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군 뒤 암군 뒤 암군.. 명나라는 어떻게 멸망하게 했을까? 명나라의 역사 총정리 몰아보기 통합본 3부 최종화

역사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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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역사 총정리 몰아보기 통합본 3부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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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돋보기입니다 명나라의
역사 7부 있니다 명 나라에는 총
16명의 황제들이 있었는데이 중
유능한 황제들은 별로 안 되고 거의
대부분이 무등왕 군주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답이 없는 암군이네
명이 있었는데이네 황제들을 명나라의
사대 암군이 부릅니다 10대 왕제
무중 정덕제 이은 두 번째 명나라
4대 암군이 바로 세종 가정제 있니다
세종 가정제 무능하여 명나라 내치를
망쳤을뿐 아니라 외적의 침입이 그게
달했을 때인데요 6부에서 말씀드린
북로 남의의 화가 정점을 찍었을 때가
가정제 치세이
했습니다 북로 남의의 화중 북로
몽골족을 가리킵니다 몽골 초원으로
쫓겨난 몽골은 미약하게 남아
징기스칸의 후회들이 보르지기트
출신들이 대한을 이어갔지만 사실상
오이라트 몽골 족에서 새로운 강대
부족으로 성장하다가 오이라트 에센
타이 시가 토목보의 변 이후
보르지기트 부족들을 학살하고 대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센타이 씨가 부하게
피살 당하고 다시 보르지기트 출신의
바연 문계 복귀했지만 보르지기트
오이라트 한분 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바야 문케이크 출신의 이스마일 타이
시에게 살해당하면서 그의 아들인 바투
문캐논 should 통합하고
1480년 다얀칸 지휘했습니다 다얀칸
그 통이라 몽골 초원을 조직적으로
다스리고자 좌익 세계 우익 세계 총
여섯 개의 만호로 나누고 각 만호장
자신의 아들들로 임명해 다스렸습니다
문제는 그 아들들이 각자의 세력권을
갖고 독재적인 부족들로 나뉘는데 그
중 가장 강력했던 세력이 다양한의
손자 알탄 칸이 다스리던 우익 세
만호 중 하나였던 오르도스
세력이었습니다 오르도스 지방의 세력주
있던 알탄칸 men 몇 번이고
명나라를 침공하며 약탈하 였는데 그
중 가장 컸던 침공이 1550년에
경수의 팬이었습니다 알탄칸 몽골군은
만 대군으로 명나라 깊숙히 남아
하더니 수도 베이징을 포위하였다 방의
선언과 업무를 맡은 평로 대장군
구라는 정작 전쟁을 명분으로
백성들에게 물자를 약탈하면서 제대로
싸우질 않았고 그 덕에 알탄칸 베이징
근교에서 각종 약탈과 노략질을
자행했습니다 결국 알탄칸 그 가정제
매년 명나라가 막대한 양의 세포를
몽골에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강 화름
했고 알탄카라 철수하였습니다 알탄칸
돌아온 뒤 명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다가 1571년 공식적으로
명나라와 평화 화친 조약을 체결합니다
명조와 평화 협정에 따라 명나라는
각종 기술자들을 알탄칸게 보내주기도
하였는데이 기술자들이 오늘날 내몽골의
중심지인 호보트 이름바 귀화성이란
도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되는게 알탄칸 몽골
전체의 대한은 아니었습니다 몽골 전체
의 대칸의 따로 있고 알탄칸 그저
여섯 개의 만호 중 하나였는데 그저
그 세력이 워낙에 커서 알탄칸 권력이
대한보다 더 강했을 뿐이었습니다 힘은
강력하지만 정통성은 알탄칸게 없으니
알탄칸 정통성에 목말라 있었는데
그래서 알탄칸이 포섭한게 티베트
있습니다 몽골은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
일래 티베트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티베트 불교가 몽골인들의
종교였습니다 몽골 족에 수용한 티베트
불교가 겔룩파 아는 종파 있는데
1578년 알탄칸이 겔룩파 수장 소남
갸초 몽골로 초청 합니다 두 사람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알탄카라 티베트
불교의 겔룩파 국교로 선포하고
알탄카라 get 3에게 달라이라마는
칭호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이게 바로
달라이라마의 시작입니다 소남 기초는
스스로를 3대 달라이라마를 자칭하고
자신의 스승들을 1대 2대
달라이라마를 모셨어 그리고 소남
기초도 알탄칸게 몽골의 통치자이자
티베트 불교의 수도자로서 신성성을
부유하면서 알탄칸 종교적 지지를
받아냅니다 하지만 알탄칸 사 후 그의
세력은 알탄칸 때만큼의 위상을 누리지
못하고 몽골은 다시 여러 만 호들이
세력 경쟁을 벌리며 약화됩니다
다음은 북로 남의 화중 남외 있니다
이맘때쯤이 바로 그 악명 높은 외구의
기승을 부릴 때였죠 외구 전기 외구
후기 외구 구분 FA 전기 외구
명나라 초기의 외국인데 당시 일본은
남북 조로 분열이 되어 있어서
자국민들 통제가 어려웠던 시기고
혼란의 팀을 타 외구 불리는 일본
해적들이 명나라의 동남 해원과 고려
조선을 침공해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1대 왕제 홍무제 주원장은 외국 들의
자진 약탈로 인해 해안을 봉쇄 키며
