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멸망 후 들어섰던 중화민국은 어떻게 중국을 중국공산당에게 빼앗겼을까? 국공내전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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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1부.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화해할 뻔 했던 사건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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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돋보기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주의 국가, 중국정부는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요?
중국사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 멸망 이후 중화민국이 들어섰지만
끝내 장제스가 이끌고 있던 중화민국은 중국 대륙을
하나의 정치단체에 불과했던 중국 공산당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어쩌다가 빼앗기고 말았을까요?
중국사에는 중국 대륙의 패권을 두고 싸웠던 여러 대표적인 라이벌 구도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중화민국의 장제스와 중국 공산당의 마우쩌둥의 싸움이었죠.
그 둘의 빅매치를 국공내전이라고 부르는데요.
어떻게 중국 공산당이 중화민국을 압도하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지
국공내전 시리즈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937년에서 1945년 중국은 일제와 중일전쟁을 치렀습니다.
1945년 8월 일제패망 후 중국은 일본을 쫓아낼 수가 있었죠.
중일전쟁 직전까지 중화민국을 이끌던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을 쥐잡듯 한합했습니다.
아직까지 무장조직을 갖춘 정치단체에 불과했던 중국 공산당은
대장정을 통해 장제스의 탄압을 피해 도주하다가 산시성 예난에 자리를 잡았죠.
장제스는 예난에 있는 중국 공산당 부대를 끝까지 토벌하려고 했으나
당시 일제가 한창 중국 대륙 침략의 야욕을 보일때였고
항일에 대한 강력한 민심에 별수 없이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멈추었습니다.
중화민국 내의 유일 여당인 국민당이라
장제스가 이끌던 중화민국을 국민당정부라고도 부르는데요.
1937년 일본이 결국은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장제스는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중국 공산당과 2차 국공 합작을 체결했습니다.
중국 공산당 내의 무장조직이었던 홍군은
팔로군과 신사군이란 부대로 국민당군 내 소속되었습니다.
팔로군과 신사군이 항일전쟁을 안했던건 아니지만
사실상 중일전쟁을 주도했던건 국민당정부였고
중일전쟁 내내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세력 확산에 신경을 썼습니다.
항일을 빌미로 수많은 청년들과 지식인들을 중국 공산당에 입당시키거나
팔로군에 소속시켰습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고작 3만명에 불과했던 홍군이
중일전쟁 때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바뀐 뒤
중일전쟁이 끝나는 시점에서는 100만명에 육박할 정도로 불어나 있었죠.
그래서 중일전쟁 내내 국민당정부의 장제스에게 말썽만 피우는 중국 공산당은
상당히 거슬리는 존재였습니다.
한남사변회라는 갈등도 있기는 했지만
당장은 일본과의 전투가 급하기에 중국 공산당의 전략을 쏟아부을 수가 없었고
그 사이 중국 공산당과 팔로군은 규모를 더욱 확대하였죠.
그리고 마오쩌둥 역시 중일전쟁 이전에는 대장정을 통해서
그리고 중일전쟁 당시에는 정풍운동을 통해
사실상 중국 공산당의 독보적인 주인으로 군림하여 독재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중일전쟁 내내 항일보다는 세력 확장을 꾀했던 마오쩌둥의 계획대로
중일전쟁이 끝나자 일본군 잔당 세력들의 항복을 받아가며 순식간에 화북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산시성에는 옌시산이라는 거대한 군벌이 있었습니다.
중일전쟁 당시에도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은 옌시산의 직속부대로 편입되어 있었죠.
형식상 편입되어 있었을 뿐 팔로군은 독자적으로 움직여서
옌시산도 팔로군을 벼르고 있었습니다.
중일전쟁 이후 산시성부터 시작해 화북지역을 야금야금 장악해 가둔 중공과 팔로군을
군벌 옌시산이 보고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죠.
옌시산도 중일전쟁 때는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산시성을 잃은 상태였고
중일전쟁이 끝나자 옌시산도 곧바로 산시성 세력 회복에 나섰으나
이미 산시성 요충지 곳곳에 팔로군이 주둔 중이었습니다.
그러는 한편 옛날부터 동북지역의 지리적 중요성을 인지한 마오쩌둥은
팔로군 일부를 동북지역으로 보냈습니다.
일단 동북지역은 일본 관동군을 몰아낸 소련이 점거하고 있었기에 더 유리하기도 했죠.
장제스는 팔로군과 신사군의 자의적 진군을 당장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형식상 명분적으로는 팔로군과 신사군 모두 국민당군의 소속이었으니까요.
장제스는 팔로군과 신사군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엄룡을 내놓으면서
다른 국민당군 부대들로 일본군의 잔당들을 소탕하고 도시대를 재점령하도록 하였죠.
이에 대해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중국을 분열시키고 내란을 선동하고 있다며 장제스를 맹비난하였습니다.
다음은 마오쩌둥이 장제스에게 보낸 전보의 내용입니다.
모든 동맹국의 통솔자 가운데 단지 당신 한 사람만 하나의 잘못된 명령을 내렸다.
