 진료에 바치는 사람이었다.
아이와 노인과 여자와 남자.
그들의 환분은 귀와 목과 코와 입에 그치지 않았으므로
전문가로서의 기능이 무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말이지
일반적으로는 침샘에 타석이 생기는 경우가 제일 흔하거든.
근데 그건 아니고
부비동도 정상이고
인간의 입, 침샘의 위치와 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브리핑을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가 더 번지기 전에 나는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니까 다른 과의 문제가 아니냔 말이지.
목 아니나 턱이나.
그런데 염증 생긴 건 아닐까?
글쎄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내 보기에는 신경증이 아닌가.
신경증?
그 애가 그럴 일이 뭐 있겠어?
애들 공부 잘하지.
남편 착하고 돈 잘 벌지.
걔네 아들 치의학 대학원 갔다고 한턱 낸 지 얼마 안 됐는걸.
말투에 심술이 묻어났을까.
남편이 물끄러움이 나를 바라보았다.
요점만, 핵심만 얘기하는 내 방식을 남편이 싫어한다는 걸 알지만
그런 고려를 하기에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제 와이프 신경증이나 좀 알아주시지 싶었다.
자신의 처지를 과장해 동정을 구하는
어쩐지 얄미워지는 여자애와
그런 돈을 받아야 하는 내 처지가 너무 싫다는 듯
반항기가 섞인 눈을 한 남자아이.
두 아이 모두 도움이 절실해 보였지만
남은 인원은 하나뿐이었다.
오후 내 맴돌던 아이들이 또렷한 눈동자가
뱅뱅 눈앞을 어지럽혔다.
사람 일이라는 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
당신 전화라도 해보지 그래?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도 있잖아.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그건 남편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그의 이야기의 보조를 맞추고
지루할 만큼 오래, 아주 오래 생각하고
그리고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 답을 하는
그 방식을 이제껏 견지하는 그의 인내심은
가히 놀라운 것이기는 했다.
그에게 존경심을 품게 했던
또래의 어떤 남자와도 달라보이게 했던
그의 여유로운 방식이
이제는 나이 된 남자의 소심함으로 보이는 것
또래의 어떤 남자보다도 더 늙어보이게 한다는 것
그건 순전히 내 문제일지도 몰랐다.
그가 피해게에서 본 것
보지 않은 것이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 얘기도 말하지 않았지만
남편도 알지 못했지만
나는 피해게에 빚이 있었다.
말 그대로의 빚
개원 당시 남편에게 건넨 돈의 일부였다.
꼭 일해야 할까?
몇 밤을 망설였지만 나는 결국 그렇게 했다.
나는 남편에게
내 근검과 절제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들이 의사가 되기만 하면
가난하고 촌스러웠던 시절이 끝나리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온
달랑 가방 하나가 전부였던 신부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보던
신호에 급마득 차나 하던 눈길을 단호히 끊어내고 싶었다.
멀쩡히 공부하던 아들이
난데없는 봉사를 일삼다 급기야 유급을 하고
웬 목소리만 큰 인간들과 어울려다닌 것
스텝이 될 꿈도
저명한 병원의 한 사무실을 차지하리라는 희망도 버린 것이
순전히
저 쌀쌀 맞은 여자의 탓이라 여기는 두 사람에게
보란듯이 동그라미로 가득한 통장을 내밀고 싶었다.
그건 내 생에 가장 치졸한 욕망이었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쩌면 다 갚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했던 내 말은
그대로 사실이 되었다.
소속 없이 일하는 여자 변호사
무료 변론을 일삼는 내 통장의 숫자는
마이너스와 플러스를 오각이 일수였으며
월말이면 피에게 이자를 보내는 것이
이제 꼭 10년째였다.
부탁을 했을 때 두말하지 않았던 피는
이제껏 단 한 차례도 원금 상환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이제 좀 깎아보내도 되지 않겠니?
금리가 내렸는데
라고 한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요일
모처럼 늦잠에서 깨어난 내 발치에서
강아지 검둥이가 졸고 있었다.
너 무슨 침샘이 마른다며?
우리 남편이 걱정된다고 전화해 보라더라.
자기 실력으로는 낮게 하기 힘든 모양이라면서
나는 가볍게 장난처럼 시작했다.
그게
피는 말끝을 흐렸다.
뜻밖이었다.