강력한 해금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의 남조 북조 무로마치
막불 통일이 되고 당시 명나라 3대
황제였던 영락제는 머리를 써서 일본의
막부 정권이 알아서 외고를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합니다 바로 무로마치
막부에대 명나라 무역 독점권을 주는
것이었는데요 무르 막치 막부가 대명
무역을 독점을 하는데 외부이사 가서
불법적인 약탈을 하면은 이게 무로마치
막부에도 피해를 주겠죠 무로마치
막부는 명나라와 국교를 트고 명나라는
무로마치 막부의 무형 만을 공식
무역으로 인정하며 그 증표로 감압이
아는 표차를 발행했습니다 당연히
무로마치 막부만의 감압을 소유할 수
있었고 오로지 감합이란 증표로 무역이
가능했던이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무역의 형태를 감합 무역이 부른답니다
1404년 감합 무역이 시작한 일에
일본에서는 명나라로 견명 3이라는
무역선이 활동을 시작했죠 이렇게 전기
외국가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전기 외고는 명나라다는
고려의 피해가 더 컸답니다 외고로
인한 명나라의 지옥은 후기 외구
때부터 터입니다 그래도 100년 정도
감화 무역으로 명나라 일본 무역이
안정화되어 가는 듯했으나 내부적으로
많은 패턴들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모르
마침 막부는 대명 무역을 후쿠오카의
하카다 상인과 나가사키의 사카이
상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있었습니다
두 상인 집단에게 제한된 무역에
대해서 타지역 일본 상인들의 불만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하카다 상인과
사카이 상인들 끼리도이 무역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원래 명나라
조정은 두 상인 집단에게 돌아가면서
교육을 했으나 1523년 두 상인이
한꺼번에 명나라의 정 척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카이 상인이 명나라
조중의 뇌물을 바치면서 로비를 했고
이에 명나라는 사카이 상인과 무역을
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하카다
상인이 영파의 반란을 일으킵니다이
사건이 영파의 나입니다 반란 규모
자체는 그렇게까지 크지 않아서 어렵지
않게 지압되는 했으나 명나라
조정에서는 단단히 화가나 일시적으로
감화 무역을
중단하더라도
훨씬 축소시켜서 운영하였습니다
가뜩이나 이전에도 나가사키와
후쿠오카에서 만 이루어지던 제한된
무역의 불만이 많아 는데 이것보다 더
규모가 축소가 되니까 다시 해적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외국가 부활한
것인데요 이게 바로 후기 외구의
시작입니다 이때의 왜구를 단순히
무역선 털어먹는 도적 집단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들은 양국의
공식적인 승인을 허가받지 않은
불법적으로 무역을 하는 무장 단체인
겁니다 때로는 약탈하고 때로는 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버리는 기업화된
해적 집단들인 거죠 그렇지만
무역이란게 쌍방향이 아아이 명나라가
해금 정책을 펼치고 감화 무역을
축소하면 그만큼 중국 동남 해안에서도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의 기회도
줄어들게 되는 겁니다 이들도 명나라
정부의인가를 받지 않은 채 불법 무장
단체가 되어 일본의 외국도 결착하여
암시장을 형성하고 밀무역을 하는
겁니다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았기에
그들은 군대를 소유할 수밖에 없었고
관군의 단속에 걸려서 몰리다 보면
약탈을 하고 이런 식으로 반복됐죠
그러니까 후기 왜구는 일본인만 있는게
아니라 명나라 이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후기 외구의 80%
중국인이었고 동남아시아 출신의 민족
구성 도 다양했다고 하죠 후기 외구의
기승을 부릴 때이 바다를 제패했던
가장 큰 세력의 해적단을 보유하고
있던 해적왕이 있었습니다 바로 왕직
이었는데요 왕직 명나라 안휘성의
태어난 명나라 사람으로 처음에는 소금
장사를 했었습니다 일본에 넘어가
대상인으로 성장 상담겸 해적단을
창설하고 명나라 일본 마카오 동남아
일대 해역의 주도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마카오에 어느
나라가 진출해 있었느냐 바로 유럽의
포르투갈이 있습니다 왕지은 포르투갈의
유럽 선장 과도 교역을 했고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로부터 받은 화승총을
실은 왕직 배가 일본에 표류하면서
조총이 전래된 거랍니다 명나라 가정제
조정은 왕직 해적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해금 정책을 더 강화했는데
그럴수록 왕직 가담하는 세력이 더
많아지고 왕직 해적 규모도 더
커집니다 왕직 본거지는 일본 선부
끝자락 고토 도라는 섬이었습니다
본거지가 일본이다 보니까 명나라가
왕직 잡기도 곤란했고 일본 입장에서도
왕직 통해 엄청난 부와 물자가
일본으로 유입이 되니 굳이 왕직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555년 조선에서 일어난 의묘 외변
왕직 해적단들의 소행이었다 조정은
왕직 잡으려고 고민하다가 호정원
자원에 따라 호정원 절강성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파견합니다 그동안 왕직
