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민족인데 왜 다른 나라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

지식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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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매우
특수한 관계를 형성해 온 국가입니다
두 국가 모두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은 문화적
언어적 그리고 역사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중세부터
1800년대 이르는 기간 동안엔 신성
로마 제국의 일원으로서 오래도록 같은
연합체에 속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독일권 국가인 이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로는 아주 짧은 몇몇
기간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별개의
국가로서 유지되어 왔고 이러한 분리는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하나로 연합되고 못하고 별개의 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18세기 무업 중부 유럽에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하는 정치적
연합체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국이라고 하지만 일종의 국가간
연합의 성격에 가까웠고이 제국에 속한
각 국가들은 이러한 연합체 내에서
경쟁과 협력 등 각자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경쟁의 중심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전통적 지배 세력인 오스트리아와
새롭게 부상하는 프로이센이 있었죠
특히나 프로이센은 프리드리 비렐
1세와 프리드리히 2세로 이어지는
18세기 무렵에 급격한 군사력 증강을
통해 제국내 오스트리아의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 왕위
개승 전쟁에서는 이곳 슐레지엔을
강탈하며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에 막대한
스크래치를 남겼습니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을 개찾기 해
버린 7년 전쟁에서도 프로는
슐레지엔을 끝끝내 지켜내며 성공적인
방어를 이뤄냈는데 7년 전쟁 무렵
오스트리아 인구는 약 2천만 명이었던
반면 프로이센의 인구는 약 500만
명으로서 인구수 측면에서 무려네 배나
차이가 나고 있었고 이런 인적 자원의
열쇠를 넘어선 프로이센의 승리는 주변
국가들로 하여금 큰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두 차례 전쟁으로
인해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대국으로서의
지휘를 확고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프로이센의 부상은 신성로마 제국 내
오스트리아의 지배력을 위축시키는 한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양광 체제를
형성하며 제국의 권위를 크게
감소시키는 결과를 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의 내부적 분열은 향우
불어닥칠 거대한 유협 앞에서 제국의
몰락을 앞당길 주요한 유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는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05년 당시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곳 아우스터리츠
ES 오스트리아 러시아 나군과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하며 중부 유럽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수많은 연방 국가들이 나폴레옹의 압력
속에 프랑스 주도의 새로운 라인
동맹에 대거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했을뿐만
아니라 기존부터 프로이센의 부상으로
점차 내부 분유를 맞이해 오던
신성로마 제국은이 같은 여러 공국과
도시 국가의 이탈 앞에서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할 수가 없었죠 결국
1806년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이세는
제국의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천년 이상 지속된 제국의 사는
하루 아침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나폴레옹이 패배를 맞이하고 전후
처리를 위해 소집된 빈 회의에서
39개의 독일 국가들은 기존 신성로마
제국과 프랑스의 라인 동맹을 대체할
새로운 연합인 독일 연방을 수립하며
새로운 출발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 연방은 여전히
회원국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상호
방위와 내부 질서의 틀을 제공하는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었고 진정한 독일
통합에 대한 논의는 시기상조인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제국이 주도하고 프로이센이 견제하는
양상의 독일 연방은 이미 그 시작부터
갈등의 씨앗을 을 내포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죠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독일 국가에 대한 전통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고 프로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자신의 지도로
가래에 통일된 독일을 유롭게 내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일 연방의 한계는 분명해지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중앙통치 기구의
부제와 오스트리아와 프레센 경쟁
구도는 독일 국가들의 효과적인 협력과
통합을 방해하고 있었고 특히 19세기
내내 유럽 전역에서 끌어 오르고 있던
민족주의 사상은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에 대한 야망에 점점 더 불을
잡히고 있었습니다 예 반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포지션은 약간 애매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을 주도하는 국가였지만 그들의
관심은 독일어권 국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고 이탈리아 지역과 동유럽 지역
등 비독 1 용토를 보유한
오스트리아는 다민족 제국의 성격을
뛰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독일
국가 수립보다는 과거 신성로마제국
