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벨스의 스승 세계를 세뇌시킨 천재 '에드워드 버네이스'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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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버네이스 #마케팅 #천재 #당몰이 #당신이몰랐던이야기 #괴벨스 #나치 #선전 #홍보
참고 및 출처
https://omeka.uottawa.ca/jmccutcheon/exhibits/show/american-women-in-tobacco-adve/torches-of-freedom-campaign
https://libapps.salisbury.edu/nabb-online/exhibits/show/propaganda/what-is-propaganda-/where-did-the-term-propaganda-
https://www.hankyung.com/article/2018122643901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509200970191194
https://slownews.kr/59225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오늘은 나치
선전 장관 베스가 추종했던 홍보의
아버지 마케팅의 선구자이자 세계
최초의 PR 에이전시를 세운 에드워드
버네이스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상
마케팅이라는 것을 하나의 학문이자
산업으로 만든 인물이죠 여러분은 혹시
프로파간다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아마 대부분 부정적인
느낌을 받으실 듯합니다 프로파간다 즉
선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정치인들이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대중을 선동하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죠
실제로 현재 프로파간다는 선전 선동을
뜻하는 더 나아가서는 논리적이지 않고
상식적이지 못하나 사람을 홀린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사실
프로파간다는 원래부터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던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애초의
정치 용어로 쓰던 용어도 아니죠
프로파간다는 1622년 로마 가톨릭
교환 그레고리 15세가 설립한 포교를
전담하는 추기경들의 위원회의 이름
신앙 전파를 위한 성직자 회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프로 파악 간다가
전파되어야 할 것들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기 때문이죠
당시만해도 특정 대이나 신념을
전파하는 행위를 프로파간다 했을만큼
프로파간다는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하지만
18세기부터 포기 활동이 아닌
세속적인 활동 주로 정치적인 맥락에서
프로파간다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20세기 첫 특히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프로파간다는 서구
국가들에서 아예 부정적인 의미로
변화하게 되었죠 여러 국가들이 전쟁을
정 정당화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프로파간다를 사용했는데이
과정에서 많은 거짓 정보와 과장된
사실들이 유포되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이게 된 겁니다 특히 나치독일의
선전부 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가
프로파간다를 체계적으로 활용하며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유대인과
다른 소수 집단에 대한 혐오를
조장했고 괴벨스의 활약 아닌 활약
덕분에 이때부터 대중은 프로파간다의
조작가 거짓 정보의 상징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괴벨스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대계 감성이죠
바로 오늘의 주인공 세계 최초의 PR
에이전시를 만든 홍보의 아버지
에드워드 버네이스 있니다 깊게 들어가
보면 프로파간다로 게벨스도 에드워드
버네이스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죠
현대 우리가 쓰는 프로파간다는
에드워드 버네이스 저석 프로파간다로
시작된 것이고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홍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책을
저술했는데 괴벨스는 에드워드가 쓴
책들을 마치 교과서처럼 읽으며
프로파간다 기술을 습득했어요 에드워드
버니스 왜 홍보의 아버지로 불리는지
그 상과 함께 지금까지 그가 진행한
캠페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죠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1891년 11월
22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에드워드의
가문은 그야말로 명문가였다 아버지는
엘리 버네이즈 있고 어머니는 안나
프로이트 버네이스 있는데 아마 안나의
미드 네임을 듣고 눈치 채신 분들이
계실 듯합니다 어머니 안나 프로이트
버네이스는 현대 성격 이론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금은 트 프로이트의 여동생이 여기서
재밌는 것은 에드워드 버네이스 아버지
엘리의 여동생이 프로이트의 아내라는
점입니다 즉 엘리와 프로이트가 서로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겹사 돈을
맺음으로써 에드워드에게 프로이트는
외삼촌이 고모부가 된 것이죠
에드워드가 추후 자신의 선전 술의
심리학을 접목시킬 수 있었던 건
동시대 최고의 심리학자로 활동했던
삼촌 프로이트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이고요 증주 할아버지 아이작