잡으려다가 실패한 명나라 관리들이
부지기수였고 호종은 무조건 강경하게
나간다고 해서 왕직 잡을 수 없다고
봤습니다 호정원 우선 명나라 동남해
안에 있는 왕직 산하해적단 두목들은
이간질 합니다 누구에게는 무역을 좀
허용해 주고 누구에게는 탄압하고 이런
식으로 명나라에 남아 있는 왕직 산하
적자를 전부 포섭하거나 토벌했습니다
그리고 왕직 가족들을 찾아내어 인질로
잡았는데 호정원 일본의 사람과 정보를
보내서 왕직 가족들이 전부 안전하게
잘 있으며 호종은 왕직 교섭하여
왕직게 합법적인 무역의 기회를 열어
주겠다는 의사를 보냅니다 철석같이
믿는 왕직 바로 명나라를 방문하였는데
1558년 호종은 왕직 체포한 후
명나라 조정에 승 을 받고 왕직
처형했습니다 그런데 호종은이 실제로
왕직 살려주고 싶어 했으나 명나라
조장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왕직
처형시키는 주장도 있습니다 여하튼
호동원 왕직 제거의 공을 인정받아
중앙정부의 높은 관직이 제수된 정치
싸움의 실패 탄핵합니다 왕직 처형
직전 이렇게 말을 했다는데요 저는
국가를 위하여 도적을
쫓아냈지만 이이 말 뜻은 자기가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했기 그나마
외구의 침략을 억제하고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말인데요 인정하기 싫지만
맞는 말이었습니다 느와르 영화를
보면은 최대 보스가 갑작스레 죽으면
왜 그 밑에 여러 세력들이 내전을
벌리면서 대혼란이 찾아오죠 여기도
똑같습니다 해저왕 왕직이 죽으면서
외구 통제가 되지 않은 채 명나라를
침략해 왔고 명나라에 대혼란이
찾아옵니다 명 나라도 몇 명이 무능화
폭군들의 거치며 과거 홍무제 주장이나
영락제 때의 군사력을 전혀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다나 지속적인
해금 정책은 해안가의 국방력 수준도
저해시켜 놓았고 심지어는 구 이른 두
명이 단 한 명의 사상자 없이
명나라군 900명을 사살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때 명나라를 구원하러
영웅이 한 명 나타나니 바로 척계광이
[음악]
있습니다 척계광 원래 북쪽 몽골을
막던 장수였습니다 이때부터 첫 기광이
지휘하는 부대는 구과 기강이 제대로
잡힌 부대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첫
기광이 외구의 피가 극심했던 절강성의
담당자로 파견이 됐는데 찾기 3이
조직하고 훈련시킨 부대는 역시 그
이전에 명나라 절강성 군부대와
질적으로 다른 부대가 되었습니다
첫개강이자 아던 부대를 척가군이라고
따로 부를 정도였는데요 척계광의
척가군 일반 명나라 군과 달랐습니다
정규군이 아니라 해당 지역 농부 광부
등 현지인들로 구성을 했습니다 그러면
병사들은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명분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척계광이 개발해
낸 진법이 있으니 그 유명한
원항입니다 원왕은 첫 개관이 저술한
병서 기호 신서의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병사들의 진형이 마치 조류
원왕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원왕의 핵심은 역할 구분 있데요
12명이 한 개의 대를 짜고 그
12명은 각각 여섯 개의 역할로 구분
어 있습니다 우선 분대장 역할의
지휘자 대장 한 명 방패와 표창을
가지고 있는 등패 두 명 긴 막대의
여러 개의 날카로운 가지들을 붙여서
공격하는 부기 낭선 두 명 장창병
네명 삼지창 두 명 맨뒤에서 곤봉으로
후미를 지원하는 화병 한 명 이렇게
한 개의 대를 구성합니다이 진법에
원항이라 이름이 붙은게 물론 진형의
모양도 원왕 럼 생겨서 있지만 원왕
그 암수가 금슬이 좋아 한 마리가
죽으면 다른 한 마리도 따라 죽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원항 since이라고도
부르는 겁니다 한개의 대를 이루는
12명은 마치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반드시 믿어야 하며 서로를 믿어 만
추고 자기 역할만 잘한다면 절대
깨지지 않는 진법이 겁니다 만약
12명 중 대장이 죽었는데 다른
병사들이 도주한다 men 그 병사들은
전원 사형당하는게 원칙입니다 고된
훈련도 수반되었습니다 원왕는 현지인
이웃 주민들로 구성했기에 그나마
서로를 믿게 하는게 수월했습니다이
정도 조직력과 군율 과 체계를 갖추니
척가군이 한 순간에 정예병의 되었던
겁니다 1561년 1만 명의 외국이
쳐들어왔을 때 첫 기강의 원진 첫가구
아홉번을 싸워 아홉번을 모두 이겼으며
1963년에는 평행의 전투에서 외구
이만을
격퇴시켰다 연전 연승을 거두면서
외구의 기세가 확 꺾이게 됩니다 첫
계왕은 외구 퇴치의 1등 공신이었던
[음악]
거죠 자 그런데 이때 명나라 황제였던
11대 황제 가정가 명나라의 두 번째
대암 군이라고 말씀드렸죠 가정대 때
북로 남의의 화가 절정에 이르기도
했지만 가정제 무능으로 명나라의 내치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가정제 각종
도술에 빠져 있던 황제로 도술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각종 기행
짓들을 삼았습니다 가정제 아주
엽기적으로 궁녀들을 심심풀이로
죽였는데 황제의 과도한 도술에 지처
아닌 궁녀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가정제 목졸라 죽이려다가 실패한 적도
있을 정도죠 가정제 무능함에 해설하는
