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 반야심경에 대해 저번에 강의했던 것을 이어서 하는데요. 저번까지 구마라집 역하고 그다음에 현장스님 역을 그 제가 다시 번역한 것을 그 읽는 것까지 아마 끝냈던 거 같은데 오늘은 이제 반야와 이연이 함께 번역했고 그것을 제가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을 읽어보고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 볼까 생각합니다 .
근데요 내용은 지금 사실 그 구마라집 번역이나 또는 그 현장스님 번역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크게 다르지 않고 다만 구마라집 번역이 그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한 번 더 언급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세 분이 거의 다 같습니다. 이 반야 이연 스님이 번역한 경전은 현장의 역과 그 뭐 아 거 똑같죠.
"사리자여 이러한 모든 것은 법이라 공한 모습이니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 공 가운데에는 색도 없고 느낌이나 생각, 행업, 의식도 없습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도 없으면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경계도 없을 것입니다. 무명도 없으면 또한 무명이 없어질 것도 없으며 나아가 늙고 죽음이 없으면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고집멸도 없으면 지혜가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는데 얻어질게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게 이제 저의 번역입니다.
여기서 이제 한번 생각해 봐야 될 것은 제가 뭐 여러 번 말씀드리긴 했지만 여기서 이제 아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할 때 어 제(諸)라고 하는게 우리는 모든이라고 해서 마치 형용사처럼 해석을 하게 되는데요. 그러면 형용사처럼 해석하게 되면 이런 모든 법은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이런 모든 법은 공한 모양이라 뭐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제 여러 경전 특히 이제 아함경이나 이런 경전들 속에서 보면 제(諸)라고 하는게 그 일체(一切)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고요. 그다음에 일체(一切)라는 말은 그 싸뻬라고 썼을까 대한 생각을 여러 번 해 봤는데요. 저 개인적인 추측인데 아마 일체(一切)라는 말은 그 번역자가 일체라는 거 자체가 그 브라만이 나누어서 아트만 그 각각의 대상 속에 들어갔다는 의미에서 하나인데 잘라진 모든 것이라는 의미로 썼기 때문에 그것은 아마 브라만 그 당시에 전변설을 주장했던 브라만들이 생각했던 일체(一切)에 대한 개념을 그 표현했고 그 다음에 사문들이 주장했었다. 그 사대적인 사고방식 그런 식의 모든 것이라는 의미로서는 아마 제(諸)라고 번역하지 않았나는 생각이 좀 강력하게 의심이 드는데요. 사실 모두 제(諸)자도 보면 말씀 언 다음에 놈자 자를 갖다 붙여 놓은 거예요.
그래서 요거를 풀이해서 말하면 말로 표현된 것이라는 뜻을 가져요. 그래서그 연기에서도 보면 명색이 식이 대상으로 삼는 건 명색이든요 근데 명색이 것을 두 글자를 하나로 딱 합쳐 놓은 글자가 제와 같은 모양을 갔습니다 그래서 어 여기서는 이런 것들은 지금 언어로 표현되어 있는 모든 것들은 사실은 법이라서 그래서 공한 모습으로 있다는 거예요.
안녕하십니까 호황입니다.
오늘은 반야신경 이어서 저번에 강의했던 것을 이어서 하는데요.
저번까지는 구마라짐 역하고 현장스님 역을 제가 다시 번역한 것을 읽는 것 까지 끝냈던 것 같은데요.
오늘은 이제 반야와 이연이 함께 번역했고 그것을 이제 제가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을 읽어보고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볼까 생각합니다.
근데 이 내용은 지금 사실 구마라짐 번역이나 또는 현장스님의 번역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크게 다르지 않고 다만 구마라짐 번역이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한 번 더 언급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세 번이 거의 다 같습니다.
이 반야 이연이 공역한 이 경전은 현장의 역과 똑같죠. 글자도 한 글자도 안 틀리고.
그래서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없으면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경계도 없을 것입니다.
무명도 없으면 또한 무명이 없어질 것도 없으며 나아가 늙고 죽음이 없으면 또한 늙고 죽음이 닿을 것도 없을 것입니다.
