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 중 이른 죽음이 가장 아쉬운 조선의 국왕 헌종, 안동 김씨 vs 풍양 조씨 조선 최악의 암흑기 세도정치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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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악의 암흑기 세도정치 4부. 이른 죽음이 가장 아쉬운 조선의 국왕, 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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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도포입니다 조선
최악의 암흑기였던 세도정치의 역사
부입니다
1834년 순조 사 후 순조의
손자이자 죽은 효명세자의 아들이었던
헌종이 여덟 살이라는 최연소의 나이로
즐겨했습니다 헌종의 할머니 즉 순조의
아내였던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 청정을
6 7년 정도 맡았고 왕실 최고
어른이자 수렴 청정을 맡은 순원
왕우가 안동 김 씨이 안동 김씨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지다 심지어 헌종이
11살 때 결혼한 새로운 왕비 효현
왕후 안동김 씨였고 하지만 안동김씨를
벼르고 있던 집안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안동김씨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집안 바로 헌종의 외가이자 죽은
효명세자의 처하였던 풍양조 씨였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안동김 씨와 풍양조
씨가 대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기
안동 김씨는 순원 왕후를 필두로 풍양
조씨 가문도 반남 박씨처럼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려고 했죠 순원 왕후
김씨는 수렴 청정을 시작하곤 곧바로
죽은 자신의 외 아들이었던 효명
세자에게 익종이 아는 묘호를 내리며
의 등급으로 추었습니다 이에 남편의
이른 죽음으로 왕비 한번 되어보지
못했던 효명세자의 아내도 행정상으로
왕의 부인 자기를 받게 되었고 헌종의
어머니로서 왕 대비로도 인정받을 수
있었죠 그녀가 신종 왕우 조씨 있니다
신종 왕우의 집안이 바로 풍양조
씨였고 신종 왕우 왕비로서 그리고
왕대비 조우가 하사된만큼 풍양 조씨도
강력한 외척이 되었고 순원 왕우
며느리 집안의 조만형 조인형 등을
요지에 등용하면 풍양조 씨도 세도
가문으로 거듭났습니다
[음악]
헌종 5년이었다 1839년 서양인
선교사들이 활기를 치고 다닌다는
정보에 조선 조중의 비변사는 천주교
신자 조사 및 체포를 엄중하게
지시했습니다 척사 윤음 서양의 외래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다 유흥을
내리면서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10개월간 119명이 순교하였고이
중엔 조선 최초의 신부였던 김대건의
스승 피에르 모방 신부도 있었고
김대건의 아버지도 있었습니다이 사건이
기해
박해입니까 양반들도 끼어 있었는데이
양반들이 대부분 안동김 씨의 주루
되고 있던 양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이
기회 박해를 가장 주도했던 건 풍양
조씨와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는
사람들이었죠 즉 기해 바퀴는 안동김
씨에 대한 풍양 조씨의 선방이 있으며
두 세도가문 대결의 전조와 같은
사건이었죠 그렇다면 기해 바게 때 왜
안동김 씨는 반격에 나서거나 대응을
하지 않았던 걸까요 풍양조 씨가
서서히 안동김 씨의 11를 걸어올
시점에 안동김 씨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순조 말 안동김
씨의 세도 장치를 시작했던 김조순이
이후 안동김 씨를 이끌던 건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김효근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고 딱 기해박해가 이루어진 시점에
김근은 중풍으로 실어 증까지 앓고
있었습니다 끝내 1840년 김근은
사망하 김효근의 뒤를 이어 안동김
씨를 이끈 건 김군의 동생
김좌근이었습니다 김좌근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건 헌종 제위 이후였습니다
역시나 실세 가은 소속 답게 이제 갓
관직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4년 만에