충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정제 무능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가정제
해서를 죽이려고 했으나 해서가
상소문을 올리기 전에 가족과 인사하고
관까지 짜 두었다는 말을들은 가정제
이런 해설을 죽여봤자 본인만 폭군
소리들을 것 같아서 굳이 해설을
죽이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정제 독교 놀리는 점점
수위가 세졌고 결국 가정제 수운
중독에
[음악]
걸립니다 1967년 가정제서 후 그의
아들 목종 경제가 명나라 12대
황제로 등극합니다
윤경은 아버지 치세 때 쫓겨난 해서
등의 충신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국정을
조직해냅니다 지난 명나라의 역사
부에서 말씀드렸던 몽골의 아탄 칸이
한창 몽골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명나라와 화친을 맺고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일 때가 바로 목종 융경제
때입니다 일시적인 평화가 좀
찾아왔다고 잠깐 안심하고 국방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죠 목종 윤 경제는
몽골 조기 침입을 항상 경계했고 북방
국경지대 국방에 지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알탄 칸의 몽골도 몽골이
중앙아시아 투르크의 타타르가 실시
각명 나라를 노렸 그든 목중 윤
경제는 외구 토벌의 영웅이었던 첫
개강을 불러들여 북방 국경지대에
부임식 있니다 역시 첫 개강은 첫
개광 첫 개강이 부임하자 북방
국경지대 국방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북방 국경지대 국방력 강화 사업으로
목중 융경제 때부터 말리장성 축조
사업에 들어갑니다 어 만리장성은
진시왕의 업적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만리장성을 처음으로 쌓은 사람은
고대의 진시황이 맞죠 그러나
이맘때쯤이면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았을 때로부터 1500년이 넘은
시점이었습니다 명나라 때 기준
진시왕의 만리장성은 오늘로 비유하자면
우리에게 삼국시대 산성 수준이에요
진시왕 때 싸움 만리장성이 명나라
때까지 온전하게 이어졌다고 할 수
없으며 고대의 축성 기술이 명나라
때와 비교하면 많이 뒤쳐져 있었겠죠
목종 융경제 때 만리장성을 재보수 및
강화하였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만리장성의 모습은 진시왕 때의
만리장성이 아닌 명나라 때의
만리장성입니다 물론 워낙 대대적인
사업이라 목중 윤 경제 때 시작했지만
그 완공되는 시점은 목중 경제가
사망하고 나서 도 한참 이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진시왕 때의
만리장성이 명나라 때의 만리장성의
공통점이 있는데요 그것은 북방 유목
세계의 유목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만리장성은 몽골
족에 대한 중국인들의 두려움을
상징하는 것이며 또 중국인들 그들이
세운 한족과 비한 족의 경계인 겁니다
따라서 만리 장선 기준으로 그 이남은
전통적인 중국 한족의 역사를 할 수
있겠지만 그 이북의 문화권은 중국간의
다른 문명을 가진 다른 세계라고
해석할 수가 있어서이 만리장성이 동북
정을 반박하는 사례로도 많이
거론됩니다
[음악]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면 목종 윤 경제가
매우 뛰어난 성군 같죠 물론 폭군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어마어마한 호색한이었고 그 때문 이제
꽤 젊은 나이와 사망합니다 1572년
목종 윤경재 사후 윤경재 아들 신종
만력제가 13대 황제로 등극하는데 아
드디어 그가 왔습니다 명나라 통틀어
최악의 폭군이 명나라에 4대 한군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만력제는 이
4대 암군이 안 들어갑니다 4대
암군으로 뛰어넘는 암군 중에 암군이
있어요 그런데 만력제가 처음부터 암군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만력제는 뛰어난
재산들을 앞세워 그가 누적되어 있던
명나라의 사회적 패턴들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데요 그 대표적인 이물이
장거정이 있습니다 또 명나라는 환관의
입김이 강한 구조였다고 말씀드렸는데
만력제 때 황제인 신음과 총회를 받던
황관 풍부도 대당 유능한 환관이
있으며 사회 의식도 투철해서이 장거정
풍보보 되어 명 명나라 쇄신 개혁에
착수합니다 당시 명나라의 가장 급한
사회적 문제가 재정악화 있습니다
명나라는 그간 북로 남의 화로 인한
군사비 지출이 매우 컸고 비대해진
신사층 다 챙겨 줘야 했으며 또 연이
황제들의 문란한 사치 생활에
국가재정에 파탄날 대로 파탄날
있었습니다 장거정 풍부는 우선
전국적으로 철저하게 호구 조사와
토지를 측량하여 세금 제도를
개혁합시다 있는 잡대 세금이 너무
많았습니다 전부 신사층 their
배부르게 해주는 악습들이 있는데
장거정의 지세 즉 토지세 정세 즉
인두세 두 개의 세금만 남겨 놓고 다
정리합니다 이걸 일조
편법이라고 오로지 은으로 납부하도록
하였습니다 과거 명나라의 역사
5부에서 말씀드렸듯 이때 명 나라에는
정말 많은 은이 유입되고 있었거든요
이러니 조세 과정이 투명해지고
합리적이고 확실해져서 국가 재정이
강화될 수가 있었죠뿐만 아니라
장거정의 황화 취수 사업을 진행하고
국번 강화를 위해 힘썼는데 첫 개강을