고진멸도가 없으면 지혜가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는데 얻어질 게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게 저의 번역인데요. 여기서 이제 한번 생각해 봐야 될 것은 제가 뭐 여러 번 말씀드리긴 했지만
여기서 이제 시제법공상 할 때 재라고 하는 게 우리는 모든 이라고 해서 마치 효용사처럼 해석을 하게 되는데요.
그러면 효용사처럼 해석하게 되면 이런 모든 법은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이런 모든 법은 공안모양이라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제 여러 경전 특히 이제 아움경이나 이런 경전들 속에서 보면 재라고 하는 게 그 일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고요.
그 다음에 일체라는 말은 사페라는 단어를 번역한 말이라고 했죠.
근데 왜 그러면 그냥 일체라고만 써도 될 텐데 굳이 요거를 재라는 말로 바꿔서 썼을까에 대한 생각을 여러 번 해봤는데요.
저 개인적인 추측인데 아마 일체라는 말은 그 번역자가 일체라는 것 자체가
브라만이 나누어서 아트만으로 그 각각의 대상 속에 들어갔다는 의미에서 하나인데 잘라진 모든 것이라는 의미로 썼기 때문에
그것은 아마 브라만 그 당시에 전변서를 주장했던 브라만들이 생각했던 일체에 대한 개념을 표현했고
그 다음에 사문들이 주장했었던 사대적인 사고방식 그런 식의 모든 것이라는 의미로서는
아마 재라고 번역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좀 강력하게 의심이 드는데요.
사실 이제 이 모두재자도 보면 말씀원 플러스 말씀원하고 그 다음에 놈자자를 갖다 붙여 놓은 거예요.
그래서 요거를 프리해서 말하면 말로 표현된 것이라는 뜻을 가져요.
그래서 12연기에서도 보면 명색이 식이 대상으로 삼는 건 명색이거든요.
근데 명색이라는 것을 두 글자를 하나로 딱 합쳐 놓은 글자가 재화 같은 모양을 갖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런 것들은 지금 언어로 표현되어 있는 모든 것들은 사실은 법이라서
그래서 공한 모습으로 있다는 거예요.
사실 이제 이게 공이라고 하는 말도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제가 예전에도 한번 말씀드렸는데 세상을 파악하는 방법은
채와 상과 용이라고 하는 세 가지 관점으로 우리는 대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 대한 본체가 있고요.
그것에 대한 모양이 드러나고 그 다음에 그것의 쓰임새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면 차가 있으면 차 자체는 움직이지 못하지만
그 차를 움직이는 운전사가 있어야 되고요.
그 다음에 차의 모양도 있어야 될 것이고 차의 쓰임새도 있다고 생각되겠죠.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을 채상용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이것은 채 때문에 상과 용이 드러난다기보다도
상과 용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그것의 쓰임새 때문에
그것이 본체가 무엇일 거라고 추정하는 생각이 드러난 거죠.
그래서 이런 생각 때문에 사실은 본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들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그것은 서양 철학이나 또는 동양 철학에서도 똑같은 문제를 계속 문제를 삼았어요.
그래서 그것이 예를 들면 서양 철학에서는 아르케가 뭐냐,
본질이라고 하는 게 뭐냐 이런 것에 대한 얘기를 했고
또 우리는 그것이 일원론이냐 이원론이냐라는 생각을 가지고 끊임없이 얘기를 했죠.
그래서 이원론 쪽으로 말한다면 음양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드러날 거고요.
그 다음에 일원론 쪽으로 말하면 본래 태극에서부터 모든 게 이렇게 나왔다
그런 식의 생각들이 우리에게는 늘 일상화되어 있어요.
인도 사회에서도 보면 그래서 그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한 근본적인
그 근본 성품에 대한 갈구, 생각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죠.
그래서 그 성품이 뭐냐, 그 성품이 뭐냐고 물었을 때
불교인들의 대답은 두 가지로 할 수 있어요.
공성이라는 말과 성공이라는 말로 얘기할 수 있겠죠.
공성이라는 말은 굳이 그것을 성품으로 말한다면 비어있는 성품이겠지 이런 의미인 거예요.