지친 듯 나지막한 음성이었다.
너 무슨 일 있니?
나는 대뜸 물었다.
정말이지?
칼을 디미는 듯하다고 남편이 늘 핀잔을 하지만
피는 내 어투에 익숙해진 친구였다.
실은 그게
잠깐 뜸을 들인 피는 곧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얘
그렇지 않아도
사실 너한테 전화를 할까 했었어.
너라면 방법을 찾아주지 않을까 싶었어.
나는 침묵을 지켰다.
이건 좀 특이하다 싶었다.
아니 내가 말이야
잠을 자지 못해서
나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내게 털어놓을 태세인 상대에게는
그 편이 효과적이다.
설마
그 남편이 문제를 일으킨 것일까?
건장한 체격에
아직도 준수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장년의 남성이니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아니라면 딸아이가?
예고 나와서 줄리아드인가 예비학교인가 들어갔다는 그 딸애가
미국에서 웬 금발이랑 연애라도 하나?
착하디 착한 아들의 애야
달리 문제일 것이 없는데
내 상상은 거기까지였다.
피와 같은 처지라면
양념처럼 끼이는 극성 시어머니
심술 굳은 시아버지
우리들에게는 피를 동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얘깃거리였던
그 시부모가
시시한 병을 앓는가 하다
두어 해 전 차례로 돌아가셨으므로
우리 아들 말이야
아
아들애가 연애를 하는구나
예사 여자애가 아니구나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제야 피도 진짜 세상의 일부가 되는구나 싶었다
수제이며 인물 좋고 키 크고
게다가 착하기까지 한 아들
누구라도 자부심을 가질 만한 청년이었지만
피는 그 인격에 어울리게끔
아들의 여자친구
장래 며느리감에 대해서도
그저 사람 괜찮았으면 해오던 참이어서
우리들의 입을 비죽거리게 만들었던 터였다
아이 참 어쩜 좋으니
세상에
아이 참 나는 말 못하겠다
이 대목에서 내 인내는 바닥을 쳤다
무슨 일이야
애라도 가졌다니
어머 얘 너 어떻게 알았니
나 진짜
피의 말꼬리가 울음에 묻혔다
드라마 시작이군
나는 중얼거렸다
어느 촌동네
해도 해도 너무한 집의 딸일까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알 수 없는 딴 딸아 출신일까
슬며시 호기심이 동했다
드디어 피에게도 인생의 쓴맛을 볼 기회가 온 모양이었다
나는 일단 염장을 질러보기로 했다
애 가졌으면 못 이기는 척하고 결혼시키면 되지
니네 남편 돈 잘 벌겠다
너 애 좋아하겠다
잘 됐네
뭐가 걱정이야
송수하기 저편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소리가 들렸다
어지간해야 말이지
웬만하면 내가 이러겠니
이 애가 정말이지
세상에
내가 정말
세상에
내가
녹음기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던 피가
급기야 흐느끼기 시작했다
피가 울다니
그건 사건이었다
부자 아버지와 착한 어머니
남을 할 데 없는 형제들
그 누구도 피를 울릴 일 같은 건 만들지 않았다
피는 여유로운 집안 아이답게 너그러웠으며
쟤는 좀 감성이 둔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웬만해서는 울지 않는 친구였다
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에서 밀려났을 때
두 번 거듭 내게 수석을 빼앗기고도
그저 내 등을 툭 치고 말던 친구였다
얘
너 괜찮니?
내가 갈까?
우리 집으로 올래?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거의 가슴이 뛸 지경이었다
너 바쁘잖아
휴일 겨우 쉬는데 어떻게 그래?
와중에도 체면을 차리는 저 바른 생활 여성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야
지금 휴일이 문제니?
