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자유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 이승만5 /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의 시작), #이승만과자유민주주의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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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9. 24.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공작관TV그레이트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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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수용 올림 -
대한민국 연대사를 성경적 세계관으로
알리고 전하는 대한역사 문화원의 한국
대사 버기 특강입니다
[음악]
자유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 다섯 번째
이야기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간 이승만의
이야기입니다 우생 마사는 사자성어를
들어보셨나요 평상
잔잔한 강이나 호수에 소와 말을 풀어
놓으면 둘 다 헤엄쳐 살아 나옵니다
하지만 홍수가 나서 물살이 거셀 때
소화 말이 강에 빠지면 헤엄이 서툰
소는 살아남고 힘이 세고 헤엄을 잘
치는 말은 죽는다고 합니다 말은 거센
물살을 거스르려고 발버둥치다 힘이
빠져 죽지만 손은 물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 가며 육 살아나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이승만의 인생이 바로
우생마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믿고 저항하던 때 오히려
뿐이었다면 그가 기독교로 종하고 난
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고
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하나과 행
라 사를 주도한 이승만의 행보를
따라가보겠습니다
이번 시간엔 먼저 이승만이 조선을
넘어 드디어 세계 무대로 걸어들어가는
그 시작점 미국유학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904년 8월 7일 이승만이
투옥된지 5년 7개월 만에 한성
감옥에서 록을 때 대한제국은 여전히
러일전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전쟁의 양상은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져
있었죠
이승만은 추록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그의 비망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감옥에 낡은 철문을
걸어 나왔을 때 대한제국 정부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이미
분쇄되고 승리한 일본군은 대안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일본 는 대안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전 세계에 알려져
있었고 그래서 서방 국가들의 정신적
내지는 물질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지금 일본은 대안을 그들의 군대
소나기에 넣었고 그들이 보호할
것이라고 약속했던 바로 그 삶을
대안에서 약탈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랬습니다 을사 약이나 한일 합방까지
갈 것도 없이 이미 조선 는 일본의
소나기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죠 그런데이 상황이 전적으로
일본만의
만능일까 우리의 책임은 없었던
것일까요 러일 전쟁이 발발한
1904년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 달 23일 덕수궁에서
한일 의정서가
작성됩니다이 의정서의 핵심은
대한제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대한제국을 일본의 군사 기지로
제공한다는
것이었고이 의정서에 고종이 합의
서명을 하면서 일본은 어떤 제재도
없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들여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1904년 8월 22일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확정지역 할 무렵
대한제국과 일본은 제 1차 한일
협약을 맺게
됩니다이 협약의 핵심은 일본인을
대한제국 정부 재정 외교 고문으로
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도둑에게
안방을내어 준
격이었던 겉으로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힘없는 나라가 굴복한 듯
보이지만이 협약 이면에는 한편에 막장
드라마와 같은 뒷거래가 있었고 그
결과 이런 굴욕적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로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고종은 한일의정서 체결 전인
1904년 2월 17일 이미 창덕궁
후원을 일본군 사단에게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일 의정서가 체결된 후인
3월 20일 일본은 이토히로 를
대한제국의 특사로 보내 고종을 아케
했습니다 일본의 특사
이토히로부미가 고종을 련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로 고종에게 뇌물을 안겨
주기 위한 것이었죠
이토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선물이라며
30만 엔을 안겨
주었습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해 보면
약 400억에 달하는 거금 있니다
뿐만 아니라 고종에게 경부선 철도
지분도 보장해 주고 앞으로 경의선
철도의 지분도 보장한다는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그날 그 자리에
함께한 일부 대신들에게 임마 금용
뇌물이 제공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8월 대한제국 정부의 일본인 재정
외교 고문을 안치는 제 1차 한일
협약에 동의할 수밖에요 이 일을
지켜본 민영화는이 분통 터지는 상황을
영국 공사관의 방문해 영국공사
조던에게 전하였고 영국 공사
관에서는이 민망한 사건을 기록하여
영국 외무성 문서 보존소 보관해 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종을 일본의
총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한
불쌍한 개혁 군주처럼 믿고 싶어 하죠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을사 약 체결전
이미 고종과 일부 조정 대신들이
일본에게 돈을 받고 대한제국을
넘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 대한제국