나는 당신의 이런 잘못은 당신의 사심 때문이라고 본다.
나는 중국과 동맹국의 공동이익의 입장에 서서 간결하고 철저하게 당신의 명령에 반대한다.
당신이 공개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만큼 공개적으로 잘못된 명령을 거두어 들어야 한다.
장제스는 8월 14일과 20일 두 차례에 걸쳐 마오쩌둥에게 전보를 보내
충칭에서 직접 만나 회담 자리를 갖자고 제안했습니다.
마오쩌둥은 고심 끝에 22일 정월라이를 먼저 보내겠다고 했죠.
장제스는 정월라이가 아닌 마오쩌둥과 대화를 하고 싶다며
24일 세 번째 요청을 보내왔고 마오쩌둥은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오쩌둥이 장제스 보고 내란을 선동한다며 욕해놓고
장제스가 먼저 내민 대화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국민혁명군 참모장으로 중일전쟁 당시
중국 주둔 미군과 국민당군을 총지휘라 했던
엘버트 웨드마이어 중장도 마오쩌둥에게 충칭으로 와서
이야기하자는 제안을 보내기도 했죠.
사실 성격이 불같은 장제스가 전쟁에 앞서 대화의 제스처를 먼저 내민 건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중국 내 내전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고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세계대전이 끝이 났는데
중국에서 이념전쟁이 벌어진다면
미국과 소른들 개입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게 되거든요.
그 부담이 매우 컸으며 그리고 미국이 판단했을 때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습니다.
소련 역시 마찬가지였고 소련의 스탈린도 마오쩌둥에게
저들과 협상 제례를 가져보라며 등을 떠민 것도 있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충칭으로 가기로 합니다.
8월 29일부터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약 43일간의 협상 제례를 가집니다.
두 사람의 협상과 동시에 양측의 실무진들끼리의 협상도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죠.
국민당 정부 측에선 판로군의 규모를 최대 12개 사단까지 늘려줄 수 있다고 했으나
중국 공산당에서는 그 이상의 사단을 요구하였습니다.
미국 대사까지 회담에 참여하여 양측을 중지하는 노력을 보였습니다.
장제스는 회담의 유리한 위치에 있고자 회담이 한창이었던 9월
36개군 73개의 사단을 중국 전역 곳곳으로 보내
주요 도시들을 점령해가면서 중국의 주도권을 주려고 했죠.
1945년 9월 7일 산시성 상당지구에서는
옌시산의 군벌이 류보청과 덩샤워핑이 이끌고 있던 판로군 부대와 접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충칭에 있던 마오쩌둥은 이 회담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알게 되었고
장제스 또한 마오쩌둥과 합의를 볼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다만 미국과 소련의 압력이 있었고 어쨌든 두 사람이 만났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1945년 10월 10일 신해혁명 기념일에 맞추어 두 당이 합의한 협정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를 쌍십협정이라고 합니다.
협정의 내용은 두 당 모두 내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한다.
평화를 위해 힘쓴다.
민주주의에 입각해 정치의 민주화를 이루어낸다 등
구체적인 내용은 없고 추상적이고 막연한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판로군의 편지 문제는 전혀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충칭 회담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난으로 돌아온 마오쩌둥은
전혀 평화와 내전을 위한 노력을 이행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북방을 어떻게든 차지하려고 했죠.
하지만 충칭 회담이 한창 오가는 사이 중국 전역에
국민당군이 곳곳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쉽진 않았는데
마오쩌둥은 그나마 국민당군의 부대가 얼마 없는 동북 만주 지역을 장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간 일본 관동군을 몰아내고 동북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소련은
미국과 국민당 정부가 만주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반드시 만주를 중국 공산당에게 넘겨줄 생각이기도 했죠.
소련은 관동군으로부터 노획한 다량의 무기와 장비를 판로군에 양도해주었습니다.
이에 질세려 국민당군도 대군을 동북 지역으로 이동시켰습니다.
1945년 12월까지 국민당군의 대도시 위주를 점령하였고
중국 공산당은 농촌과 중소도시 위주로 주둔하고 있었죠.
1946년 1월 미국은 전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을
중국 정권 특사로 임명해 중국으로 보냈습니다.
마셜은 국민당 대표 장두순과 공산당 대표 저우월라이를 만나
둘을 중재해주며 쌍십협정 이행을 촉구하고
내전을 중재하라며 두 사람을 중재했습니다.
1월 13일 마셜의 중재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시적으로 정전협정에 조연하였죠.
그 사이 만주에 있던 소련군은 1946년 2월에서 3월에 걸쳐
만주에서 철수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장제수는 정전협정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1946년 3월 장제수는 이중전회를 열어
정전협정의 협의안을 모두 무시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국민당군은 계속 동북 만주로 집결하고 있었고
중국 공산당도 지속적으로 판로군을 만주로 파병하고 있었죠.
주로 서만주를 국민당군이 동만주를 공산당 판로군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전쟁은 불가피했습니다.
국공내전의 자세한 전개 2부에서 계속됩니다.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저희 역사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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