우리 남편 마침 등산 가고 없어
너네 신랑 없으면 내가 가도 되고
우리 남편 운동 나가고 없긴 하지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를 반복하던 피는 전화를 끊었다
정확히 30분 후
내 집 골목 앞에 부드러운 6기통 엔진 소리가 들렸다
은빛 재규어가 뿜어내는 빛이
거실 2평까지도 환히 비치는 것 같았다
문이 열리고 피의 가느다란 다리가 빠져나왔다
피의 아들의 여자
피의 표현에 따르면
피의 아들은 꼼짝없이 엮인 케이스였다
합격을 축하하는 뜻에서 친구 하나가 단체 소개팅을 주선했다
남자 넷
여자 넷
남자들은 출중한 학벌을
여자애들은 출중한 미모를 중심으로 선발한 그 그룹에서
피의 아들은 단연 돋보이는 청년이었다
그 여자애가 피의 아들의 짝이 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을지 몰랐지만
그 다음 진행은 그렇지 않았다
피에 따르면
여자애는 계획적으로 대단히 교묘하게 아들에게 접근했다
첫 미팅이 끝나고 귀가하던 길
먼저 택시를 타고 떠난 여자애가 피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를 타고 보니 지갑이 없다
어디선가 흘린 것 같다
어쩌면 좋을까
착한 피의 아들은 여자애를 태운 택시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서 택시비를 지불했다
당연히 여자애는 피의 아들에게 감사의 점심을 샀다
그리고도 둘은 끊임없이 부딪혔다
도서관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학생 식당에서
여자애는 피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와는 2시간 거리의
서울 위성도시의 여자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했다
만난 지 5개월
두 사람은 초스피드로 가까워지고
마침내 아이를 만들었다
충분히 의심이 가는 이야기여 맥락이었다
만나는 봤어?
그럼
애가 아주
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싼 티 나는 애였구나
피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딸 아들 다 키우는 사람이잖아
남의 딸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정말 뭐라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애였어
피는 아들의 휴대폰에서
여자애의 번호를 알아냈다
하지 않던 짓이었다
라고 피는 말했다
그 이전
피는 아들의 미니홈피에서
여자애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수술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콧날
학생이 맞나 싶게 짙은 화장
보는 순간
어쩌자고 이런 아이를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전화하니까
그 애가 글쎄
어머 어머님이세요?
이러는데
그 목소리가 어찌나 여우같은지
아휴 세상에
내가 숨이 턱막혀서 그냥
낮빛조차 붉어진 피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어쩔 셈이더냐고 내가 물었다
당연히 결혼해야지 생각하는 거 같더라
태아 초음파 사진 뒤밀면서
어머니 우리 아기 예쁘죠?
그러는데
내가 아주 기절하는 줄 알았어
무슨 애가 그러니 세상에
아들은?
그 애는 어떤지 내가 물었다
우리 아들
글쎄
여자친구 임신한 거 얘기했을 때는
저도 결혼까지 생각한다는 거 아니겠니?
근데 차마
그 말을 못하는 게
애가 착해서 그런가 했는데
그게 아닌 거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피는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피의 남편이 여러 경로로 알아낸
여자애의 환경이라는 것이
피가 각오한 바를 넘어
차마 상상을 초월한 경지였다
아버지 없는 집
가사도우미 어머니
오빠라고 하나 있는 건
술집 웨이터로 일한다는 거였다
갖출 것은 다 갖춘 드라마
이제 내가 나설 차례였다
그 애를 만나봐 달라
그거지 지금?
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는 환경이 어떻든
그 여자애가 착실해 보이면
뭐 어쩌겠나
결혼시켜야지 했었어
그런데
한 번 만나봐
너는 늘 애들 만나니까 알 거야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세 잔째 물을 마신 피에게서
나는 여자애의 전화번호를 건네받았다
이모님이시지요?
키가 크고 지나치게 마른 여자애가
내 앞에 서 있었다
통화를 할 때
피의 언니라고 했었으므로 나는
피와 비슷하게 얌전한
사모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앉아요
좀 늦었네
나는 차갑게 사무적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강의가 좀 늦게 끝나서
버스를 놓쳤거든요
지방대학 다니는 고충을
여자애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전혀 주눅든 표정이 아니었다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나는 안경을 바짝 지켜올렸다
나는 사실 좀 바쁜 사람이에요
아가씨도 바쁜 모양이니
우리 얘기를 빨리 끝내기로 하죠
분위기를 다 잡고
막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참에
여자애가 말했다
저
그 전에 뭐 하나 주문할게요
실은 점심을 못 먹었거든요
지금 보이는 게 없어요
너무 배가 고파서
여자애가 손짓하자
종업원이 달려왔다
배가 고픈 깐으로는
올해 메뉴판을 들여다본 여자애는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기면서
음식을 주문했다
저 까르보나라 하나 주시고요
마늘빵도 주세요
올리브유랑 잼도 주시고요
오렌지 주스도 한 잔 부탁드려요
피가 상대할 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혼자 기를 내고
혼자 길을 갔을 아이였다
뻔뻔하기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어처구니없어하는 내게
여자애가 물었다
이모님도 뭐 좀 드실래요?