발탁해 몽골 전선 쪽으로 보 에이 첫
개강을 물심양면 지원해 준 것도
장거정이 있으며 당시 막 부상하던
여진족을 맡기 위해서이 성량을
요동으로 보내 여진족을 견제하게
했습니다 그나마 장거정의 통해
명나라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일시적으로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런데 왜
만력제를 명나라 멸망의 신호탄을 쏜
암군이 하는 걸까요 1572년
명나라의 13대 황자의 신종 만력제가
지휘했습니다 만력제의 재위 초반에는
재상 장거정 황관 풍부 등을 내세워
여러 개혁을 시도하며 그간 누적되어
있던 명나라의 사회 경제적 방패들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장거정의
개혁은 실패로 끝이납니다 우선
장거정의 개혁은 기득권자들의
재멋대로이 재산 분리기를 억제하는
것이 가장 핵심이었습니다 조세 제도를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개혁한다는 건
그만큼 기득권자들이 제멋대로 굴기가
어려워진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기득권자들 그러니까 조정의 신사층 들
대다수는 장거정의 개혁을 탐탁치 않아
있다는 거죠 장거정의 개혁이 실효성이
컸던 건 맞지만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한 개혁 들이었던 거죠 그리고
장거정 결탁과 환관 풍부 역시 투철한
사회 의식으로 강력한 환관 세력들을
보아 장거정의 개혁을 지지하였습니다
풍부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은
악랄했다 부정적으로 축제한 재산도
어마어마했습니다 장거정 풍부는
자신들의 개혁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이들을 손쉽게 숙청했다 원래
개혁이라는게 지배층들의 사회적 합의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게 이상적이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힘들잖아요 장거정
풍부는 다소 독재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들의 정적이 상당히 많이 생겼습니다
이때 장거정의 벼르던 이들에게 아주
좋은 트집이 하나 생겼는데 장거정이
부친상을 당했습니다 성리학이 국교였던
명나라에서는 부모 상이 있으면 고향의
낙향해 3년상을 해야 하지만 장고은
혹시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 개혁이
백지화 될까 봐 두려워하여 상을
원칙적으로 치르지 않았고 조정에서는
장거정의 불효를 꾸짖는 상수들을
비발치 정치적으로 몰리던 장거정의
무슨 이유에서인지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더라 사망합니다 장거정의 사망과
동시에 반대파들이 모두 복직하여 황관
풍부 탄핵하려 했죠 황관 풍부는 그가
만력제의 신임을 봤던지라 만력제의
도움을 기대했으나 정작 만력제는 풍부
보호해 주지 않았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받들겠다 풍부에 유별 번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만력제는 폭군이
됩니다 명나라 16명의 황제들 중
최악의 복군 4대 암군으로 뛰어넘는
암군 중의 암군이 있죠 만력제의 재외
기간은 실로 막장인데 장거정 풍부
탄핵후 만력제의 약 30년 정도를
전혀 정사에 임하지 않았습니다 대소
신료들과 다 함께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조정 어전 회의 참석률이 1
2년에 한 번씩이 있습니다 26년간
회의에 나타나지 않기도 했죠 하필
만력제가 명나라 황제들 중 재위
기간이 48년 가장 길기 때문에이
만력제의 무능으로 인한 명나라의
혼란이 그만큼 오래 이어졌고 명나라는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몰락하자
그러면 만력제는 뭘 했을까요 그냥
놀았죠 그냥 매일 놀았습니다 상상하기
힘든 대륙 스케일의 사치를 부리며
놀기 만했습니다 황근의 수도 그 어느
때보다 늘어나고 국내의 수만 10만
명이라 라고 하죠 만력제가 가장
즐겼던 놀이가 국면의 환관을 죽을
때까지 구타하거나 고문하기 있다고
합니다 신하들이 말리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말리고 제발 어존 회의에
출석해 달라고 몇 번이나 호소했지만
만력제는 듣지 않았습니다 고위직
정치인들조차 황제 얼굴을 까먹고
만력제의 한심스러운 행동에 사직을
하는 신하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만력제는 신하들이 사직을 하는지도
몰랐고요 그리고 만력제의 치세는
외부적인 위기 요인들도 명나라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명나라는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요동에 거주하던 여진 족들을
통합시키기 않 토록 여진 족들의 각
부족들을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이간질하는 등 그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만력제 초기 장거정이
요동 지역으로 발령시기 이성량
때까지도 잘 이어지는 듯했으나
장거정이 탄핵당하고 만력제가 워낙에
국정이 임하지 않으니 이틈을 타 누루
아치가 여진족을 통합해 뒤 명나라와
다투며 명나라는 조금씩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는