조정 대신 중 나라를 걱정하던 한규설
민영화는 고종에게 조미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미국의 밀사를 보내
일본으로부터 벗어날 길를 모색하려
했습니다 조미수호 조약은
1882년 조선이 서양 나라와 맺은
첫 번째 국제 조약으로 미국과 맺은
것이었습니다 전문 14조 이루어진이
조약의 제 1조 조선이 제 3국으로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조약국 있
미국은 즉각 이에 개입 거중 조정을
행사함으로써 조선의 안보를
보장한다라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설과 민영화는이 조항을 근거로
고종에게 미국의 밀사를 파견할 것을
주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추천한 밀사는
다름 아닌
이승만이 그러나 고종은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규설
민영환의 끈질긴 설득으로 이승만은
대한제국 조정에 밀사가 되어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이 사진은 이승
떠나기 전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죠 이승만은 대한제국이 발행한
여권을 가지고 1904년 11월 4일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대한제국 조정의 사로서 대한제국을
떠나 태평양을 건너 미국 워싱턴을
향해 길을
섰습니다 이승은 194년 말 어 미국
LA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먼저 미국에 와
있던 신근우 신흥우 형제 그리고
배제학당 학우들과 제외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것은
1904년 말이었지만 이승만은 곧바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이듬해인 1905년 8월
4일이 되어서야 그 만남이 이루어졌죠
이승만이 미합중국 대통령 루즈벨트를
만나 대한제국의 위태함을 알리고
대한의 독립을 보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러 가는 길에는 그 당시
하와이에 살던 윤병구 목사가
동행했습니다 이승만과 윤목사가
루즈벨트를 만나러 가는 그날 뉴욕
타임즈에 대한제국 조정의 밀사
이승만과 윤병구 목사가 시오도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게 될 것이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날 이승만과
윤병구 목사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려던 청원서 있니다 1908년
기자 맥켄지가 자신의 책 대한제국의
비극 부록으로 대한제국 독립
청원서를수록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내용을 알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욕 동부롱
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 사가모어 힐에
있는 대통령의 별장에서 루즈벨트를
만나게 됩니다 루즈벨트는 아주
예의바르고 정중하게 두 사람을
맞아주었습니다
이승만은 조미수호 통상 조약을 근거로
위태함을 처한 불쌍한 나라를 건져
달라는 독립 청원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정중
게 지금 당장 그 청원서를 받아주지
못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런 공적인 문서는
사적으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죠이 청원서를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다시 자신에게 전달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이 말은 아주 정중이
거절을 통보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루즈벨트의 속내를
알길 없는 두 사람은 대한제국 공사
간으로
향했습니다 이승만과 윤병구 목사가
루즈벨트 별장에서 나왔을 때 수많은
기자들은이 만남의 결과를
궁금해했습니다 이승만은 기자들에게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이 청원서가
대통령께 공식적으로 전달돼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간다고 말했고 기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일인양 두 사람을
재촉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두 사람은
워싱턴에 있는 대한제국 공사관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 공사
간에는 공사가
공석이었다 줄 것을 요청하자 김윤정은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김윤정은 이미 일본에
매수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결과가 나온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1905년
7월 29일 미국은 이미 일본과 비밀
조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 조약이 바로 가스라
테프트
미입니다 미국 육군장관 테프트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 가스라 도쿄에서 맺은이
비밀 협약은 두 나라가 서로의
식민지를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루즈벨트가
대한제국의 청원서를 받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이 일이 무산되자 이승만은
너무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승만은이 모든 과정을
자세히 민영환 편지로 알렸습니다 편지
일부를 살펴볼까요
다만 언제든지기에 있는 대로 조미수호
통상 조약을 인연하여 불쌍한 나라의
위태함을 건져 주기 바랍니다 하니
루즈벨트의 대답은 앞서 말한 것처럼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청원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승만과 윤목사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이승만을 놀라게
한 일도
적었습니다 그 시로 욕에 와서 기차를
타고 밤을지나 아침에 워싱턴에 도착해
보니 각 신문에 모두 나고 벌써
우리가 워싱턴에 왔다고
났으니이는 지금 우리나라 형편에 돈을
신문사에 준다 해도 이렇게 기사를 낼
수 없는 일이라 목석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어떻게 기쁘지 않을까
즉시 공사관에 가서 윤정에게 청원서를
보이고 신문사에 돈을 줘도 기사한줄
가 어려운 상황에 이렇게 많은 신문이
대안의 일을 보도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너무 놀라고 기뻐하는 이승만의
얼굴이 상상이 되시나요 그런데
공사대리 김윤정은 결국 그 청원서를
받지 않았다는 거죠 이승만은 그 분한
마음을 편지 말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실로 우리나라 원수는 일본
사람이나 러시아 사람이 아니요 실로
돈에 팔려다니는 놈들이 우리의 제일
원수라
