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유. 엠. 부찐. 19편 | 제3장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의 초기 철기시대 | 제1절 초기 청동기시대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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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과 청천의 양 하천 사이의
지역과 대동강 유역의
주거지들이 신석기 시대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의 축조 양식에
있어서는 지방적 차이가 심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이 시기에 한반도
물질 문화에 전반적인 배경하에서 볼
때 범의
구석과 의 유적은 다른 나라 문화의
반점으로
보인다 압록강 유역과 송화강 상류의
문화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대동강 하류의 소위 궁산
문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남만주 한반도
북부에서 철기 출현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많은 학자들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요동반도의이
시대에 있어서의 문화의 특수성을 낮게
평가하고
있다 사실상 쌍사자 다층 류주의 제
3문화 층을 접하게 되면 곧 1년에
독특한 특징에 주목하게
된다 이것은 특히 규모가 크지 않은
사각형의 주고이
주거의 형태는 일정한 방향이
없다 그러나 주거지의 방향은 그것이
배열되는 산의 경사가 전개되는 것에
따르고
있다 또한 새로운 특징으로서 주목해야
할 것은 30에서
100cm까지의 구멍에 세워진
주거지의 돌담이다
세 번째 새로운
특징은 벽을 돌로 만든 것과 함께
입구의 외실
구조이다 몇몇 외실 돌계단의 잔존물
있다
그러나네 번째로 차이가 나는 것은
로지의 밑바닥이 석판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주요한
상정해볼 때 기원전 20세기에
요동반도 쪽으로 석조건물을 애호하는
아마도 거석문화의 건설자 연관을 갖는
어떤 새로운 종족이 유입되었을
듯하다 돌에 대한 그들의
선호는 아마도이 시기의 유적인
주거지의 구조의 특징을 남겼을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전 시기의 쌍사자
유적은 그 시기의 다른 유적과 어떤
점에서도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도를 선호한 흔적은 매장지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남만주 한반도 북에서의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흔히 다양한 형태의
돌무덤 즉
지석묘
석관묘 적석 but 그리고
석곡분갈이
출현 및 이것들이 광범위한 지역으로의
확산과 관련을
맺는다 무덤 형태의 하나인 함경북도
양강도의 몇몇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거의 전 지역에서
발견된다 한반도 넘어의 지역에서
지석묘는 중국 동부와 만주에서
두드러진다 동북에서 서쪽으로 천산
삼매의 아지 거석으로 된 건축물이
발견된다 이미 역사의 여명기의
그것들은 그
거대함과 단순한 모양으로 사서 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20세기 초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도 일본의 학자들은 지성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삼상 남의 논문들 특히 만주와
한반도의 고대 묘에 관한 중요한
논문들은 금동 지역의
지석묘와 석관의
목록이라고 불리워질
만하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특히
19
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독자적인 한국
고고학의 형성과 더불어 한국의
고고학자들 도유호
김용관 김정배 등도 거성 문화의
연구에
참여했다
상남과 한국의 고고학자들이 밝힌
지성의 대는 때로 1천년의 차이가
나기도 한다
연대가 처음 추정된 것은 일본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일본 학자들이 내놓은
결론은 지금까지 몇몇 연구자들을
앞지르고 있지만 한국의 고고학자들이
뒤에 온 작업들에 의해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와 다른 유적에 관한 기존의
견해가 상당히 변
이 논문에서 지성은 연대를 분명하게