임진 회라는 일으키죠 두투미 히디
시의 임진 회라는 그저 선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 대륙 진출까지
염두해 둔 것이기 때문에 임진 내라는
비단 조선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이 무너지면 전란이
명나라로 옮겨지기 때문에 명나라는
아직 일본군이 조선에 있을 때 차라리
조선에서 싸우는게 낫다며 조선의 구원
요청을 수락하여 명나라 원군을
파견하자 임진란 당시 명나라 원군의
파병 이유가 바로
순망치한이었습니다 입술이 없으면이가
실이라는 뜻으로 조선이 일본을 상대로
방패 마귀가 되어주니 방패 마귀가
없어지면 명나라가 곧바로 화를 입기에
조선이란 입술을 보존하는 것이
명나라의 국익이라는 뜻입니다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파병한 병력이
조선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이여송의
요동
병력이었다 4가 조선으로 이동하니까이
요동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심각하게 약해지고 이틈을 타서 누루
아치가 여진족의 세력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임진 혜란과 누르하치의
여진족 외에도 몽골 보바 이에 난
중국 서남부 귀주 성에서 일어났던
묘족 양응룡의 난 등 명나라는
끊임없이 외한에 시달렸습니다
1998년 임진 내란이 끝이 났고
표면적으로는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일본군이 패배한 듯했으나 명나라의
요동 병력은 크나큰 손실로 요동의
지배권을 사실상 누르하치에게 모두
빼앗기게 되었고 임진 해란 보바이
에난 양응룡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군사비 지출로 명나라는 심각한
적자 지장에 시달립니다 그 와중의
만력제는 명나라 몇 년치 예산을
퍼부으며 끊임없이 사치스러운 생활이
영의 있습니다 만력제는 후기 문제로도
신화자 다투었던 만력제는 후궁 전기비
총애하여 그녀 사이에서 나은 아들을
후계로 임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이 아들은 후궁의 제식이 적자가
아니며 세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엄연히
장남이 따로 있었는데 신하들은 유교식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후궁의 셋째
아들을 황태자로 삼을 수 없다고 극구
반대합니다 만력제는 장남의 황태자
책봉을 미루면서 계속 셋째 아들를
밀고 싶어 했는데 이게 바로 명나라가
조선의 광해군 세자 책봉을 인정해
주지 않은 까닭입니다 명나라 조정은
임진한 때 명민하고 유능한 모습을
보인 세자 광해군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지만 진라 후 정작 광해군의
공식적인 세자 책봉을 허락해 주지
않았는데요 광해군도 후궁 소생의 둘째
아들이잖아 조선에서 첫째 아들이 아닌
아들이 세자가 되어 왕이 된다면
만력제가 조선의 사례를 들면서 더
주장할 수가 있어서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받아들여 주지 않은 겁니다
만력제의 엄마까지 나서자 만력제는
별수 없이 장남을 황태자로 임명했고
1620년이 문제만은 만력제 사후
황태자 장남이 14대 왕제 태창제
지휘했습니다 태창제 명나라 4대 암군
중 세 번째 암군이 그요 형언할 수
없는 호색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태창제 지휘하고 10일 만에
쓰러집니다 열흘간 아주 화려한 밤을
보내고 쓰러지고 만 거죠 그리고
태창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재위
한 달 만에 사망합니다 한 가지
의심스러운게 태창제 살피던 사람이
어이가 아니라 정귀비 환관이 있다고
해요 정귀비 기억나십니까 선대 황제
만력제가 총애했던 후궁으로 원래
그녀의 아들을 황태자로 임명하다
실패했었죠아요 그래서 전기비 태창제
암살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지만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 16 120년
태창제 아들 천계제 15대 황제로
지휘합니다 천계제 명나라 마지막 4대
함군입니다 아주 뭐 만력제 태창제
천계제 삼대가 명나라를 말아먹은 거죠
천계제 글도 읽을 줄 몰랐다고 하고요
귀뚜라미 싸움 붙이고 구경하는 취미에
빠져 있었다고 하죠이 천개 자면 또
유명한게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황제판 맥가이 보였는데 목공소
씨가 천재 가까웠다고 해요 그렇지만
황제로서의 자격은 수준 미달이었다
최대 위기는 바로 요동의 누루하치
여진 족이었다 이미 만력제 재위
만년에 누르하치의 여진족은 1619년
사루 전투에서 대규의 명나라 군을
격파하여이 요동의 지배권을 완전하게
차지해 놓은 상태였죠 천계제 재위기
있던 1621년 누르하치는 심영과
요양 마저 점령합니다 이제 명나라의
그 어느 누구도 누루 아치의 여진족을
막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때
명나라의이 사람이 나타나 누루 아치를
막아냅니다 말리장성 바로 앞에
영원성이 곳이 있었습니다 명나라를
상대로 항상 승리만 거두던 누루
아치가 1626 6년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당시 영원성을 사수하던
명나라 측 사랑과는
[음악]