제가 사드릴게요
어제 알바비 받았거든요
어디 한번 붙어보자는 투였다
비난하려는 뜻은 없었지만
웃음이 나왔다
웃음을 감추지 않고
나는 말했다
됐어요
아가씨나 많이 먹어
잠깐 미간을 찌푸렸을 뿐
여자애는 곧 환히 웃으며 말했다
하긴
어머님도 그러시고
이모님도 정말 날씬하시네요
그 연세
조절을 잘 하시나 봐요
음식이 차례로 날라져 왔다
여자애는 잘 먹었다
잼을 듬뿍 발라
세 개의 빵을 먹고
양손에 숟가락과 포크를 들고
크림소스가 잔뜩 묻은
국숫가락을 말아 올리며
접시를 차근차근 비웠다
한 입 음식을 먹을 때마다
여자애는 방끝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니네들은 애써 조절해야겠지만
나는 마음껏 먹어도
이처럼 날씬한 몸매를 유지한다는 듯이
어디서 만나도 저런 걸 좋다고
진영이 이 애도 참 헛독독이구나 싶어
화같이 밀기 시작했다
내 인내심이 바닥날 즈음
여자애의 접시도 바닥이 났다
아이 잘 먹었다
이제야 좀 정신이 드네요
죄송해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여자애가 말끄럼이 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죄송한 어투가 아니었다
다행히 입덧은 안 하는 모양이지
나는 좀 심술곱게 물었다
그게 있잖아요
제가 보기보다 건강체거든요
우리 엄마도 입덧은 없었대요
도무지 신경이라고는 없는 아이 같았다
난데없는 승부욕이 맹렬히 치솟았다
임신했다고 엄마한테도 말씀 지었어?
엄마는 뭐라 하셔?
셀쭉 입을 다물던 여자애가 불쑥 말했다
이모님 바쁘시다면서요
저희 엄마가 뭐라 하시던 그게 궁금하실 리가 없잖아요
이런 싸가지
입 밖으로 뱉을 뻔한 말 대신 헛기침이 나왔다
그냥 하실 말씀을 하세요
그럼 저도 드릴 말씀을 드릴게요
단순히 되바라진 이라고만 하기에는
스물세 살의 여자로서는 상당히 능숙한 협상태도였다
피는 말했다
만나 보고
그리고 나서 얘기해줘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나 많아
뻔한 얘기이다 싶었다
피의 예상대로
여자애는 의도적으로 피의 아들에게 접근하고
계획적으로 임신을 했다
나는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알바라는 것도
탁자 아래 까딱거리는 여자애의 다리가 보였다
애써 차분한 척하고 있지만
여자애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내 속에서 잠깐 동정심이 잃었다
여자애도 이 사회의 부스러기일 뿐이었다
중심으로 가고자 길을 쓰겠지만
그건 그저 기일 뿐
이 아이를 아무런 곳으로도 데려다주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좁은 이마와 약간 넓은 미간
하관이 빤
평생 빈곤에 시달릴 운을 타고난 얼굴이었다
남자들에게는 호소력이 있을 법한 커다란 눈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결기로 번뜩이는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는 말했다
정말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여자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었고 여자애가 말했다
왜 안 된다는 거죠?