버네이스는 함부르크의 유대교 율법학자
라비 있습니다 애초의 라비도 존경받는
스승님 주인 님인데 랍비 중에서도
최고 여정 시인 하인리 하이네와
친척이었다 말 그대로 명문가였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에드워드의 가족은
에드워드가 한 살 때 다 같이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에드워드는
이때부터 생애 대부분을 뉴욕에서
보냈기 때문에 사실상 에드워드의
고향은 뉴욕이 코네 대학교에서 농업
하기를 취득하고 잠시 농업 분야에서
일할만큼 선전과는 전혀 관련 없는
곳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국물 수출 업자로 일하던
뉴욕의 농산물 거래소에 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파리에서 체류하며
공물 관련 전보를 잃는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죠 에드워드는 20대
중반부터 선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에드워드는 친구의 소개를 받아
의학 전을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했죠
이때 에드워드는 샤워의 장점과 코르셋
착용의 위험성에 대해 편집하거나
데미지드 굿이라는 이름의 성병과 성을
사고하는 이들을 다룬 연극을
홍보하면서 처음으로 홍보일을
시작했습니다 영극 홍보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에드워드는 자신 신 마케팅
그리고 대중의 의견을 조작하고
형성하는 능력 즉 선전의 재능이
있음을 깨닫죠 능력을 인정받은
에드워드는 연극과 공연 예술 홍보
담당자로 경력을 쌓아 나갔습니다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여 공연을
홍보하고 대중의 관심을 끌면서
자신만의 선전 수를 만들어 나갔죠
그러다 1917년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전쟁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연방 공보 위원회
cpi 설립합니다 26살의 에드워드는
cpi 라틴아메리카 업무 국에 발탁될
주요 임무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미국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전쟁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작업과 임무를 심리
이전이라고 불러줘 cpi ES 일하며
에드워드는 더 깊이 있는 선전 및
여론 조작 기술을 연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수요가 있는
대상에게 혹은 수요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 만한 대상에게 그리고 타국가
아닌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를
진행했지만 cpi ES 더 큰 의미의
마케팅 즉 인간의 근본적인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연구할 수 있었죠
그것도 당사자는 모르게 말입니다 이후
에드워드는 선전이 비즈니스 세계에서
하나의 전문 분야로 인정받기를 원하기
시작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세계 최초의 PR
회사를 뉴욕에 설립했던 독립적인 PR
컨설턴트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에드워드는 얼마안가 20세기 미국
사회 및 현대 자본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3,000 프로이트
못지 않은 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에드워드의 컨설팅을 받은 회사의
제품들은 마치 하나의 사이 현상처럼
문화를 바꾸고 심지어 법을 바꾸기도
했죠 조은 과정에서 말하면 우리는
아직도 영양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물론이고 어쩌면 생각까지도 말이죠
에드워드가 피 회사를 세운지 1년
차가 되던인 1920년 머리망
제조업체인 베이다 해원은 자사의
머리망을 많이 팔리게 해 달라며
의뢰를 해 왔습니다 평범한 마케팅
회사라면 단순히 예쁜 영화배우를
모델로 하는 광고 전단을 생각했겠지만
에드워드의 생각은 달랐죠 에드워드는
물건이 아닌 물건이 팔릴 만한 상황에
주목했습니다 1911년 뉴욕에서는
911이 있기 전까지 미국 최악의
참사로 불리던 뉴욕 트라이앵글
의류공장 화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희생자가 모두 여성이었고 15분 만에
146명이 사망한 참사였습니다이
사고로 인해 뉴욕 공장 조사 위원회가
발족되면서 1920년까지 60여개의
산업 안전 관련법이 설치될 정도로
파급력이 큰 사건이었습니다 언뜻
머리만을 전혀 관련 없어 보이지만
에드워드의 눈에는 달랐죠 에드워드는
트라이 글 우리공장 화재의 충격이
아직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다는 것을
이용해 프로에 친 긴 머리카락이
공장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매우 위험하다는 내용의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얼마가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머리망을 하는게 더
안전하다는 인식이 생기게 되었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머리망을 하는게 더
안전하죠 핵심은 이전까지 전혀
걱정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기
만들었다는 겁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베니의 머리망을
구매하 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가
베니의 머리망을 하나의 유행이자 안전
용품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몇몇 주
정부에서는 공장 근로자와 여성 식품
서비스 종사자들의 머리망 착용 의무와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했죠 매출은
