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또 왜 미국 땅일까?

지식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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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을 살펴보면이
포인트 로버츠 man 덩그러니 미국의
영토로 정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투아 센도 끝자락에 자리잡고
캐나다에서 육로로 접근할 수 있는이
작은 땅은 어떻게 선으로 그은 듯
잘려서 미국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일까요이 의문을 풀어내기 위해선
과거 영국과 미국이 치열하게 버렸던
영토 분쟁과 협상에 대해서 하나하나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때는 19세기 초반 당시
비보나 수달의 가족으로 만들어진
모자는이 동물들의 멸종 위기로 이어질
정도로 유럽에서 대히트를 치고
있었습니다이 모 호자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져 유럽의 귀족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필수품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마침 미국과 영국이 인접한
지역은 값비싼 모피를 제공해 주는
비버 수달 담비의 동물이 대규모로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영국과
미국은 모피를 팔아서 유럽으로부터
고품질의 총기 금속 직무를 북미로
들어오고자 했고이는 결국 미국과
영국간 주도권 다툼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이 지역의 모피 산업은
영국의 노스 웨스트 컴퍼니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에 미국의 사업가들은
1811년 컬럼비아강 하구의 교역소를
차려 국의 지배력에 도전하고자
하였습니다이시기 모피 무역을 둘러싼
경쟁 속에서 양측은 상대 회사의
스파이를 보내거나 원주민 동맹을
활용하고 모피 확보를 위해서 상대측
영토를 침입하는 등 공격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리건 지역에서의 지배력 다툼이
한참이던 와중 1812년 미국과
영국간 전쟁이 발발합니다 당시 영국은
타병 체포하겠다는 명목으로 미국의
상선의 강제로 승선하여 영국 타병
의심되는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행위를 버리고 있었는데 문제는이
과정에서 순수한 미국 시민들이
끌려가는 경우 경도 많았다는 것이었고
애초에 남해 국가 선박의 강제로
쳐들어와서 사람을 데려가는 행위
자체가 심각한 주권 치해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미국은 영국의 행위에
맹렬히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와 한창 나폴레옹 전쟁을 벌리고
있던 영국은 프랑스의 교역을 막기
위해서 다른 국가들을 향해 프랑스로
가려면 먼저 영국의 한국로 와서
허가부터 받고 세금까지 내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로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당시 미국의 경제는 무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영국의
강압적 조치는 당연히 미국의 불만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북미
대륙에서도 미국 은 영국이
원주민들에게 무게와 자원을 제공하며
미국에 대항하게 만든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고 이렇게 상선 침입
무역 통제 적대적 원주민 지원 등
마치 그들의 식민지 다루 듯하는
영국의 행위에 분노하던 미국은
전쟁으로 영토 확장까지 노려보자는
여론까지 더해지며 1812년 6월
18일 결국 영국에게 선전 포고를
감행합니다 전쟁은 백악관까지 불탈
정도로 2년 동안 치열하게
벌어졌는데이 같은 유열 사태의 결과
양국은 서로 간의 대립이 결국 양측
모두의 손해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후 상호발전 을 위해서
평화와 공존을 이어나가는 것이
자신들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쟁
이전 상태로 국경을 보관하는
1814년 겐트 조약 상후 오디오에서
해군 군비를 제한하는 1817년 러쉬
바오트 조약 등 전쟁 이후 양국은
그간 애매하게 남겨왔던 영역에
하나하나 규칙을 정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18년에
조약에서 양측은 본격적으로 영미
양국의 국경을 조율하기 시작하였고이
과정에서 로키 3매까지 국경을 부위
49도 선으로 설정하는데 합의하였으나
문제는 이곳 오리건 지역 지이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무역상들이 한창 목표를
둘러싼 경쟁을 이어가던이 오리건
지역은 양국 모두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오리건 지역도 그냥 국기
49도 선을 기준으로 국경을 그어
버리자고 제안했지만 이미 노스웨스트
컴퍼니를 통해 모피 무역에서 미국의
회사보다 상당히 우유를 점하고 있던
영국은이 같은 제한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곳 콜럼비아 강 유역은
비버 수달 단비 등 모피 공급원이
풍부하게 서식하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컬럼비아 강으로부터 태평양까지
이어지는 직항로 영국이 모피를
효율적으로 수 라는데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오리건 지역은 모피
무역상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개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고 이렇게
인구밀도가 낮은 변두리 지역에
대해서는 어느 한 국가가 배타적
지배권을 주장하기 애매했기 때문에
결국 양국은 논쟁 끝에 오리건 지역을
공동 점유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국과
미국의 오리건 공동 점유가 시작된
직후 영국의 회사는 본격적으로이
지역의 모피 시장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영국은 유열
충돌까지 버리고 있던 자국 회사들의