합니다이는 우리 말이 아니라이 나라
사람들이 땅을 치며 하는 말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너의
나라는 일본이 와서 마음대로 하여야
참 복이라고 합니다 김가을 당장 파직
키거나 소환하시고 바랍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내가 물고 뜯기도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나라는 어찌되든
말든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내일도 그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1905년 11월
18일 대한제국은 일본과 을사 약을
맺고 외교권을 빼앗기며 사실상 일본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 책임은 왕과
조정 대신 그리고 백성 모두의
것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밀사로
사명을 마친 후 유학을 하기로
계획했습니다 선교사들 역시 이승만에게
유학을 권했고 언더우드 선교사와 개일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가
이승만을 위해 진심 어린 추천서를 써
주었습니다 미국에서 추천서란 그
사람을 내가 보증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만큼 아무에게나 써 주지도
않고 받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선교사가 이승만을 위해 추천서를 써
주었다는 것은 이승만의 됨됨이가
훌륭했고 성실하고 유능했던 것을
의미하죠 게일 선교사는 워싱턴 및
미국 각지에 있는 기독교
형제들에게 그리고 워싱턴 계약 교회의
루이스 햄린 목사님에게 보내는 두통의
추천서를 써 주었는데 게일 선교사는이
추천서를 통해 이승만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추천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승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실함 한성
감옥에서의 개종과 한성 감옥의 기적
그의 세례 문제
그리고 앞으로 이승만의 학업에 도움을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언더우드 개일
선교사와 여러 선교사의 추천서를
합하여 모두 19 통의 추천서를
가지고 미국에 온
것입니다 개일 선교사의 요청으로
이승만은 1905년 4월 23일
워싱턴 계약 교회에 햄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 교회의 성도로 미국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승만이 그때까지
세례를 못 받은 상태였는데 그 이유는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당시
서울에 있던 많은 선교사들 모두
이승만에게 세례를 주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이 서울에 있을 때
게일 선교사님에게 세례를 받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게일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들의 마음을 생각하여 미국의
햄님 목사에게 세례를 부탁
죠 또 개일 선교사의 부탁대로 햄님
목사는 자신이 담임하는 워싱턴 계약
교회의 성도인 조지 워싱턴 대학
총장에게 이승만을
추천했고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한 학력이 인정되어 조지 워싱턴
대학 2학년 2학기로 편입하여 2년
동안 영어 미국사 유럽사 프랑스어
철학 천문학 경제학 등을 수강하며
1907년 6월 5일
과목을 수강했고 19세기 이탈리아
건국과정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죠 논문 제목만 봐도 이승만이
얼마나 역사와 국제 정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사실 이승만의 하버드 시절은
너무나 큰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친일 인사 인 대한제국
정부 외교 고문을 맡고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저격당해 살해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를 저격한 사람은
전명훈
장인한이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친밀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일본의 실체를
알지 못했던 터라이 사건 이후 한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는 얼음장같이
변했 입니다 이승만에게 그 여파가
미쳐 석사 가정을 밟는 동안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 시간을
견뎌낸
것이죠 그리고 이승만은 1908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가정에
들어갔습니다 프린스턴에서 이승만은
정치학과 국제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국제법과 외교 미국
헌법사 미국사 철학사뿐 아니라 심지어
신학교 기숙사 칼빈 클럽에 기숙하며
신학 강자를 계절학기로 수강하여 신학
학사 하기까지 취득했다고 합니다
학부부터 박사 가정까지 그의 수강
과목들을 보면 역사가 한 번도 빠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10년 이승만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주의 아는 박사 논문으로
박사 학기를
취득하였습니다
명문대학을 그것도 세 곳을 다니면서
5년 만에 박사 하기를 취득했다
정말로
놀랍죠 더구나 그의 박사 논문은 우수
논문으로 후일 프린스턴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할만큼 수준 높은
논문이었다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몇 년 후 이승만 박사가
일본의 탄압으로 미국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 단행본으로 나온 그 논문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엄친아 엄마 친구
아들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승만
박사가 바로 원조 엄친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미국 의 대학
진학률은 인구의 5% 밖에 안
되었다고 하는데 이승만 박사는 대학
대학원 박사 하기까지 받았으니 미국
사람들도 부러워할 만한
학력이 더구나 당시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이승만 박사보다 뛰어난
학력 소지자가 없었다고 하니 이승만
박사는 당대에 엄나 중 최고였다고 할
수 있죠 이승만을
연구한고 교수의 글을 보면 이승만이
당대에 엄친
아였다는 유학생들에 비해 더 유명한
대학을 다녔고 또 최초로 국제 정치학
분야에서 박사 학기를 따냈기 때문에
군계일학 격이었다 하겠다 미국
대학에서 2년여 기간에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한국인으로서 이승만이 최초일뿐 아니라
미국인으로서 극히