니네 엄마가 파출부라서
니네 오빠가 나이트클럽의 웨이터여서
내 아버지가 안 계셔서
내 전직이 의심스럽기 때문에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나는 여자애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말했다
아가씨 말고는 아무도 이 결혼을 원하지 않아
진영이조차도
가혹하다 싶었지만 여자애가 자초한 일이었다
여자애를 만나기 전
피오의 예기치 않은 불행의 끝을 보면
어떨까 싶었던 내 욕망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 흥분되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시시할 만큼 상투적인 스토리였다
피오의 운을 시험해보려 한 내 시도가
여자애는 조금 침울해진 것 같았으며
그것으로 충분했다
너무 많은 걸 노리면 실패하는 법이었다
나는 피에게 전화를 걸어 결과를 알려주었다
피는 다른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애도 진짜 결혼을 하려는 건 아닌 것 같더라
내 명함 줬으니까 전화 올 거야
고마워
미안해
라고 한 피가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입안이 마르는지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내 판정을 기다리는 두 고학생의 문제에 시달리면서
틈틈이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여자애는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며칠 새 불면에 시달린 듯
집단처럼 퍼석한 얼굴로 나를 맞이한 여자아이와
점심을 먹고
여전히 빳빳한 눈에 오기를 담아
나를 보는 남자아이와 마주 앉았던 오후
나는 극도로 지쳐 있었다
다만 몸이 피로했던 것이 아니었다
머리 속에 녹슨 철사가 가득 찬 듯
혈관에 어떤 이물질이 들은 듯
온몸이 벗어기고
머리카락 사이에 모래가 흘러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실 몇 년 늦어지면 그 뿐이죠
남자아이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퀘퀘한 냄새가 감도는 방안
더러운 테이프에 의지해
간신히 매달려 있는 유리 창문에는
짓눌려 죽은 날벌레들의 시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도 알아
너는 혼자서도 잘 해낼 거야
내 말은 진심이었다
홀로 실험실에 남아 밤을 새우기를 즐긴다는 아이였다
지원서를 보낸 것도 아이의 지도교서였다
이 아이에게 내미는 손
그 손을 잡는 순간 아이는 약해질 것이었다
여자아이보다는 남자를
가능하면 이 공개를 원하는 재단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조건이었지만
진심으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했지만
나는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런 거 다 소용없다고 생각해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아이가 말했다
움찔, 등이 고추서지는 느낌이었다
유리컵 몇 개 갖고 씨름하는 거 그냥 재미로 하는 거예요
심심하니까
의대 갈 성적은 안 되니까
그건 아니지
라는 내 말을 자르며 아이가 또 말했다
가난한 애들
지질이 궁상인 애들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 같아요
의대나 법대 가는 게 꿈이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거
부모들이 그러는 거
다 보고 자라거든요
탁탁
아이의 손끝에서 볼펜이 소리내며 돌아갔다
장학금 받아서 대학 가고 공부 마치면
그러면 뭐가 달라지겠어요?
어디 취직은 하겠죠
찌질한 회사에
홀로서기를 도와주는 일
그것이 재단의 역할이며
우리 사회의 책무이며
그런 말들이 내 입에서 울퍼지지 않았다
선생님도 변호사시라면서요?
우리 아빠가 맨날 그랬어요
법학은 밥학이라고
법대 가서 고시하라고
선생님 아버지도 그러셨겠죠
그쯤에서 나는 인정해야 했다
불빛이 없이도 길을 잃지 않을 아이일 거라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아이는 그저 아이일 뿐이었다
열여덟 해
딱 그만큼의 두께가 안 좋은 얼굴을
나는 이윽히 바라보았다
서류에 적힌 바에 따르면
아이의 아버지는 오래전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죽지 않을 만큼 다쳤고
산재 처리를 받았으나
치료에는 턱없이 부족한 보상을 받았다 했다
글쎄
아버지들이 다 같지는 않아
선생님 아버지는 그런 얘기해 주지 않았어
진즉 돌아가셨거든
볼펜을 돌리던 아이의 손이 머졌다
아이는 비스듬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밥하기여서 먹고 살기 위해서 법대 간 건 아니야
법이라는 건 말이지
나는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급작스레 밀려오는 피로 때문이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말 들어봤지
다만 불편할 뿐이다
뭐 그런 얘기
예전에도 그런 말은 있었어
선생님은 그 말 안 믿었어
누군가
우리 부모님이나 할머니나
아니면 그 위에 누군가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어째서 다른 아이들은 다 가진 것들이
내겐 없을까 생각했지
법대에 가는 것
고시를 하는 것
그리고 판사가 되는 것
내 어릴 적 생각이 거기까지였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이었다
법학은 밥학이라고?