판서 중에 최고봉인 이조 판서까지
승진했던 김정은을 비롯한 안동김 씨에
다시금 조정 요직에 자신의 일파
사람들을 안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헌종은 점점 나이를 먹고 있었기에
조만간 헌종이 충분한 나이가 되면
순원 왕우의 수렴 청정은 끝이 날
것이고 딱 봐도 풍양 조씨가 그때를
노리는 것 같아 김주아 그은
안동김씨에 반하는 세력들을 하나 둘
탄핵하기 시작했죠 안동김 씨에 의해
탄핵된 신하들은 대부분 풍양 조씨와
어떤 식으로라도 연결이 되어 있었고
영의정이었던 조인형 반강제적으로
영의정에 사직해야 만 했습니다
1840년 12월 순원 는 수렴 청전
끝을 선언했고 이대에 1841년부터
헌종은 15살의 나이로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헌종은 대왕 문종
10대왕 연산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꽃미남 국왕으로 조선왕족 실력의
기록에는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교 나오는 것
같다고 적혀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정식 기록은 아닌 야사이 궁궐의
상궁들의 나인들이 어떻게든 헌종 얼굴
보려고 일부러 인근을 지나가 눈에
뛰려고 했다죠 헌종은 친정을 시작한
이후 우선 구형의 각 대장들을 안동김
씨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로 전부
교체했습니다 1843년에 안동김씨
집안의 왕비 효현 왕후 김씨 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안동 김 씨의
위세는 그 이전에 비해 정말
추락하였고
1844년에 과거에 사직했다 작은
할아버지 조인 형을 다시 영의정으로
불러드렸습니다 왕비가 죽고 없었던
헌종은 1844년 효정왕후 홍시라
새로운 왕비를 간택해 드립니다 안동
김씨 가문의 여인이 아니라는 것만
봐도 확실히 안동 김 씨가 이전만큼
권력을 독점하지 못했다 다는 뜻이겠죠
아 울로 몇 년에 걸쳐 헌종은
대부분이 안동 김씨지지 세력이었던
감찰기관 인사 구성을 물가리 했으며
추사 김정희 등 반 안동김 씨 파들을
사면하고 등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헌종은 안동김 씨 세력에 공격할
기회가 생깁니다 안동김 씨 일파 중에
천주교 신자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래서
헌종 제위 초에 일어났던 기회 밖에도
안동김 씨 세력에 타격을 주었죠
1845년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
최초의 신부로 임명된 김대건 신부가
조선으로 귀국하여 포교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심지어 김대건 신부는
황해도 서해 안에서 해외 선교사들이
조선에 미리 입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죠 1846년 헌종과
풍양조 씨가 같이 박해를 일으키니이
사건이 병호 박해입니까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김대건 신부와 함께 현성문화인쇄사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탄압 범이는 훨씬 넓어지며
안동 김씨 사역들도 일부 연루가
되었고 안동 김씨의 위세는 확
꺾입니다 김근도 설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풍양 조씨의 정권이
수립되었던 걸까요 헌종이 친정을
시작하고 풍양 조씨를 통해 안동김씨를
제외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옛 안동김 씨처럼 풍양조
씨의 세상에 온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헌종은 풍양조 씨에게 막강한 권력을
밀어주는 쪽도 아니었습니다 헌종이
원했던 건 왕권 강화 선대왕의 순조
때처럼 특정 가문의 권력이 독점되어
왕이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는 것이
목표였기에 헌종은 풍양 조씨도 안동김
씨처럼 되지 않게 하기 위해 풍양
조씨를 철저하게 제외했습니다 그래서
망화 조선왕족 실력을 그린 박시백
화백도 헌종 재위기 정치 구조는 안동
김씨 세력이 확 꺾였다 그나 풍양
조씨의 정권이 수립되었고 뭐 이런게
아니라 그저 두 가문의 균형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젊은 나이임에도 헌종이 노련한 조정
대신 대를 상대로 안동김 씨의 독주를
맡고 세력 균형을 맞췄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대단한 영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죠 헌종은 네살 때 아버지