그렇죠? 그게 어떤 존재가 있어가지고 한 게 아니라
그냥 비어있는 성품으로서 우리는 상과 용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니까
굳이 성품으로 말한다면 비어있는 성품쯤 되겠지 이런 말로 할 때는
공성이 되겠죠. 공한 성품으로 있다 이런 의미가 되고
성공이라고 말할 때는 성품 자체가 공하게 됐다 이런 말인 거죠.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비어있는 거지, 그것 자체가 이렇게 된 게 아니다.
그래서 공성과 사실은 성공은 약간 의미가 다르고
문장 내에서 어떻게 쓰여 있는지를 봐야 되는데
사실 우리 불교 텍스트를 공부하면서 이런 거 잘 구분 안 하고 보다 보니까
문제가 사실 좀 심각하게 벌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이렇게 모든 것들은 법이고 그것은 공한 모습으로 있어요.
공한 모양으로 있다고.
그러니까 공한 모양으로 있다는 말은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외부에서 들어온 감각 신호를 받아서
그다음에 변화된 값을 전기적으로 생체 신호로 변화된 것을 뇌에 전달해서
뇌가 바뀌어질 신호를 가지고 어떤 대상들을 실제 하는 것처럼 모습을 그려내죠.
그러니까 그것은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
실제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나한테 보이고 있는 것은 텅 비어있는 공간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그냥 허황한 모습일 뿐이라는 거예요.
마치 우리가 TV나 이런 걸 보고 있을 때
전원이 꺼졌다고 생각하면 그냥 아무것도 없는 빈 캔버스 같은 게 드러나죠.
그런데다가 전원을 눌러서 신호가 들어오면
그때 어떤 대상들이 막 드러나는 것처럼 드러나요.
그런다고 해서 그 모니터 속에 또는 TV 속에 드러나고 있는 대상이
설사 사과라고 하더라도 그 사과가 실제 사과는 아닌 거죠.
사과 같은 모양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죠.
그런 식으로 우리는 공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니터 속에 있는 그 사과는 태어나서 모니터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불생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것이 꺼졌다고 해서 사라졌다고 모니터 속에서
장면이 전환돼서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 놈이 죽어서 소멸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겨나거나 소멸되는 것도 아니고
그 모니터 속에 있는 것이 이쪽 게 더럽고 이쪽 것이 깨끗하게 보인다고 해서
두 개 합쳐놓은다고 해서 그 놈이 더럽거나 깨끗해지지도 않아요.
본래 그냥 그것은 신호가 나타나면
더러운 모습으로 비춰지고 깨끗한 모습으로 비춰줄 뿐이지
거기에 무슨 다른 거 없어요.
증감도 역시 마찬가지겠죠.
늘고 주름도 역시 그렇게 드러나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유가 뭐냐면
우리는 실제의 대상이라고 하는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이라고 하는
이렇게 실제의 대상이라고 이해했었는데
그것이 뭐라고요? 법이었다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텅 비어있는 것 가운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 속에는 색이 없어요.
우리 머릿속에서는 온 세상에 온 우주가
다 비춰지고 다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우주는 안 들어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그 속에는 색이라고 하는 무더기가 없어요.
그래서 또 느낌의 무더기,
또 이미지의 무더기,
또 그 다음에 행업의 무더기.
여기서는 행은 여러 번 설명했는데
여기서의 행은 행업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업과 악업으로 벌어지고 있는 업을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느낌이라든지
그다음에 어떤 이미지라든지
그런 행업이라든지
또 그 다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인식작용이라고 하는 것들이
무더기처럼 있는데
이런 것들이 어떻게 서로 조합되었을 때
대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하는 게
그게 다섯 가지 온을 취해서
우리는 실제의 대상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그것을 뭐라고 부른다고요?
우리는 오치온이라고 부른다고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오치온으로 취하고 있는 대상들이
사실은 실제의 대상이 아니라
텅 비어있는 공 가운데에서 드러나고 있는
색수상행식이기 때문에
사실은 그것은 없다고 하는 말인 거죠.
그래서 이렇게 없으려면
이렇게 없다고 하는 이 사실들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이해해야 되냐면
안이비설신이가
안이비설신이를 여기서 이렇게 써 있으니까
무안이비설신이 이렇게 써 있으니까
사람들은 자꾸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다 이렇게 없다고 자꾸 생각을 해요.