내 생각은 그와 달랐다
합법적으로 용인된 테두리 안에서
복수하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법이었다
법이란 복수의 학문이었다
나는 복수를 꿈꾸었다
세상에 대해
내 지난 시절의 모든 것들에 대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곧 잠이 들듯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선생님은 성공하셨네요
변호사 되고
저 같은 애들 도와주는 일도 하시고
이건 뭐
아이가 나를 면접하는 형국이었다
도와주시면 열심히 하겠다
이런 얘기해야 하는 건데
그게 잘 안 되네요
오늘 면담도 진짜 하기 싫었거든요
아까 과학실에 박혀 있다가
우리 선생님이 하도 화를 내시는 바람에 집에 온 거죠
아이와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거기까지인 것 같았다
더 시간을 끌면
어쩐지 아이 앞에서 내 신세 타령을 할지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너무나 피곤했다
돈 받는 거
누가 주더라도 즐겁지 않은 거
나도 잘 알아
세상에 공짜가 없잖아
알겠지만 지금 심사 중이야
결과가 어떨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너 만난 거 아주 좋았어
결과 상관없이 생각나면 연락해
내 명함 갖고 있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살아야 해
이런 말을 나는 하지 않았다
아이는 열심히 살아갈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랬듯
세상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확인하며 살아갈 것이었다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그날까지
부서진 꿈의 잔해를 안고
그 밖에 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밤
늦은 시각에 나는
피의 그 여자애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기다릴게요
내일 같은 장소에서
라고 여자애는 말했다
오빠가 전화를 안 받아요
학교에도 안 나온대요
여자애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바보 같은 놈
부모 뒤에 쥐새끼처럼 숨어있는 놈
어설픈 똑똑이
피의 아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전혀 연락이 안 된다는 말이야?
내 역할마저 잊고서 나는 물었다
그게
여자애가 픽 웃었다
문자가 오긴 했어요
뭐 시간이 필요하다나요?
그래서?
어쩔 셈이야?
여자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걸 왜 내게 묻느냐는 눈이었다
칼자루를 쥔 것은
여전히 여자애였다
오빠가
저랑 결혼하기 쉽지 않다는 거
알아요
그날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라고
이모님 만난 날
그날 저녁에 만났거든요
오빠 같은 사람들
저 잘 알아요
공부 지독하게 잘하는 인간들
소심한 사람들
연애도 공부하듯 하죠
진도 나가는 거
미리 예습하고 또 복습하고
임신 같은 거
예습 안 한 일이니까 겁나는 거죠
얼마나 겁을 내는지
펑펑 울더라니까요
그날 밤에
울어야 할 여자애는 내 앞에서 웃고 있었다
이모님은
제가 오빠를 꼬셔서 애를 가졌다 생각하시겠지만
아니 뭐
그건 맞기는 하지만
나는 내 앞에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입이 바짝 말랐지만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물조차 넘어가지 않았다
꼬셔서 애 가진 거 맞잖아
아니야?
그것조차 아니라면 너무 허탈할 것 같았다
여자애가 헤헤 웃었다
뭐 그건 그렇지만요
오빠도 저 좋아한 것도 맞거든요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다고요
여자애의 눈시울이 순간적으로 젖었다
여자애의 말이 사실일 것을 나는 믿었다
그 착한 아이는 인터넷을 뒤져 맛집을 찾아내고
아름다운 거리
걷기 좋은 길을 외웠을 것이다
와인 한 병을 주문하기 위해
서너 권의 전문서적을 뒤졌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가방을 뒤졌지만 손수건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여자애에게
내 손수건을 내밀었다
훌쩍거리다 팽
코를 푼 여자애가
아무튼
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오빠 같은 사람과는 달라요
제가 매달리면 좀 오래는 가겠죠
오빠는 마음 약하니까
그렇지만 저는
아시겠지만
저는 그럴 여유가 없어요
학교도 마쳐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그래서 말이지
나는 여자애의 말을 끊었다
여자애에게 더 이상의 이야기를 맡기는 건
너무 심한 일이었다
진영이 어머니가 좀 도와주실 거야
아가씨 공부랑 생활이랑
만나봐서 알겠지만
아가씨에게도 몹시 미안해하고 있고
내 목소리가 낮아졌다
은밀한 거래를 일삼는 거강꾼처럼
뒤가 캥기는 기분이었다
무자비해지자 생각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서운 일
사나운 사람
도무지 앞뒤 막힌 인간들과
수없이 협상을 해본 터였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여자애에게 몹시 미안했다
이해해요
제가 엄마라도 나같은 애
며느리로 실을 테니까
어떻게 도와주실 건데요?
겹겹은 마스카라로 두꺼워진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여자애가 물었다
나는 백을 열고
피해계에서 받은 통장을 꺼냈다
통장을 들여다본 여자애가 말했다
오빠네 집
역시 상당하네요
그럼 가실까요?
