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왕을 왕이라고 부리지 않던 시대, 신라 초기 최고 지도자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 이사금, 마립간 시대 한번에 몰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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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이사금,마립간 시대의 역사 통합본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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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6세기경 22대왕의 지증왕 때부터 공식적으로 왕이라는 왕호를 사용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거서관, 차청, 이사금, 마립관이라는 신라만의 독재적인
칭호를 사용했는데요.
이 중 거서관은 제사장이란 뜻으로 신라의 시조인 박혁것의 한 명,
차청은 역시 제사장과 비슷한 뜻을 가졌으며 2대 군주였던 남해 한
명입니다.
3대 군주부터는 이사금이란 칭호를 썼는데요.
신라의 이사금 시대에는 총 14명의 이사금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14명은 누구였고 어떤 역사를 만들었는지 신라 이사금
시대 총정리 들어갑니다.
우선 이사금이란 뜻부터 알아야 겠죠.
이사금이란 이가 많은 사람을 의미 합니다.
2대 군주 남해 차청은 사위였던 석탈에게 양의를 하려고 했으나
석탈아는 한사코 거절하면서 남해 차청의 아들이었던 유리에게 양보
하기로 합니다.
유리 역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석탈 에게 양보하려고 하자 두 사람은
누가 더 이가 많은지를 두고 이가 더 많은 사람이 보위를 입기로
하였는데 유리가 이가 더 많자 3대 유리 이사금으로 직위했죠.
당시에는 이가 더 많으면 나이가 많고 삶의 지혜가 더 많다고 인식
했다고 합니다.
이래서 최초의 이사금이 등장했는데 참고로 이사금이 후임금의 어원
이 되는 용어랍니다.
신라라는 나라는 6개의 촌이 모여 만든 나라죠.
유리 이사금은 신라를 권극했던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 6촌에 각각 이씨 최씨 정씨 손씨 설씨 배씨성을 하사하였고
이들은 신라 지배층 귀족의 핵심 세력이 됩니다.
유리 이사금 하면 유명한 것이 한가위죠.
유리 이사금 때 6촌의 분여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사모로 만든 옷
만들기 대결을 했는데 지는 쪽이 연회에 전액을 부담하기로 하는
대결에서 한가위가 유래했다고 합니다.
유리 이사금 서후 유리 이사금은 아버지의 유지대로 다음 군주는
석타래에게 양위했습니다.
이래서 타래 이사금이 4대 군주로 직위하였고 타래 이사금은 최초의
석씨 이사금으로 타래 이사금이 직위하면서 신라에는 사위에게
양위하는 관습이 생겨납니다.
타래가 어디 출신인지는 설마 분분한데요.
석타래는 유명한 대장장이었다고 합니다.
석타래는 철재련 부족을 이끌던 부족장으로 가야국의 김수로 집단과의
경쟁에서 밀려 신라로 유입되었는데 아마 울산 지역의 철재련 부족
출신으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타래 이사금 재휠기에는 김할지 설화가 전해지는데요.
계림이란 숲에서 금상자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서 김할지가 탄생했습니다.
이러한 설화를 가지고 있다는 건 외지 집단이었던 김할지의 세력이
신라로 편입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징하는데요.
김할지의 세력이 어디 출신인가 를 두고 북방 유목민족이라는
아마 김씨 세력은 진한 지역 소백산맥 인근에 있던 부족으로 백제이 성장
에 밀려 신라로 들어왔다는 설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오대군주 파사이사금은 유리이사 금의 조카로 유리이사금의 아들을
제치고 오대군주를 직위하였습니다.
다시 박씨로 돌아온거죠.
파사이사금은 대구 창령 합천 울진 강사 3척으로 신라의 영토를 확정
하여 신라의 국력을 키워놓아 지난 소국들 중에서는 가장 강한 국가
로 발돋움시키기도 했습니다.
6대 군주는 지마이사금으로 오대 파사이사금의 아들입니다.