효명세자가 죽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는데 어느 한 신하가 헌종게
효명세자의 어진을 보여주면서 용모가
빼닮았다고 하자 헌종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도 있을만큼 헌종은
아버지에 대한 계승 정신도 남달랐던
듯
[음악]
보입니다 이렇게 헌종은 젊은 나이에
안동 김씨를 몰라하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왕권 강화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
하나가 헌종 겐 없었습니다 바로 후사
있죠 헌종은 왕비였던 효정 왕우 홍
씨보다 경빈 김씨라는 후궁을 더
사랑했습니다 두사 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들이 야사에서 전소로 나마 많이
전해지 보 있습니다 오죽 사랑했으면
헌종은 더 가까이에서 경빈 김씨를
자주 보고 싶다며 창덕궁 안에 낙선
제라는 한옥 별채를 짓고는 본인이
그곳에 기거하고 그 바로 옆에
석복헌과 수강제 만들어 주어 그곳에서
경빈 김씨가 기거 하도록 하였죠
이토록 두 사람 사이는 애틋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아이가 없었습니다 하루빨리
후사를 두고 세자로 정해야 왕권이
완성될 수 있는 마당에 급해진 헌종은
녹용 단귀 숙지황 등 정력의 좋다는
한약재들을 수소문하고 다녔습니다 이게
과학적인는 잘 모르겠는데 사슴이 매우
음란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수컷 한
마리가 정말 많은 컷들과 교미를
한다고 하는데 여러 암컷 사슴들 한
번에 많은 짝짓기를 하는 수사슴의
녹용을 끓여먹으면 정력이 좋다는
소문에 녹용을 수천 첩이나 먹었다죠
새끼를 품은 암컷 돼지의 배를 바로
갈라 나온 돼지들을 끓여 먹기도 했고
해남의 진양주 그렇게 정력이 좋다며
뭐 이런 약주도 많이 마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약도 좋다고 무작정 많이
먹으면 몸에 무리가 있는 거 아시죠
헌종이 그랬습니다 정력에 좋다고만
하면 그냥 의심없이 먹어 되니까
한약의 과도한 복용으로 어느 순간부터
헌종이 급성 위험에 시름시름 앓다가
1849년 헌종은 제위 15년 만에
겨우 23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효명세자와 같은
나이에 사망했죠 헌종의 낙선재는 비단
헌종의 러브 스토리만 담긴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문인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헌종은 문인들을 자주
낙선재로 불러 학문적 예술적 교류를
했답니다 원헌 고해는 헌종이 직접
지은 시와 직접 작사작곡한 작품들도
있을 뿐더러 낙선재 뒤편에 승화루
아고 헌종 개인 소장 창고를 만들어
책과 서화 수준 높은 인장들을
수집했다고 합니다 헌종이 모았던
인장의 숫자가 500점이 넘었다고
하며 현재 남아 있는 190점이 국립
고공 박물관에 있죠 기록에 의하면
헌종이 이곳 승하 루에 모은
소장품들은 910점
4555m이라고 합니다 청나라와
조선의 고전들과 더불어 위대한
문인들의 문집 당시의 신간 서적들
653 종에 이르는 서화 중국 역대
명화가의 작품들 김홍도와 겸제 정선의
작품들 역대 조선 임금들의 글씨
안평대군 한석봉 추사 김정희 등의
명필들의 어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이
모든 컬렉션들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기록에서는 헌종의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평소에 실속 있는 것에 힘
쓰려고 스스로 노력하셨다 실사 구이라
말을 사랑하여 늘 좌우에 걸어두고
경계하고 반성하는 뜻을 붙이셨다
성품이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평상복은 무명이나 모시 옷에
지나지 않았다 평소에 서화를 사랑하여
고금의 명가들이 이들을 다 내부에
모아 두시 금서의 유문 고증하여
역사에 누락된 것을 보완하고
정정하셨던 그리고 서해에 있어서
전서와에서는 오묘한 경지에까지
이르셨다 헌종 사 후 헌종이 겨우
맞추 놓았던 세력 균형은 이제 어떻게
될까요 참고로 헌종 지세 때 중국
청나라는 아편 전쟁을 겪고 난징
조약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였습니다
그럼 역서 돋보기 있습니다 저희 역서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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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