이래로 이어져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더욱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독일 국가를 둔
양국간의 갈등은 1834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독일 국가들의
관세동맹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상대적으로 높은
산업력 보유하고 있던 프로에는
관세동맹을 통해 독일 국가들 사이에서
프로이센의 영향력을 높이는 동시에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등 경쟁 국가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통합 시도를
시작으로 프로에는 점점 더 독일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국왕을 몰아내고 자유주의
공화국을 수립한 2월 혁명이
발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의
불신은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번지기
시작했고 독일 국가들 또한이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1848년 3월부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하노버 등 수십개의 독일 국가에서
언론의 자유 국민 의회 설립 헌법
개혁 등 자유를 갈구하는 대규모 시가
벌어졌고 시민과 왕실의 격렬한 충돌
끝에 결국 자유주의 세력에 의한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가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자유주의 급진주의 보수주의
등 각 독일 국가의 다양한 세력이
의회에 소집되었고이 의회의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가 통일된 독일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이 같은
의제에서 의원들은 독일의 통일 방식에
대해서 란 논쟁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방식들이 그
유명한 대독일 주의와 소독일주의
이었죠 대독일 주의는 모든 독일
국가들과 오스트리아 제국까지 포괄하는
통일한이었고 소독일 주의는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독일 국가만을
인정하는 통일한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독일 주의는 그 안에서도 오스트리아
전체를 포함해야 한다 오스트리아의
독일로 권만을 포함해야 한다 등등
다양한 의견이 난립하며 격렬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오랜 논쟁
끝에 오스트리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국민 의원은 프로이센을
주도로 한 소독일 주의를 바탕으로
하되 그 대신 오스트리아의 독일어권
영토의 독일 가입 가능성을 남겨 두는
것으로 헌법 초안을 작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1848년
말에 접어들며 대부분의 독일
국가들에서 왕실이 다시금 권력을
되찾고 있었고 다양한 사상을 가진
의원들 간의 분열은 의회의 권력
악화를 가속해 나가고 있었습니다이
드메인 1849년 3월에 의회는
프로이센의 국왕인 프리드리 비름
4세에게 독일 제국의 왕관을
제한했으나 당시 국왕은 전통적인
군주제 질서를 먹칠하고 있는 혁명
세력을 안이쁘게 바라보고 있었고 이미
의회의 권력 또한 유명무실해 있었기
때문에이 같은 불쾌한 왕관을 거부해
버렸습니다 결국 의회의 분열과 각
군주들의 권력 강화 속에서 혁명은
동력을 잃어버렸고 프랑크프르트 국민
의회는 1849년 5월 30일을
해체되는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국민 의회에서 벌어졌던 독일 통일
문제만큼은 여전히 독일 국가들의 깊은
염원으로 남아 있었고 그리고 이러한
염원은 1860년대에 접어들며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강력한 지도력과 교소를 겸비한 인물
오토폰 비스마르크가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임명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비스마르크는
얼마 전 크림전쟁 과정에서
오스트리아가 애매하고 소극적인 외교
행위를 버려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 양측 모두에게 불신을 당하고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상황을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우선 1864년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스 덴마크를
상대로 전쟁을 버려 슐레 스비 이와
홀슈타인은 양도받아 나눠가지게
되었는데 지도에서 보이다시피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로 터 완전히
단절된 영토였고 비스마르크는 바로이
같은 맹점을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드는 두 점제
대한 통치 방식으로 치열한 갈등을
버리고 있었고 비스마르크는 홀슈타인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재정적인 지원을
이어나가며 오스트리아의 심기를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와 접촉하여
오스트리아의 대항한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고 당시 영토 일부가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있던 이탈리아는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제한을 즉각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이 같은 동맹
사실이 유출된 이후 양쪽으로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 내에서
포레 센의 대항할 세력을 결집해
나가기 시작했고 양국간의 갈등은 더
이상 대화나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1866년
6월 14일 오스트리아와 프로의 생
간의 전쟁이 발발한 것이었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프로의 생 고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우월한 전술과
조직력 그리고 최신식 열차와 신식
무기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지속적인 승리를 검어지고 있었고
그나마 오스트리아가 손을 벌려 볼
만한 열강들은 이미 크림 전쟁에 대한
배신감으로 외면할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양측 사이에서 균형자 자처하며 간제
비지를 하고 있던 프랑스가 7월 초에
뒤늦게 오스트리아 편을 들며 전쟁에
뛰어들고자 했으나 파죽 시세로 우스라
군을 도려내는 프레 생굴을 바라보며
결국 전쟁 참전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쟁은 단 7주 만에
프로이센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이로