신라는 초기에는 가야와 자주 다투 었는데 파사이사금 때 신라의 영향력
이 커진 뒤로 지마이사금 때까지 가야와의 투쟁이 더욱 격렬해집니다.
가야는 고대국가로 넘어가지 못한 연맹왕국이었기에 당연히 신라가
가야보다 큰 나라로 인식하지만 이때까지 말해도 신라도 중앙집권
하를 하지 못한 연맹왕국이었던 만큼 아직은 가야가 신라보다 더
강한 나라였을 때죠.
7대는 일성이사금으로 일성이사금 이 누구의 아들인지 기록마다 다
일성이사금은 죽은 왕족 바가도 를 갈문왕으로 봉하여 왕에 준하는
자기를 내렸는데 그래서 일성이사금 은 왕이 되지 못한 왕족 바가도의
아들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지만 둘 사이에 시차도 꽤 나가기에 정확하진
않답니다.
다만 8대 아달라이사금이 6대 지마이사금의 아들이고 두 부자 사이에 7대
일성이사금이 끼어든게 뭔가 수상 적긴 하죠.
8대 군주 아달라이사금이 마지막 박씨의 이사금입니다.
삼국서기에는 왜 아달라이사금의 끝으로 박씨 군주가 더이상 배출되지
않았는지 자세한 설명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다만 아달라이사금 시절 김할지 의 5대손 김구도를 신라의 네번째
관댕인 파진찬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할지 이후 정식 역사에서 김씨 사력의 최초로 신라 정치계 핵심
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는 기록 인데 신라의 이사금을 두고 박씨
와 석씨가 대립하는 구도 속에서 석씨가 김씨와 연합해 박씨를 정치
적으로 견제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아달라이사금 제위기 연호랑 세후녀 부부설어가
전해지고 있는데요.
포항의 어부였던 연호랑이 우연히 움직이는 바위에 올라타더니 바위
가 연호랑을 일본까지 데려가 버렸고 연호랑이 도착한 일본지역에서
왕으로 군림했다는 설화입니다.
한편 남편 연호랑을 찾으러 갔던 아내 세후녀도 똑같이 바위에 올라
타곤 남편이 있는 일본지역에 도착해 왕비가 되었다고 하죠.
재미있는건 일본신화에서도 스사노의 이지모쿠니 건국신화라든지 혹은
이지노쿠니 신화라든지 신라의 이주집단이 일본지방의 나라를
건설했다는 신화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설화 속 연호랑과 세후녀가 석씨와 김씨 연합에 쫓겨난 박씨의 망명
집단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습니다.
다만 연호랑과 세후녀의 이야기는 서기 157년 아달라이사금 제위기
4년째에 일어난 일로 이후로도 아달라이사금은 20년이나 넘게 집권했기에 설득력이
다소 부족하긴 하지만 아달라이사금 제위 초반부터 다른 박씨 왕족들이
탄압을 받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도 해석해 볼 수는 있죠.
아달라이사금을 내쫓고 9대 버류이사금 때부터 12대 첨회이사금까지 석씨
세력이 이사금을 세습했습니다.
9대 버류이사금이 석탈의 손자죠.
버류이사금의 아내가 김씨인 걸로 보아 석씨와 김씨의 연합은 거의
확실시되는 것으로 보이죠.
10대는 내예이사금으로 버류이사금의 손자입니다.
내예이사금 시절 포상팔국 즉 해안가에 있던 8개의 소국이 연합하여 가야를
공격했는데 이때 신라군이 가야를 지원하여 포상팔국의 연합군을
무찔러준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3세기에 일어났던 포상팔국의 난인데요.
이때 포상팔국이 공격했다는 가야가 어느 나라였는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본 뒤 가야라함은 김해에 있던 금광가야를 가리키지만 여러 정황상 포상팔국
이 공격한 국가는 하만에 있던 아라가야였다고 한 주장이 더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아라가야라는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고 이 국가의 원래
국가명은 알라국입니다.
이만큼 3세기 신라는 명실상부 경상도 권역에선 가장 강한 강대국으로
볼 수 있으며 포상팔국의 난을 기점으로 서서히 신라의 국력이
가야를 앞지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1대 조분이사금은 10대 내예이사금의 사촌형제입니다.