원숭환 원숭환 부임전 요동의 책임자는
웅정필이었습니다 웅정필 철저한 수성
주의자였는데 지금 당장의 명나라
군으로 누루 아츠의 여진족을 격파하는
건 무리니 차라리 방어에 전념을
하자는 전략이었고이는 잘 먹혀 들어서
누루 아치가 함부로 공격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다만 웅정필 함께 또
다른 요동의 책임자였던 왕하 나가
싸우자는 쪽이었고 웅정필 왕하 을
막으려고 했지만 왕하은 웅정필 허락
없이 성밖으로 나가 싸우다가
누르하치에게 대판 깨진 적이
있습니다이 패전의 책임을 으로로
웅정필 왕하 joh 모두 해임되었고
다만 왕하영 당대 권신이 있던 환간
위충현 지인이라 해임해 끝이 났고
웅정 필만 참수되었다 그리고 요동에
부임한 사람이 원숭환이 있죠 원숭환은
문신 출신임에도 군사 및 전쟁
덕후였습니다 부임 전부터 후금과의
전쟁에 늘 관심을 두고 있었고
영원성을 온 것도 자원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부임 하자마자 원숭환은
곧바로 성 보수공사에 돌입해 방어의
만전을 기했고 인맥을 총 동원에
포르투갈로부터 홍이포 아는 압도적인
활력을 가진 대포를 30분이나
구입했었죠 원숭환은 누르하치의
여진족을 반드시 말리장성 밖에서
막아야 한다고 했지만 원숭아 밑에
장교들 가운데 위충현 파들은
만리장성에서 싸우자고 주장을 했고
원숭환의 반대에도 위충현 일파들이
제멋대로 말리장성 산해관지 철수한
반면 원숭환은 끝까지 영원성에
남았습니다 영원성에 있던 원숭환의
명나라 군은 2만이 조금 안 됐고
누루 아츠의 여진족은 10만이 넘는
병력이었다 영원성의 명나라는 원숭환의
뛰어난 리더십 파이 홍이포의 막강한
위력 그 외 다양한 화기들 그리고
원숭환이 미리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방어 도구들로 누루하치 여진족의
맹공을 막아냈어 결국 누르하치는
영원성 합력을 포기하고이 충격의
후유증 때문인지 그해 누르하치가
사망합니다이 전투가 중국인들이 그토록
기념하는 영원성 전투 즉 영원
대처입니다 영원성은 오해 날의 후르
다우시 신칭 고성 있니다 누루하치
사후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여진족의
카노를 기했고 이대에 1627년
명나라에서 황제 천계제 죽고 16대
왕제 숭정제가 지휘했습니다 1627년
여진족의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공해
정묘 호란을 일으켜 조선이 명나라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화를
맺었으며 정묘호란 이후 고정
홍타이지는 아버지 누르하치가 끝내지
못한 영원성 쳐 들어갔으나 이번에도
원숭환의 수송 전에 막혀 영원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원숭환의
군사력은 더 막강해지고 있었는데요
조선의 북쪽끝 가덕도는 곳에서 옛
명나라군 장교 모물 tout이
여진족과 싸움에서 패퇴한 후 가덕도의
자리를 잡고는 가덕도에서 명나라를
지원하겠다는 명분으로 조선과
명나라로부터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그 돈으로 명 조선 여진족
사이에서 무역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역을 위해
강력한 수군을 운용하고 있었죠
모문룡은 개인의 이익만 조출뿐 명
나라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됐기에
원숭환은 모문룡의 블러그를 죽여버리고
모문룡의 수군을 그대로 흡수했습니다
원숭환은 강력한 수분마저 보유하게 된
건데요 설상 가상으로 대흉년이 들어서
후금의 여진족들이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렸어 습니다 싸움은 고사하고 당장
오늘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었죠
홍타이지는 당장의 영원성을 뚫고
말리장성 이남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당장의 식량 확보를 위해 원숭환
모르게 몽골 초원을 경유에 크게 돌아
만리장성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1629년 10월경 홍타이지의
군사들은 말리장성 새끼를 찾아내
들어왔으며 무려 베이징 코앞까지
진격하는데 너무나도 당황한 원숭환은
부랴부랴 정예병 몇 천 정도 차출해서
베이징으로가 홍타이지의 공격을
막아내긴 막아냅니다 홍타이지 몽골
초을 크게 우에서 들어온지라이
보급선의 문제가 있었고 이미 충분한
약탈을 다 해 놓은 상태여서 더 큰
싸움을 일으키지 않고 돌아갔던 거죠
베이징을 지켜낸 원숭환은 다시 한번
영웅이 되는 줄 알았으나 베이징 내
백성들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 보니까
원숭환이 무능에서 홍타이지가 베이징
바로 앞까지 왔다고 생각해 민심이
대단히 안 좋았습니다 명나라 황제
숭정제 차도 분기 탱천하여 원숭 안을
노골적으로 비난합니다 홍타이지가
여기까지 오는 걸 여태까지 몰랐던게
말이 되냐는 거죠 더불어 세력이 너무
커진 원숭환은 시기하던 반대파들이
제에게 원숭환 이간질 했고 결정적으로
홍타이지 쪽에서도 사실 우리가 원숭환
내통하고 있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립니다 화가는 숭정제는 원숭환은
아주 잔인하게 처시 이렇게 명나라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원숭환이 제거되
아니 명나라 조정은 왜 자꾸 인재들이
내치기 할까요 명나라 조정은 왜
이렇게 무능했던 걸까요 그 시작은
이놈에게 있었습니다 명나라의 환관
[음악]
위충현 명나라는 초기부터 환관들이