하는 역할 및 초기 철기 시대의 각
단계 문화의 성격을
이해하 도움을 주는 유적으로만
된다 지성은
형태학적으로 그리고 연대기적으로 그
기원이 똑같지
않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들
사이에서의 차이를 히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으며 묘를 두 가지
형태와
북방식 지석묘와 남방식 지석묘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전적인 지석묘와
변화된 형태의 지성로
분한다 북방식 지석묘 또는 고전적인
지성 형태는 유럽과 동지중해의 유사한
축 과 전혀 차이가
없다 이것은 취사용 탁자 모양의
거대한 건축물로 그 지석을 구성하는
것은 수직으로 세워진 거대한
석판이다 지석의 위쪽에는 더욱 거대한
석판 덮개가 놓여 있고 그 덮개의
모서리는 지석의 선에서 심하게 나와
있다 은 지석묘의 안쪽에 있는데 거의
지면에 드러나 있다 그러한 지성들의
절대 다수는 고대에도
훼손되었는데 이것은 그 연대 추정에
있어서 심각한 차이를 빚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형의 지성들의
많은 부분은 한반도의 황해도와 평한
남도에 있는데이 지역에는 열개 또는
그 이상의 지성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중국 요영 지방의 남쪽
요동반도의
청원
통화현 그리고 류화현도
발견된다 산동 지석묘의 일부 형태가
북방형 취한다는 것은 흥미롭게 주목해
볼
만하다 북방식 지석묘의 모델로서의
요동반도의 북편에 있는
화동 유적의 3호 지석묘를 주시해
보자 그 구조물의 벽은 거칠게
다듬어진 두께
15cm 20cm 길이 길이
120cm 높이 약
140cm 석판으로 되어
있다 사각의 묘실은
160
160 20 또는
30cm 판석으로 덮여 있다 묘실의
벽이 땅 속으로
110cm 들어가 있음으로 인해 땅
위에 솟은 부분은 60cm 넘지
않는다 바닥의 면적은
2.4
평방미터 바닥에는 두께
50cm 토층이 깔려 있고 그 밑에는
상박이나 대퇴 보이는 뼈의
파편과 질 좋은
골석쇠 파편 단지 그리고 가늘고 긴
동체가 있는 윤이나는 붉은 단지
돌출부가 있는 부석의 곤봉 등이
있다 화동과 나온 3호 지성에 대해
그렇게 자세하게 언급하는 것은 우연
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먼저이 지성
묘에는 유적들이 예외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삼상 차남이 향한 지석묘의
연대 추정이 주로 거기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남방식 지석묘의
전형으로는 대구시 외곽의 대봉동 제
1구역 유적에서 나온 3호 지료를 들
수
있겠다 농지 가운데 위에 치수 375
235 40에서
50cm 불규칙적인 원추형의 거대한
윗 판석
보인다 판석 밑에는 판석의 층이 있고
그 층 밑에는
200에서
500cm 직각형 대석이
있다이 대석 묘 내부에서 돌로 된
단검 돌 화살 세개 밑바닥이 둥근
붉은 토기와 문이 없는 밑바닥이 둥근
갈색 토기의 조각들이
발견됐다 이러한 토기들 볼 때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의
것이다 지석묘를 두 가지 기본 형태로
나누는 것은 단지 그들의 배열에
있어서의 일반적 성향을 나타내기 위한
것일 뿐이다 즉 한대의 남도와 심지어
한반도의 가장
남쪽에서도 북방식 성묘가
발견되며 함경 남도와 평안 북도
방식의 성묘가
발견된다 황해에 대해서는 어떤 형의
성묘가 지배적인 이해하긴 는
힘들다 한반도에 있는 지성의 배열에
있어서 여러 개가 혼재하여 나타나는
것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다음의 결론
즉 지성에 있어서의 차이는 지역적
특성일뿐만 아니라 또는 오히려
시대적인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게
했다
현재는 북방식 성묘가 방식 지성에
앞선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김용관 팽이 모양의 토기가 있는
주거는
발생학적으로 북방식 지석묘와 긴밀이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삼상 차남의 견해에 의하면
북방식
지석묘와 남방식 지석묘의 시대차이
평균에서 약 4세기 가량이다 그에
의하면 북방식 지석묘와 남방식
지석묘의 출연 시초의 차이가 대단히
짧은 각각 기원전 3세기 기원전
2세만 북방식 지석묘의 소멸 시기는
기원전
세기고 방식의 소멸 시기는 기원후
3세기 심지어는 4세기까지
이른다 삼상 남에 의하면 북방식
지성의 소멸 과 남방식 지성의 출연
시기는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남방식지 성묘는 동질적이지
않다 삼상 차남은이 구조물들의네 가지
변종을
지적한다 첫
번째이 형태의 지석묘의 윗 판석
밑에는 어떠한 석조물 없다 두 번째
상층