그러면 우리가 본래 이렇게 다 있는데
부처님이 없다고 말했으면
부처님이 거짓말한 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 거짓말한 걸 우리는 억지로 믿어야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확인도 안 되는 것을
그래서 여기서는
이것이 안이비설신이라고 말했을 때
경전 속에서는 여러 가지의 경우가 되는데
이게 번역될 때 실제의 눈과
그다음에 귀와 코와 이런 것들은
그냥 개별적으로 말했어요.
그냥 눈은 눈이라고 말했고
귀는 기라고 말했어요.
근데 부처님은 이것을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할 때
이 육근이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기능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뒤에다가 근이라는 이름을 붙여요.
그래서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이라고
붙이는 것이 있죠.
그러니까 안이비설신이와
안이비설신의근은 다른 거예요.
그다음에 다시 여기에다가
또 네이처와 외입처라고 하는
입처의 개념으로 다시
그래서 여기서 그러면 뭐가 되냐면
안입처, 이입처, 비입처, 설입처, 신입처, 의입처가 있겠죠.
그럼 우리는 이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되겠죠.
그러겠죠.
이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돼요.
이것이 실제 눈코입기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눈코입기 기능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네입처와 외입처의 개념으로서
안이비설신의 입처를 말하는 것인지를
구분해야 됩니다.
근데 중국사람 중국어로 번역할 때
한문으로 번역할 때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썼어요.
그래서 이게 사실은 안이비설신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안이비설신의근을 말하는 것인지
안이비설신의 입처를 말하는 것인지는
우리가 문장 속에서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근데 여기서 보면 안이비설신이도 없고
색상향미촉법도 없고 안개도 없고
의식개까지도 없고
이렇게 말한다면 다 없는 게 되죠.
그러면 이거는 그냥 있으나 마나한 문장입니다.
그런 얘기를 할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이거는 그렇게 이해할 수 없고
안이비설신의근이라고 말할 때는
의근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다음에 안이비설신의 입처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뒤에 안개 내지 무의식개라고 하는 말 때문에
사실은 이 문장은 안이비설신의 입처와
색상향미촉법 입처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야 돼요.
그러니까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내 입처가 없으면
그 내 입처와 짝이 되어서 드러나는 게 뭐예요?
색상향미촉법이라고 하는 외 입처죠.
이것은 머릿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대상들이에요.
그래서 안이비설신의 입처는 뭐가 돼요?
나 자신이 됩니다.
나 자신으로 여기고 색상향미촉법이라고 하는
외 입처는 나 이외의 다른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내 입처와 외 입처는
쌍으로 함께 드러나기 때문에
안이비설신이라고 하는 내 입처가 없다면
색상향미촉법이라고 하는 외 입처도 안 드러날 것이고
그렇죠?
그렇게 이해해야 이 문장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벌어지고 나면 우리는
다시 여기에서 18개의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 뒤에 무한개부터 무의식개까지는
18개를 설명하는 말인데요.
우리는 보통 12입처를 안이비설신의와
육근과 육경을 합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그것을 12처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그런 표현은 잘못된 거라고 제가 예전에 얘기했고
삼과설의 잘못된 주장 때문에 우리가
그런 생각들을 자꾸 한다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안이비설신이라고 하는 것과
그다음에 색상향미촉법이라고 하는
내 입처와 외 입처가 함께 드러나게 되면
반드시 우리는 색상향미촉법이라고 하는
그 대상들이 안이비설신이라고 하는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들이 18가지의 개분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떻게 일어나냐면
안이비설신이 있겠죠, 그렇죠?
눈, 코, 입기가 있을 것이고
그다음에 눈으로 이것은 내가 대상을 봤을 때
그런 개분별이 일어나지 않겠어요?
눈으로 본 게 있으면 안개겠죠.
우리가 뭘 봤어요.
그러면 저거 눈으로 본 거야라는 구분이 일어나겠죠.
그다음에 내가 봤으면 저거는 내가 봤다고
눈으로 봤다고 하는 인식도 일어날 거예요.
그렇죠?
그래서 주관과 객관과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의 세계에서 내가 봤다고 하는 생각까지도
동시에 3가지가 드러나요.
그래서 이것이 16개의 개분별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개분별을 통해서 어떻게 대상을 알게 돼요?