조분이사금은 오늘날 경북 김천과 영천까지 진출하였는데 두 지역에
있던 감문국과 골벌국을 정벌할 때 나선 신라명장이 왕족 서구로였습니다.
12대 첨혜이사금은 11대 조분이사금의 동생입니다.
이맘때쯤 신라의 명장 서구로의 입지가 아주 대단했는데요.
여러 정벌전에서 활약했던 서구로 였기에 군권을 쥐고 있었으며 백성
전제 군주제에선 군주보다 신화가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면 군주가
그 신화를 그냥 냅두지 않죠.
253년 서구로가 신라를 방문한 일본의 사신에게 조만간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능멸했는데
서구로의 능멸에 분노한 외왕이 신라를 침략한 적이 있었습니다.
서구로는 첨혜이사금에게 자신의 실언으로 일어난 잔쟁인 만큼 본인이
수습하겠다며 외군 진영을 찾아가 강화로 잘 마무리할 계획이었으나
서구로에게 일을 바득바득 깔던 일본군 장수는 서구로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화형 시켜 죽여버렸습니다.
서구로가 잘한 건 없지만 그래도 사신의 신분으로 적진을 방문한
외국 고위직 귀족을 화형으로 죽이는 건 신라로서도 참으면 안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것도 국내에서는 인기가 많은 서구로였는걸요?
그런데 첨혜이사금은 구태여 서구로 화형권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신라의 명장 서구로의 죽음을 두고도 가만히 있는 첨혜이사금을 두고
정치권에서도 말이 많았고 첨혜이사금의 지지도는 급락합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한 게 김미추였는데요.
13대 미추이사금이 최초의 김씨이사금으로 김구도의 아들이랍니다.
김구도와 김미추 사이 시차가 7,80년이 나다보니
뭐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싶지만 혈연관계인 건 맞습니다.
김씨가 등장한 이후로 박시석씨 김씨 사이에서는 혼인 중첩이 이루어졌기에
미추이사금도 박시석씨와 연관이 있었고 신라는 사위가 왕위를 계승하는 관습도 있었기에
처음에 이사금의 지지도가 추락한 쯤일타 미추이사금이 지지도를 규합하고는
이사금으로 직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우기 과정에서 석우로의 친화적이었던 석시집단과 연합한 것으로도 보입니다.
미추이사금은 이상하게 신라 구국의 신으로 모셔지는데
각종 설화에서는 향후 신라의 위기가 찾아와 신라가 위기를 수습할 때마다
미추왕릉에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고
신라인들은 신라가 위기를 극복한 게 전부 미추이사금의 보고 덕분이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14대는 유래이사금으로 다시 석시로 돌아왔는데요.
돌아온 석시집단은 석우로 사력들로 보입니다.
예당초 미추이사금도 석우로의 죽음에 방관했던 처음의 이사금에게 등을 돌린 석시사력의 추대를 받은 거니깐요.
14대 유래이사금때는 신라가 일본을 원정간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날 간사이 지방에 아카시시를 공격했다고 하는데요.
이 삼국사기에는 준비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모든 야사와 일본측 기록에선
실제 일본으로 넘어가서 신라가 큰 성과를 세웠다고 나오죠.
훗날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 사신들이 일본을 방문했는데
그때 사신 일부가 유래이사금때 신라가 일본을 침공한 적이 있다는 일본측 기록을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13대는 기림이사금으로 석시라는 것만 알 뿐 구체적인 각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6대 흐래이사금은 석시의 마지막 임금인데요.
흐래이사금이 석우로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역시 둘 사이에 엄청난 시차가 존재해서 마냥 믿긴 어렵죠.
흐래이사금때 대대적인 외의 침공이 있었는데
비록 신라가 결과적으로는 격퇴하긴 했지만
그 과정이 매우 험난하고 피해가 막심하여
외에 대한 외교 실패로 흐래이사금의 지지도가 떨어졌을 때
김씨가 부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17대 이후로는 오로지 김씨가 세습하였습니다.