석판은네 개의 커다란 돌들이 받치고
있으며이 돌들 사이에는 돌더미 채워져
있다 세 번째이
지성면에서 석판과 돌더미 모양에
벽으로 되어
있다네
번째이 형의 구조물은 대단히 거대한
상층 석판이
특징적이다 마지막 세 가지 형태의
실에는 또한 석관이 있으며 어느
경우에는 심지어 사호
발견된다 상층 석판 밑에서 보통
발견되는 석관은 때로는 석판 다로
밑이 아니라 마치 그것을 사방에서
포위하는듯한 곳에 있다 그러한 무덤의
집합체 속에서 지성은 이미 방어적
역할과는 무관하고 그것은 곧 무덤의
유적이라는 표시로서 역할을 하게 됐다
석관이 있는 지석묘는 더욱 후기의
구조물로서 간주되며 그리고 삼상
차남은 심지어 이러한 형의 지석묘는
돌더미가 있는 신라와 가야 시대에
지어진 더욱 후기의 분묘에 전해졌다고
직접적으로 쓰고 있다
그는 후기의 지석묘와 신라의 분묘가
형태 학상 그리고 문화적인 면에서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분묘가
5세기에서 6세기에 속한다 하여 후기
지석묘 원대를 세기로
추정한다 삼상 남이 생각하는
바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이 지역
지성가 장기간 속였다는 그의 주장은
거의
확실하며 또한 거성 문화의 발전과
화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주목할만한 그의 두 번째
주장은 지성의 설립에
있어서적인 차이에 관한 것으로 방식
북방식 성묘 보다 4 500년
뒤에까지
잔존한다는
것이다 삼상 차남의 논문을 살펴볼 때
나오는 매우 중요한 세 번째 결론은
지석묘와
석관묘 상관적인 동기성 띄고 있다는
것이다 지석묘의 대한 다른 분류
방법이 최근 북한 고고 학자들에 의해
고한 되고 있다 이들은 지석묘를 팽이
모양의 토기를 만든 사람들이 만든
무덤 가운데의 한 형태라고
간주하면서 먼저이 모든 축조물 두
개의 변종 형태로 나눈다 그 첫
번째는 낮고 석조물로 둘러싸여져 있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높으나
독특하게서 있는 지석묘가
그것이다 구식의 용어에 따르자면 키가
큰 지성은 고전적 내지는 북방식
지성에 상하며 낮은 것은 남방식
지석묘 내지는 변형 지석묘와
상응한다 북한의 학자들에 의하면
그러한 용어가 이러한 유적의 연대와
구조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해주지 함
따라서 고전적 성묘를 그들은 덕형
고인돌로 남방식 지석묘를 침촌
고인돌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하고
있다 호자는 구조에 있어서 일정하지
않다 무덤 구역에는 하나에서 개까지의
석관이 있을 수도
있다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하나의
석관이 있는 집합을 침의 가장 뒤늦은
축조물이라고 간주하는데 즉 그들의
견에 의하면 지성의 진화는 하나의
집체 속에서 관의 숫자가 줄어드는
경향을 따랐다는
것이다 몇 개의 관리 있는 침촌
인도를 북한 학자들은 구조에 따라
가지 형태로
분류한다 하나의 무덤 구역
안에네 개에서 여섯 개 분의 커다란
고인돌과 보통의 돌 상자식 석관이
배합된 것이다
황주은 침촌이
긴동요이 그러한 유형에 속할 수
있다 두 번째 형의 구조물이 먼저번에
것과 구별되는 것 것은 고인돌의
양측면 지석이 두꺼운 판석으로 돼
있으며 목연의 벽들은 가느다란 남에서
뽑혀져 나와 있다 침촌 리의 청진동
고인들도 이러한 건축물에
속한다 하나의 무덤 구역에 판석으로
만들어진 몇 개의 지석묘가 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동질적인 고인돌은
침촌네 번째 변종일 듯하므로
우리는 침촌
고인들의네 가지 형태를 상정할 수
있다 북한의 고고학자들이 제안한
지석묘의 새로운 분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전적 내지는 그들의
용어로서 덕형
고인들은 시대적으로 뒤진 것이며
개무덤 구역을 한 촌 고인돌의 변종
가운데 하나라는데
있다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덕형
고인들을 두 개의 군으로
나는다 첫 번째에 속하는 것은 비교적
높지 않은 고인돌로 그 주위에는 무덤
구역의 흔적이
보인다
그한지 석은 별로 다듬지 않은 돌로
이루어지며 그것의 위는 불규칙한
형태의 커다란 판으로 덮여
있다 예를 들어 황해도 오덕리 석장
골의 제 2유적 지대에서 나온 이호
고인돌의
진성은 길이
4.4m 너이 2에서
4m 두께
0.4m 규격
을는다 측면 벽들의 두께는
0.3m이다 두 번째 군에 속하는
덕형 고인들은 비교적 거대한 구조물로
그 높이는 때로
1.5m 아지
달한다 오덕리 유적에서 나온 포
고인들은
이형의 전형적인 축조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거대한 지석묘 있데
거대한 판들 이루어져 있으며 직경
4.4m 원형판으로 덮여 있다 묘실은
길이
1.95m 너이
1.8m 높이
2.5m이다 지성의 벽을 확고하기