내가 세상을 보고 있고
보고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생각까지
동시에 드러나고 그걸 구분해낼 수 있는 거예요.
그것을 개분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안이비설신이라고 하는
네이처가 안 일어난다면
색상향미촉법이라고 하는 외입처도 안 일어나고
그것이 무엇인가 대상을 구별해낼 수 있는
판별작용도 안 일어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까지 설명은
우리가 법이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대한 설명이겠죠.
그래서 이것을 아는 것, 이것을 알면
뭐가 되겠어요? 무명이 없는 거겠죠.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 있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밟지 못하다고.
11연기에서 무명이라고 하는 게
맨 먼저 드러나고 있는
지금 이 모든 것이 법으로 되어서
공헌 모습으로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게
무명이 없는 거죠. 무무명인 거예요.
그렇지 않은 것은 무명인 것이고요.
그러니까 무명이 없기 때문에
그걸 없앨 무명조차도 없는 거죠.
그렇겠죠?
더 이상 무명이 다 없어져야 될 이유도 없어요.
지금 이 상황을 시제법 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중불감,
시고공중무생, 무수상행식,
무한이비서신위, 무색성량미촉법,
무한계 내지 무의식계까지
이거를 지금 아는 것이 뭐예요?
무명을 알았기 때문에 무명이 사라진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무명이 사라지면
무명이 다 없애버리려고 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되면 노사도 없어지겠죠.
왜냐하면 무명 때문에 드러나고 있는 게 노사니까
무명이 사라졌으면 노사가 사라졌으니까
노사를 없앨 필요도 없겠죠.
우리가 늙고 죽는 것을 따로 있으니까
그놈을 없애야 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무명이 사라지면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죠.
다시 그러면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사성제는 우리가 어떻게 괴로움이 집기하고
그 괴로움이 집기됐다면 어떻게 소멸되고
그 소멸에 이르는 길을 공부하는 게 사성제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부처님이 깨달은 소식이에요.
그러면 부처님이 자기가 깨달은 소식을 가르쳐놓고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한다면
가르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진멸도가 없다면 지혜가 없는 거죠.
고진멸도도 없고 지혜도 없고 이런 말이 아니고
고진멸도가 없다면 지혜도 없어서
얻을 것조차도 없어요.
그런데 그 이유는 얻을 게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왜냐하면 이것이 외부에 있는 도라든지
외부에 있는 공덕이라든지 이런 거라면
그것을 내가 내 것으로 만들고 소유해서
뭘 얻을 게 있겠지만
이 사건들이 다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자기 자신 안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얘는 얻을 것조차도 없는 거예요.
얻을 것조차도 없다고.
그런데 여기서 이무소득고라는 말을
이 앞에다가 붙여서 읽는 이유는
그 다음번에 설명하겠지만
다른 번역본에서는 대부분 이무소득고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리살 타는 보살은
반야바라 밀달에 의지했기 때문에
또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고가 두 번씩 반복돼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이것을 이렇게 때문이고
또 이런 것이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을 해야 되는데
그러면 말이 이상해집니다.