드물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걸쳐 일본과 중국에서 우리보다 먼저
수많은 유학생을 구미에 파견했지만
그들 중에 이박사의 학력에 필적할
인물은 리 많이 배출되지
않았다네 이승만은 정말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승만이 공부를 한
목적은 신의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엔 늘 조선의
독립이 가장
간절했습니다 때문에 이승만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공부함 동시에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강연과 연설을 하며
조선을 알리는 일에 힘을 다했습니다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을 졸업할
무렵부터 5년 동안 약 200번이
넘는 강의와 강연을 했다고 하는데
많으면 한 달에 13번까지 강연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일본의
처사가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예로 그의 인터뷰 기사들을 몇 가지
소개할까 합니다 그가 미국에 간지
얼마 되지 않은
1905년 6월 이승만의 인터뷰
기사가 워싱턴 타임즈에
실렸습니다 이 광고는 어제 우리
타임즈의 칼럼 란에 게제할 것을
요청받은 것으로이 어린아이의 아버지인
이승만을 도와 그 소년이 거주할 곳을
찾아주려는
목적이다이 광고의 이면에는 어느 한국
출신자의 비상한 용기와 인내심 박해와
투어에도 굴하지 않은 결심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이승만의 표현대로 한국은
지금 절실하게 기독교를 필요로 하고
있다 기억도 할 수 없이 오래전부터
그 나라를 지배해 온 유교를 대체하기
위해서이다 사실이 기사의 목적은
상의도 없이 미국으로 보내진 아들을
자신이 공부할 동안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인터뷰였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
기회를 잡아 조선의 상황을 이야기했고
그를 인터뷰한 기자는 이승만의 말에
매료되어 이승만의 말들을 신문에
고스란히 옮겨 주었
이승만은 러일 전쟁의 영향에 대해서
신문을 통해 일본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며 한국은 명목상의 독립만을
유지할 것이고 일본의 군사적 지배가
은자의 왕국 구석까지 퍼질
것이다라고 담대하게 외친
것입니다 1907년 6월 13일 자
워싱턴 포스트는 이승만이
YMC에서 강연한 내용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습니다 이승만은 강연에서 한국의
풍물 사진까지 동원했다 이승만이
보여준 100매가 넘는 사진 중에는
장옷을 입고 언제나 눈을 내리 깔고
나들이 하는 중인계급 부인들의 사진도
포함되어 청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국의 양반집 여인들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는
지체 높은 여인네들 은 집밖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설을 마치자 청중 수백 명이
이승만에게 박수 갈채를
보냈다 조선의 문화를 알리는 것이
무슨 나라를 구하는 일인가
싶으시죠 당시 미국에는 조선과 일본이
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또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조선의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죠 일본의 언론 플레이는
정말 놀라웠으며
때문에 이승만은 조선의 고유한 문화를
알려 조선이 독립적인 나라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뉴저지주 뉴어크에서
발행한 모닝 스타지 1907년 7월
25일자 이승만 인터뷰 기사는 아시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일본과 러시아의
야욕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방법에서 두 나라는
다르다 지나친 자만으로 충만한
러시아는 러일 전쟁 기간 중 외부
비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선량에 보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서양 문명이라는
양가죽으로 늑대 본성을 위장하려고
했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빈수레가
요란한 셈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총은
조용히 적의 심장을 겨눈다
일본에 굴복한 한국인은 아무도 없다
강대국들은 정의의 대의를 위해
한마디도 못 하고 있다 일본을 자극해
극동의 상업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 보이지 않는가 약소국들의 대한
부리로 얼룩진 평화를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다 이승만이 하버드에서 석사
가정을 공부할 당시인
1907년 평양에서는 장대현 교회를
시작 놀라운 대부흥이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습니다 198년 피츠버그 1차
세계 선교 대회에서 이승만은 미국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지금 조선은 기회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미국의
형제 자매들이여 이것은 여러분의
기회입니다 이러한 사정에 있는 나라가
무엇을 필요로 할 것인가 생각해
보시고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보살펴
주십시오 빨리 조선땅에 들어가라
그리고 조선을 깨워라 그리고 조선을
도우라는 호소이 조선을 살리려는
필사의 외침이었을지도
1일 콜로라도 한인 애국 동지 대표자
대회 연설에서 그에 굽히지 않는 독립
의지와 간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조선이 일본에 질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조선의 역사는 일본보다
뛰어나다 조선은 반만년 이상 보존되어
왔으며 결코 지구상에서 말되지 않을
것이다 당 본는 아시아 연대론 대동화
공영을 외치며 아시아 일대를 소나기에
넣으려 했습니다 아시아 연대론이라는
것은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일본과
힘을 합쳐서 서양 나라를 막아내자는
터이 없는 주장입니다
일본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고 있을 때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일본에 의해 외교가 단절되어 버린
대한제국의 상황을 알리는 외교관의 역
감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외교 통로가 단절된 상황에서
미국 대중에게 직접 대한제국의 독립이
위협받는 상황을 알리는 공공
외교관으로 대한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인식시키는 문화 외교관의 역할을
감당하고
[음악]
있었습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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