17대 군주가 바로 내물마립관으로
김씨의 세습을 완성시킨 내물마립관부터는
이사금이 아닌 마립관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죠.
8대 아달라이사금의 끝으로 박씨 세력이 더이상 군주로 직위하지 못했어도
박씨 세력에서는 지속적으로 왕비를 배출하거나
뭐 몇백년 뒤에 일이긴 하지만 통일신라 말 박씨가 다시 왕으로 직위한 것과는 달리
석씨 세력은 16대 흐래이사금의 끝으로
더이상 신라 역사에 거론조차 되지 않는 걸로 봐선
무슨 일이 있어도 있긴 있었을 텐데
그 내막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총 14명의 이사금들을 설명드렸는데
14명은 온전히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한 것일 뿐 정확하진 않습니다.
삼국사기의 내용만 보면 비현실적인 가계도
제외기간에 비해 이상할이 많지 부족한 기사들
중국과 일본 측 사소와 상반되는 시점들을 고려해봤을 때
14명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도 추정하고 있습니다.
17대 뇌물마립간부터 왕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는데
지진왕이 왕을 사용하기까지 총 5명의 마립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5명은 누구였고 또 어떤 역사를 만들었는지
신라 마립간 시대 총정리 들어갑니다.
최초의 마립간을 사용한 군주는 17대 뇌물마립간
356년 직위한 뇌물마립간은 석씨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이후 신라 왕실의 성씨인 김씨 세습을 시작시킨 군주입니다.
삼국사기에는 흐래이사금에게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김씨 출신의 뇌물마립간이 직위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평화로운 이왕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중론입니다.
8대 아달라 이사금의 끝으로 박씨 세력이 더 이상 군주를 직위하지 못하였어도
박씨 세력에선 지속적으로 왕비를 배출하거나
몇백년 뒤에 이르지만 통일신라 말 박씨가 다시 왕으로 직위한 것과는 달리
석씨 세력은 16대 흐래이사금의 끝으로
더 이상 신라와 역사에 거론조차 되지 않는 걸로 벗어난
무슨 일이 있어도 있었을 텐데 내막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뇌물마립간 이후로 신라가 친 고구려적인 성향이 매우 짙어지고
뇌물마립간도 고구려에게 의존하던 외교를 통해
이 뇌물마립간의 김씨가 석씨를 몰아내고 집권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습니다.
뇌물마립간 이전부터 4세기 초 고구려가 낭랑대방군을 병합하면서
스멀스멀 한반도 남부로 진출하고 있었거든요.
고구려의 중재로 뇌물마립간은 신라 최초로
중국의 외교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였죠.
제위기간이 무려 45년이나 되는 뇌물마립간은
신라의 중앙집권을 기틀을 마련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뇌물마립간 취세에 경상도 권역 전체가 신라의 영향권 하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뇌물마립간은 끊임없이 외의 침략을 받으며 골머리를 알았습니다.
뇌물마립간 제위 초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이때가 딱 근초고왕과 그 직후 백제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점이었거든요.
그런데 4세기 말이 되면 고구려의 관계투쟁이 직위하고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 터지는 가운데
신라의 뇌물마립간은 고구려에게 더 의지하는 경향이 크다 보니
자연스레 백제와 신라의 사이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392년엔 아예 뇌물마립간이 왕족 실성을 고구려의 볼모를 보낼 정도였거든요.
고구려에게 이를 갈지만 정작 관계투쟁에 연패만 하던 백제의 아신왕은
서기 399년 그간 신라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가야 외의 연합군을 데리고
아주 대대적인 신라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이때의 침공은 신라에게 절체절명의 공격이었는데요.
뇌물마립간은 수도를 벗어나 고구려 국경지대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다행히 관계투쟁왕이 400년 오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에
백제 외의 가야 연합을 무찌르면서 신라를 구원해주었습니다.