막강한 권한을 누리기 쉬운
구조였습니다 니다 1대황제 홍무제
주원장 때부터 황제권 강화하겠다고
승상을 없애 버리면서 재상들이 힘을
약화시켰고이 강화되면서 자연사의
황제를 보필하는 환관들의 입김이
강해졌죠 정변으로 황제가 된 영락제는
자신의 정변을 도은 환관들은 크게
중용하며 특수 초범이 정보기구 동창을
만들고 환관들 구성하였습니다 9대
황제 성화제 때는 동창에 이어 서창도
만들고 11대 황제 정덕제 때는
동창과 서창에 이어네 판도 만들면서
황금들 이루어진 특수 첩보 및 정복
이구가 무려 폐경화 됐습니다 환관들은
황제 이름을 대신할 외국사절 군대의
지휘 지방 군사기지에 대한 시찰 첩부
활동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으며 13대
황제 만력제 때는 환관들의 각
지방으로 보내 세금을 수취하는
업무까지 맡겼으니 환관들의 힘이 실로
어마어마했죠 명나라의 무능하거나
암군이 황제들 개체는 언제나 그
황제들의 눈과 귀를 가리는 권신
환관들이 존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역대급 소리를 듣는 최악의 환관이
명나라 말의 위충현 있니다 위충현
15대 황제 천기의 환관 으로 천계제
또한 명나라 4대 암군 중 하나로이
천계제 목공 취미에 전념을 하고
국정은 운영하기 싫다고 대놓고
말하면서 위충현게 모든 황제의 업무를
다
떠넘겼기 국정을 농담했고 일부
신하들이 천계제게 위충현 내진하는
상소를 올려도 천기 이제는 상소를
보지도 않았으며 위충현 바른말하는
신하들 혹은 자신에게 아부를 하지
않는 신하들을 모두 쳐내며 조정을
자신의 측근들로 가득 채워 나갔죠
사람들은 황제 위의 위충현 이라고까지
했죠 하지만 천계제 사후 후 위충현
제법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는 정제의
등극을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숭정제는 지위 후 위충현 제거하려다가
위충현이 스스로 자결을 합니다
숭정제는 위충현 시신을 흔적도 없이
찢어버립니다 위충현 죽고 없어져도
이미 명나라 조정은 무능한 사람들로
가득했죠 위충현 잔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농민들의
분노였습니다 환관들이 지방세금 수치를
담당했다고 했죠 그 사이에서 얼마나
농민들을 소탈 했겠습니까 위충현 때
환관들의 세금 착취는 이루 말할 수
없었죠 환관들의 착취를 떠나서도
명나라는 중기 때부터 비대해진
신사층에 대한 혜택을 모두 챙겨
주고이 신사층은 또 기득권을 내세우며
토지 재산을 불법적으로 견병하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고 농민들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명나라
농민들은 명나라 정부를 언젠가부터 더
이상 신임하지 않고 있었는데 신사층이
비대해지는 신사층 상급 신사와 하급
신사로 나뉩니다 명나라 정부도 하급
신사까지 다 챙겨 줄 여력이 안 되고
상급과 하급 사이에 차별과 구분이
심해지자 몰락 하급 신사들 불만을
품어 농민들을 부추기면서 폭동을
주도했습니다 신사들이 일으킨 민변이
하여 사변이 부르는데요 명나라
후기부터는 이제 신사층의 부추김이
없어도 불만을 품은 농민들 그리
군대를 조직해 민변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아까 홍타이지의 여진족이
대기근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씀드렸죠 이때의 대기근은 동아시아
전체적인 대기근이 있고 농민들의 삶에
피폐 때로 피폐해져 있었고 정말 여러
곳에서 농민 반란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습니다 숭정제는 홍승주 통해 농민
반란을 아주 강경하게 진압하면서 반란
수뇌부들의 항복을 강요했는데 거의 다
항복을 할 때 유일하게 항복하지 않은
사람이 이자성이 있습니다 이자성은
섬서성 출신의 농민이었다 그만이 계속
항전하는 1638년 동관 전투의
패전으로 진압이 되어 버립니다
숭정제는 홍순주 곧바로 청나라
전선으로 투입시켰다 EL 타 이자성이
이슬람 회족의 반란군과 도모하여
제기하였고 한때 진압되었다 농민
반란군을 다시 다 불러모아 그 규모가
자그마치 50만이 농민들은 물론 하급
신사들 몰락한 신사층 그간
중앙정부에서 밀려난 지방관들이 다
동조했고 이자성의 발람 규모는 명나라
중북부 전체를 아울렀다 순 나라의
황제를 자처합니다 1644년 이자성은
베이징으로 진격해 베이징을 함락시키다
이자성이 베이징을 함락하기 직전
충전제는 조정 신하들에게 어전 회의를
열었는데 아무 신하들도 안 왔다죠 더
이상 희망을 보지 못한 숭정제는
자금성 뒷산에 해화 나무에서 목을
매어 죽고 유원 죽어서 참마 선조들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으니 내
시신의 얼굴을 가려주고이 모든
부도덕함이 다 자신의 소행이 자기
시체만 건드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해코지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이로써
명나라가 멸망합니다 명나라 멸망이
청나라의 공격 때문이라고 아는 분들이
많은데 명나라는 이자성이 아니라는
내부 반란으로 멸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자성은 어떻게 되고 청나라는 언제
중국을 다 차지 않느냐고요 그건
청나라의 역사에서 이어집니다 그간
명나라의 역사 시리즈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역서 돋보이 있습니다
저희 역서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