그래서 이 말은 앞에 얻을 것이 없는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으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해서
저는 문장을 이렇게 끄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기존의 것과 좀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좀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 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서 보면
기존에 번역되어 있는 것들을 한 번 보면
현장스님의 번역을
운허스님이 번역한 것을 보면
이무소득고 보리살 타의 반야바라 밀다고
신무가해 무가해고 무유공포
원리 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의 반야바라 밀다고
고지 반야바라 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 고진실불어 고설 반야바라 밀다주
즉설주할 아재아재 바라아재 바라승아재 모지사바
이렇게 현장스님이 번역을 했고
이 번역에 대한 한글 번역을
운허스님이 어떻게 번역했냐면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 밀다를 의지함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 밀다를 의지함으로
안욕다라 삼약산보리를 얻느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 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아라
그러므로 반야바라 밀다의 주문을 말하나니
주문은 곧 이러하니라
아재아재 바라아재 모지승아재 바라아재 모지사바
이렇게 지금 번역을 했어요
근데 잘 한번 생각해 보면
이 번역도 좀 생각해 봐야 될 문제가 뭐냐면
조금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이무소득고와 보리살타의 반야바라 밀다고
라고 하는 이유가 두 번씩이나 반복되기 때문에
이 문장이 번역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무소득고는 앞에 문장으로 연결되고
그 다음에 보리살타가 반야바라 밀다에 의지했기 때문에
신무가해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무가해고 됐다고 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게
훨씬 더 맞는 것 같고요
그 다음에 이제 여기서는 생각해 봐야 될 것은
반야바라 밀다라는 게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무엇은 반야바라 밀이라고 번역되어 있고
어떤 데는 반야바라 밀다라고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다가 바람이 육바람이랄 때는 우리가 육바람일 그런지
육바람일다 안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다는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일 것이다
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반야바라 밀다는 이것이 다라는 말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경전을 쭉 검색해서 보니까 그렇지는 않고요
그냥 바람이 있다에 대한 바람이 타에 대한 음사였기 때문에
바람일로 번역한 사람도 있고
바람일다라고 번역한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다라는 말이 금강경에서는
많다라는 의미로 쓰인 게 아니고
대단하다는 말로 쓰인 거거든요
그런데 그걸 우리는 많다, 매우 많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것도 번역에 오류죠
그래서 보리살타가 반야바라 밀다에 의지했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이 없었고
걸림이 없었기 때문에 공포심이 없었다
그런데 원리전도몽상이라는 게 이상한 거예요
사실 따지고 보면
도대체 전도몽상이라는 게 뭘까요?
전도몽상이에요
전도라는 말은 뒤집어졌다는 말이죠
완전히 뒤집어진 게 전도예요
몽상은 꿈같은 생각이란 말이에요
도대체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완전히 뒤집어져서 꿈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냐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여태까지 앞에의 얘기들을 생각해 보면
전도몽상이라는 게 그거죠
우리는 실제하지 않는 일체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실제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전도된 것이고
그것은 꿈과 같이 드러나고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꿈같은 생각이라고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에게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구경열반이라고 하는 말이
구경이라는 말을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되는데
구경은 마지막에 우리가 최종 목표로 이런 말이에요
최종 목표로 얻어지는 것은 열반이라는 뜻인 거죠
그래서 열반의 정의도 실제로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앞에 문장에서 이무소득거라고 나온 것처럼
이것은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외부에 있는 열반이라면 우리가 죽어서 다시 태어나가지고
다음 생에 어디 열반이라는 세계에 가는 것이라면
걔는 분명히 얻는 게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말한 열반은 그런 열반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얻을 게 없어요
그러면 열반의 정의가 뭐죠?
우리는 산법위원회에서 열반은 적정이라고 말했어요
열반은 열반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모든 번뇌가
사라진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께서는 열반이라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열반은 제가 구차제정 설명할 때도 얘기를 했는데
상수멸이라고 하는 선정에 대면
그 상수멸을 어떻게 해야 되냐면 구족주해야 된다고 했어요
그것을 갖추어서 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라 그랬다고
그러니까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끝끝내 얻어져야 될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열반이 아니라 얻을 게 없는 열반인 거예요 사실은
불이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기만 하면
구경으로 마지막에 도착되는 곳이 어디냐면 열반이라는 뜻인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좀 다르다는 거죠
그다음에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서 보면 마치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했기 때문에 안욕다라 삼약삼보를 얻었고
그다음에 이런 것들의 주문으로 따지면
이것이야말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그 주문이 최고의 주문이기 때문에
반야심경의 결론이 마치 주문인 것처럼 우리는 이게 결론 지어져 있어요
근데 사실 생각해 보면 부처님은 이렇게 주문을 외우는 것 자체를 극혐하신 분입니다
극혐한 게 아니라 그런 것이 잘못됐다고 그것을 비판하면서 나온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에요
그래서 부처님이 가르침을 폈어요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근데 대승경전을 표방하고 있는 부처님이 말하려고 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실이 이것이라고 말했던 그 대승경전이 주문을 앞세워가지고
부처님의 말씀이 안욕다라 삼약삼보보다 더 중요한 게 이 주문이라고 말했다면
이건 좀 한번 생각해 봐야 될 문제가 아닌가라는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이어서 얘기할까 합니다
아쉽죠
이래야 다음번에 또 볼 가능성이 많아서 오늘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