위한 석제 대신에 1.05m 깊이의
호가 파여져 있으며 그 호의 깊이가
지석 전체 높이에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이 지석묘는 형태상 화동과
지석묘와 매우
흡사하다 따라서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삼상 차남과 전혀
반대되는 지석묘의 형식 분류를
제한한다 즉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덕형 고인돌은 연대상 더욱 후기의
것일뿐만 아니라 총형 고인돌의 직접적
진화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침촌 고인돌에서 나온
도구가 기원전 2천년 후반의 주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들
고인돌도 같은 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간주하고 있다 작은 검 도끼
화살
손도끼 청동 화살이 발견되는 덕형
고인들은 그 연대가 더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북한의 고고학자들이
추정한 연대가
확인된다면 새로운 분들과 그리고
지성의 연상의 개승 관계를 가지고
비록 돌을
기하 를 만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는 않을지라도 청동기 시대의
난만 주와 한반도 문화 발전의
전통적인 개념에 대해 새롭게 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석관 묘은 또한 극동에 거성
문화의 총체에 포함되는 축조물 속한다
그러나 때때로 석관묘 변형된 지석묘와
구별하기가 사실상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북한의 고고학자들이 특히 강조하는
것처럼 석관묘 지석묘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것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였지만 한반도
지역에서만은 오랫동안 병전 있으며 그
결과로 독특한 혼합 문화가
만들어졌다 석관 묘은 전문 서적에
대단히 자세히 기록되 있으며 때문에
우리는이 유적들에 대해 짧은 개요와
분류에 머물렀으면 한다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요화 유역과 한반도
북서쪽 지역의 무덤을 제외한 남만주
한반도의 석관 묘를 청동기 시대의
묘라고 생각하는데 이들의 최종적인
연대는 아직 추정되지 않았다
흥미롭게 주목할 만한 것은 만주
지역에서 석관 면은 전 지역에서
아니라 부분적 집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삼상 차남은 그러한 근원지의
분권을 다섯으로 나눴다 즉 하부 열하
길림성 부군 송화강 상류 등이다
이종은 더 후기의 자료를 이용해
분포의 숫자를 넓히고 있다 특히
그는이 유적들의 집중 지역에 또
하나의 근원지 즉 요영 지방 남쪽을
추가하는데 그는이 지역에 강상 루상
12대 영자의 묘를
포함시킨다 그는 이외에도 군의 상근의
유적을
포함시켰다 주목할 것은
상남이 만주 고대문화의 중심지
요동반도의 원 문화에 그러한 유적이
없었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이것을이
지역 발전의 독특한 역사적 경로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60년대
초에는이 지역에서의 다실 석관 묘의
고고학 발굴 보고가 나왔다 따라서
삼상 차남이 내놓은 청동기 시대의
요동반도 지역의 역사적 발전 경로가
독특하였다 논의는 근거가
박약하다 석관묘 분류에 관해서 삼상
차남은이 묘들을 세개의 거대한
지역군으로
나누는데 각각의 지역에서는 그 방향
구조 무덤의 유물 구성에 따르는 몇
가지 형태의 묘를 분해 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나눈 지역 분포권
내에
각의들에는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석관묘
처음 나타나는 것은 기원전 1천년 때
전반에 열하 지방에서
나타났으며 그다음에는 기원전 1천년
대의 중 또는 그보다 뒤늦게 길림
지방에서 나타났다 그는 만주와
한반도에서이 무덤들은
통화가
압록강에서 퍼져 나갔다고
간주한다 그는 그러한 묘의 출현을
맥인 즉 고대 문헌에 잘 알려져 있는
예맥족 혹은 맥 쪽의 유입과 연관
짓는다 한국의 고고학자 이종선 석관에
대해 몇 가지 다른 분류를 하고 연대
또한 전혀 다르게 추정한다
그는 석관묘 두 개의 큰 군으로 구분
즉 실제적인 석관묘 그리고 지석묘의
총체 속에서 석상이 관의 역할을 한
묘가
그것이다 첫 번째 군에 있어서이
정선은 두 개의 형
아와
아로 두 번째 군에 있어서는 세 개의
형 ia ib 그리고 IC 나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