이후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은 더욱 거대해졌는데
신라의 고분군에서 호우면 그릇이라는 청동그릇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호우면 그릇 바닥에는
을면연 국강산 관계투지 호태왕 호우십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습니다.
신라의 고분군에서 고구려 관계투 대왕의 시호가 적힌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에서
당시 신라가 얼마나 고구려의 영향권 하에 있었는가를 추론해 볼 수 있죠.
402년 뇌물마립간 사후
고구려에서 볼모 생활을 하던 실성마립간이 18대 군주로 직위했습니다.
뇌물마립간의 아들도 아닌 실성이 마립간으로 직위한 건
고구려의 힘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직위 후 실성마립간도 친 고구려적인 성향을 보이며
뇌물마립간의 아들이었던 복호를 고구려로 볼모로 보냈습니다.
실성마립간 제위기에는 여전히 외와 충돌이 치열했는데요.
삼국세기에는 실성마립간이 대만도 정보를 준비하려다가 말았다고 하며
외는 끊임없이 신라를 침공했습니다.
이렇게 외와 사이가 안 좋았음에도 실성마립간은
뇌물마립간의 다른 아들이었던 미사흔을 외에 볼모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고구려의 복호를 보낸 것도 그렇고
이는 실성마립간이 언젠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선대왕의 아들들을 내보내려던 목적으로도 보입니다.
그런데 실성마립간은 유일하게 어쩌지 못한 왕족이
선대왕, 뇌물마립간의 장남, 눌지였습니다.
실성마립간은 고구려를 이용해 눌지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고구려는 오히려 눌지의 능력을 높이사 반대로 눌지를 지지해주었습니다.
결국 417년, 눌지마립간은 고구려의 도움으로 실성마립간을 살해하고
본인이 19대 마립간으로 직위했습니다.
다만 고구려 입장에선 눌지마립간을 지지해준 것이 패착이었는데요.
고구려의 도움으로 마립간이 된 눌지마립간이었지만
눌지마립간은 친 고구려 외교를 버리고 신라의 자주성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뇌물, 실성, 눌지, 연대기에서 알 수 있듯
지금 고구려가 신라의 왕위계승에도 개입을 하고 있잖아요.
고구려의 내정간섭이 도를 넘어선 겁니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며 남진하자
이는 신라의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434년 백제와 동맹을 재결합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신라의 사이는 이후 회복되지 않을 정도로 나빠지죠.
한편 눌지마립간은 일본에 가있던 동생 미산을 귀국시키고 싶어해서
과거 박시왕족 출신이었던 박제상을 일본으로 파견했습니다.
박제상은 일정 고구려를 방문해 눌지마립간의 다른 동생인 복호를 귀국시킨 전례가 있었거든요.
박제상은 일본으로 넘어가 미산을 무사히 귀국시켰지만
본인은 미처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아주 잔인하게 처형됐습니다.
신라 경주에 가면 대룡원 지구에 있는 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큰 황남대총의 남분이
눌지마립간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었습니다.
458년 눌지마립간 사후 그의 아들였던 자비마립간이 20대 군주를 지기했습니다.
자비마립간 때는 고구려백지 신라의 싸움이 훨씬 격해졌는데요.
특히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압박했고
475년 결국 백제는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수도를 공주, 웅진성으로 천도해야만 했습니다.
백제의 한성이 함락될 때 신라의 자비마립간이 구원병을 요청해주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었죠.
백제가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뒤에도 고구려는 백제를 압박했고
나제의 동맹의 의거 신라도 고구려를 계속 공격하자
장수왕이 신라도 압박하여 충청도까지 진출했습니다.
이러한 대외적 위기 속에서 479년
자비마립간의 아들 소지마립간이 20대 군주를 지기하였습니다.
소지마립간은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립니다.
481년 고구려는 신라의 성 7개를 빼앗고
심지어 수도 경주 바로 위쪽인 포항까지 내려옵니다.
이후로도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신라를 침공, 경북지역에 쑥대밭이 됩니다.
그나마 장수왕이 죽은 뒤로 고구려의 침공이 조금은 잠잠해집니다.