합 을 추진하여 허드슨베이 컴퍼니라는
단일된 회사로서 효율적인 사업 추진을
가능케 했으며 한편으론 우리건 지역의
동물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이는
의도적으로 모피의 공급 과잉을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모피의 수익성
악화가 발생하고 자본력과 인프라
그리고 결속력 아지 부족했던 미국의
모피 상인들은 허드슨베이 컴퍼니와
치킨 게임에서 대부분 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영국은 오리건
공동 점유하는 합법적 경쟁 아래에서
미국을 물리치고 사실상의 모피 독점
체제를 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820년대 동안 회사에 막 대한
수익을 가져다 주었던 모피 산업은
1830년대에 접어들며 서서히
하락세를 맞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전 세계적인 모피 수요와 더불어 미국
상인들과의 경쟁으로 인한 무차별적인
동물 포획은 비보나 수달 등 동물의
씨을 마르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회사의 모피 수급량을 갈수록 줄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유럽에서도 비단 모자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기 시작하고 이것이
점차 비버 모자를 대체해 나가면서
오리건에서 모피 무역은 갈수록 쇠퇴를
맞이해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1840년대 북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미국의 확장은 우리들의 명백한
운명이다 이처럼 미국인들은 명백한
운명론을 내세우며 서부 개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1840년대에
들어서며 수천명의 개척민들은 비옥한
농토와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오리건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사막과
산과 대초원을 뚫고 대규모 위주를
감행했고 이렇게 우리건 지역은 야망이
넘치는 미국인 개척민들이 인해 매년
수백명의 인구 유입을 이뤄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압도적인
인구를 앞세 미국인들이 오리건 내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영향력 증대로 인해 미국 정부는
오리건 지역에 대한 영미 공동 점유를
철회하고 독자적인 영토로서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한편
영국도 오리건 지역의 분위기가
변해감을 서서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물론 쇠퇴에 가는 산업이었다 ba
무역은 여전히 회사에 상당한 수익을
가져다주고 있었고 태평양과 연결된
컬럼비아 강은 영국의 효율적인 물품
수송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미친듯이
몰려드는 미국인들 앞에서 영국 당국은
물리적 충돌 없이는 더 이상 오리건
지역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또이 지역이
군사력을 무리하게 투입할 정도로 중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국 입장에서는 미국과
대립하는 것보다는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북미 식민지를
안전하게 유지하는데 훨씬 더 싸게
먹히는 것이었죠 결국 1846년 이의
관계가 맞아 떨어진 영미 왕국은
로키산맥 조재 해협에 이르는 지역을
북이 49도선 기준으로 분할하여 나눠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점은 도대체
영토확장 과정에서이 포인트
로버츠라디오 는 것입니다 더 나은
대안은 없었던 것일까요 사실이 같은
일이 발생한 가장 큰 원인은 당시
영국과 미국 모두이 지역에 대한
세부적인 질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측량 기술과
도구의 부족으로 인해 당시 협상가들은
영태 이곳저곳을 상세하게 따지에
다투기보다는 그저 49도선 기준으로
영토를 분할하는 것이 가장 평화롭고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북이 49도선 아주 살짝 빠져나온이
포인트 로버츠는 양국간의 평화를 위한
의도치 않은 희생양이 되어 버렸고
포인트 로버츠가 미국의 영토라는
사실은 향후 국 위원회가 정확한
국경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밝혀진 이후로도이 지역에 대한 양국의
별다른 협상은 부재했던 그 이유는
양국 모두이 작고 사소한 지역 때문에
굳이 테이블에 앉아서 얼굴 불쾌하며
영토 재조정을 논의하는 것이
비율적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굳이 머리 아프게이
지역의 소유권을 논의하는 것보다는
해당 지역의 국경 통과 간소화 별도의
우편 서비스 제공 등이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는 것이
문제 해결을 위한 더 효율적인
접근이라고 판단한 것이었죠 그러나
이렇게 홀로 캐나다와 붙어 있는
지형으로 인해 지역민들은 역사적으로
여러 불편을 겪어 오기도 했습니다
1973년 포인트 로버츠의 가뭄이
발생했을 때 지역 주민들은 미국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미국과 캐나다간 협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한동안 물부족이 허덕이기
했으며 2020년에 코로나 사태
등으로 국경이 폐쇄되었을 때도 정부간
협상 타결 전까지 지역 주민들은
한동안 포인트 로버츠의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포인트 로버츠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여러 독특한
문제를 겪기도 했지만 양국간의 협력과
지역 커뮤니티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일상을 영의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와 치 포인트 로버츠의
사례는 국경이 단순히 나라를 구분
짓는 선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지식한 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