당연히 급격하게 상승했습니다 이렇게
에드워드의 홍보 방식은 물건이 아닌
상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기업이 무엇을 팔까 고민한다면
에드워드는 어떻게 팔까 고민했죠
물건을 홍보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물건을 필요하다고 느끼게끔 그 물건을
살 수밖에 없게끔 생각을 조작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1923년에
진행한 프로테인 겜블의 아이보리 비누
캠페인도 마찬가지였죠 당시 치열했던
비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보리
비누는 차별화된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차별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소비자는 사용하던 걸 계속
사용하는게 문제였죠 홍보를 맡은
에드워드는 가장 비누가 필요하지만
씻는 걸 싫어하는 동시에 아직
선호하는 제품이 없는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추었죠 에드워드는 아이보리
비누조각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첫
두번째 대회 참가 자격은 예술가들에게
주어졌는데 수상작은 뉴욕을 비롯해
각지 박물관과 미술관의 순해
전시되었고 두 번째 대회부터는
초등학생까지 참가 자격을 넓혀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비누조각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아이보리 비누는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각인
되었죠 에드워드는 대회를 25년 동안
개최했습니다 예술가와 산업계 인사들을
심사위원으로 참여시켜 대회 권위도
높여져 대회 결과와 우승작을 신문과
잡지에 보도했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까지 끌 고요 프록터의 겜블의
시장 점유율은 후발 주자임에도
급상승했고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아이보리 비누를 사용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아이보리 비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누 중 하나이죠
1929년에는 자유의 횃불 캠페인이
진행되는데이 캠페인은 에드워드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유명한 커리어 중 하나입니다 채널의
담배 편에서도 잠깐 나왔죠
1900년대 초중반 담배 유해성이
알려지며 담배 소비량을 최초로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담배
회사들은 여성들에게 에도 담배를
판매하고 싶어했죠 미국에서 여성의
공공 장소 흡연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어 있었습니다 공공 장소에서의
흡연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말은 사회적
시선이 좋지 않았다는 말이죠 만약
여성이 자유롭게 담배를 필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진다면 엄청난 매출
상승이 예상되었지만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담배
회사는 여성 소비자 시장 개척을 위해
에드워드에게 홍보를 맡겼습니다
에드워드가 생각해낸 방법은 페미니즘이
있죠 20세기 초중반 페미니즘은
서양권 에서 말 그대로 불같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차별
폐지와 평등을 주장하며 거리로 나왔죠
에드워드는 여성의 공공 흡연권과 여성
흡연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여성의
권리 평등과 연결했습니다 담배불을
자유의 횃불로 상징화 시켰죠 여성들이
담배 붙이는 불은 담배불이 아니라
인권 운동에 있어 자유의 횟대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다이 말은 방송을
타면서 여성 흡연은 곧 기존 사회에
대한 즉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반항이 되었습니다 1929년 부활절
퍼레이드 때는 젊은 여성 모델들을
고용하여 담배를 피우면서 뉴욕
시가지에서 퍼레이드를 하게 만들어
이목을 끌었습니다 여성들은 우리의
흡연을 허락하라 말을 하며 거리를
행진했고 그 결과 여성 흡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였고 여성
흡연율도 크게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이 캠페인은 사회적 변화를
이용해 상업적 이그 추구한 대표적인
사례로 알의 힘과 윤리적 문제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죠
1930년대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디 정책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진행하였습니다 1930년대 대공황시기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디의 정책을 통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여
경제를 재건하고 실험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기업들은 유디 정책이 자유시장
경제를 위협할 것이라며 크게 반발했고
전미 제조업 협회와 같은 기업
단체들은 에드워드를 고용했습니다
에드워드는 뉴디 정책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비교하며 이데올로기적
전쟁을 버렸고 뉴디 정식이 미국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문 라디오 잡지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 의 뉴디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배포하는가 하며
기업의 성공 사례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강조하는 내용을 홍보해 에드워드의