서기 500년 소지마립간이 죽고 지징왕이 22대 왕으로 지기했는데요.
지징왕부터 왕호를 사용하였지만
지징왕도 제위 초창기에는 마립간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지징 마립간이었죠.
지징왕은 선대왕 소지마립간과 꽤 먼 친척관계입니다.
직계가 아닌 왕족이 왕이 되었다는 건 무언가 수상적죠.
더군다나 지징왕은 매우 늦은 나이에 왕이 됐고요.
이와 관련하여 소지마립간에 대한 설화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소지마립간이 쥐를 만났는데
쥐가 소지마립간에게 까마귀를 따라가라고 했더랍니다.
까마귀를 따라가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고
그 옆에 연못에서 어느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비밀봉투를 주면서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점성술사가 여기서 한 사람은 왕을 의미하는 것 같다고
봉투를 뜯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소지마립간은 봉투를 뜯었고
봉투에는 검은고의 갑을 쏘라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소지마립간은 궁궐에 있던 큰 검은고 갑에 화살을 쐈는데
갑 안에는 승려와 간통을 하던 왕비가 있었다죠.
소지마립간은 두 사람을 모두 처형시켰습니다.
비록 설화이기는 하나
설화는 실제 사건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승려와 간통을 했다던 왕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비를 처형함으로써 후사를 낳을 여인이 없어졌다는 거죠.
또 다른 설화가 하나 더 있는데요.
경북 영주의 토책사력가였던 파로가
자신의 딸 벽화를 소지마립간에게 소개해주었는데
벽화가 워낙 미인인지라 소지마립간이 푹 빠져
그녀를 궁궐로 불러들였는데
벽화가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은 겁니다.
그렇다면 소지마립간의 후계가 안정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아들을 출산한 그 해 바로 소지마립간이 죽습니다.
그래서 소지마립간의 아들이 너무 어린 탓에
왕위를 이을 수가 없었고 지징왕에 직위한 거죠.
모든 게 우연이라기엔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들이 많죠.
그래서 분명 이 사건에 지징왕이 배후에 있지 않을까 추정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5명의 마립간들을 소개해드렸는데
마립간의 뜻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마립간은 대군장이라는 뜻입니다.
언뜻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뜻이지만
초창기 신라 군주에 칭호했던 거서강과 차차홍은
제사장이라는 종교권력을 뜻했습니다.
대군장은 종교권력이 아예 사라진 오로지 정치권력만을 의미하죠.
신라 권국집단이었던 박씨는 무속집단이었습니다.
최초로 마립간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내물마립간부터
김씨가 세습을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신라 김씨 왕족들의 시조인 김할지의 세력은 무속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권력을 더 이상 나타낼 필요가 없던 겁니다.
물론 이후로 신라의 왕들은 신라 토착 무속신양을 신봉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국왕에 대한 신성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신라의 권국 정체성을 보장해 주어 사회를 통합하고
그리고 김씨 왕족은 아니어도 귀족 지배칭들의 조상은 무속집단이었기에
그들을 끌어안으려는 목적도 있었던 거죠.
그리고 마립간은 왕이 아닌 군장이란 뜻이었던 만큼
신라가 커지긴 했어도
엄연히 마립간도 왕은 아니기 때문에
강력한 왕권과 미약한 왕권 그 경계 지점에 있던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마립간의 무덤들을 오히려 더 크게 조성하고
화려한 부장품들을 가득가득 넣어
체면과 권위를 과시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거대한 무덤들을 만드는데
우리가 경주에서 쉽게 보는 그 대룡원 무덤들이
바로 돌무지 덧널 무덤들이죠.
마지막 마립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징왕의 무덤도
대룡원 지구의 천마총이 유력하구요.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는 신라 금관부터
그 다양하고 화려한 출토품들은 거의 대부분 대룡원 지구
즉 마립간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이랍니다.
법풍왕부터는 불교로 공인하고 왕권이 완성되었기에
무덤 양식이 바뀌는 거구요.
여기까지가 마립간 시대의 역사였으며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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