한 여자애는
발 딱 일어나더니
앞장서서 문쪽을 향해 걸었다
차가 없다는 내 말이
여자애를 당황케 한 모양이었다
아
나는 전철이 좋아
사무실이 시내 한복판이거든
여자애가 코웃음을 쳤다
내 생각이 맞았어
진짜 이모 아니죠?
변호사가 이런 일도 하는 줄은 몰랐어요
얼마나 받으세요?
이런 일 하시면
여자애가 내게 결정타를 날렸다
그 오후
나는 피해계에
한모금의 서류를
퀵서비스로 붙였다
여자애에게서 받은
각서와 영수증
중절수술을 한 병원의 영수증이었다
서류의 어떤 부분에도
나는 내 개인적인 의견을 첨부하지 않았다
저녁의 회의에서 나는
두 명의 고학생 중
여자아이에게 장학금을 줄 것을 건의했다
허약해 보이려고
가련해 보이려고 애쓰던
여자아이의 눈빛이 절박했지만
그 때문이 아니었다
절망의 끝에 서 있는 남자아이
불빛 없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할
그 아이에게
내밀었다 거두어진 손이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 넣을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나는 그렇게 했다
아니
어쩌면 그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가는 그 아이가
만날 급경사와
튀어나온 바위와
무릎을 꺾게 만들 진창들
그것이
진실 쪽에 가깝다는 것을
그 아이가 알았으면
나는 바랐다
절망적인 분노가
그 아이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를
나는 바랐다
견눈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알게 되기를
자정이 지날 즈음
내 휴대폰이 울렸다
피였다
피는 울고 있었다
미안해
라고 말했다
다 끝났어
잊어버려
나는 대범한 척 울었다
정말이지 악몽을 꾼 것 같아
하면서 피는 다시 울먹였다
악몽은 되풀이 되는 법이라는 것을
나는 말하지 않았다
생이 이제는 피에게도
더 이상 너그럽지 않을 터였다
언제나 양지였던 피의 나날이
그늘로 옮겨갈 것이었다
삶이 공평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
그건 쓸쓸하고도 다행한 일이었다
피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갈증이
참을 수 없는 심한 조갈증이 들었다
이른 새벽
잠을 짓누른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내 몸은 흥건한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비칠거리며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병지에 물을 들이켰다
거실 거울에 비친 내 몰골은
그야말로 귀신 같았다
탁자 위의 휴대폰이
깜빡 시선을 끌었다
깊은 밤
피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폴더를 열고 나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정말 고마워
평생 잊지 않을게
라고 피는 적었다
다음 문장은 이러했다
이제 이자 보내지 마
그리고 원금도
나는 들고 있던 병을 들어
마저 물을 들이켰다
쿨럭쿨럭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물소리가 들렸지만
무자비한 갈증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혓바닥의 돌기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남편의 진료실을 찾아야 할 모양이었다
이 작품을 다 들으신 우리 가족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이야기는 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유한 엄마 피와
또 변호사 직업을 가진 친구
그리고 그 부유한 부잣집 엄마의
착한 아들과 엮이는 가난한 집의 여자
이 정도면 저녁 황금 시간대에 나올 법한 드라마의 소재로
딱 안성맞춤 아닌가요?
그런데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좀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우는 대를 이어 이어지고
그 부우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만의 리그 안에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또 생각나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개천에서 욕나는 일은
더 이상 없겠구나 하는
일종의 사회에 대한 슬픈 반항심입니다
그리고 좀 더 마음이 아픈 것은
피의 아들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의 태도인데
임신한 것을 빌미로 결혼을 하겠다고 때려 쓸 법도 한데
그 여자애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이
초연하게 그들이 그런 반응에
아무런 감정 없는 듯이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저를 슬프게 하는 것이었는데요
부자들이 자기들이 리그에 아무나 들어오는 것을 제안하듯이
가난한 사람들 또한
그들 부자들이 성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처음부터 요구하는 것을 포기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결국 죽을 똥 살 똥 정말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아닌 다음에야
그 부의 굳건한 벽으로 가려진 세계로 진입하는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의 연대와 가난의 연대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 나누어가는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재밌게 감상하셨나요?
가족 여러분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하고요
지금까지 서하진 작가의
침이 마르는 시간을 읽어드렸습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