인해 본 전쟁은 7주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로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던 독일 연방은 즉각 해체되었고
이후 오스트리아는 독일 국가에 대한
모든 주도권을 프로이센에게 넘겨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편에 서거나 중립을 지켰던
여러 독일 국가들을 합병하며 영토를
넓혔으며 이드는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 국가들을 배제한 북독일 연방을
새롭게 창설하며 독일 통일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반면 프레
생과 이탈리아에게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분열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고 결국 1867년 헝가리와의
정치적 타입을 통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으로 새롭게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독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이후 프로이스 불과 3년
만에 프랑스와 전쟁을 버려 프랑스로
하여금 수도인 파리까지 함락 당하게
하는 대굴욕을 선사했고 이에 한 술
더 떠 베르사의 궁전에서 독일제국
수립을 선포하며 강력한 열강의 출연을
대대적으로 알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프로이스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독일
국가들의 통일 과압을 완수했고이
시점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완전히
별개의 국가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시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오스트리아의 광범위한 지역은 독일어
권으로 독일 제국과 문화적으로 공통된
유산을 공유하고 있었고 결국 과거에
수많은 대립에도 불구하고 두 국가는
상호 동맹까지 맺어가며 긴밀한 관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수십년 뒤
양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사이좋게
연합국을 상대로 싸우게 되었고 전쟁의
결과 두 국가 모두 사회 좋게 제국이
붕괴되는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전쟁
이후 연합국은 강력한 독일 국가의
출연을 방지하기 위해서 조약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나섰죠 그러나 대부분의
용토를 상실하고 독일어권 지역만 남게
된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다민족 제국이 아니었고 필연적으로
더욱더 독일의 동질감을 느끼며 국가
통합을 선호하는 정서가 확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극심한 경제난을 겪던
전광기 동안 크게 확산되었고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인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총통으로 등극하며
더욱 폭발적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 나치 단과 앞세
오스트리아로 군대를 끌고 들어갔고
국가 합병을 반대하던 기존 오스트리아
정보를 몰아내고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며 통일된
독일 제국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의 9월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것이었죠 이후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며 연합국은 양차 대전과 같은
비극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서 독일에게
더욱 강력하고 극단적인 처벌을
내리고자 했고 그렇게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비무장화 되어 연합국이
의해서 사이좋게 분할되는 최우를
맞이했습니다 이후 독일은 1949년에
각각 서독과 동독으로 새롭게 출범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6년이 지난
1955년에 이르렀어요 연합 곡들과
독립을 위한 조약을 맺게 되었고 이때
오스트리아는 다시는 독일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고
영구적으로 중립국으로 남을 것을
선언하며 간신이 독립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과의 합병과 이로 인한
전쟁의 경험은 오스트리아 국민들로
하여금 독일과의 통일을 경계하게
만드는 유산을 남기도록 하였고 이들은
점점 독일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 의식
즉 오스트리아 인이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확립하며 중립국 오스트리아의
발전을 이어 나갔습니다 이후 독일의
재통일 냉전의 종식 유럽연합 수립
그리고 오늘날 21세기 이르기까지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서로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채 역사를 형성해 왔고
이렇게 한국은 언어는 동일하지만 각각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이민 되었습니다 한편 과거에
여러 조약들을 떠나서 오늘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에 대해서 양측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고자
코라나 레딧 등 다양한 의견공유
커뮤니티에서 많은 글들을 찾아보며
하나하나 읽어 보았습니다 대부분은
연합에 대해서 별 심이 없었으며 그
이유는 물론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참사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양국 국민들이 유럽 연합이라는 틀
안에서 이미 상품및 서비스 등
자유무역을 누리고 있고 교통 여행
측면에서도 열린 국경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동일한 화폐를
사용하는 등 일상적인 영역에서는 이미
충분한 통합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 국민의
입장에선 굳이 인구가 열배나 많은
독일과 합병하여 정치적 목소리를 잃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또한 합병으로
인해 중립국 지혜를 저버리고 나토에
가입하면 불필요하게 국제정치적 갈등이
휩쓸 수 있다는 것 독일과의
합병을리는 이유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자 이것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에 관한 영상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식한잔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