캠페인은 유디 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약화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참고로 이때 에드워드가 만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현대까지도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죠 베이컨도 에드워드의
작품입니다 20세기 처 미국은 간단한
아침 식사를 선호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에드워드는 내과 의사들의 대상으로
행한 간단한 설문 조사를 통해 내과
의사들은 든든한 아침 식사를
선호한다는 뉴스 기사를 개재하여
분위기를 바꿔 놓았죠 동시에 아침
식사로 인기가 없었던 베이컨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다른 기사들을 활용해
베이컨과 달걀이 최적의 식사 메뉴임을
설명했습니다 든든한 아침 식사는
베이컨이 되었고 우리는 아예
서양에서는 아침에 베이컨을 먹는 다로
아지 인식하고 있죠 굴직한 것들만이
정도이고 수많은 캠페인을 만들고 또
진행했습니다 저술 활동도 활발하게
했는데 1923년에는 최초의 알
전문서 있 여론 정제를 출간해죠이
책에서 에드워드는 알 분야를 처음으로
정의하고 설명했습니다 대중 심리학을
연구하여 적절한 메시지를 만들고
뉴스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알
전문가의 역할을 대중들 사이에 유용한
상징적 연결을 만드는 사람으로
정의해죠 참고로이 책은 괴벨스가 독일
내 반 유대주의 여론을 끌어올리는데
이론적 바탕이 된 책으로도 유명합니다
1928년에 출간한 프로파간다에서
사회가 학가 심리 조작 기술을 대중
커뮤니케이션에 적용하는 방법을
탐구하고 대중 조작과 상징적 행동을
통해 정치 사회변화 성평등 인종 평등
등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기존의 선전 방식을 옛
방식이라 말하며 자신을 새로운 선전가
칭했는데 예를 들어 피아노를 홍보할
때 구시대적 선전가 피아노를 알리는
것에 주력하지만 새로운 선전과는 집단
습관을 이끌어내어 피아노가 팔리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고
설명했죠 집단 습관은 쉽게 말해서
특정 집단이 가지는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중년층은 등산복을 즐겨 입는 것
같은게 집단 습관이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머머 특 이런 글들도 집단
습관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드워드는 피아노에 대한
집단 습관을 이끌어내려면 가정
음악실을 유행시켜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가장 먼저 가정 음악실 행사를
개최하여 고급스럽게 연출된 가정
음악실을 전시하고 그다음엔 유명
음악가들을 섭외해 가정 음악실에서
연주회를 여는 식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생성하며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전혀 없던 가정
음악 실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는
것이었죠 최신 트렌드에 민감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고객에게 가정
음악실을 제안하기 시작하며 가정
음악실이 점차 집단 습관으로 자리잡게
되고 이때부터는 구태어 피아노를
선전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프로파간다 역시 괴벨스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괴벨스는 독일인이
자발적으로 나치가 되는 환경을
만들었죠 1947년에는 합의의
조작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대중의
무의식적 욕구를 이해하고 이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1952년에는
홍보라는 최근 내면 피를 단순한
홍보나 광고가 아닌 공군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과정으로 정의했습니다 또한를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개인과 조직이
공공과 조화를 이루며 성장하고
생존하는데 필수적인 도구라고 말했죠
이후로도 여러 책을 출간하는
에드워드는 말년에 뉴욕을 떠나게
됩니다 약 70세 무렵인 1961년
경 에드워드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메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로
이주해 보스턴 대학교 홍보학과 교민
교수로 활동하면서 국무부와 메사추 세
추주 보건 교육 복지부 등에 에서
자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피알 활동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고 사망 직전까지 클라이언트와
만남을 가지며 무려 100세가 넘은
고령에도 컨설턴트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죠 에드워드는 1995년
3월 9일 103세 나이의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했습니다 피아를 체계화하고
발전시키며 혁신적인 캠페인을 통해 살
변화까지 일으킨 인물이지만 동시에
대중 조작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여성 흡연을 장려한 캠페인은 대중
건강을 희생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죠
말년의 흡연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가
하면 피아 게의 윤리 기준과 규제
강화를 위해 노력한 것을 보며 자신도
윤리적 문제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네요 나치의 선전장관
케베스 추종했던 홍보의 아버지
에드워드 버네이스 대한 이야기 이번
편은 여기까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